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sley, Sage, Rosemary and Thyme
다이스 합작(3)
Parsley, Sage, Rosemary and Thyme
여름날이 화창했다.
저택에 당도한 뒤로 바쁘게 움직였기 때문에, 조이스로서는 오랜만의 휴가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곳을 뜨지는 않는다. 그가 상속받은 유산은 출판사 하나, 그리고 몇몇 개의 보석상과 부티크. 전부 세심한 관리가 필요한 것들이다. 게다가 사교계와 가까운 만큼 그는 사내로는 드물게 살롱 출입이 허가되어 있었다.
지독한 분내와 손이 메마르는 천 옷에서 해방된 첫날. 기념할 만큼 높은 정오에 그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도련님은 잘 있나.’ 그리고 하녀를 도와 빨래를 널었다.
근래 같이 시간을 보낸 적이 거의 없다. 조이스가 런던 안팎을 바쁘게 움직이는 시간만 해도 다른 사람의 노동시간보다 조금 길었다. 과연 육체노동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편하긴 했지만, 돌아오자마자 집안을 돌보아야 하는 집사 비슷한 처지에서 몸을 놀리는 건 사치였다. 다행스럽게도 모든 일이 조이스에게는 간접적으로나마 익숙했다. 유행을 좇는, 고풍스러운 차림의 여성과 그 발을 닦아주는 사내 같은 것…….
물론 딜런은 싫어했다.
“형.”
딜런이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조이스의 방에 앉아 있었다. 표정이 못마땅했다. 조이스는 객실을 빌려 쓰며 자주 바깥에서 숙박했는데, 덕분에 방 안의 공기에서는 사람 내가 나질 않았다.
조이스는 곁으로 가서 가만히 앉았다. 침대가 이쪽으로 조금 더 기울어졌다.
어째선지 딜런은 살이 빠지고 있었다. 드러난 손목과 발목에서도 그것이 여실히 보였다.
조이스가 말했다.
“왜.”
“뭐 하다 들어온 거야?”
“응, 뭐. 집안일들.”
“그까짓 거 형이 왜 해.”
“평소에는 집안을 못 돌보잖아.”
“…….”
“바쁘니까.”
“역시 다 팔아버리자.”
예의 출판사, 부티크, 보석상 등등의 이야기였다.
변호사가 낭독해 준 유언장을 해설할 적부터 딜런은 찡그린 얼굴이었다. 졸업하기까지 계속, 그런 것들 전부 팔아버리자고, 그리고 둘이서 편하게 살자고 얼마나 징징댔는지. 그럴 때마다 조이스는 달래느라 애먹었다.
우리 어머니의 유산이다, 의지이기도 하다, 사자의 의지를 배반했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딜런은 그런 미신 따위 믿지 않는다고 말대꾸였다. 조이스는 그 시절처럼 쓰게 웃으며, 동생의 이마를 쓰다듬어 주었다. 부스스한 머릿결과 가벼운 머리뼈가 느껴졌다.
“요새 내가 아파.”
딜런이 말했다.
“몸도, 발도, 그리고 밤마다 가슴이 갑갑해. 그런데 형은 옆에 있어 주지도 않고.”
“의사를 불러 줄까?”
“됐어…….”
바라던 말이 아니었나 보다. 조이스는 머쓱하니 얼굴을 쓸어내렸다. 달래는 법이야 알고 있지만, 직접 말 꺼내기에는, 이 나이 먹고 낯간지러웠다.
흘긋 딜런을 보니 무진장 기대하는 낯이라, 어쩔 수 없이 한숨을 토해내고, 이렇게 물었다.
“오늘은 같이 잘까?”
눈을 반짝인 동생이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여름철인데도 이 애는 들러붙는 걸 좋아했다.
생각해 보면, 이제부터는 숨 돌릴 만큼은 느긋해질 것이다. 그러면 학생 때 약속했던 것들, 여행이나 피크닉을 함께 해도 좋겠지. 하다못해 코벤트 가든에서 연설을 듣는대도 딜런에게는 새로울 테다.
딜런은 집 밖으로 도통 나가질 않았다. 하고 싶은 일이 있냐고 물으면 글쎄, 하고 말을 돌렸다. 나쁘지 않은 성적으로 졸업했건만 도통 꿈이 없어 보였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데.
뭐든 하게 만들어 줄 텐데, 나라면.
조이스는 내심 속상했으나 티 내진 않았다. 의연하게 굴면 언젠가 활기를 차리려니 기대할 뿐이다.
그나마 회화에 흥미를 보이기에 선생을 붙여 주었다. 바깥일로 바쁘기만 하건만 딜런은 도통 조이스가 뭐든 ‘해 줄’ 틈을 보여주지 않아서, 그는 내심 서운한 상태였다.
그래도 가족인데.
그래도 형제인데, 어째서 다른 집처럼 싸우고 화해하고 하질 않는지.
무엇에든 숙이고 마는 조이스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그는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딜런이 얌전한 탓이라고.
문득 조이스가 입을 열었다. 등 뒤, 침대맡 창가에서 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등이 따뜻하게 달아올랐다. 몸이 데워지고 있었다. 더위 먹을지도 모른다, 싶어서 조이스는 딜런을 끌어 테이블 앞에 앉혔다.
“차라도 내오게 할까?”
“응.”
딜런은 조이스가 등 돌려 가버리기 전에, 얼른 끄나풀을 당겼다. 붉은 끈 끝에서 희미하게 딸랑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곧 기다렸다는 듯, 집안의 유일한 하녀가 쟁반을 내왔다. 데이지가 좋아하던 은화처럼 오래된 쟁반.
히비스커스 향기.
조이스가 분홍빛 찻물이 든 유리병을 들어서 잔 두 개에 따라놓았다. 딜런은 무심하게 들어 마시면서도 조이스를 쭉 올려다보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형은 매일 그런 말을 해.”
“응?”
“의사 불러 줄까, 산책 갈까, 같이 잘까, 달콤한 것을 사다 줄까… 매번 같은 레퍼토리잖아.”
“……싫어?”
“아니. 좋아. 하지만.”
조이스는 눈을 끔뻑이며 자리에 앉았다. 딜런이 수줍은 듯이 말했다.
“난 그냥, 형이 옆에 있어 주면 좋겠는건데.”
“미안해. 다음에 시간 나면, 둘이서만…….”
조이스는 이어질 말을 찾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그는 ‘둘이서만’ 해야 하는 일들이 뭔지 잘 몰랐다. 소풍도, 여행도 그다지 특별하진 않았다. 그는 늘 형제와 함께였으므로.
그러니 이 말조차 식상하게 느낄지 모른다, 하는 생각에 그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이런 마음마저 예상했다는 듯 딜런이 슬며시 웃었다. 냉차 속에서 얼음이 다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둘이서만 바다 가자.”
딜런이 말을 마쳐주었다.
조이스는 얼음이 녹아 물 같아진 차를 벌컥벌컥 마셨다. 과육 껍질이 덜 걸러졌는지, 입안에서 쓰고 신, 떫은맛이 느껴졌다. 언제나 그렇듯 조이스는 찡그리지 않고 그 순간을 견딜 뿐이었다.
그리고,
의사는 무명을 꺼내 땀을 닦았다. 고집 센 데이지를 평생 돌봐온 의사는 이제 노환이 왔는지 말이 느렸다. 여전히 여름이었고 그가 비지땀을 흘리는 까닭은 더위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조이스는 기도하듯 두 손을 깍지 낀 채 그의 앞에 앉았다.
응접실 안에서는 깨끗한 백합 향내가 풍겼다. 데이지가 죽고 나서 장미 묘목을 모조리 베어버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친과 같은 병입니다.”
의사는 망설이지 않았다. 날이 덥네요, 하는 것처럼.
조이스는 잘 들리지 않았던 것처럼 침묵을 고집했다. 의사가 군소리를 보탰다.
“그 입매만큼은 모친분을 닮으셨군요. 버킨 씨.”
“뭐라고 하셨죠?”
“질환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아시겠지만, 이건 신경증적인 ‘증상’일 뿐이니까요. 마약성 진통제가 도움이 될 겁니다. 하지만.”
의사는 이제야 뜸을 들이기 시작했다.
“모친의 경우를 보셨으니, 추천해 드리지는 못하겠군요.”
데이지는 앓다가, 자신이 앓는다는 것도 모르고 죽어갔다. 그 꼬락서니를 두 번 다시 보라는 소리였다.
백합, 장미, 양귀비, 데이지……. 어째서 자신의 삶이 어울리지 않는 꽃으로 점철되어야 하는지, 조이스는 알지 못했다. 신이 있다면―이 장난에 퍽 공을 들여야 했으리라.
그는 서랍 속에 놓아둔 지 오래된 로사리오를 떠올렸고 그조차 산호를 조각한 장미 모양인 것에 넌더리를 냈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자 그것을 슬픔으로 분간한 의사가 인자하게 말했다.
“어디 좋은 데서 요양하며 보내십시오. 제가 드릴 조언은 그뿐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들은 찻자리를 조금 더했고 불편한 침묵이 이어지기 전 파했다. 의사의 재킷을 챙겨 걸치는 걸 도와주면서, 조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다시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의사는 별말 없이 돌아섰다. 이제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로런 씨가 뭐래?”
딜런이 쉰 목소리로 물었다.
최근 들어, 조차 아니고 한 달 전부터 딜런의 몸이 급격히 쇠약해졌다. 하녀가 우물쭈물 털어놓은 바에 의하면 봄부터 끼니를 자주 걸렀다고 했다. 하루에 먹는 것이라고는 조이스와 함께하는 소박한 밤참이나, 그가 들고 온 단 음식뿐일 때도 있었다고.
제 손가락을 쥐어짜듯이 하며 안절부절못하기에 조이스는 별말 없이 그녀를 격려했다. 마음은 지옥이었다.
“그냥, 좀 쉬래. 피곤해서 그렇다고.”
“별거 아니네.”
“그래. 한동안은 네 곁에 있어야겠는데.”
“싫어?”
딜런이 웃었다. ‘싫지 않지?’라고 묻는 듯한 표정이어서, 조이스는 미간을 펴고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동시에 자신이 꽤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미 다 눈치챘을 것이다.
딜런은 기민하니까. 그래도, 조이스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좋아.”
“거 봐… 다 정리해 버리라고 했잖아. 그깟 번잡한 일들은.”
품이 큰 셔츠 속에서 삐져나온 두 손목이 가느다랗다. 큰 옷을 입은 게 아니다. 그간 마른 것이다. 조이스는 동생의 손등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여상하게 정원 일을 이야기하면서 생각했다.
‘신이시여, 빌어먹을 그 힘을 가지고 있다면, 저를 방해하지는 마십시오. 얌전히 있는 게 당신 일이 아닙니까?’
몇 년간의 기숙 생활도 그의 무신론을 고쳐 놓지는 못했다. 학교에서, 교리란 곧 맛대가리 없는 감자 껍질 수프와 딱딱한 빵 한 덩어리였다. 은혜가 고작 이런 것이라면 평생을 믿지 않겠노라 다짐한 것도 그였다.
인간의 품위가 이런 것이라면 차라리 굶고 말겠다는, 귀족적인 자의식이 어느새 자라났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간 그는 차석으로 졸업했다. ‘학교의 명예를 드높이며’.
이틀 뒤 조이스는 홀로 외출했다. 수면제를 진통제로 속여 동생을 재우고 난 뒤였다. 그는 얇은 외투를 걷고 번쩍이는 회중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유리알 너머의 분침은 약 오십오 분경, 돌아올 때는 자정을 넘길 것이다. 딜런은 잠이 들겠지.
학교의 명예를 더럽히고 싶었던 건 조이스 혼자만이 아니다. 대다수 학생은 의욕 없이 졸업 연설을 들었다. 차석인 그는 수석이었던 알베르와 경계 어린 친분을 나누었는데, 그는 집안에 들볶이느라 십 대에 새치가 반인 소년이었다.
연설 직전에, 강단 뒤에서 둘은 짧게 이야기했다. 알베르는 이렇게 말했다.
‘넌 내가 필요할 때가 올 테지. 내게도 그렇고.’
‘무슨 뜻이야?’
‘모르는 척하지 마, 너나 나나 괴짜잖아.’
‘글쎄.’
‘이미 피난처는 정해뒀어. 주소를 줄 테니 언제든 찾아와. 그리고, 내가 이 주소를 통해 널 찾는다면, 무슨 이름을 달고 있든 도와줄 거라고 약속해.’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너는 평생 그 등신 같은 부르주아 생활을 계속할 테니까. 넌 자유를 빌릴 수 없지만, 나는 돈을 빌릴 순 있겠지.’
초승달처럼 야윈 미소가 선하다.
삼 년 뒤 조이스는 야간열차를 예매했다. 예정된 일이었을까? 아니면, 이것 또한 불온한 신의 안배일까?
이런 상념은 알베르를 만나자마자 지워야 했다. 그는 꽤 번듯한 시설에 살고 있었다. 그래, ‘시설’이다. 저택이나 집과 같은 목가적인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기이함이 거기 있었다…….
어둠 속에서 하얀 가운이 시퍼렇게 빛난다. 양고기를 썰 때 쓰는 칼날 같은 서슬이다. 알베르는 잡목림 속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낯선 잎향기가 났다.
“알베르. 알베르 ■■■■.”
“누구지?”
장난기 어린 대답이다. 알베르가 일어서서, 담배를 떨어뜨려 밟으며 조이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직 다가가기 전이라 둘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이스가 이 손을 잡으리라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물론 조이스는 악수를 나누었다. 그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지언정 신을 향해 고개를 주억이지 못하는 부류의 인간이다. 내면의 타향, 가슴 속의 부랑아는 쉽게 죽지 않는다.
그것이 뒤늦게 그의 영혼을 살라 먹고 있었다. 꺼져가는 담뱃불처럼.
“피울래?”
알베르가 건넸다. 상표 없는 종이갑 안에 가지런히 만 담배가 놓여 있었다. 조이스는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계속 말하는 건 알베르였다.
“전보 받았어. 가지.”
그들은 굴속으로 내려갔다. 첨탑을 거꾸로 한 것처럼 깊고 스산한 계단은 먼지가 잘 닦이지 않아서, 징 박은 구두를 미끄러뜨릴 뻔한 게 수 번이었다. 그 짓을 다섯 번째쯤 했을 때 조이스는 약 냄새를 맡았다.
희미하게 풍기는 것은 독을 끓인 증기처럼 폐부를 찌르는 쓴 냄새.
‘약과 독은 같은 극이지.’ 학창 시절 알베르는 말했다. 그때의 그는 의사보다는 연금술사 같았다.
조이스는 주변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연금술사를 졸업했다면, 지금은 뭘까. 지구가 돈다?
높은 별처럼 아릿한 빛이 깜빡거린다. 알베르가 몇 마디 자랑스레 떠벌였지만, 조이스의 시선은 규칙적인 소리를 내는 회색 스크린이 아니라, 조악한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구속 장치에 가 있었다. 그는 이런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소문 나쁜 치과 의사의 침대처럼 사람을 눕히게 만든 기구였다. 그러나 다리를 받쳐야 할 부분이 두 갈래로 나뉘게 되어 있었다. 지금은 가지런히 다물어져 있지만, 질기다 못해 단단해 보이는 가죽과 말 재갈 같은 버클이 달려 있었다. 지금껏 여러 사람을 묶어 보았는지 벨트 구멍이 좀 헤져 있었다.
양팔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몸보다 높은 팔걸이 위에도 마찬가지로, 마구를 개조한 듯한 수갑이 묶여 있다.
“누워.”
탁, 소리가 났다. 알베르가 어딘지 미끈해 보이는 장갑을 공들여 손에 끼우고 있었다.
조이스는 천천히, 검은 재킷을 벗었다. 그대로 몸을 뉘려는데 알베르가 지적했다. “시계, 넥타이, 구두, 전부 벗어. 속옷 제외하고 빠짐없이. 가능하면 속옷도 벗어.”
“농담이지?”
“네 동생 목숨 가지고 농담하겠어?”
그 말을 남기고 알베르가 마스크를 끌어 올렸다. 흰 두건 너머에서 그가 웃을지 어떨지는 모르는 일이다.
발목과, 오른쪽 손목을 꽉 조이는 느낌. 손가락 한 마디쯤의 공간을 남겼다. 왼손마저 묶기 전에 조이스는 손목을 들어 올렸다. 알베르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인제 와서 후회하느냐고 묻는 듯한 눈빛에 조이스는 피식 웃었다.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담배. 한 대만 빌리자.”
“……뭐, 좋아. 처음부터 내가 권했으니.”
그들은 담배를 피웠다.
연기 속에서 약물이 주사되기 시작했다. 굵은 철제 바늘이 살갗을 뚫는 건 꽤 아팠다. 알베르가 말했다.
“졸리지는 않을 거야. 나른해질 뿐이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자, 친구. 내 실력을 믿어 보라고. 지금까지 피험자는―”
의식이 늘어졌다. 그는 고장 난 엘피판처럼 들리는 목소리에 집중하기를 포기했다. 시간이, 아주 길게 느껴졌고 그는 환하고 밝은 공간에 있었다. 그럴 리가― 그가 걸어 내려온 계단의 수를 가정하면 이렇게 밝을 리가 없다.
환할 리가 없다.
암막이 눈 앞을 가리고 있다. 피처럼 빨간 커튼의 속살을 보며 나는 가슴을 졸였다. 이 앞에 약 사백명 가량의 졸업생, 그리고 팔백 명 이하의 기숙생들이 도열해 있을 것이다. 안은 덥다. ‘아니, 밖이라 해야 하나’라고 생각한다. 곁에 선 수석이 뾰족한 팔꿈치로 옆구리를 툭툭 치고 있다. 이름이 뭐였더라, ‘야, 너.’ ■■■■가 말했다. 그는 테가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는데 지금은 교복 셔츠로 그 안경을 닦고 있다. 이게 왜 보일까, 이렇게 어두운데. 갇힌 듯 갑갑한 이곳은 기름 등 하나 없다. 만에 하나 엎질러지면 큰 사고가 벌어질 테니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탁, 하고 초가 켜진다. ■■■가 손을 탁 튕기더니 공중에 띄운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모르는 체하지 마, 너나 나나 괴짜잖아. 너는 등신 같은 부르주아 인생을 살겠지. 계속, 계속, 녹조류가 잔뜩 낀 풀장이야 거긴. 이 등신아.’ ■■■가 웃는다. 나는 그가 왜 웃는지 알 수 없다. 바깥에서―아니 저 안에서는 교장의 연설이 끝나간다. 누군가 손뼉을 잘못 쳤는지 딱, 하는 소리가 울린다. 딱 한 번. 교장이 한 번 숨을 가르고 헛기침한다. 그들은 침묵에 동조하며 아무 소리 없이 나머지 연설을 듣는다. ‘등신 새끼.’ ■■■는 계속 주절거린다. 나는 상관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공부병에 걸린 듯이 기숙사에 틀어박혀 있다가 머리가 돌아버렸다. 그래서 새치가 반 이상을 차지한 검은 머리칼, 모두가 그를 반편이라고 부른다. 아마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동생을 떠받드는 개 같은 자식이기도 하고 속물이고 졸부이고 노새이며 근친상간과 관련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비속어의 내용이기도 하다. 나는 아무 상관 없다고 생각한다. 문득 고개를 숙이면 누군가 내 손을 잡고 있다.
‘형.’
그 얼굴이, ■■■가 든 촛불의 빛 안에서 일렁거린다. 따뜻해 보이는 살결을 쓰다듬어 주니 곁에서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상관 없다고 생각하며 딜런을 쓰다듬는다. 피부가 따뜻하다. 아아, 다행이다.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아. 요전에 누군가 죽었었는데. ……그런데 왜 이렇게 어릴까. 딜런은 열아홉 살이다. 나는 스물이 넘었다. 왜 이렇게 낮을까. 왜 갑갑할까. 헛간에 갇힌 일은 십 년도 전의 사건인데. 그때도 딜런이 와주었지.
‘형.’
딜런이 멀겋게 웃는다. 비타민과 함께 나오는 신 내 물큰한 우유 잔 같다. 너무 예뻐서, 눈물이 날 것 같아. 멀미가 난다. 그래 차에 탔었지. 덜덜 떨며 커다란 짐가방을 들고. 이 짐을 기사가 어서 자동차 뒤에 실어 주길 기다렸지. 딜런은 짐칸에 실린 가방 위에 앉아 있다.
‘형.’
‘왜.’
나는 간신히 대답한다.
‘다 괜찮을 거야.’
‘―뭐가?’
‘다 괜찮을 거야.’
‘다 괜찮을 거야.’
연설이 끝났다. 옆에서 핏, 하고 헛웃는 소리가 들린다. 알베르가 속삭인다. ‘이제 우리 차례야. 차석. 참고로 난 이제부터 미친 소리를 할 거야…….’ 다 괜찮을 거라고, 딜런이 엄청나게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이고, 그것을 끝까지 들으려다가 막이 열리고, 빛이 쏟아지고, 뜨거운, 아주 뜨거운 전깃불, 그리고 총 천이백 명 가량의― 박수 소리와, 아무도 알아볼 수 없는데, 알베르 다만시가 말한다. ‘저는 이제부터 미친 소리를 할 겁니다. 저명해질 학우 여러분.’ 그 소리가
그는 고장 난 엘피판처럼 들리는 목소리에 집중하기를 포기했다. 시간이, 아주 길게 느껴졌고 그는 환하고 밝은 공간에 있었다. 그럴 리가― 그가 걸어 내려온 계단의 수를 가정하면 이렇게 밝을 리가 없다.
환할 리가 없다.
따스할 리가, 이 삶이.
백합, 장미, 양귀비, 데이지!
…Hello darkness my old friend……
데이지가 좋아하는 노래군.
빛이 넘칠 때쯤 그는 눈을 감았다. 눈 안에서 피가 꿈틀거리며 녹조류 색 피막을……
헤엄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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