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야기
엘모 50일 고백 로그
파이널판타지14 확장팩 전반에 걸친 스포일러 및 효월의 종언 주요 스포일러 포함
00.
당신의 여행은 좋았나요?
02.
모노에게 있어 단순하지 않은 시작은 없었다. 깊은 생각보단 즉각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 천성 탓도, 물론,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보다는 빠르게 내리는 결정과 종종 가지는 강한 확신이 그를 두 번 고민하지 않는 사람으로 빚어냈다. 처음 모험을 떠나기 시작했을 때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다소 충동적이고 대책 없는 성정은 단점도, 장점도 될 수 있다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진한 후회를 남기는 어떠한 대상이 되기도 한다.
모노는 걷다 말고 자리에 대 자로 드러누웠다. 며칠간 아껴 마시던 물이 바닥난 지 세 시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굶주린 배에선 천둥 치는 소리가 났다. 없으리란 걸 알면서도 괜히 가방을 헤집었다. 입에 넣을 것이라곤 며칠 전 먹은 샌드위치의 식빵 부스러기뿐이다. 빵 알갱이를 입가에 찍어 바르며 모노는 생각했다. 여기서 울면 진짜 멋없어 보이겠지. 당장 사흘 전부터 쫄쫄 굶고 있다는 걸 생각한다면, 글쎄. 멋이고 자시고 크게 중요하지는 않게 되지만 말이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느냐는 질문은 무용하다. 모노는 모험을 떠나겠다고 큰소리쳤을 때 어머니가 했던 말을 기억했다. 모노의 즉흥적인 성격에 크게 기여하신 어머니는 그날, 모노가 난생처음 보는 표정을 지었다. 옆에서 박장대소를 터트리는 아버지를 잘근잘근 밟다가 간신히, 아주 간신히 꺼내신 말이 바로 이것이었다. 너 자신 있니. 행간에 담긴 우려와 걱정을 읽지 못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신 있게 답했다. 어떻게든 되겠죠, 뭐. 어머니는 말리지 않는 아버지의 등을 시원하게 갈기며, 당신은 애를 말리지 않고, 하고 투덜거리셨으나 모노를 직접 붙잡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게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무엇을 걱정하셨던 건지 모노는 인제야 간신히 깨달았다. 많은 모험가가 으레 그러하듯 그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건 난공불락의 던전이나 길거리를 어슬렁거리는 마물 따위가 아니었다. 오히려 모닥불 없는 밤, 차츰 떨어져 가는 식량, 에테라이트조차 없는 가장 가까운 마을, 길을 걷다 보면 종종 마주치는 무뢰한들이 초짜 모험가의 목숨을 쉬이 앗아갔다. 그러한 현실적인 면에서 보았을 때. 모노가 지금껏 생존할 수 있었던 건, 어쩌면 거대한 행운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행운과 요행은 언젠가 끝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모노는, 숲을 등지에 둔 채 드러누워 직감했다. 그게 바로 지금이라고. 큰소리 떵떵 쳐놓고 싸늘하게 식은 시체로 집에 돌아가는 불효를 저지르다니. 죄송한 마음에 뼛속까지 시릴 지경이었으나 별다를 수가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모노는 배가 고팠고, 한 발짝도 움직일 힘이 없었으며, 당장 입에 털어 넣을 군것질거리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한참을 누워 있었다. 허기는 점차 잊혀갔다. 대신 졸음이 쏟아졌다. 잠든 몸은 서서히 식을 것이고 날은 차츰 질 것이다. 체온을 온존할 수 있는 이불도 없는 마당에 맨몸으로 잠드는 건 얼어 죽겠다는 뜻과 진배없다. 알고 있었다. 그냥 움직이고 싶지 않았을 뿐이지. 눈을 감고 굶어 죽은 자신을 상상하다 모노는 킥킥 웃었다. 죽음은 달콤한 향을 가지고 그를 서서히 감싸 안고 있었다. 이를테면, 그래. 모닥불에 맛깔나게 구운 고기. 향신료를 가득 뿌린 채로 지글지글 익어가는 멧돼지의 앞다릿살 냄새…….
“뭐 해?”
황당한 질문에 모노는 눈을 뜨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가진 거 없어요. 굶어 죽기 직전이니까 그냥 내버려 두세요.”
그러자 옆에서 무언가 털썩 주저앉는 소리가 났다. 모노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지만 스멀스멀 고개를 드는 욕구에 조금은 순응하고 싶어졌다. 가라고 했는데 왜 안 가지. 누가 봐도 빼앗을 것 없는, 세상을 만만히 봤다가 된통 혼나고 죽어가는 모험가의 상 아닌가. 설마 입은 것까지 전부 뺏어갈 셈인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무는데 옆에서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너 입에서 침 흐르는데.”
“그럴 리가 없는데.”
“그리고 여기 누워 있으면 굶어 죽기 전에 대왕 모기한테 피 빨려서 과다출혈로 죽을걸.”
그 말에, 마침내, 모노는 눈을 번쩍 뜬다. 과다출혈로 죽는 건 상관없지만 그 까닭이 대왕 모기한테 피를 빨리는 것 때문이라면 정말, 몹시도, 진심으로 사양하고 싶었다. 어쩔 수 없었다. 모노는 모기가 싫었다.
몸을 벌떡 일으키자 순간적으로 시야가 하얗게 번졌다. 갑작스럽게 몸을 움직인 탓이리라. 으, 하고 머리를 짚었다. 천천히 좀 일어나지, 하고 타박하는 목소리가 아득하게 울렸다. 모노는 가까스로 목소리의 근원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시야를 하얗게 물들이던 안개가 조금씩 걷히며 상대방의 인영을 천천히 덧그릴 수 있게 된다. 모노는 그 윤곽에서부터 차근히, 빈 그림을 채워 넣듯 느리게 상대를 관찰하다가, 이윽고 눈을 맞췄다.
처음엔 제가 잘못 본 줄만 알았다. 희게 질린 시야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 착각했다. 그만큼 상대는 하얬다. 하얀 귀, 하얀 머리칼, 하얀 피부, 하얀 눈. 하얀 옷. 우뚝 솟은 귀 한 쌍이 상대가 비에라임을 짐작게 했다. 상대 또한 모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참이고 말없이 서로를 탐색하듯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모노는 어떠한 불분명한 착각에 휩싸였다. 그건 마치 오래 묵은 향수와 닮아 있었다. 누군가가 모노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듯했다. 기다렸다고. 보고 싶었다고. 또 어쩌면. 마침내 찾았다고. 내 말이 틀리지 않았다고. 희한한 일이었다. 모노는 상대를 오늘 처음 보았다. 자신을 빤히 들여다보는 그 눈에는 오랜 이별을 축복하는 애수도, 간만의 재회에 반가워하는 기쁨도 없었다. 모노는 자신 또한 그러하리라고 어렴풋이 짐작했으나 그게 가슴 깊은 곳에서 울리는 농도 짙은 환희를 없는 것으로 만들지는 못 했다.
때마침 모노의 배가 크게 울었다. 여간 큰 소리가 아니게 꼬르륵, 하고 허기를 드러내자마자 모노는 고개를 훅 떨궜다. 제 배를 빤히 들여다보다가 상대를 한 번 곁눈질했다. 민망함에 뺨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현실에서 유리되었던 것처럼 뿌옇게 녹았던 감각이 하나둘씩 돌아오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가장 먼저 모노를 압도한 건 형용할 수 없는 허기였다.
“배고파?”
상대가 물었다. 모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을 해서 좋을 건 없었다. 굶주려서 힘도 못 쓰는 와중에 마음을 숨기는 건 의미 없는 일이었다. 상대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다가 주위를 한 번 둘러봤다. 무언가 고민하는 듯했다. 모노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이대로 짐을 죄 빼앗기고 발가벗겨진 채 버려진들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리라는, 짐작이라기보단 예측에 가까운 감각은 모노에게 전에 없던 침착함을 선물했다.
“고기 구워둔 게 조금 있는데. 가서 먹을래?”
고민을 끝내기도 전 모노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비척비척 발을 끌며 상대의 뒤를 따라 걷는 채였으며, 또 의식을 말끔히 하니 모닥불 앞에서 고기를 게걸스럽게 뜯어 먹는 중이었다. 기억은 드문드문 끊겼다. 다만 새로운 해가 떴을 때 모노는 상대, 카엘의 기상에 맞추어 일어나 모닥불을 정리했다. 아침으로 샌드위치를 나누어 먹고 저들이 머문 흔적을 가볍게 지웠다. 그리고 두말할 것 없이 발맞추어 떠났다.
03.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카엘이 숨죽여 으르렁댔을 때 모노는 이불 속에 파묻혀 있었다. 이슈가르드의 추위는 가혹했다. 오르슈팡이 내어준 핫초코와 숙소는 몸을 따뜻하게 데우기 부족하지 않았으나 모노를 괴롭게 하는 건 보다 근본적인 마음의 문제였다.
눈을 감으면 생생하게 떠올랐다. 눈앞에서 괴로워하며 쓰러지던 나나모 여왕. 기다렸다는 듯 문을 박차고 들어온 위병들. 갑작스러운 구속. 날뛰는 일베르드와 라우반. 난장판이 되어가는 연회장을 보며 모노가 느낀 건 아득한 추락감이었다. 발밑에 구멍이 뻥 뚫려버린 듯한 아찔함에 제대로 설 수조차 없었다. 비에라의 높고 큰 귀는 소리를 잘 포착하도록 발달했으며 지난 몇 개월간 숙련된 모험가였던 모노의 청각은 더더욱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그랬기에 모노는 들었다.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라우반을 저토록 광분케 한 일베르드의 말을.
정신 똑바로 차려. 마차에서 카엘이 중얼거린 말을 곱씹으며 모노는 몸을 조금 더 둥글게 말았다. 말재주가 없는 카엘은 아마도 자신을 걱정했을 것이다. 그의 말에는 틀림이 없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그들은 쫓기는 신세였으니까. 게다가 아직은 턱없이 어린 알피노와 비전투원인 타타루가 함께였다. 여유를 부리거나 감정에 매몰되어 있을 틈은 없었다. 새벽이 기능을 중지하다시피 하게 된 지금. 그들을 지켜줄 사람은 드물었고 타지인 이슈가르드엔 이슈가르드만의 문제가 산재했다.
창문이 크게 한번 덜컹거렸다. 낡은 창살이 삐걱거리는 소리마저 누군가 속삭이듯 멀게 느껴졌다. 추위는 질색이었다. 춥기보단 쪄 죽는 한이 있더라도 더운 게 나았다. 모노는 이불을 강박적으로 끌어모으며 더는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벼락처럼 깨달았다. 이불 밖에서 카엘의 목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숨죽인 욕지거리도, 거친 숨의 씨근거림도. 하다못해 발소리조차도.
이불을 엎고 몸을 벌떡 일으키는 그 찰나. 모노는 오만 가지 가능성에 짓눌린 채였다. 처음 겪는 날것의 배신이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릴 수 있었던 건, 적어도 차렸다고 믿을 수 있었던 건 카엘이 그렇게 말해주어서였다. 카엘은 자신과 달랐다. 큰 감흥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일베르드 그 자식이 어딘가 뒤가 구렸다며 길길이 날뛰었다면 날뛰었지. 단단한 사람이었다. 적어도 모노에겐 그랬다. 불현듯 막혀오는 숨과 함께 모노는 직감했다. 카엘 없이는 버티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 무슨 일들이 일어날지는 모르지만 그만큼은 확실하다.
“왜?”
방구석에 앉아 있던 카엘이 고개를 들었다. 조금 놀란 낯이었다. 동그랗게 뜬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모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반사적으로 튀어 나간 대답을 주워 삼키고 싶지는 않았다. 손아귀로 이불이 말려 들어갔다.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카엘은 종종 복잡한 인간관계를 귀찮아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는 혼자인 게 편한 듯이 굴었다. 세월이 굳힌 신뢰는 어렴풋이, 아주 희미하게, 만일 제가 부탁한다면 카엘은 그러지 않으리라고 속삭였지만……. 모노는 마지못해 머무는 카엘을 상상하곤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너는.”
“응?”
“만약 내가…….”
문장이 되지 못한 낱말이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간헐적인 날숨만 그 틈새를 간신히 비집고 나왔다. 카엘. 너는 만약 내가. 떠나지 말라고 한다면. 숨이 꽉 막혔다. 누군가가 흉통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아니지. 떠나지 말라는 게 아니야.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게 아니다. 떠나도 돼. 다만. 만일 네가 떠난다면. 그렇다면 내가.
뒷모습을 좇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 관계가, 사람이, 상황이 있다. 툭 불거져 어디에서든 카엘을 찾을 수 있으리라 확신하는 것과는 별개로. 모노는 언젠가 자신이 그러한 상황이 놓일까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각은 빠르고 간결하며 그렇기에 유난스럽게 서글프지도 괴롭지도 않다.
“자네들. 잠깐 들어가도 괜찮겠나?”
노크 소리와 함께 알피노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모노가 고개를 끄덕였고 카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노는 문간으로 다가가며 무슨 일이야, 하는 카엘의 뒤통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뱉지 못한 말이 입 안에 고였다. 질척한 웅덩이로 모이고선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조금 피곤했다. 잠깐이라도 더 쉬고 싶은데. 하지만 알피노가 찾아온 걸 보니 걸음을 재촉할 때가 왔다는 사실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짐을 챙기며 모노는 대비한다. 떠날 시간이다. 빛의 가호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04.
강렬한 두통과 어지럼증을 느끼던 순간. 모노의 시선은 카엘에게로 향했다. 마찬가지로 머리를 짚고 비틀거리는 카엘이 시선 끝에 간신히 걸렸다. 저도 모르게 손이 움찔했다. 내뻗지 않은 건 순전히 제 머리를 둘로 쪼개는 듯한 격통이 저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산크레드가 시작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찾아온 원인 불명의 두통에 새벽은 차례차례 의식을 잃고 되찾지 못했다. 침상에 누워 움직이지 않는 새벽이 하나둘씩 늘어갔다. 나를 혼자 두지 말라던 알리제마저 떠난 날 밤. 모노는 카엘을 찾았다. 늦은 시각이었으므로 그가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조금, 아주 조금쯤 했으나 그건 모노의 걸음을 막을 방해물이 되지 못했다. 확인해야 했다. 충동이라기보단 의무감에 가까운 그 감정은 모노로 하여금 카엘의 방에 발을 들이고, 침대로 다가가 그의 머리맡에 앉게 했다.
카엘은 눈을 감은 채였다. 새벽과 같았다. 희미하게 오르내리는 가슴팍이 그가 살아 있음을 알렸다. 그러나 모노에겐 그로도 부족했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손끝이 이마에 맞닿았다. 천천히 내려가 코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 모노는 제 숨을 멈췄다. 느리고 단단하게 굳자 느껴지는 숨결이 있었다. 카엘은 진실로 살아 있었다.
커튼을 꼼꼼하게 친 방이었다. 달빛 한 점 들지 않았다. 잠귀가 밝은 카엘은 근래 들어 줄곧 잠을 설쳤다. 오늘따라 깊이 잠든 편이었다.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점차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카엘을 보는 건 달갑지 않았다. 전위에서 카엘이 난동 부리는 소리를 들을 때면 모노는 모든 걸 때려치우고 그에게 달려가고 싶어졌다. 자기 파괴적인 공격을 퍼붓는 카엘을 붙잡고 조금만 진정하라고 간청하고 싶었다. 대검을 든 이래로 이렇게까지 후회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모노는 걱정했다. 전장을. 새벽을. 그 모든 걸 아우를 만큼, 카엘을.
제국과의 전쟁은 녹록지 않았다. 주요 인사인 새벽이 하나둘씩 얼굴을 감추자 승패는 더더욱 예측하기 어렵게 되었다. 어떻게든 잘 포장해 봐도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그러지 않는 것 사이엔 크나큰 괴리가 있었다. 모노는 오늘 낮에 어쩌면 새벽이 줄행랑친 것 아니냐고 숙덕거리는 병사들을 보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쩌냐는 걱정에 다른 병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도 아직 영웅님들이 있잖아. 영웅이라는 그 한마디에 그들의 얼굴에 어렸던 근심과 공포가 가셨다. 멀리서도 그게 보였다. 그래, 그렇지, 영웅님들이 계시지, 하고 맞장구치는 이들을 지켜보다가 발을 돌렸다.
새벽이 자취를 감출수록 영웅은 드러나야 했다. 사기가 꺾이지 않으려면 그게 최선이었다. 그들은 더 많은 전장에, 더 많은 시간을 들여, 더 많이 출전했다. 제대로 쉴 틈이 없었다. 항의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러지 않으면 우리는 질 것이다. 상대는 제국이었다. 황제의 생각은 확고했으며 합의점은 찾지 못했다. 죽을 듯이, 미치광이처럼 베어내고 걷어차고 내지르고 찔러대다가 엉망진창이 되어 돌아오기를 몇 번째 거듭하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나 모노는 얼마 전부터 차라리 자신도 하루빨리 쓰러지기를 바랐다.
간결하게 말하자면, 그냥 지친 것이다. 그런데도 도망가지 않은 까닭은 모노를 영웅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어서다. 그리고 카엘이 이곳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너도 마찬가지일까? 느닷없는 질문에 입술을 사리문다. 너도 견디는 중이겠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뭘까. 무엇이 널 지탱할까. 또 무엇이 너를 무너뜨릴까. 이어지는 질문은 어쩐지 너무나도 당연하게 느껴졌다. 너는 어떻게 해야 포기하지 않을까.
명징하진 못해도 간단한 답은 있었다. 찾기 어렵지 않았다. 약간의 욕심이라면 욕심이겠으나 모노에겐 그게 최선이었다.
“카엘.” 숨죽여 속삭여 보았다. 우리가 아직 서툴 적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이다. 지금에서도 어둠을 빌려 간신히 읊조리는 것에 불과했지만. “나를 믿어.”
나를 믿어서. 나를 떠나지 마. 아니. 기실 떠나는 건 상관없다. 하고 싶은 말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만일 네가 나를 떠난다면. 뒤돌아보지 않고 나아가게 된다면. 어느 순간 나 없이 어딘가에 다다르게 된다고 해도.
“내가…… 너를, 찾을게. 그러니까.”
너도 나를 찾으라고 말하진 않을 것이다. 다만 부탁이야. 찾아도 좋다고 해줘. 내게 필요한 건 네 허락이다. 오직 그뿐이다.
우리는 언젠가 닳고 몰려 헤어지게 될지도 모르니까. 서로의 자취를 모르는 채로 낯선 별에 불시착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원치 않음에도 서로를 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는 반드시 올 것이다. 영웅이라고 불리는 우리가 응당 짊어져야 하는 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조금이라도 덜 힘들기를 바라는 건 아마도.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모노는 그네들이 신이 아님을 안다. 그 자신들조차 신을 찾고 있는 까닭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척 없이 방에서 나와 문을 닫았다. 제 방으로 돌아가는 대신 천막을 젖히고 나왔다. 날이 찼다. 겉옷을 하나 껴입을 걸 그랬다는 짧은 후회와 더불어 카엘이 이불을 제대로 덮고 있었던가, 하는 의문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뒤를 한번 돌아봤다. 천막이 펄럭이자 안쪽에서 닫힌 방문이 언뜻 비쳤다. 돌아가는 대신 모노는 다시금 걷기 시작했다.
여명이 틀 무렵. 머리를 도끼로 내려치는 듯한 끔찍한 둔통이 그를 반겼다. 머리를 부여잡은 채 주저앉으며, 정찰 나온 병사의 눈을 피해 어떻게든 숨으려 애쓰다가, 모노는 자신의 차례가 도래했음을 알았다. 거부할 수 없는 강렬한 인력이 저 자신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저항하지 않는다. 발악하지 않는다. 눈을 감고 호흡을 정돈하려 갖은 힘을 쓴다. 생리적인 눈물이 맺힌 눈은 무심코 카엘이 잠들었을 천막으로 향했다.
너는 기어코 혼자 남을 것이다.
부디 외롭지도, 괴롭지도 말기를 간절히 바라며 모노는 눈을 감는다. 끈덕진 수마는 점액질처럼 달라붙었다. 그렇게 그를 세계 저편으로 끌어당겼다.
05.
“잠깐 시간 괜찮아?”
모노는 책장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목소리였으므로 경계할 필요는 없었다. 책을 덮고 고개를 끄덕이자 문간에서 쭈뼛대던 상대가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섰다. 반쯤 열린 창에서 불어온 바람에 붉은 머리칼이 흔들렸다. 그라하였다.
“왜?”
“음, 아니. 그냥 궁금한 게 있어서.” 어색한 듯 방안을 살피던 그라하는 제 앞자리에 조심스레 앉으며 덧붙였다. “혹시 네 시간을 방해했다면 미안해!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야.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책을 아예 옆으로 치우자 그라하의 시선도 따라 움직였다. 책 표지를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는 시선이 제법 집요했다. 모노는 그라하의 쫑긋대는 귀를 모르는 체해야 할까 짧게 고민했다. 가쁜 일들이 어느 정도 잦아든 시기였다. 간만의 휴식을 즐기기 위해 카엘은 자리를 비웠다. 그러니 이제껏 궁금해하던 정보를 찾아보기엔 지금이 적기였다. 카엘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최대한 빨리 해치워야 했다.
제 낯에서 조급함이 드러났는지 그라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쁘다면 다음에 와도 괜찮아, 하고 말하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모노는 고개를 저었다. 기왕 온 김에 서둘러 주제를 끝맺는 편이 나을 성싶었다. 제1세계에서의 어지러운 일들을 모두 겪어온 결과. 모노가 얻은 교훈은 어쩌면 다음이라는 말은 당연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으니까.
그라하는 조금 후에 말을 시작했다. 조심스러운 투였다. 자신의 반응을 자세히 살피려는 듯 접힌 귀가 간헐적으로 움칠거렸다. 모노는 그라하의 말을 멍하니 곱씹으며, 어쩌면 그가 처음부터 준비했던 질문은 이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언약을 준비 중인 거야? 카엘과?”
모노가 읽고 있던 책의 제목은 ‘정통 언약의 유례와 절차’였다. 성마르게 꽂아두었던 책갈피는 언약반지와 언약 텔레포의 이론이 빼곡하게 서술된 페이지 가운데에서 흘러내리고 있으리라. 모노는 잠시 입을 달싹였으나 하고자 하는 말은 찾지 못했다. 결국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이 모노가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아직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잠깐 뜸을 들이다가 모노는 신중하게 말했다. “카엘이 언젠가 지나가듯 말한 적이 있었어. 언약에 관해서. 그래서 찾아보다가, 단점보단 장점이 더 많을 것 같아서…….”
“아직 정해진 단계는 아닌 거구나.”
모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카엘이 무슨 대답을 내놓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1세계에 온 이후 카엘은 많이 변했다. 모노는 카엘이 그렇게 우는 것을 처음 보았다. 항상 드세고 단단한 사람이었는데. 근래 들어선 안정을 찾아간 듯하지만 이전과 비할 바는 아니었다. 모노는 카엘이 종종 불안감에 시달리는 것을 알았다. 그가 구태여 말하지 않더라도 모노는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다. 가빠지는 숨, 연신 입술을 적시는 혀, 주위를 살피느라 바삐 굴러가는 눈. 곁에 서면 부딪히는 손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간혹 주먹을 세게 쥐어 무언가를 억누르려는 듯했다.
모노는 카엘이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기질이 어떻든 일상 내내 긴장하는 건 좋지 못한 일이었다. 하물며 목숨을 건 전투를 거듭 벌이는 그네들 같은 상황이라면 더더욱. 죽을 각오로 나가는 만큼 긴장과 이완이 확실해야 했다. 모노는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방도를 궁리했고 언약이라는 방식을 골랐다. 사심이 들어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모노는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카엘은 수락할 거라고 생각해. 많이 힘들어했잖아.”
그라하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찰나였으나 모노는 그 얼굴에서 짙은 죄의식이 스쳐 지나는 것을 보았다. 제가 아무리 말해도 지워지지 않을 낙인 같은 죄책감이었다. 지적하는 대신 고개를 돌렸다. 창문 너머 까마득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너울 같은 바람에 머리칼이 달싹였다.
“실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게 아니야.” 그라하가 조용히 말했다. “나는 그저 묻고 싶었어. 네가 어떻게 견딜 수 있었는지를 말이야.”
무엇을, 하고 되물을 필요는 없었다. 구태여 입에 담지 않아도 모노는 그라하가 무얼 묻고 있는지 알았다.
혼에 담긴 빛에 눈이 시렸다. 견딜 수 없다고, 견디기 싫다고 몇 번이고 되뇌었다. 눈부신 밤에 모노는 종종 카엘에게 매달렸다. 유일한 동아줄이라는 것처럼 끌어안고 호흡을 맞췄다. 맞닿은 가슴 너머로 선명하게 박동하는 심장을 느껴야 했다. 그런데도 살아 있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언제 빛이 터져 나올지 모른다는 공포는 모노를 확실하게 좀먹고 있었다. 그는 애당초 긴장을 유연하게 넘기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다.
불안감은 초조함을 유발했고 조급한 감정은 모노의 신경을 날카롭다 못해 예리하게 벼려 놓았다. 모든 게 끝난 지금. 모노는 말할 수 있었다. 그때 자신은 절박했다. 제 안에 눌러놓은 빛이 불편하고 역겨웠다. 나 자신이 시한폭탄이 된 기분은 결코 유쾌하지 못했다. 모노를 그보다도 조급하게 한 건 카엘의 존재였다. 대죄식자가 되면 카엘과 새벽을 적으로 인식할 것이다. 세계는 다시금 빛으로 휩싸일 테고 자신은 토벌의 대상이 되리라. 제 목에 칼을 겨누고 끝끝내 토멸할 사람은 카엘이다. 카엘밖에 없었다. 그러면 제가 견디지 못했던 빛이 카엘에게 향할 터였다. 모노가 가장 두려워한 건 바로 그것이다.
매분 매초가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카엘도 비슷한 상황이라는 사실을 끝없이 곱씹고 되뇌어야 도망치지 않을 수 있었다. 도망쳐봤자 갈 곳도 없다는 사실은 그때의 모노에겐 그다지 중요치 않았다.
그런데도 어떻게든 견뎌냈다. 아득바득 살아서 지금, 이 순간, 그라하의 앞에 앉아 있다. 그리하여 질문을 받았다.
모노는 제가 해야 할 말을 알고 있었다.
06.
“무슨 생각해?”
모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무기를 손질하던 제 손이 어느샌가 멈춰 있었다는 사실은 그제야 알았다.
카엘이 앞자리에 앉아 제 무기를 꺼냈다. 몸체가 잘 빠진 총이 어두침침한 조명에 푸르스름하니 빛났다. 규칙적인 기계음이 배경 음악처럼 깔린 채였다. 그들은 라그나로크 안에 있었다. 거대한 함선을 타고 우주 끝, 그 너머까지 날아갈 참이었다.
저마다의 결심을 복기하듯 새벽은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알피노와 알리제, 야슈톨라와 위리앙제와 산크레드. 모노는 함선 내부를 한번 빙 둘러보았다. 제각기 할 일로 바빠 보였다. 시선의 종착지는 결국 카엘이다. 카엘은 휴대용 가방에서 낡은 천을 꺼내 총을 벅벅 닦고 있었다. 드러난 팔뚝이 힘을 줄 때마다 움찔거리는 모습을 가만히 관찰하다가, 모노는 제 무기를 내려놓고 느리게 의자에 머리를 기댔다. 등받이와 머리가 부딪치는 힘만으로도 올려두었던 안대는 쉽게 떨어져 시야를 가렸다.
“……무슨 일 있어?”
카엘이 물었다. 모노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가만히 생각했다. 카엘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입을 다물면 상당히 냉한 인상이었다, 카엘은. 타인이 마음 편히 가까이 다가오기가 힘든 분위기를 풍기는 건 말할 것도 없었고. 성격이 나쁘다는 평가를 종종 받는 주제에 제 앞에서만 바보 같아진다. 저도 모르게 감았던 눈을 떴다. 안대가 가린 시야는 온통 시커멨다.
“안 보여.”
모노가 중얼거렸다. 손아귀에 걸치듯 기대어 놓은 스태프의 차가운 금속 감촉이 오늘따라 유난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숨을 쉬며 눈을 내리까는데 문득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시야가 차단되면 청각은 더더욱 예리해졌다. 그게 아니더라도 모노는 카엘의 걸음걸이를 완벽히 익혔다. 그래서 카엘이 잠시만, 하고 말했을 때. 그러며 누군가의 거친 손이 뺨을 스치고 안대에 닿았을 때. 약한 힘으로 안대를 당겨 풀어냈을 때, 모노는 놀라지 않았다.
함선 내부가 너무 어둡지 않나 싶었는데도 안대를 꼈다가 벗으니 눈이 아팠다. 모노는 눈을 살짝 찡그리며 상대를 올려다봤다. 카엘이 지척에 있었다. 안대를 정리하며 이건 나중에 돌려줄게, 하고 이야기했다. 일견 평온하기까지 한, 흔들림이 없는 목소리로. 제 눈을 덮었던 가리개를 차곡차곡 접는 손에선 반지 하나가 덜렁 끼어 있었다. 제게도 있는 것이다. 그들의 언약반지였다.
“불안해?”
카엘이 물었고 모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제와 감정을 숨기는 건 의미 없는 일이었다. 불안하다기보다는, 그래, 두려웠다. 그들은 항상 삶과 죽음의 최전선에서 아슬아슬하게 곡예 했으나 이번엔 조금 궤가 달랐다. 누군가는 죽으러 간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그만큼 무모했다. 살아 돌아올 자신. 솔직하게 말하자면 모노에겐 없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다른 무엇도 아닌 절망의 요람.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한 좌절의 둥지니까.
게다가. 기실 모노를 진정으로 두렵게 하는 건 카엘의 존재다.
카엘을 곧게 바라본다. 그러면 카엘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왜, 하고 물어오는 그 모든 움직임 하나하나를 망막에 새기듯 집어넣는다. 우리가 향하는 곳은 뒤나미스로 뒤덮인 우주의 끝. 마음이 곧 현실이 되는 세계. 속으로 하염없이 곱씹으며 모노는 오래 묵은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카엘.”
“응?”
“하나만 약속해.”
비장함이나 결연함과는 결이 다른 이야기다. 삶에 대한 원초적인 욕망은 때때로 추악하며 모노는 그러한 날것의 감정들을 외면하고 싶었다. 성마르게 타오르는 것들을 옆으로 밀어놓고, 배제하고, 그렇게 간신히 눈을 돌리며 눈앞의 것에 집중하면. 그러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공포에 떨지 않아도 된다. 나의 죽음과 네 생존과 우리 모두의 삶을 저울질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모노는 여태껏 그렇게 해왔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럴 수 없다.
결론은 하나다. 외면할 수 없다면 마주해야 한다. 궤짝에 욱여넣어 던져놓았던 감정들을 일일이 헤아리고 흡수하며 모노는 낯선 무언가를 찾았다. 아직 정확히 명명할 수는 없으나 ‘그것’은 명확한 물성을 가졌다. 작고 따뜻하며 눈을 뗄 수 없다. 그러며 꼭 심장과 비슷한 박자로 맥동했다.
아직은 미지의 것이다. 앞으로는 아닐 것이다. 우주가 꺾이는 끄트머리에서 모노는 알지 못하는 감정에 이름을 붙일 것이다. 증거 없는 분명한 확신이다. 그 자체가 곧 증명인 믿음이다.
“만약 너와 내가 떨어져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반지를 힘주어 그러쥐며 모노는 또박또박 말했다. “나를 기다려 줘. 무슨 일이 있어도 찾으러 갈게. 나는 네가 어떤 형태든 알아볼 수 있어.”
삐, 삐, 삐. 침입자를 알리는 경보가 울림과 동시에 모노는 스태프를 잡아챈다. 대답은 필요치 않다. 그들의 싸움은 시작되었다.
00.
인간은 여기서부터 걸어 나가는 것이다!
06.
가지 마.
끄집어내지 못한 말은 심장과 함께 저편으로 떨어진다. 열감이 잔재하는 자리에서 산란하는 섬광에 머리가 아찔해졌다.
카엘이 사라졌다. 자각하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손을 뻗었다. 땅에 닿았다. 쓸 듯이 짚고는 빛을 쥐었다. 구부린 손아귀를 천천히 폈다. 반지였다. 고개를 돌린다. 아득히 먼 저곳에 내린 길은 꼭 반지의 반사광을 닮았다.
어깨가 무겁다. 한 걸음 내디디기도 힘들다. 그런데도 모노는 이를 악문다.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악써가며 옮긴다.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방울이 눈가에 고이고는 떨어진다.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모노는 그저 걷는다.
멈출 수 없다. 숨을 쉴 수 없게 되더라도. 모노는 걸어야 한다. 저 멀리서 산란하는 유백색 섬광에 다다라야 한다. 빛으로 난 길을 밟고 끝의 끝까지 닿아야 한다. 집중하면 될 것이다. 전투에서 그러했듯. 목표만을, 이외의 것은 전부 잊어버린 채 오로지 하나만을 노리며 매몰되면. 언젠가는, 어떻게든 닿을 것이다.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할 수 없다. 모노는 약속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엔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떨구고. 얼굴을 손에 파묻고. 떨리는 입술을 짓씹고.
몸이 텅 비어버렸다. 들숨과 날숨마저 느낄 수 없다. 죽음과 같은 침묵이 흩뿌려진 이곳에선 어떠한 소리든 멀리 퍼진다. 울음을 참는 까닭이 바로 그것이다. 믿고 맡긴 새벽에 걱정을 끼칠 수는 없다. 카엘이 선택을 후회해선 안 된다.
으스러지듯 쥔 반지가 손아귀를 파고들었다. 세게 짓누른 입술에서 뜨끈한 것이 번지듯 퍼졌다. 혀를 감싸는 비린 맛에 차츰 정신이 든다. 소매로 눈가를 거칠게 닦아내고. 고개를 든다.
기다려달라고 한 데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카엘은 어디서든 보였으니까. 목적지를 정한 이상 모노는 자신이 망설이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안다.
호흡을 바로 잡자. 느리게나마 나아가자. 모노가 품은 결의란 그러한 것이다. 다다르고 말 것. 도망치지 않을 것. 기어코 너와 다시 어깨를 마주할 것. 어둠 끝에 빛이 있으리라고, 흔들릴지언정 믿음을 버리지 않을 것.
마지막의 마지막에서, 너와 내가, 그리하여 우리가, 함께 여명을 마주할 거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아니하는 것.
파도처럼 덮치는 최후의 깨달음에 몸을 맡긴 채. 모노는 또한 감각한다. 느낀다. 하며 확신한다.
너를 찾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미 네게 가고 있다.
01.
죽음이 도래했다. 저항할 수 없는 강제성이 곧 공포가 되어 번진다. 모노는 가장 먼저 흥미를 느끼나 현실감이 쓰나미처럼 한 차례 쓸고 지나간 곳에 남은 건 불분명하고 불유쾌한 공포뿐이다.
모노에게 옳고 그름은 더는 중요하지 않다. 인간은 이렇게 해서라도 살고 싶었나 보다. 건조한 감상을 잇는 건 제 독백이다. 느껴본 적 드문 후회요 생전 처음 뱉어보는 탄식이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마음을 숨기는 일 따윈 없었을 텐데. 우리에게는 시간이 많다고 자위하지 않았을 텐데. 네가 아젬 직을 맡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조금이라도 먼저 손을 뻗어 그러지 말라고, 차라리 조금만 더 곁에 있다가 받으면 안 되겠냐고 졸라도 보았을 텐데. 덧없다. 이미 지나버린 비탄이다.
의식이 끊기기 직전. 모노는 바란다. 미하엘이 보고 싶다.
느리게 몸을 움직였다. 적어도 그렇게 믿었다. 어딘가에서 빠져나오는 동안 모노는 사방에서 울리는 광기 어린 통곡을 듣는다. 울부짖음을 뒤로 하고 어딘가엔가 맞닿는다. 땅에 발을 디디면 그때부터 걷기 시작한다. 정처 없이. 목적지 없이. 비틀거리며. 몇 번씩 무너지고 일어나길 거듭하며. 질질 끌리던 로브가 어느 순간 찢겨 사라지고, 얼굴을 가리던 가면이 떨어지며, 길던 머리칼이 타버려 얼룩덜룩해지는 와중에도. 걷고. 걷고. 걷는다. 아젬을. 별을. 이정표를. 목표를. 찾기 위해서. 보기 위해서.
흐린 시야에 빛이 번진다.
만일 다음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때의 나는 어디서든 너를 찾을 수 있기를.
그리고 지금의 네가 너무 외롭지 않기를.
세계가 기운다. 공평한 안식에선 짠맛이 났다.
??.
결착이 났다. 절망은 물러났으며 세계는 다시 평화로워졌다. 판에 박힌 문장을 중얼거리며 모노는 책을 덮었다. 햇살이 영 따가웠다.
일이 마무리되자마자 카엘이 한 건 새로운 집을 구하는 거였다. 카엘은 빛의 전사가 아니더라도 돈이 부족하지 않을 만큼 있었고, 모노는 비록 실험과 자기만족에 버는 돈을 족족 갖다 바치는 중이었으나 집에 보탤 비상금은 있었다. 몇 번의 시찰과 권유, 짧은 논의 끝에 그들은 결정을 내렸다.
라벤더 안식처가 바로 그들의 새로운 보금자리였다. 고즈넉한 분위기와 따뜻한 볕, 전체적으로 고요하고 숲을 연상케 하는 분위기가 마음에 든 까닭이었다. 외출을 좋아하던 카엘은 근래 들어 일찍이 집에 돌아오곤 했다. 함께 마당에 앉아 책을 읽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새로운 일상으로 자리 잡아가는 시기였다.
모노는 제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작게 박힌 보석이 반짝일 때마다 빛에 얽힌 과거를 되짚어 읽을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많은 고난이 있었다. 없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이 어찌나 많았는지 헤아리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모든 역경을 뚫고 기어코 쟁취해 냈다. 구태여 자각하지 않아도 기저에 깔린 평화로움이 모노를 노곤하게 했다.
“자?”
조심스러운 부름에 모노는 고개를 들었다. 카엘이 고개를 빼꼼 내민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노는 고개를 젓고 몸을 곧추세웠다. 아니, 근데 좀 졸려서, 하고 대답하자 카엘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익숙하게 곁자리에 앉으면 모노는 말없이 고개를 기댔다. 당연하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눈을 감았다.
“자고 일어나면 디저트 먹을래? 케이크 포장해 왔는데.”
“케이크?”
“초코케이크. 지난번에 먹고 싶다고 했잖아. 뮨한테 부탁해서 오늘 받아왔어.”
“같이 먹어.”
“그러지 뭐.”
카엘은 말을 잇지 않았다. 모노는 그가 제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 배려해 주고 있음을 알았다. 몸을 조금 더 틀었다. 온전히 기대고 차근히 숨을 고르자 졸음은 기다렸다는 듯 쏟아졌다. 요즘은 이상하게 틈만 나면 잠이 쏟아졌다…….
“카엘.”
“응?”
“계속 있어.”
어디 가지 말고. 뒷말은 꼭꼭 삼켰다. 필요하지도 않았다.
나직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제 심장 속에서 움튼 몽글거리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모노는 알았다. 한 단어로 정의할 수도, 단정 짓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 가장 비슷한 단어를 찾아 입 밖으로 내게 된다면 그건 아마도 사랑이라는 말과 비슷한 발음일 것이다.
까마득한 시간과 공간을 지나온 것처럼 느껴졌다. 기분 좋은 탈력감을 마지막으로 모노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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