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덕문
다이스 합작(2)
송덕문
데이지 버킨은 나쁜 엄마였다.
말하자면 그랬단 소리다. 조이스는 언제나 어머니를 사랑했다. 비록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더라도, 온갖 성가신 일을 어린 양자에게 넘기는 부류더라도. 때리거나 내다 팔지는 않았으니까.
오늘 데이지가 죽었다. 학기 말 파티 날이었다.
이어서 방학이 예정되어 있는, 평온한 나날이었다. 딜런은 무도회 생각에 신이 난 것 같았다. (조이스 생각에는 그랬다.) 조이스는 딜런의 옷매무새를 만져주고, 오랜만에 실크로 지은 고운 정장을 차려입었다. 포인트라고는 코사주밖에 없었지만, 온실에서 구해온 생장미는 오히려 죽은 낯빛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딜런은 언제나처럼 아름다웠다. 조이스는 포도주가 담긴 크리스털 잔을 내밀었다. “마셔. 목마르지?” 딜런이 간만에 진심으로 즐거운 모양이라, 조이스도 기분이 붕 떴다.
파티 분위기가 소년들의 잔에 술을 탔다. 공개적으로 여자애들과 짝을 지을 수 있었지만, 조이스는 누구에게도 춤을 신청하지 않았다. 딜런과 벽에 기대어 선 채 음료를 홀짝일 뿐이었다.
‘이대로 있을까.’
딜런이 흘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조이스는 그게 뭘 요구한다는 건 알았는데,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아 망설였다. 다른 음료수가 마시고 싶은가? 레모네이드, 탄산? 아니면 슬슬 핑거푸드를 집어 먹고 싶은가?
그가 몸을 바로 세우고 음식 테이블로 향하려고 할 때였다. 곁에서 딜런이 옷깃을 붙잡았다.
“형.”
“응?”
조이스는 즉시 다정한 형제처럼 대꾸했다. 친우들이 들으면 놀랄 만큼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뭐, 이미 이런저런 조롱거리가 된 참이긴 했다. 그중에는 재산을 이용한다는 글러 먹은 소문도 있었고……,
어쨌든 조이스에겐 딜런이 중요했다. 데이지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데이지와 딜런은 조이스 인생에 개입한 유이한 인간이었다. 영향력을 끼쳤다는 점에서 그랬다.
‘가족이니까.’
그는 발그레 상기된 동생의 얼굴을 박박 쓰다듬어주었다. 뺨에 꽃잎 같은 혈색이 돌자 귀여워 보였다. 피식 웃는데,
뒤에서 누군가 어깨를 잡아당겼다.
얼굴이 익었다. 기숙사 사감이었다. 조이스는 사감인 맥밀런 ‘경’을 좋아하지 않았다. 늘 음침한 눈으로 아이들을 훑어보았기 때문이다.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는다거나, 무감한 표정이라거나, 과묵하다는 점은 오히려 장점으로 꼽을 수 있겠지만, 조이스는 밑바닥을 찍은 사람들의 시선이 싫었다. 끌려들어 갈 것 같아서.
어쨌든 맥밀런 경은 둘을 불러냈다. 샹들리에 밑에서 빠져나오자 영국에 걸맞은 칙칙한 날씨가 둘을 반겼다.
슬슬 겨울의 냄새가 났다…….
장례식장은 텅 비어 있었다. 재산에 걸맞은 규모를 가졌긴 했지만, 데이지의 내적 자산이 그리 알차지 않았다는 방증이었다. 조이스는 예상했다는 듯 겸허히 자리를 지켰다. 하룻밤 식장에 안치한 후, 아침을 챙긴 후 바로 성당에서 출발할 예정이었다.
데이지는 신을 믿지 않는다. 그래도.
조이스는 누구든 간에 자신의 ‘어머니’를 굽어보고 있길 바랐다. 타락한 천사의 나발 소리조차 없다면, 가는 길이 너무 고달프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에서 조이스는 식장에 축음기를 가져왔다. 데이지가 좋아한 음반 몇 개를 관에 함께 넣고 묻을 생각이었다.
“조이스.”
딜런이 불렀다. 이 애는 어쩐지 울지도 못했다. 그렇게 커버린 거야, 라고 조이스는 생각했다. 옷깃을 붙드는 버릇을 버리지 못한 동생에게, 조이스는 다정하게 대꾸했다.
“졸려?”
“아니. 그냥. 형은?”
“나도 그냥 그래. 밤새 있을 거야.”
“아까 있잖아, 변호사가.”
유언장 이야기였다. 조이스는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기분으로 앉았었는데, 노회한 변호사는 쉬엄쉬엄 낭독했다. 목록이 상당히 길었고 전하고자 하는 바는 짧았다. 유산은 거의 딜런의 것이다. 그게 두려운 걸까? 조이스는 딜런의 동그란 머리통을 슥슥 쓰다듬었다.
그가 물었다.
“무서웠어?”
“그건 아닌데, 형이 가진 건 너무 초라해.”
“아니야. 출판사도, 고용인들도 누군가는 관리해야지.”
“우린 둘 다 자식인데 왜 가진 게 달라? 같이 해야지.”
“그러니까… 우리가 어른이 되면.”
“난 애가 아닌데.”
짐짓 토라진 목소리로 딜런이 말을 막았다. 어른들 세상이라느니 어쩌니 하는 건 또 조이스의 버릇이었다. 딜런이 계속 말했다.
“음악 틀자. 응?”
“여기서?”
“아무도 없잖아, 삼촌도 갔고.”
자칭 삼촌이라는 작자는 사실 팔촌이었다. 조이스가 빵과 비싼 술 한 병을 품에 챙겨주고 돌려보냈다. 어차피 딜런에게 가야 할 것들을 탐내러 온 개자식이었다.
조이스는 대답 안 하고, 베토벤이 담긴 바이닐 하나를 전축에 올렸다. 음반이 돌아가자 조심스럽게, 가느다랗고 섬약한 침을 맨 끝 테두리에 얹었다. 바늘이 바이닐을 긁어내며 지직대다가 세상을 집어삼켰다.
적어도 바로 앞에 있었던 조이스는 그렇게 느꼈다. 그는 아무리 해도 이 음악을 좋아할 수가 없었지만, 데이지와 딜런이 음악을 청하다가 잠에 드는 광경은 좋아했다. 자장가로 이루어진 부드러운 밤.
딜런이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았다.
“내가 가진 거, 전부 형 거야. 알지.”
“글쎄.”
“슬퍼?”
“음, 아니. 아마도.”
“울고 싶은 게 아니면 춤추자.”
딜런은 두 손을 마주 잡고 빙글빙글 도는 걸 좋아했다. 언젠가 정원에서 그러다가, 조이스가 딜런을 들어 올려 안는 순간 데이지가 비명을 질렀다. 아이가 떨어지면 어쩌냐는 거였다. 그 뒤로 조이스는 그런 짓은 안 했다. 데이지는 언제나 신경이 약했으니까.
데이지, 데이지, 데이지.
너는 늘 그 생각뿐이지.
강렬한 단조가 그의 머릿속을 내리찍었다. 도끼에 팔이 잘린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딜런이 그의 힘없는 손을 끌어서 빙글빙글 돌았다. 조이스는 가만히 잘린 팔을 내주고, 위로 들어주고, 꼭두각시처럼 홀로 춤추는 소년을 보다가, 제 동생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가 말했다.
“딜런. 난 슬퍼.”
“…….”
“너무 슬퍼. 이제 나한텐…….”
딜런은 키가 많이 컸다. 이제 어깨를 맞댈 수 있을 정도였다. 몸집은 한참 작아서, 민들레 씨앗처럼 불면 날아갈까, 싶은데.
딜런이 슬며시 웃음소리를 흘리며, 조이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 애가 속삭거렸다.
“이제 우리뿐이네.”
“……그래. 나한테….”
“아쉬워?”
“…….”
딜런이, 어딘가 어긋나 있다는 건 조이스도 잘 알았다. 하지만 지적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미안해.”
이런 말에 억장이 무너지고 마니까.
작은 소년이 대체 뭘 미안해야 한단 말인가? 세상은 항상 가혹했다. 딜런보다 사악한 인간군상을 봐온 조이스에게, 동생은 사랑스러운 천사였다. ‘나만 사랑해 주는.’ 나에게 있어 주는… 이 특별한 울림이, 그의 정신을 마비시켰다.
귓속이 멍했다. 조이스는 음악에 묻히길 바라면서 중얼거렸다.
“가면 안 돼, 딜런.”
어디로든.
장난감을 망치고, 친구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어머니는 이제 없으니까, 나는 네게 튼튼한 목마를 사주고 하루 종일 안아줄 수도 있어, 그러니까 너는 이렇게 떠나가면 안 돼. 허망하게. 시름시름 앓다가, 맥이 죽어버리면 안 돼.
“응. 약속해.”
딜런이 말했다. 소년은 조이스의 뺨에 제 볼을 비비다가, 문득 시선을 들어 올렸다. 병균처럼 붉은 안광을 가려주던 속눈썹이 들리자, 소년의 눈동자는 어딘지 사이해 보였다.
그는 천장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거기에는 나팔 부는 천사가 있었다. 딜런은 웃던 입매를 천천히 내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봐, 이건 내 거야. 데이지. 당신이 애쓴 것들이 효율적이진 않았지.’
그들은 아직 연회복을 입고 있었다. 아마도 내일 아침까지.
데이지는 나쁜 엄마였고, 방학 동안 그들은 평화로울 예정이었다. 딜런은 여행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어디든 좋을 것이다. 함께 있다면. 조이스에게서 슬픔을 걷어낼 수 있다면.
‘형이 좋아하는 건 나니까. 풍경이나 채광 따위가 아니라, 나야. 보여, 데이지? 눈치 없는 당신이 키워준, 완전한 내 마음이야…….’
아무래도 지옥은 시끄러울 거였다. 음악이 멎었다.
가슴팍의 장미가 시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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