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료

[화산귀환/청문드림] 홍매화(紅梅花)

-밀회

* 적폐 / 날조 / 캐해석 차이 있습니다.

* 매화연 16화 유료분 이후의 시점입니다. 드림주 주의.

* 두 사람의 대화를 이어 볼 수 있습니다. (유료입장)

크지 않은 방 안의 촛불이 일렁인다. 창밖에 환하게 떠 있는 보름달 아래 바람 소리를 따라 밤나무꽃이 흔들거리고 풀벌레가 조용히 제 존재를 드러내 울고 있다. 생각이 잠겨있던 청문은 멀찍이 떠 있는 달을 본다. 전쟁 동안 화산에 멀리 떨어져 본대에서 지내다 보니 자주 화산이 그리웠다. 저 너머로 계속 가면 화산이 있지만 갈 수 없다. 지금은 전쟁을 끝내야 하는 것에 집중해야 했으니까. 화산에 남아있는 어린 아이들, 보다 나아서 지금 함께하고 있는 모두의 미래를 위해서 그래야만 했다. 청문은 한숨을 쉬었다.

‘어렵구나.’

연홍은 의료원으로서 지금도 충분히 받쳐주는 이들이었다. 전쟁이 길어지니 부상을 대처할 수만 있게 돼도 조금 더 무기를 들고 살아남을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것은 마교의 교구를 동시에 기습하자는 작전을 뒷받침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지만,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본대에 나타난 마교도의 수가 예상보다 많았고 혼란 속에서 가장 중심을 잡아준 건 다름 아닌 연홍이였다. 의원으로 남아있던 연홍 련이 앞장서 외부에서 마교도를 제압하고, 내부에선 이탈조를 누구보다 먼저 알아차린 연홍 화가 증인을 붙잡아뒀다. 덕분에 내부의 혼란은 빠르게 정비할 수 있었지만 연홍 련은 쓰러졌고 작전은 반쯤 이행되었다. 득도 있었지만 실도 작지 않았다.

‘그 사람은 이것도 예상했던 것일까.’

작전에 대한 논의에서 연홍 화는 반대하지 않았다. 연홍 련이 군장으로 얘기가 나올 때도 그녀는 이상할 만큼 조용했고 오히려 상황을 지켜보다 못해 상관없다는 눈이었다. 자신의 반대로 그들이 연홍 화의 눈치를 볼 때도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그것이 실의에 맞는다면, 저는 따를 뿐이지요. 장문인들의 혜안에 따라가겠습니다.

실의만 맞는다면 뭐든 이용해도 좋다. 바꿔말하면 어떤 상황이든 연홍이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이기도 했다. 연홍 련이 쓰러져 청명이 데리고 왔을 때도 그녀는 예의 무심한 얼굴로 처소를 가리켰다.

-넝마 같은 꼴로 돌아다니지 말고 당장 저 쪽으로 가도록 하세요. 택아, 여벌 옷과 면포 챙겨서 안내해드려라.

엄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린 그녀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동생에 대한 걱정도, 망설임도 없었다. 매정하다 느낄 만큼 가벼운 발걸음이었지만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인상을 구겨 상황을 보던 연홍 화는 주변을 살피다 지휘부를 찾아 방장 대사에게 부채를 펼쳐 귓속말을 한다. 고개를 끄덕인 방장에게 허리 숙인 연홍 화는 맹주로서 지휘를 하는 걸 지켜보다 발걸음을 옮긴다. 부채 너머로 시선이 마주쳤을 때, 휘어진 제비꽃 눈동자가 자신을 보고 웃자 청문은 미미하게 눈이 흔들렸다. 그건 안심시키는 미소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지켜보라는 암묵적인 의미이기도 했다.

‘그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다는 게 가능한 것인가.’

연홍 련의 상태는 한눈에 봐도 위험해 보였다. 허리와 허벅지에 박힌 바늘들과 그녀에게 나온 피인지 구분하기 힘들 만큼 하나의 핏덩어리처럼 보였다. 청명 역시도 피를 많이 뒤집어 귀신같은 몰골이었지만 지나가는 길마다 피가 점처럼 바닥에 묻어났다.

‘걱정이구나. 소가주도, 청명 그 아이도.’

연홍 화의 말따라 청명은 암존과 함께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처음은 강렬했을지라도 다른 사상자들이 나오다 보니 뒷전으로 밀리게 되었다. 그것이 그녀 나름의 걱정이었던 걸까. 소가주의 상태는 세가에 있어 예민한 문제이니 가주로서 빠른 판단을 했다고 생각한다. 생각이 꼬리를 물던 청문의 처소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셔도 됩니다.”

“실례하지요.”

들려온 나긋한 목소리와 격식을 갖춘 화려한 궁장이 눈에 들어왔다. 부채를 살랑이는 손가락과 틀어 올린 비녀가 한눈에 봐도 고아한 신분이라는 분위기를 감추지 않는다. 청문이 당황한 얼굴로 보고 있자 도도하던 얼굴이 반달처럼 눈을 휘며 웃는다.

“좋은 밤입니다, 청문진인.”

연홍세가의 가주, 연홍 화가 인사하니 청문은 뒤늦게 포권한다. 방금 전까지 생각하고 있던 여인이 제 눈앞에 나타나 인사가 늦었다.

“아... 좋은 밤입니다, 가주님. 어쩐 일입니까?”

연홍 화는 대답 대신 청문을 물끄러미 본다. 청문은 침의를 입고 긴장한 기색으로 보고 있자 팔짱을 끼며 보던 그녀는 고개를 기울이다 이해가 안되는 듯이 말한다.

“치료를 안 받는 환자가 있어서 말입니다. 금창약도 분명 드렸던 거 같은데.”

청문은 멈칫했다. 자신도 나서서 마교를 막았지만 제자들을 먼저 챙기느라 제 치료를 뒷전으로 미루었다. 부대마다 연홍의 사람이 배치된 덕에 화산의 현자배들이 치료를 받고 있었고 그 중엔 청명도 있었다. 알아챘다간 분명 그 아이는 길길이 날뛰었을 것이다. 정인이 다쳐서 심란한 아이한테 자신까지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심한 것도 아니었기에 스스로 치료해 둘 생각이었다.

“다친 제자들 앞에서 제가 티 낼 수는 없잖습니까. 가벼운 상처입니다.”

“경증인지 아닌지는 제가 판단할 테니 그 옷부터 벗으시죠.”

부채를 접어내 정리한 연홍 화가 가까이 다가가자 뒤로 주춤한 청문은 연홍 화의 어깨를 잡았다 금방 손을 놓았다. 움직임을 막아내려던 게 강하게 붙잡은 것 같았다. 멈춰 선 연홍 화는 무심한 표정으로 팔짱을 껴 묻는다.

“안 벗으실 겁니까?”

“……그리 보고 계실 거요?”

항상 쓰고 있던 도관을 벗은 반듯한 얼굴이 난감해하는 게 보였다. 장문인쯤 되는 이들이라면 같은 배분인 장로나 의약 당주에게 도움을 받거나 할 수 있겠지만 부상자의 수를 파악하고 있던 연홍 화는 그가 도움을 구할 사람이 부족하다는 걸 알아챘다.

‘나야 의원이니 벗은 몸을 보는 거야 아무렇지 않다지만..’

편의와 별개로 그를 존중해주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가만히 청문을 보던 그녀는 어깨를 한번 으쓱이고 창밖으로 몸을 돌린다. 부산스럽던 경내도 지금은 사람의 자취를 감추어 횃불을 들고 있는 경비만 드문드문 다닐 뿐이었다.

“이 방에선 달이 잘 보이군요. 잠들기 아까울 만큼.”

자연스레 말을 돌리는 연홍 화의 뒷모습을 보다 한숨을 쉰 청문은 그 틈에 옷을 갈아입는다. 연홍 화에게 다가간 그는 어깨너머로 팔을 뻗어 창문을 닫아낸다.

“…밤공기가 서늘합니다, 가주님. 염치 불고하지만 치료를 부탁드려도 되겠소?”

창호지 너머로 새어 나오는 달빛이 스며든 밤이다. 연홍 화는 고개만 기울여 뒤에 있는 청문을 본다. 촛불을 등지고 있어 드리워진 그림자가 시야를 덮고 있지만 이 거리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는 아니다. 선한 인상의 얼굴에 멋쩍은 시선을 마주하던 연홍 화는 순순히 눈꼬리를 휘어 웃는다.

“청문진인 부탁이라면, 들어드려야죠.”

몸을 완전히 돌린 연홍 화의 손이 청문의 머리카락을 귀로 넘겨 살핀다. 치료를 위해 침의를 정리하고 상반신을 드러낸 청문은 석상처럼 자리에서 멈춘다.

늦은 시간이긴 해도 밖에는 사람이 다니고 할 테니 연홍 화에게 괜한 소문이 돌게 하고 싶지 않아 창문을 닫아냈지만 가까워진 거리가 새삼 신경 쓰였다. 의료단에서면 모를까 장소가 달라졌을 뿐인데 자꾸만 얼굴이 홧홧해진다. 배려한다고 한 행동이었는데 도리어 자신이 밀어붙인 자세가 되었다.

‘신경... 쓰이진 않으신 건가.’

움직임을 가로막은 건 아니라 얼마든지 제 곁에서 나올 법한데도 연홍 화는 그 자리에서 어깨를 잡고 옆구리에 감긴 붕대를 콕콕 건드리고 있을 뿐이었다. 의원에게 상처를 보이는 게 이리 긴장할 일이던지. 평소엔 탕약과 태워낸 약재 냄새로 그을린 향이 나던 사람에게서 코가 삐뚤어질만큼 달큰한 장미 냄새가 났다.

“처치를 안 한 건 아니나, 소독은 제대로 하신 겁니까?”

“……기본적인 부분은 할 수 있소. 예전엔 사형제들도 제가 해줬으니 말입니다.”

연홍 화는 납득했는지 더 묻지 않았다.

매화검존만 봐도 그는 다쳐서 오지 않는 날을 세는 게 손에 꼽을 만큼 부상이 잦은 환자였다. 의원으로선 최악의 환자이지만 그의 치료는 제 동생이 전담하고 있으니 경험 쌓기엔 더없이 좋은 상대이기도 했다. 어지간히 질기고 튼튼한 젊은 무인의 몸은 꽤 귀중한 자료니까. 덕분에 그 아이의 치료 솜씨는 날이 갈수록 빠르고 정교해졌다는 걸 제 눈으로도 알 수 있었다.

넘겨낸 청문의 머리카락을 제 쪽으로 돌려놓은 연홍 화는 그에게 나와 등에 타박상을 입은 걸 발견한다.

“여기만 해결하면 되겠습니다.”

다부진 등 위로 연홍 화가 손을 얹는다. 부드럽고 따뜻한 기운이 등을 어루만지듯 감싸내니 멍이 있던 자리가 옅어지며 말끔해진다. 치료를 끝냈음에도 연홍 화는 청문의 몸을 살핀다. 어깨가 넓은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리 보니 그가 무인이라는 걸 새삼스럽게 느낀다. 등에 잡혀있는 근육들이 보기 좋게 자리 잡아 탄탄하다는 느낌이었다. 심미적으로 봐도 괜찮은 몸이라는 생각을 끝낸 연홍 화는 등을 한번 쓸더니 탁 두드린다.

“끝났습니다, 청문진인.”

“아... 그... 감사합니다, 가주님.”

연홍 화의 말이 끝나자 빠르게 거리를 둔 청문은 개어놓은 침의를 도로 입는다. 이 사람이랑 있으면 도통 모르겠다. 심장이 울렁거리다 못해 긴장되는 게 단순히 분위기 때문인 건지 정말 이 사람에게 연심이라도 가진 건지 고민되었다. 매무새를 정리한 청문이 몸을 돌려 시선이 마주치자 연홍 화는 고개를 숙인다.

“그럼,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지요.”

“아까-방장대사께 무슨 얘기를 했던 것이오?”

침착하게 물어보았지만 청문은 금방 후회했다. 미련 없이 가려는 발을 붙잡으려니 튀어나온 게 일 얘기라는 게 부끄럽다. 그녀는 옷차림 때문에라도 시선을 집중시키기에 남들보다 수월할 사람일 텐데 방장을 앞세워 지휘를 맡기더니 홀연히 자리를 비웠다. 걱정했다는 걸 알면 부담스러울까. 고개를 든 연홍 화는 무덤덤한 눈에서 곧 심드렁한 기색을 보인다.

“방장께서 해야 할 일을 얘기했을 뿐입니다. 정신을 못 차리는 거 같길래. 맹주가 그래서는 아니 되지요.”

“가주님이 무모한 분은 아니라는 건 알지만 참으로 비밀이 많으십니다. 노리는 게 있는 겁니까?”

연홍 련의 무위가 드러나면서 그들은 연홍 화도 비슷하거나 혹은 그 이상일 거라 짐작했다. 밧줄에 묶여 손가락이 부러진 채로 게거품을 물고 정신을 잃은 무사를 데려온 연홍 화는 말했다.

-이 자를 심문하면 뭐라도 나오겠지만 저는 본보기는 하나로 충분하다 생각됩니다만.

배신자를 색출하는 건 중요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수습을 하기에도 정신없는 상황이었다. 연홍 화는 혼란을 부추길 바에 조용히 묻어두길 권고했고, 그들은 암묵적으로 받아들여 이 문제는 의료단 관계자와 장문인들만 알고있었다.

연홍 화에 대한 의심도 나왔지만 그녀는 잡아낸 무사에 대한 처분과 심문을 그들에게 넘김으로써 용의선상에서 제외되었다. 청문은 그녀가 배신자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녀가 정말 배신자였다면 사실 자체를 숨기거나 잡아 온 증인을 입막음한다던가 방법은 얼마든지 많았을 테니까.

“…청문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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