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캐

손 있는 날

애기&션

린아이런은 꽤 넓은 집에서 자랐고, 그녀의 부모가 호상을 맞이한 관계로, 젊은 임 부부는 꽤 넓은-낡아빠진 집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침구를 갈고 커튼을 새로 달고 중고로 구한 간접등을 채우는 등의 노력이 있었으나, 맞벌이 생활에서 고가구를 팔아치운 후 이케아에 갈 심력이 남아날 리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부부는 이민자들 사이에서나 감탄 살 법한 자개농, 태국과 대만 양식이 섞인 서랍장, 완연한 차이나풍 장식그릇(본차이나, 태국산)을 방치해 놓고 살았다.

자개농은 침실에 있었고 장식장은 2층 계단참에 놓여 있었다. 삐걱거리는 계단을 올라가면 엉뚱하게 호화로운 빈티지가 놓여 있는 구조였다. 그리고 대개 손님들의 눈을 사로잡는 건 그 위에 걸린 검집이었다.

 

- 이건 또 일본이네.

 

라고 아이런은 생각했지만 카페인을 충당하러 내려가면서 잠시 눈에 담아 둘 뿐이었다. 검집은 그녀의 증조모가 물려준 것이었는데 과거에 신체였다고 했다. 이제 와서, 녹슬고 부러진 칼날이 무엇을 벨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뽑았다가는 그대로 부스러질 칼이 풍수를 방해할 듯하지도 않아서, 그대로 둔 것이다.

그녀가 착각한 게 있다면… 이 검은 사무라이가 할복한 위엄 있는 역사도, 보검이라는 귀중한 명명도 닿아 있지 않은 물건이다. 과거 그녀의 고증조부가 전장에서 주워온 것을 어떤 무당도 처리하지 못해 그대로 봉인해 두고만 있었다. 한 번도 뽑아 보지 않은 검집 안에는 경면주사로 멋스럽게 쓰인 쇄문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몇백 년이나 삭아빠진 날림부적은. 아니 인제 도검이니 쇄문부니 경면주사니 말해도 아무도 못 알아 듣는다. 특히 이 미국땅에서는 더 그렇다.

아이런의 남편은 계단참을 몹시 못마땅해하며 팔아 치우자, 그래야지, 하고서는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선 신경도 안 쓰고 자러 올라갔다. 삐걱거리는 계단.

 

애기는 거기에서 태어났다.

 

소년은 언제나 다시 태어난다. 그래서 그는 애기라고 불렸을지도 모른다. 모두 장본인조차 잊어버렸을 이야기. 골동품에 씐 도깨비 취급해도 그는 흐릿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을 거다. 그렇게 경멸해줄 사람이나마 있었다면.

신체도, 신자도 잃어버린 신은 잡귀일망정 큰 힘은 지니지 못한다. 그래도 애기는 이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래 전의 ‘친구’가 떠올랐던 탓이다.

그 애를 화장대 안에서 지켜보거나, 가끔 계단을 혼자 삐걱이게 만들어서 성질나게 하는 건 한때 애기의 소박한 즐거움이었다. 그 애가 떠난 지도 오래였지만 어차피 고향을 잊은 건 애기도 마찬가지였다. 애기는 영화 속 유체-고스트처럼 검에서 ‘흘러나와’ 비물질적인 행태로 바닥에 납작 들러붙었다.

냄새가 났다. 산 사람 냄새가…… 그는 투명한 눈꺼풀을 감고 그것을 느꼈을 뿐이다.

 


“있잖아.”

 

너 누구냐, 어떻게 들어 왔느냐는 질문을 후두두 뱉어내는 ‘그 애’ 션의 얼굴은 구겨져 있었다. 애기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결국 션은 얌전한 침입자를 신고하기로 했다. 이미 오래 전에 끝난 쇼 티켓을 들고 들여보내 달라 하는 머저리들은 반년에 한 번이면 족했다. 이미 일주일 전 그런 인간을 끌어낸 참이다.

막 출근한 경비원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애기를 끌어냈다. 일어선 키가 생각보다 몹시 컸고,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아도, 어른이 되어가는 몸이었다. 그런데 살짝 엿보인 소년의 얼굴은 무척 희었다. 션은 끄무레한 인상과 하얀 머리털과 정돈된 골상보다 두 눈 위에 두른 더러운 붕대에 시선을 빼앗겼다. 할로윈 지난 지 이 주가 넘었다.

 

“넌 아름답다.”

 

애기가 말했다. 무척 앳된 목소리였다.

몸에 힘을 쭉 뺀 청소년 하나일 뿐인데, 초짜 경비원은 그것 하나도 못 끌어가서 지원을 요청했다. 이 시간에 일찍이 출근한 부지런한 경호가 있었다면 놀랄 일일 터다. 그들은 대개 입장 삼십 분 전에야 준비를 마치고 설렁설렁 돌아다닌다.

쇼가 시작되기 한 시간 전이다. 션은 아직 덜 그린 눈썹 사이를 찌푸리면서, 칼날 같은 미소를 지었다. 비웃음.

 

“나도 알거든? 야, 경찰 불러. 이런 애새끼들 더는 못 참겠어.”

 

경호원이 애기를 놓자 연약해 보이는 몸이 스르륵 가라앉았다. 그때쯤 깨달은 것이, 안대를 써놓고 뭐가 보이긴 한단 말인가?

하여간 어디서 잘 주워들어 가지고. 션은 대충 아는 순경 하나에게 연락해서 불법침입을 거론하며 담뱃불을 붙였다. 발갛게 타들어가는 불빛에 눈이 부시단 듯 소년이 고개를 돌리는 게 보였다.

그 동작에는 연극적인 데가 있었다. 보여주려고 하는 노릇인 게 빤히 보였다. 다 크기도 전에 사람 여럿 울릴 만한 태가 났다. 어쩌면 이미 그럴지도.

 

“너 있잖아.”

 

션은 팔이 닿지 않을 데까지만 다가서서 쭈그려 앉았다. 스커트 자락이 구겨지며 바닥에 살짝 쓸린다. 그가 희게 반짝이는 싸구려 자켓을 추슬렀다. 애기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너무 가까워, 하고 말하는 것 같아서 션은 다시 한 번 비웃어 주었다.

서까지 거리가 멀지도 않은데 경찰은 늘 늑장을 부린다. 멀리서 들리는 사이렌 소리는, 분명 구급차 소리일 거라고 션은 생각했다. 여기로 오는 경찰은 대개 사이렌을 올리지 않는다. 위급하지 않으니까.

 

“아빠랑 같이 와라, 응? 잡아먹히기 싫으면.”

 

분명 무대 뒤의 이빨 썩은 짐승을 떠올리며 한 말이었다. 다르게 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반 박자 후에나 이해했다.

어쨌든 소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단차가 얕은 계단 위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서, 뒷덜미를 잡힌 채였는데 종이인형처럼 맥아리 없는 두 발에 슬리퍼 한 짝도 걸치고 있지 않았다.

발바닥이 이상하게 깨끗하네.

호기심이 막 일어나려던 차에 예의 순경이 도착했다. 곱슬머리가 귀엽고 경찰복이 잘 어울리는 남자가 짜증스럽게 투덜거렸다.

 

“션……. 어 뭐야, 애잖아? 혼자 왔대요?”

“몰라. 부랑자 같은데 이름 한 번 찾아보지.”

“이봐요, 선생님. 이름이 뭡니까?”

 

소년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밖에 할 줄 모른다는 듯이.

그리고 서툰 문법으로 말했다.

 

“뭐라고 부르는지 까먹었어.”

“이거 귀찮아지네. 그냥 훈계하고 내보내면 안 됩니까?”

 

션이 담배연기를 훅 불었다. 도시 치안이 어떻게 되든 간 그는 알 바 아니었고 불청객만 없으면 그만이었다.

 

“돌아오면 또 신고할 건데? 나만 귀찮은 거 아니잖아? 쇼까지 한 시간도 안 남았어. 곧 표 끊을 거라고.”

 

슬슬 도착한 경비 두엇이 얼쩡거렸다. 션은 손짓으로 그들을 쫓아냈다. 뒷문이나 지킬 것이지.

그때 소년이 웃음을 터뜨렸다. 높고 탁한 목소리는 틀니 낀 노파의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문득 섬뜩하게 추운 기분이었다. 경비 두 명은 션의 호령에 진작 고개를 빼고 사라졌다.

 

션은 이 목소리를 안다. 알기 싫어도…… 반편이 이방인은 경계 너머 것을 귀신같이 눈치챈다.

 

순경이 눈치 없이 말했다.

 

“별 말썽도 아닌데 딴 데 내려주고 끝내죠.”

“이 씨발…….”

 

션이 중얼거렸다. 자질구레한 짜증에 전 말마디를 순경은 단순한 불평으로 알아 들은 모양이었다. 그는 소년을 놓아주며 지껄였다.

 

“싫으면 마시고요.”

 

애기가 번뜩 말했다. 맥락도 두서도 잃어버린.

 

“나도 보여줘. ‘쇼’. 어…… 그게 뭐야? ‘보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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