아침 나절

일그러진 말

많고 많은 알파벳 중 하필이면 T가 된 건 녀석이 ー이기 때문이다.

모바일 게임 《마피아 42》 기반

마피아×스파이, 도둑×영매, 건달×기자


인게임 세게관을 반영하였으나 스토리와는 관련이 없음을 밝힙니다.

(C)떨리고설레다 2020


일그러진 말

선생님, 저는 제가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요.


울컥,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라왔지만 꺼내지는 못했다. 50 초중반쯤 되어 보이는, 국어라는 담당 과목답게 감수성 풍부한 여선생이 무슨 반응을 보일지가 눈에 훤했기 때문이었다. 또 내가 지금껏 죽기살기로 쌓아 온 이미지를 깨고 싶지도 않았고. 대신 나는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말했다. 뚜렷한 목표와 그걸 이룰 능력을 가진 당돌한 고등학생 여자애를 가장해서였다.


"A대학교 경영학과에 지원하고 싶어요."

-사실 저는 아무 데도 못 가요.

"부모님도 제가 그쪽으로 나가는 걸 찬성하세요."

-아무도 제가 세상에 나서기를 원하지 않아요.

"이대로 가면 괜찮겠죠, 선생님?"

-그럼 제 인생은 도대체 언제쯤 괜찮아지죠?


어머, 그럼. 당연하지! 이대로 하면 가고도 남겠다, 우리 S.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녀는 A대학교라는 이름에만 반응했다. 시큰둥하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어리고, 구부정 수그렸던 허리는 꼿꼿이 펴졌다. 옆에서 R양이 킬킬거렸고 나는 따라 웃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아내었다. 첫날 자기 소개 시간에 하는 말이, 공부만 강조하던 다른 교사들과는 조금 다르길래 한심하게도 기대해 버린 내가 미치도록 우스웠다. 결국 저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보지 못하는 꼴이 여느 어른들과 다를 바 없었다. 역겨웠다.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아도 될까요?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가 물었다. 그녀는 지긋지긋하게도 끝까지 나와 눈 맞추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다음 번호의 서류를 보아야 할 순간까지도. 내가 견딜 수 없이 예뻐서 죽겠다는 얼굴로 그녀가 대답했다. 그래, 다음 들어오라고 해. 그리고 이거 좀 가지고 갈래? 나는 그녀가 내민 서류를 받아들며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헛구역질로 대답을 대신했다.


"다 끝났어, S?"

"응, 기다려 줘서 고마워."


복도로 나오자마자 옆에 서 있던 T가 쪼르르 달려왔다. 3년 내내 나와는 줄곧 같은 반인 녀석이었다. 같이 교무실에 볼 일이 생길 때마다 늘 기다려 주어서 고마웠다. 물론 나는 반장이고, T는 약간의 문제아였으므로 불려온 상황은 보통 살짝 달랐지만.


"내가 들어 줄까?"


녀석은 냉큼 내가 가득 안은 프린트 더미부터 빼앗아 들었다. 나는 살짝 망설이다가 순순히 넘겨주었다. T의 나를 향한 특별한 관심은, 옆에서 자칭 연애 고수라는 두 사람(내게만 보이는 존재들 - 엄밀히 말하자면 사람은 아니나, 한때는 그랬으므로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R양과 G군이 낄낄대며 떠드는 소리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었다. T는 분명 나에게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나 또한 싫지 않았다.


예쁜 이름을 따로 두고 굳이 녀석을 T라고 칭하는 이유는, 1학년 초반의 어느 날 녀석이 난데없이 꺼낸 말 때문이었다. 내 책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그 때 녀석은 자신을 T라고 부르라고 말했다. 내 주변에서 정신없이 빙빙 돌면서 R양이 그 이유를 얼핏 알려 주었다. 이름이 굳이 T인 까닭은, 녀석이 -이기 때문이야. 나는 손을 뻗어 R양을 걷어내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대답했다. 그럼 나는 S, S라고 해. 녀석이 이름을 정한 방식을 차용해서였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T는 활짝 웃었다. 좋아, 그럼 잘 부탁해, S.


많고 많은 알파벳 중 하필이면 T가 된 건 녀석이 -이기 때문이다. R양이 그렇게 재잘거렸을 때 나는 온 몸을 훑고 지나가는 전율을 느꼈다. 수업 종이 치고 T가 제자리로 돌아간 이후에도 미친 듯한 심장의 두근거림을 참을 수 없어서, 달달 떨리는 손을 패딩 주머니에 겨우 밀어넣었다. T의 존재가 반가웠다. 소수의 사람만이 가지고 태어나는 능력이자 축복(어쩌면 저주일지도- 나는 아직 이것에 대해 정의를 내리지 못했다)를 빌려내어 쓸 수 있는 힘이라니 얼마나 매력적인 것인가. T는 내가 찾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렇게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런 사람을 얼마나 오랫동안 찾아 헤매 왔는지. 나는 T가 필요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의 능력이 필요했다.


R양과 G군처럼 서로에 만족하며 이승을 떠돌아다니는 이들도 간혹 있었으나, 내가 만나 본 내게만 보이는 존재들 대부분은 영원한 안식, 성불을 갈구했다. 그들이 가장 어둡고 초라한 곳에서 본 세상은 추악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세상에 넘치는 억울함과 비참함과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반쯤 미쳐 있었다. 나 같은 사람들은 수백 년에 하나 정도로 드물었기에 더욱 그렇댔다.


나 같은 사람은 수백 년에 하나 정도로 드물다. 고모의 말대로 내가 아무리 병신이나 머저리 같더라도,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죽어 봤자 나는 수백 년을 기다려야 한다. 또 다시 나 같은 사람이 등장해 내게 영원한 안식을 전해 주기 전까지. 그 사실이 내 삶을 연장시키는 유일한 원동력이었다.


"문 열어 줄게."


T가 저번처럼 혼자 하려고 낑낑대기 전에 내가 선수를 쳤다. 학습지 무거우니까. T는 못마땅한 얼굴이었지만 굳이 트집 잡지는 않았다. 녀석은 내 호의를 받아들이며 교실 안으로 한 걸음 발을 들였다. 거의 동시에 안에서 다른 사람이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그냥 내버려 뒀다간 부딪칠 각도였다. 나는 무심결에 팔을 뻗어 T의 팔을 잡아당겼다. 나조차도 놀랄 만큼 순식간의 일이었다. T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돌아보았다.


"뭐야."


안에서 뛰쳐나오던 놈이 깜짝 놀라 움직임을 멈추었다. 반에서 제일 키도, 덩치도 큰 남자애였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잡고 있던 T의 손목을 슬쩍 놓았다. 가슴과 팔이 살짝 스쳤을 뿐, 다행히도 걱정할 만큼 큰 접촉은 아니었다.


"뭐야 둘이. 왜 같이 와?"

"난 프린트 받아 온 건데? 얘는 상담이고."


프린트? 네가? 놈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T와 손에 들린 종이 더미를 번갈아 보았다. T가 어깨를 으쓱했다. 믿기 싫으면 말든가. 놈이 미간을 모았다.


"니네 혹시 사귀냐? 아니지?"


얼떨떨한 질문에 노련하게 대처한 건 T였다. 이런 논란은 몇 번이고 겪어서 이미 익숙하다는 듯 웃으면서 가볍게 대답했다.


"아니거든?"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놈의 옆구리를 가볍게 찔렀다. 오해하지 마. S가 불편해하잖아…. 얼굴을 붉히기는커녕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으며,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닌 척 그렇게 말하는 녀석의 귀가 끝부터 새빨갛게 물들어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나 말고는 아무도 못 보았길 빌며 티 나지 않게 시선을 돌렸지만, 내 입술 끝 또한 비슷하리란 걸 나는 알았다.


-


대대로 한 신에게 귀의한, 명망 높은 성직자 가문이 있었다. 그리고 그에서 태어난, 보통과는 조금 다른 계집애가 있었다. 최초의 울음이 세상에 울렸을 때, 가문의 사람들은 한 가지 생각을 했다. 자연에서 돌연변이는 살아남지 못한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공통적으로 떠올린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이 아이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단명하리라 예측했던 아기는 질기게도 살아남아 현재까지 이르렀다.


그 돌연변이가 바로 나였다.


"…아야."


창살 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잡으려다가 삐끗하고는 손을 움츠렸다. 유일한 광원이 비스듬히 비치는 햇빛인 것도, 바닥에서 올라오는 습한 냉기도 다 좋았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겪어 와 이제는 익숙해진 일이었으니까. 다만 한 가지, 오직 한 가지 지독한 허기만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내가 바란 건 이런 식의 죽음이 아니었다. 인간의 삶은 지극히도 작고 보잘것없으므로 적어도 그 끝만큼은 잔잔하고 아무렇지도 않아야 했다. 뱃가죽이 갈비뼈에 들러붙는 기분에 몸서리치며, 나는 애써 몸을 일으켜 벽 모서리에 등을 기대었다.


멍청한 짓이었다. 이대로 남아있기를 선택하지 말았어야 했다. 날아올 모든 시선과 흐트러질 관계를 감내하고서라도, 어떻게든 T에게 부탁했어야 했다. 죽여 달라고, 내 손을 잡아 능력을 훔치고 그걸 이용해서 눈을 감겨 달라고, 그렇게 말했어야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애도, 나도 어설프게 얽히고설킨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꺼내지 못한 채 졸업했다. 

 그렇게 질기게도 엮인 3년을 흐지부지 마무리하면서, 나는 내가 그러지 못한 이유를 고민했다. 학교가 좋았다. 집보다야 어디가 낫지 않겠느냐만은, 그것과는 별개로 그냥 즐거웠다. 그 기분을 한 줌의 호흡만큼이라도 더 누리고 싶었다. 가진 건 없는 주제에 쓸데없이 욕심만 많아서는, 감히 손에 넣기를 기대하고 해야 할 일은 등한시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 보면 내 것이 될 줄 알았던 건가. R양이 내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G군이 나를 안타깝게 내려다보며 R양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결국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어리석게도 행복을 맛보았기 때문이었나.


-어?


까무룩 잠들었다가, R양의 다급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깼다. 창백한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을 나도, G군도 눈으로 쫒았다. 누군가가 들렀다가 잠그는 것을 잊어버렸는지, 굳게 닫혀 열릴 줄 몰랐던 문이 살짝 벌어져 복도를 드러내고 있었다. 순간 내가 저지른 일은 충동이었다. 그 날 T의 손목을 잡아당겼던 것처럼, 꺼내야지 하면서도 혀 밑에 꼭꼭 숨기고 있었던 말처럼. 나는 배고픈 것도 잊고 벌떡 일어났다. 가볍게 열리는 문을 밀치고, 아무도 없는 복도를 내달려 밖으로 향했다.


-


내가 기억하는 그곳에서의 처음은 작고 낯선 방이었다. R양과 G군이 날아다니며 질러대는 소리에 머리가 울렸다. S, 너 일어나. 당장! 지금 큰일 났다니까? R양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시끄럽게 귀를 찔렀다. 조금만 더 쉬면 안 될까… 나는 중얼거리다가, 공기의 흐름이 달라진 것을 눈치채고는 천천히 눈을 밀어 떴다. 마음 같아서는 번쩍, 흔한 드라마의 배우들처럼 멋지게 뜨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몸이 따라 주질 않았다.


여자는 내 침대 가까이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색은 보기 드문 분홍색이었다. 보드랍고 사랑스러운 베이비핑크도, 향긋하고 화려한 붉음도 아닌 선명한 진분홍. 가발인지 궁금해졌지만 실례인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와는 대비되는 녹색 눈동자가 예리하게 나를 쏘아보았다. 동공에 힘이 풀려 초점을 맞추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나는 눈을 몇 번 깜박이다가 겨우 그녀와 눈을 마주보았다. 그러고는 물었다.


"제가 살아 있나요?"


내가 죽었더라면 R양과 G군이 그리도 요란하게 깨울 필요가 없었으리라는, 답을 알면서도 괜히 해 본 짓이었다. 의외의 질문이었는지 여자의 표정이 잠시 굳어들어갔다. 나는 느긋하게 그녀를 기다리며 담요 위에 놓인 손가락을 시험 삼아 몇 번 까닥여 보았다. 다행히도 힘은 제대로 들어갔다. R양이 다정하게 제 손을 위에 겹쳤다. 온기는 없었지만 그 감촉에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당연하지."

"아."


그녀가 대답했고 나는 작게 탄식했다. 알고 있는 사실이래도 남의 입을 통해 듣는 느낌은 달랐다. R양이 조금 더 돌아다녀 보라고, G군을 손짓해서 보내는 것을 보며 내가 물었다. 왜 살리셨, 어요. 그녀가 말했다. 살리다니. 살짝 웃음기를 머금은 어조였다.


"네가 죽지 않았을 뿐이야."


애초에 스쿨존에서, 그것도 제한 속도보다 한참이나 느리게 달리는 차에 죽을 확률이 그렇게 높을 리가 없잖아? 나는 눈을 피했다. 여기까지 오는 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그제야 하나둘씩 떠올랐다. 슬리퍼 바람으로 되는 대로 달리다가, 무력함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던 것 같다. 차의 철제 보닛과 부딪쳤고, R양이 질러대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었음에도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차에 치인 것치고는 별로 아프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스쿨존에서라 그랬나. 내가 말했다.


"…그런가요."


저 여자가 누군지 알려 줄게. R양이 속삭였다. 생전에 기자였던 R양은 내가 모르는 정보에 빠삭했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귀를 기울였고, R양도 그걸 아는지 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듣는 동안 나는 이불을 연신 쥐었다 놓았다. 적어도 R양이, 그리고 R양의 정보가 있는 한 나는 그녀에 비해 절대 꿀리지 않는다. 그 점을 되뇌이면서 나는 할 수 있는 한 당돌하게, 내가 지금까지 몇 번이고 연기해 온 그 여자애처럼,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당신이 누구인지 알아요."


하지만 지금의 몸 상태로는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아무리 눈을 부라려 봐도 호랑이 새끼는커녕 토끼 한 마리 정도로나 겨우 보이려나. 여자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나는 참지 못하고 손을 들어올려, 공중에 둥둥 뜬 R양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직접 닿으니 용기가 생기는 기분이었다. 여전히 허공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내가 말했다. 놀라지 마요,


-저 여자도 너에 대한 파일을 가지고 있어.

"당신도 내가 누군지 알잖아요."


열대의 얕은 바다를 닮은, 투명하고 청아한 눈동자가 엷은 긴장으로 물들었다. 나는 시선을 발끝으로 떨어뜨렸다. 뭐야, S. T도 여기 있네? 아까 G군이 스치듯 던졌던 말을 기억하면서였다. 그러네, 왜 T가 여기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T의 그 능력이 어느 편에 서기에 최적화되어 있는지를 깜빡 잊고 있었다. T가 아까 잠깐 들렀다 갔어. 내가 물었다. 그러면….


"T는 어디 갔나요."

"T?"


그녀가 모르는 척을 했다.


"장난치지 마세요, 여기 있었잖아요."

"…불러 줘?"


그 질문에 나는 순간 마음을 바꾸었다. 이렇게 살려 둘 바에는 차라리 죽이고 조용히 묻으라며 절규할 때 나를 손가락질하던 표정들을 떠올렸다. 내게 쏟아지던 못났다는 말과, 제발 내가 얼마나 더러운 존재인지 깨달으라던 외침도 함께였다. 안식을 갈구하는 내가 그리도 혐오스럽게 보인다면, T의 눈에도 똑같이 비치지 않을까. 환한 미소가 싹 사라지고 그들과 똑같은 얼굴을 할 녀석을 상상하니 헛구역질이 나왔다. 심장이 곤두박질쳐서 바닥으로 내리꽂히는 기분이었다.


꽉꽉 조여드는 목구멍을 뚫고 내가 가까스로 발음했다.


"아니요."


T의 교복을 입은 모습을 기억했다. 그 손짓, 그 말투, 그 내딛는 걸음걸이 하나하나를. 아마도 내게 그의 존재가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까닭에 나는 항상 그를 주시하고 또 관찰했다. 그리고 녀석이 내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도. 추하고 비참한 내 앞에서 일그러질 그 다정함을 나는 차마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여전히 T가 미치도록 필요했지만, 동시에 필요하지 않았다. 지독한 욕심쟁이인 나는 영원한 죽음을 원했지만… 내 보잘것없는 모습을 녀석에게 보이는 것은 더 싫었다.


그러니까 나는, 차라리 이 말이 전해져 T의 마음이 짓밟혔으면 좋겠다. 처참하게 부서지고 회복할 수 없을 만큼 뭉그러져 다시는 나를 볼 생각 따위는 하지 않길 바란다. 내가 녀석의 손을 빌린다는 선택지 자체를, 안심하고 완전히 지워 버릴 수 있도록.


"저는 그 애를 마주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이만하면 됐다. 나는 살풋 감았던 눈을 천천히 밀어 떴다. T와 마주치기 전에 최대한 빨리, 내가 여길 나가면 해결될 일이었다. 딱히 갈 곳은 생각나지 않지만, 닥치고 돌아다니다 보면 하나쯤은 찾을 수 있을 테지. 내가 말했다. 그래요….


"그러면 저는 언제 나갈 수 있나요."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물어 보지, 모호한 대답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재촉했다. 정 안 된다 싶으면 혼자라도, 설령 그 대가가 수백 년의 수렁이라고 할지라도 뛰어내릴 테다. 이 점에 대해 홀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그녀가 눈치챘을까? 알 수 없었다.


"다녀오세요."


CCTV가 복도마다 설치되어 있고, 모니터는 그 남자(왜 있잖아, 검은 머리에 붉은 눈을 한, 널 여기까지 데리고 온 그 사람 말이야) 방에 있어. 확인해 봤는데 창문은 녹이 슬어서 안 열려. 내보내 주지 않으면 나가긴 좀 힘들지 않을까…. 쌩 날아들어온 G군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며 덧붙였다. 저는 아무데도 가지 않을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요. 그녀는 내키지 않는 듯 보였지만 순순히 방을 나섰다.


-


고등학생 시절의 나는 항상 가장 먼저 등교하는 편이었다. 집에 조금도 더 오래 있기 싫을 뿐더러, 텅 빈 교실에서 조용히 공부하면 집중이 잘 되어서였다. 그건 2학년의 첫날에도 마찬가지였다. 칠판에 붙은 자리 배치표(T의 이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녀석과 나는 초성이 비슷해서 보통 근처에 앉았다)를 확인하고, 내 책상에서 모의고사 문제집을 풀었다. 하나 둘 반 학생들이 등교하면서 교실이 시끄러워지자 이어폰을 꽂아 소음을 차단했다.


"네가 S지?"


냉소적인 말투로 다가오지 말라고 애써 벽을 쳐 둔 데다 전교권이라는 성적까지 겹치니, 전교에서 나는 다가가기 힘든 애, 공부는 잘하지만 재수없는 애로 소문나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아이들은 내게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림자처럼 취급하다가 내 이름을 듣고서야 힐끔힐끔 보내는 눈길이, T를 제외한 나머지에게 내가 받는 관심의 전부였다.


"…?"


그리 본다면 난데없이 말을 걸어 온 여자애들 무리에 내가 놀란 것도 개연성 없는 일은 아니었다. 나는 쓸데없는 잡음을 차단하기 위한 용도일 뿐, 사실 아무 음악도 흐르지 않는 이어폰을 귀에서 뽑았다. 잘 정리해 핸드폰과 함께 주머니에 넣었다. 내 자리에 우르르 몰려든 그 애들은 너나할 것 없이 화장을 진하게 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짧게 줄인 교복 치마가 책상에 걸터앉는 움직임에 바싹 추켜올라갔다. 나는 미간을 모았다. 우리 학교의 치마는 썩 긴 편이 아니었건만, 그 애들에게는 한참은 모자랐던 모양이었다.


"너 T랑 친하다면서?"


가장 새빨갛게 입술을 바른 여자애가 총대를 멨다. 학교 오는 데 저렇게까지 해야만 했나, 싶을 정도로 유난히 과한 화장이었다. 빽빽하게 붙인 속눈썹 위로 마스카라가 떡져 있었다. 사람의 얼굴을 잘 외우는 편이 아닌 내게도 익숙한 이목구비였다.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에 알이 큰 금테 안경. 작년에 굳이 우리 반까지 와서 고데기를 빌려 쓰던 애였다. 어머, 쟤네 좀 봐, R양이 호들갑을 떨었다. G군은 묵묵히 내 뒤에 버티고 서서 그 애들을 노려보았다. 나 외에는 볼 수 없는 존재라 할지라도, 내 편이 몇쯤은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든든해졌다.


"아니, 사실은 얘가 걔한테 관심이 있대서."


금테 안경이 말했다. 그러면서 뒤에 선 여자애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집중되자 그 애가 얼굴을 붉혔다. 키는 조금 작아 보였는데, 다리가 길어서 별로 흠이 되진 않았다. 제법 예쁘장해서 턱선에 딱 맞게 자른 단발이라는, 다소 소화하기 힘든 머리 모양도 깔끔하게 잘 어울렸다. T의 취향은 잘 몰랐지만, 내가 녀석이었다면 단번에 데이트를 신청하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G군이 휘파람을 불었다. 추파를 던질 때 흔히 쓰는 가벼운 말투였다. 뭐야,


-예쁜데?


R양이 그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덩치도 크고 힘도 센 주제에 R양에게만 약해서, 휘적휘적 날아가는 G군의 모습이 우스웠다. 하마터면 나에게만 보이는 존재들이라는 것도 잊고 눈치 없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나는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고 단발 여자애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T한테 직접 말 걸어 보는 건 어때, 내가 제안했다. 사실 그 애들이 무엇을 위해서 내게 접근했는지 감이 잘 안 잡혀서였다. 단발이 T한테 관심이 있는 것이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인지 알 수가 없었다.


"걔 착해. 분명 금방 친해질 거야."


순해. 골든 리트리버 같잖아? 내 느낌을 그대로 담은 말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 애들은 놀란 표정이었다. 마찬가지로 내가 어째서인지 짐작할 수 없는 이유 탓이었다. T가 골든 리트리버 같다고? 금테 안경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조잘거렸다. 내가 보기엔 그냥 도도한 허스키인데. 걔 여자애들하고는 말도 안 섞어, 남자애들하고만 놀잖아.


단발이 새침하게 흐름을 끊었다. 됐어,


"소개해 주기 싫으면 말아."


뭐야, 그런 거였어? 그냥 말을 하지. 여고생 특유의 높은 목소리가 나를 비웃으며 깔깔거렸다. 뭐가? 나는 눈동자에 최소한의 감정만 실으려 노력하며, 갸우뚱 그 애들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거라면 미안. 금테 안경의 옆에서 네모난 거울만 쳐다보고 있던 애가, 나를 흘겨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잘 되길 바라. 졸지에 오해를 받았다. 그 애들은 일제히 뒤돌아 내게서 멀어져 갔다. 어디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내가 실수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하지만 굳이 바로잡으려 애쓰지는 않았다. 나는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하나하나에, 나를 알지도 못하면서 지껄이는 그 사람들의 날카로운 말과 태도에 상처받는 사람이 아니었다… 절대로.


"안녕, S…. 뭐야."


유쾌하게 교실 문을 박차고 들어와, 내 뒤 자기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으며 T가 인사하다가 말을 멈췄다. 무슨 일 있어? 내 책상에 턱을 대고 앉아, 내가 든 샤프를 빼앗아 들며 다정하게 묻는 질문에 나는 그만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 버리고 말았다. 어쩌면 내가 사실 단발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한 게 아니라, 알면서도 애써 무시했던 것 아닐까?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내게는 그렇게 행동했어야 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그 가설은 금방 수면 너머로 내려가 모습을 감추었다. 나는 샤프를 돌려받으려 애쓰는 대신 필통에서 빨간 색연필을 꺼내어 답지를 펼쳤다. 아니. 내가 대답했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


여자가 방으로 돌아오기 무섭게 손님이 찾아왔다. 덕분에 나는 중요한 것을 듣지도 못한 채 한참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방문을 살짝 두드리고 상체만 빼꼼 내민 건 놀랍게도, 그리고 내게는 불행하게도 T였다. 들어가도, 될까요. 눈을 깜박이며 묻는 소심한 물음에 나는 내 초라한 얼굴이 드러나지 않게 재빨리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그녀가 답했다.


"…그래."


나는 펑퍼짐한 가디건 소매로 하관을 최대한 덮었다. 그대로 고개만 돌려 녀석의 이목구비를 눈에 담았다. 고양이처럼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눈, 그와는 대비되게도 순하게 처진 눈썹.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번지는 반가움까지 변한 것 하나 없이 그대로였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사무치고 올라와 나는 눈을 감았다. T가 내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G군이 녀석의 뒤에 서서, 손가락 하나라도 내게 까딱했다간 목을 따 버리겠다는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R양은 내 뒤에 나란히 누워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R양의 온기 없는 손가락이 귓가에 닿을 때마다 조금씩 안정이 되었다. 그들은 늘 그랬다. 스무 해에 가까운 시간을 줄곧 함께 보내 와서인지, 내 복잡한 감정을 말하지 않아도 먼저 이해하고 행동했다.


"S."


침대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녀석이 속삭였다. 동시에 나는 평소보다 격렬하게 죽고 싶어졌다. 나는 며칠을 굶어 초췌해진 상태이며, 화장은커녕 심지어 세수도 안 했다. 그나마 어제 밤에 머리를 감아 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러나 힐끔 실눈을 떠 깊은 바다 같은 T의 눈동자를 마주했을 때, 격렬한 감정에 나는 하마터면 휩쓸려 버릴 뻔했다. 저것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까, 어디에서도 들어 본 적 없었던 깊은 물살이 울렁대며 나를 삼킬 듯 몰려왔다. 천천히 젖어들기 시작한 녀석의 눈시울이, 이제는 톡 치면 터져 버릴 것 같이 발갛게 익었다. 나는 애써 얼굴 근육을 갈무리해 차분한 무표정을 만들었다. 인정해야 했다. T에게 지금 엉망이 된 내 모습 따윈 보이지 않았다. 그게 더 나빴다. 비참한 건 홀로 신경 쓰는 이가 나뿐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미친년이네, 나. 최악이었다.


"T."


간신히 내뱉은 목소리가 반쯤 가라앉았다. 내 시선도 따라서 바닥으로 내려갔다. 이름이 불리우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번쩍 고개를 드는 녀석의 얼굴에 스미는 기대를, 그 간지러운 설렘을 차마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결국 내가 꺼낼 수 있었던 유일한 말은 형편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나가, 보고 싶지 않아."


녀석이 당황한 듯 살짝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마침내 톡, 눈물방울이 터지며 눈꼬리 끝에 아슬하게 매달렸다. 상처받은 표정이 물기를 머금고 가련하게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쳐다보지 마, S. 어쩔 수 없었다고 스스로를 달래면서였다. 많이 해 본 일이잖아. 네가 지금까지 다른 이들에게 반복했던 것처럼 그냥 고개를 돌려 무시해 버려….


"T."


여자가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어떠한 특별한 이유에서인지, 아니면 그녀에게도 T가 사랑스러운 존재인 건지. 나를 대할 때와는 정 반대의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녀가 불렀다. T, 잠시만,


"S에게 따로 할 말이 있어."


T는 잠시 고개를 돌려 촉촉한 눈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느릿하게 일어섰다. G군이 눈치 빠르게 뒤를 쫒았다. 그가 돌아와 녀석이 충분히 멀어졌음을 알려 줄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는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인가요."


여자는 구구절절한 미사여구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미안하지만 너를 내보내 줄 수 없어. 직설적인 화법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물론 내용은 빼고. 대충 가늠은 하고 있었지만 늘 말하듯 듣는 것은 또 달랐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차분하게 그녀의 움직임을 쫒았다. 내가 눈으로 열심히 이유를 묻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눈치채지 못한 듯 싶었다. 여자가 덧붙였다.


"그럼에도 굳이 나가겠다면, 네 친구들과 같은 모습이 된 이후가 될 거야."

"음."


내가 웅얼거렸다. 차라리 이쪽을 공략해 볼까? 예상한 반응은 아니었던지 그녀는 도르르 눈동자를 굴렸다. 의도치 않게 기대를 살짝 비친 것 같았다. 알았어요. 나는 찔끔해 얌전히 대답하며 시선을 아래쪽으로 내리깔았다. 이제 내게 볼 일은 대충 끝난 것 같으니, 그녀를 필요한 곳으로 보낼 생각이었다. 나는 문가에 선 G군을 흘긋 바라보았다. G군은 여자와 달리 눈치가 빨라, 내 눈빛만 봐도 무엇을 묻는지 금방 알아차렸다. G군이 대답했다. 복도 저 끝에 남아 있어.


-많이 상처받았나 보더라.


나는 도로 고개를 벽으로 향하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오랜만의 보송한 이불 자락에 고개를 깊게 파묻었다. 이제 T에게 가 보세요. 의외의 명령에 당황한 그녀 주변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애써 무심한 척 내가 말했다. 걱정되시잖아요, 여린 애니까. 내가 3년간 봐 온 T는 대담하고 겁 없는 척 보이지만 실은 누구보다 상처를 잘 받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강아지처럼 지독히도 맹목적이어서 포기하지 못하고 끝까지 매달리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는 얼굴을 굳혔다. 방금 한 생각에서 자그마한 모순을 발견해서였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해야 할 것을 잘못 잡은 게 아닐까?


"그러지."


그녀는 무덤덤하게 대답하더니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울리며 밖으로 걸어나갔다. 홀로 남은 나는 이불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며 요동치는 맥박을 바로잡으려 애썼다. R양이 내 뒤에 누워, 머리카락을 빗어내리며 가느다란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주었다. G군이 따라서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어려서부터 내가 힘들어할 때마다 부모처럼 해 주던 일이었다. 간단한 동요였음에도 화음이 들어가니 훨씬 듣기 좋았다. 익숙한 가사에 귀를 기울이다가 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


며칠째 밥을 먹지 않았다. 더는 버틸 수 없어서, 까딱했다간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숨 막히는 허기는 지긋지긋했지만, 기절하듯 잠들어 있다 보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아 좋았다. 가끔 가다 눈을 뜨면 보이는 서러운 T의 얼굴 또한 잠깐이었다. 울먹이며 각각 머리맡과 발치를 지키는 R양과 G군의 목소리도.


T는 내게 물이라도 먹이려고 애썼다. 견디기 힘든 배고픔과 목마름에 취해 있다 보면, 가끔 입술에 닿는 뜨겁고 부드러운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 달콤한 물방울이 그 틈새로 스며들어왔다. 기침으로 뱉어내려 했지만 본능이 이를 거부했다. 나는 그의 팔을 붙잡고 갈급하게,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빨아들였다. 공급원의 정체를 알고 있으면서도 이성으로는 도저히 멈출 수 없는 원초적인 갈망이었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자 나는 포기하고 물 정도는 깨어 있을 때 얌전히 받아먹었다. 맞출 수 없는 시선은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다행히도 내가 처음부터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탓에, T는 제 행동을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이상의 범위는 내 미약한 이성으로도 어떻게든 통제할 수 있는 영역에 속했다.


"제발 이것 좀 먹어, S…."


내가 손대면 바스라져 사라지기라도 할 줄 아는지, T는 차마 내 털끝 하나 건드리지도 못한 채 전전긍긍하며 어떻게든 해 보려고 애를 썼다. 나는 여느 때처럼 눈을 감고 귀를 닫아 녀석의 부탁 따윈 흘려 버렸다. 놀라운 일이 그때 일어났다. 내가 늘 그랬듯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신경 꺼, 무슨 상관이야…. 하고 날카로운 말을 내뱉은 직후였다.


"나는… 너의 직업을 훔칠 거야."


뭐? 나는 지친 고개를 천천히 돌려 T를 쳐다보았다. 다행히도 환청은 아니었는지, R양과 G군 또한 똑같이 화들짝 놀라며 녀석을 바라보았다. 방금 뭐라고…. 내가 웅얼거렸다. 내 직업을 훔친단다, 몽롱한 와중에도 그 말만큼은 똑똑히 들었다. 내가 그리도 부탁하고 싶었던 바로 그 말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빠르게 뛰어서 온 몸에 뜨거움을 전달했다.


"그리고, 네 주변에 떠도는 영혼들을 모조리 성불할 거야."


그러나 따라온 말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내 기대와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혼란스럽고 어질어질해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갈팡질팡하다가 나는 R양과 그녀의 연인을 쳐다보았다. 내가 선택을 망설일 때마다 늘상 지켜 왔던 매뉴얼대로였다. G군이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는 상관 없어. R양이 말했다. 정말 괜찮아. 그러고는 목소리를 높여 합창했다. 모든 것은, 네가 바라는 대로 해.


나는 눈을 감았다. T가 말을 이었다. 그러면 네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되겠지. 움찔 몸이 떨렸다. 정확히 정곡을 찌른 말이었다. 잔인했다. 녀석은 나를 너무 잘 알았다. 두 사람이 사라지고 나면 이 집에서 온전한 내 편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 가장 근본적인 공포 중 하나였다.


그 영혼들이 불쌍하다면, 그들이 그런 모습이라도 남아 있을 수 있게 하고 싶다면…. 녀석이 침대 옆 탁자에 올려 두었던 쟁반을 들어올렸다. 뭐라도 좀 먹어. 나는 그 말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스테인리스 숟가락은 철덩어리를 달아 둔 것마냥 묵직했다. 내 기분을 눈치챈 R양이 받쳐 주었음에도 무게는 여전했다. 최대한 티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손가락은 주체할 수 없이 달달 떨렸다. 보다 못하겠는지 T가 내 손 위에 제 것을 부드럽게 겹쳤다. 녀석이 이끄는 대로 팔을 움직이다가, 차마 견디지 못하고 나는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은백색 금속이 용암에라도 빠졌다 나온 듯, 더는 붙잡고 있지 못할 정도로 뜨거웠다.


역겨웠다. 울고 싶어서 앞니로 입술을 짓이겼다. 유독 나한테만 가혹한 것 같은 운명도, 그리도 보이기 싫었던 추한 모습을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드러내고 있는 나도. 다 똑같이 찢어 죽이고 싶게 치욕스러웠다. 참았던 눈물이 결국 터져서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러자 기분이 더 비참하게, 끝없이. 아래로 추락했다.


-S!


R양이 소리질렀다. 팔을 뻗어서 내 어깨를 감싸안는 T를 G군은 주먹으로 연신 후려쳤지만, 나에게만 보이는 투명한 몸은 당연히 닿지 않았다. 그만, G 오빠. 그만 해.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더는 저항할 의지도, 기력도 없었다. 그냥 녀석이 무슨 짓을 하든 반항하지 않고 내버려 두기로 했다. 끌어당기는 힘은 기억보다 세고 부드러웠다. 나는 자연스레 T에게 기대는 꼴이 되었다. 내 눈물이 제법 많이 흘러 축축할 텐데도, T는 불평 없이 옷자락을 내어주었다.


미안, 미안해, 습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T가 낮게 속삭였다. 우는 것은 나인데 어째서 녀석이 더 슬퍼 보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내가 잘못했어. T가 말했다. 그러지 않을 거야. 감히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반쯤 울음이 담긴 어투는 퍽 애절했다. 그러니까 울지 마…. 나는 손톱이 살을 비집고 들어가 손바닥이 아프도록 힘을 세게 주었다. 녀석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서 끝없이 맴돌았다. 울지 마,


나의 S.


-


저택에는 나를 제외하고 네 사람이 살았다. T와 여자, 낮에는 어딜 갔다가 밤에만, 그것도 격일로만 들어오는 덩치 큰 중년의 박사. 그리고 나를 데려왔다지만 정작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흑발의 남자. 이외에 간혹 들러서 자고 가는 몇 사람이 더 있었다. R양의 보고에 의하면 서른 살 정도로 젊고 잘생겼고 밤일도 기똥차게 잘하는(여기서 G군이 R양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흑발의 그가 우두머리였다.


또 무수히 많은 내게만 보이는 존재들도 돌아다녔다. 그들의 꼴은 하나같이 엉망이었다. 몸에는 여기저기 구멍이 나 있었으며, 팔목은 비쩍 말라 거의 뼈마다만 남아 있었다. 그들은 쉴새없이 내게로 몰려들어 가늘고 괴기하기까지 한 손을 내뻗었는데,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R양과 G군이 잘 막아 주었다. 나야 두 사람이 있어서 괜찮았지만, 아무래도 저택의 다른 이들이 걱정이었다. 저만큼의 원혼과 함께 거주한다면, 웬만큼 기가 센 사람이 아니고서는 분명 어딘가 문제가 생길 텐데…. 과연 내 예상은 들어맞아서, 진분홍 머리의 여자는 봄기운이 만연한 지금까지도 추위에 시달렸고 T는 감기가 낫지 않았다. 소매로 입을 가리고 콜록대는 꼴이 보기가 싫었다. 고등학생 시절의 녀석이 결석은커녕 그 흔한 조퇴 한 번 한 적이 없었던 것을 감안하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성불을 해야 할까?"

-뭐?


얼떨결에 뱉어 버린 생각에 나도, R양도 깜짝 놀랐다. G군과 R양과 나는 한참을 말없이 깜박깜박 서로의 눈만 바라보았다. 애써 정신을 추스르고 내가 변명했다. 아니, 이 사람들…. 안쓰럽잖아. 얼마나 오래 나 같은 이를 기다렸을지, 그리고 내가 그들을 뿌리친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 나로서는 가늠할 수도 없었다. R양이 말했다.


-저 사람들이 불쌍하다는 건 나도 동의해. 하지만 S,


지금은 네 몸도 좀 고려할 때야. 나는 보라색 가디건 위로 팔꿈치를 감쌌다. R양의 말도 맞았다. 지금의 내 체력으로는 고작 한 사람에게 안식을 선물하는 데에도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다. 나는 눈동자를 굴려 문가를, 문틈을 비집고 튀어나온 창백한 팔을 밀어내는 G군을 쳐다보았다. R양의 말은 분명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아니야."


깜짝 놀란 G군이 손을 놓쳐 버려서, 비쩍 마른 몸의 주인이 튕겨져 들어왔다. 산발이 된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자가 초점 없는 눈을 굴려 나를 올려다보았다. 홀쭉하게 들어간 볼과 이마에 남은 구멍을 나는 마주보았다. 뒤통수까지 뚫려 반대편의 훤히 보이는 상처였다. 그녀의 간절한 얼굴에서 애절함이 잔뜩 묻어나오자, 나는 가디건 자락을 세게 부여잡았다. 그 어마어마한 한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혔다.


아니, 굳은 다짐과 함께 내가 말했다. 아무래도 해야겠어, 성불.


"차례대로 들여보내 줘."


그래서 T가 문을 두드렸을 때, 나는 너무 지쳐서 더는 내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를 지경이 되었다. 내 방을 찾는 두 사람 중 노크하는 이는 T뿐이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채 습관적으로 대답했다. 들어오세요.


"괜찮아?"


T가 방에 발을 들이자마자 나는 크게 휘청였다. G군의 뻗은 팔보다 T가 조금 더 빨랐다. 녀석은 잽싸게 내 허리를 받아내어 침대에 내려놓았다. 머리가 윙윙 울리고 어지러웠다. 나는 눈 앞의 상대가 누구인지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이끄는 대로 몸을 누였다. T가 다시 물었다.


"S, 괜찮아?"

"아니."


쉰 목소리로 내가 중얼거렸다. T는 가만히 내 이마를 짚어 보더니 경악했다. 열이 나잖아! 녀석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동안 나는 눈을 감고 R양의 차가운 체온에 의지해 끓어오른 몸을 식혔다. T는 금방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계단을 몇 층 뛰어내려갔다 오기라도 했는지 숨을 헉헉대며, 꾸덕한 액체(딸기맛이었다. 해열제가 아닐까 나는 생각했다)를 입 안에 흘려 넣었다. 먹는 게 좋겠어, G군이 거들었고 나는 그 말대로 했다. 입가에 대어 주는 머그잔의 물과 함께 삼키자, 약 기운이 금방 돌아 몽롱해졌다. 다정한 손이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올렸다. 부드럽게 한숨을 쉬더니 가슴을 토닥여 나를 재웠다.


"알아들었으면 제발 얌전히 좀 있어."


종아리와 허벅지에 닿는 낯익은 타일 바닥의 느낌에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익숙한 공간, 집이었다. 그리고 나는 분명 거기를 뛰쳐나왔다. 현실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림과 동시에 짝, 매서운 손이 뺨을 때렸다. 분명 꿈일 텐데도 느껴지는 통증에 나는 찔끔 눈물을 참아내야만 했다. 더러운 것 같으니. 날카로운 욕설이 온몸을 난도질했다. 나는 휘적휘적 팔을 뻗어 가슴 아래쪽, 응어리진 말들이 꽉 메운 그곳을 움켜잡았다. 숨이 막혀서 참을 수가 없었다.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차라리 죽이세요!"


내가 악에 받쳐 소리질렀다. 그냥 죽이고 조용히 묻어 버리시라구요. 내가 사라진다면 눈치채는 사람이 꽤나 있겠지만, 가문의 힘을 끌어모은다면 어떻게든 덮을 수 있었다. 내가 못났다면서요? 하자가 있어서 어디 내어 놓을 수도 없는 계집애라면서요. 내 평소와 다른 반응에 잠시 벙쪄 있다가, 그녀는 이내 비스듬히 웃으며 내 턱을 들어올렸다. 그만해라, S. 역겹구나. 늘 맨 앞에서 앞장서던, 이제는 나와 어떤 관계인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친척 여인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명령하는 거냐? 감히 너를 죽이고 손을 더럽히라고?


"주제를 알아야지."


우리 손에 적시기에는 네 피가 얼마나 구역질 나는지 여전히 모르는구나. 적어도 그 말을 할 때 그녀는 진심이었다. 그 분노가, 눈동자 속에서 격렬하게 피어오르는 경멸이 너무나도 매서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겁에 질렸다. 그것이 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에서 본 가장 공포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살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내 덩치 큰 친척은 우악스럽게 나를 잡아끌어 그 방에 던져넣었다.


닫히는 문틈으로 나는 익숙한 눈빛을 보았다. 모든 일의 주동자, 손 하나 대지 않고 모두를 조종해 나를 여기까지 몰아넣은 자. 점잖고 고귀한 성직자, 내가 당장이라도 찔러 죽이고 싶도록 사랑해 마지않는 나의 고모.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언제나처럼 무관심한 눈빛으로 잠시 나를 응시했다. 고작해야 몇 초도 채 되지 않을 짧은 시간이, 수천 년은 되는 듯 길게 느껴졌다. 그러더니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멀어져 갔다.


동시에 나는, 내가 지금까지 한 짓이 뭐였는지를 처절하게 깨달았다. 도시에서 가장 거룩하다고 추앙받는 P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 중 하나가 나였다. 그 성격이라면 얼마를 들여서라도 나를 찾을 것이다. 어쩌면 직접 나서서 돌아다닐지도 모른다. 그러고는 마침내, 나를 끄집어 내어 도로 그곳에 던져넣겠지. 암흑과 추위와 굶주림밖에 없는 나의 영원한 지옥…. 안 돼, 싫어. 내가 중얼거렸다. 상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싫어, 싫다고….


타는 듯한 뜨거움에 몸서리치며, 나는 무엇에라도 홀린 듯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내 옆을 줄곧 지키고 있던 T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내 눈에 오로지 녀석의 얼굴만이 가득 찼다. 방의 풍경도, 아마도 나를 붙잡고 전전긍긍하고 있을 R양과 G군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게 사라진 세상에 우리 두 사람만이 남아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녀석에게 매달렸다. 열에 잔뜩 들떠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바람만으로 가득 차 애원했다. 죽여, T. 차라리 나를 죽여 줘….


"…뭐?"

"나를 성불해."


네가 내 능력을 빌려 쓸 수 있단 거 알아. 내가 말했다. 이 순간만큼은, 설령 T의 깊은 바다를 닮은 눈동자가 지독한 경멸로 가득 채워질지라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 잠시도 견딜 수 없는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았다. 난 다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그리고 이어진 말은 처음 것과는 제법 다른 모양을 취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심지어 나조차도 눈치채지 못했다.


제발 살려 줘, T.


T는 한참을 눈을 깜박이며 나를 쳐다보다, 얕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녀석은 저를 붙든 내 손을 하나하나 조심스레 떼어내었다. 나름 세게 쥐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도록 쉽게 떨어졌다. 그러고는 내 양 팔을 조심스레 갈무리해 품으로 끌어당겼다. 네가 원한다면 기꺼이 할게. T가 속삭였다. 놀라운 말이었지만 버둥거릴 힘도 없어 나는 가만히 있었다. 녀석이 다짐하듯 반복했다. 네가 바란다면 그럴게.


"지금만큼은 제발 여기에 있어 줘…."


나는 T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고 T는 토닥이듯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마음이 차분해졌다. G군과 R양 외의 이에게서는 좀처럼 느끼지 못했던 편안함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이제는 인정해야만 했다. 내 감정, 어쩌면 몇 년에 걸친 오랜 시간 동안 천천히 달궈져 온 숯불 같은 갈망은 더 이상 부인할 수 없이 커져 있었다. 나는 들려오는 박동에 귀를 기울였다. 일상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빠르게 뛰는 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우리는 내가 도로 잠들 때까지 줄곧 그러고 있었다.


-


여자는 어느 순간부터 오지 않았다.


대신 거의 온종일 내 곁에 붙어 있는 일은 T가 도맡아 했다. 내가 저택의 모든 영혼들을 성불하고 쓰러진 그 날 이후 T는 전보다 더 조심스럽게 굴었다. 큰 차이가 드러나지는 않았어도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리저리 비뚤어지고 형편없이 일그러졌던 말들이, 그 어느 순간부터 제법 괜찮은 형태를 갖추어 나왔다.


"준비 됐어?"

"거의."


나는 마스크를 꼼꼼히 올린 뒤, 코 부근의 철사를 꾹꾹 눌러 모양을 잡았다. 침대에 대충 올려 두었던 회색 후드집업을 걸치고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속에 입은 검은 원피스는 분명 딱 붙는 핏일 텐데, 내게는 가슴 쪽이 헐렁하게 남아 도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나마 집업이 엉덩이를 덮을 정도로 커서 조금 나았다.


내가 입은 모든 옷이 T가 M 누나라고 부르는 사람에게서 빌린 것이었다. 초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흔쾌히 나를 제 옷방에 데려갔다. 인형 놀이를 하듯 한 아름 꺼내어 이것저것 대어 보더니 몇 벌을 골라 건네주었다. 대부분이 원피스나 프리사이즈의 치마였다. 내가 좋아하는 청바지는 사이즈가 안 맞아서 어쩔 수 없었다.


"신발장에 M 누나 운동화가 있어. 그걸 신어도 돼."


방문을 나오다가 비틀거리는 나를 재빨리 잡아 주며 T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신고 나온 보라색 슬리퍼만으로도 충분했다. 오래 신어서 체중에 발 모양으로 눌린 바닥이 다른 무엇보다 편안했다.


"괜찮아."


순식간에 시야가 가려져 나는 움찔했다. T가 들고 있던 모자를 덮어씌운 것이었다. 챙이 길어서 푹 눌러쓰면 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검정 볼캡이었다. 내가 당황해 바둥거리자 녀석은 다정하게 웃으며 매무새를 만져 주었다. 이러면 얼굴이 더 안 보여. T가 설명했다.


"이제 앞은 잘 보여?"


나는 엉거주춤 고개를 끄덕였다.


한 발만 잘못 디뎌도 굴러떨어져 목이 부러질 것 같은 높은 계단을 우리는 조심조심 내려갔다. 거창한 준비 과정치고는 보잘것없는 목적이었다. 장을 봐야 하는데, 괜찮다면 같이 나가지 않겠느냐는 말에 나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장을 본다는 얘기에 놀란 것이었는데, 그런 반응을 불편함으로 오해했는지 T가 더듬더듬 해명했다.


"그, 나가는 김에 시내도 돌아보고 올 거고. 간만에 바람을 쐬면 좋을 것 같아서…."


그러면서 내 눈치를 열심히도 살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내에만 처박혀 있자니 답답해서, 산책이라도 하고 싶다고 생각하긴 했었다. 나간다는 말에 R양이 반색하며 자기 일처럼 날뛰었다. 내 주변을 끊임없이 도는 바람에, 나는 고작 한 층을 내려가면서도 몇 번이나 발목을 삐긋해야 했다.


"양파, 당근, 간장…."


신발을 신으면서 T가 중얼거렸다. 나는 그가 꺼내 준 내 슬리퍼에 발을 밀어넣었다. 기름. R양이 상기시켰다. 내가 따라했다.


"기름."


맞다, 기름. T가 웃었다. 어서 가자. 녀석의 내민 손을 나는 피하지 않은 채 붙잡고 일어났다. 우리는 이른 봄 오후의 미지근한 햇빛을 만끽하며 천천히 시내를 걸어나갔다.


장을 보고 나오는 길에 카페에 들렀다. T가 결정한 일이었다. 카트를 끌며 이것저것 식재료를 골라담는, 일행으로 보이는 20대 초반의 두 남녀가 평범한 사람들 눈에 어떻게 비칠지를 골몰히 생각하느라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여 계획에 동조하고 말았다.


"있잖아, S."


고르는 중에 미안해, T가 말했다. 혹시, 너만 괜찮다면 말이야. 카운터 앞에 나란히 서서 음료를 고르다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T가 나를 불렀다. 평소보다 한참에서 눈을 돌려 녀석을 쳐다보았다. 내가 네 능력을 잠시 빌려도 좋을까? 나는 경악했다. 뭐? 외치는 목소리가 깜짝 놀라 크게 나왔다. 주변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느끼며 나는 얼굴을 붉혔다. T가 손사래쳤다. 오해하지 마,


"네 친구들도 함께하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


어머! R양이 탄성을 내질렀다. T가 우물거렸다. 물론 네가 싫다면 괜찮아, 미안해…. R양이 소리를 지르며 카페 안을 뱅뱅 날아다녔다. 쟤 좀 봐, 쟤 좀 봐! 나는 그녀를 무시한 채 G군의 의견을 구했다. 미안, 뜬금없이 그가 사과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어떻게 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어. 그러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다.


늘 느꼈지만 T의 손은 순한 봄 같았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한겨울에도 똑같이 따뜻했다. 나는 남자치고는 가늘고 고운 손가락 틈에 내 것을 집어넣었다. G군에게 묻느라 소요된 내 침묵을 거절로 받아들였는지, 머쓱하게 메뉴판으로 돌아섰던 T의 시선이 비스듬히 아래쪽을 향했다. 그가 눈을 깜박이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내 맥박이 손끝을 타고 전해지지 않기를 빌었다.


"이렇게 빌리는 거 아니야?"


아하하, 잠시 벙쪄 있다가 T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반짝 오묘한 이채가 눈동자에 잠시 어리더니 사라졌다. 좋아, 녀석이 중얼거렸다.


"좋아!"


우리는 음료수를 사이좋게 하나씩 들고 집(집? 이제는 어느 곳을 그렇게 불러야 하는지조차 확신이 서지 않았다)으로 향했다. T가 든 딸기 셰이크의 냄새에 R양이 황홀해했다. 발 맞춰 걸으면서 나는 G군이 생전에 얼마나 쾌활한 사람이었는지 처음 깨달았다. 말주변도, 재미난 것을 발견하는 센스도 없는 나 같은 사람은 절대로 끌어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뭐야. 방금 봤어?"


지나치던 여자 둘의 목소리가 내 주위를 잡아끌었다. 방금 지나간 남자, 되게 귀엽지 않았어? 나는 마스크를 턱으로 당겨 내리며 흘끗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했다. 말 걸어 볼까? 들떠서 재잘대는 대화를 T는 듣지 못한 듯, 내 반응만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두꺼운 빨대를 타고 흘러내리는 딸기 셰이크를 관찰하다가 R양이 물었다.


-왜? 뭔 일 있어?

"아니, 아니야."


도전해 봐. 근데 옆에는 여자친구 아니야? 나는 내 컵에서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보는 척 뒤쪽에 신경을 집중했다. 이어서 들려온 목소리는 보다 선명했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동시에 내가 떠올린 것은 평범한 모범생 S는 절대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오랜만의 외출에 기분이 너무 들떠 있었다. 작은 일탈 정도야 하나 더 추가되어도 큰 상관이 없을 것 같아서. 나는 그냥 눈을 딱 감고 한 번만, 딱 한 번만 저지르기로 했다. 나는 녀석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T는 깜짝 놀라 잠시 어버버거리다가 자연스럽게 나를 감싸안았다. 뭐야, 여자친구 맞잖아. 아쉬워하는 여자들의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


"들어와."


예의 바른 노크 소리에 언제나처럼 가볍게 답했다. T가 문을 반쯤 열고 미끄러지듯 안으로 들어왔다. 침대에 앉다 있던 나는 녀석을 반기려 일어나다가, 평소와는 다른 표정의 변화를 눈치채고 도로 엉덩이를 걸쳤다. T가 내내 등 뒤에 숨기고 있던 손을 내놓았다. 천천히 손바닥을 펼쳐 들고 있던 검은 물체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금속이 합판 바닥에 닿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나는 눈동자만 굴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권총이었다.


R양이 나와 T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어떻게 할까, 내려다보며 눈으로 묻는 물음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냥 내가 마주하게 해 줘. 그녀가 막는다고 막힐 일이 아니었다.


"S."


T가 이름을 불렀다.


"…아직도 그러길 원해?"


목적어가 애매한 문장이었다. 나는 괜히 못 알아들은 척, T의 창백해진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녀석은 한숨을 내쉬더니 제 머리카락을 거칠게 해집었다. 너를 죽이래. 그가 괴롭게 웅얼거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내보내지 못하겠으니 차라리 그대로 쏘아서 숨을 끊으래. 녀석은 울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게 네가 그토록 바라던 거야? 원한다면 네 소원을 들어 줄게. 뒷말은 울음에 먹혀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어쩐지 들은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나는 너를 사랑하니까….


"이리 와."


또르륵 비치는 가는 눈물은 더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리 오라고, T. 본능에 휩싸여 내가 명령했다. 녀석은 순순히 말을 들었다. 한 발짝씩 걸음을 내딛어, 다리끼리 서로 스칠 거리에 와서야 멈추었다. 녀석이 울먹였다.


"나랑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돼?"


네가 날 사랑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내가 널 사랑하게 해 주면 안 돼? 나는 견디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팔을 뻗어 녀석의 허리에 두르자, 잘게 떨리는 긴장이 그대로 느껴졌다. 나는 그대로 힘을 주어 끌어당겼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T 또한 가볍게 딸려왔다.


내가 다시 한 번 명령했다.


"더 가까이 와."


동시에 뜨거운 열기가 나를 덮쳤다. 우리가 닿은 곳에서부터 시작해 온몸을 휘젓고 돌아다녔다. 나는 맞잡은 손에 힘을 주고, 반대쪽은 목에 걸쳐 거리가 더 이상 멀어지지 못하게 붙잡았다. 녀석은 남는 손으로 침대에 흩어진 내 머리카락을 헤잡었다. 부드럽게, 때로는 격렬하게. 우리의 입맞춤은 지속되었다. 망을 봐 주던 R양의 진정하라는 목소리 따윈 가볍게 씹을 수 있을 만큼, 열렬하고 진득했다.


마침내 접촉이 끝났을 때 나는 숨을 헐떡이며 부족한 산소를 들이마셨다. T는 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가지 마, 속삭이는 소리는 들끓는 숨결에 파묻혀 작았지만 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제발 가지 마, S. 애처롭게 몸을 떨면서 녀석이 울먹였다. 나랑 여기 있어…. 나는 눈동자만 굴려 녀석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팔을 뻗어, 바들거리며 떨리는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S가 아니야. 내가 말했다. 더는 베일에 싸인 호칭 따위 필요 없었다. 나는 내 진짜 이름, 녀석이 이미 알지만 모르는 척 했던 진한 단어를 끄집어냈다. …이라고 불러. T의 놀라움이 온 몸을 통해 찌릿하게 전해져 왔다.


아아, T. 이번에는 그 기대를 짓밟지 않으며 내가 말했다. 넌 나를 가장 잘 알지만 여기까지는 몰라. 이번에 그의 머리카락에 손을 집어넣은 쪽은 나였다. 내가 속삭였다. 어떻게 내가,


"어떻게 내가 널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우리는 그대로 날아올라 허공을 떠돌았다. 너무나도 반짝이고 화려하기 그지없는 무궁한 우주를 하염없이 헤매었다. 벅차오르는 기쁨을 숨기지 않으며 T가 연신 내 이름을 불러대었다. 나의 것. 진득한 소유욕이 족쇄처럼 나를 얽매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어지러웠다.


누군가에게 속해 있다는 것이 이런 기분이라면, 그것이 덫 위에 놓인 달콤한 치즈, 나를 죽이기 위한 올가미라 할지라도 나는 기꺼이 몇 번이고 기어들어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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