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거룩한 길(8)
“동료인가?”
아직 확인하지 않은 서신철을 인벤토리에 넣고 이동하던 중, 루에리가 물었다. 그 전까지 침묵을 유지했던 터라 순간 반응하지 못하고 그를 보았다. 루에리가 말하는 이가 엔더라는 걸 한 박자 늦게 깨닫고 나는 답했다.
“응. 예전에 같이 여신을 구출했던 일행이야.”
“여신이라면, 모리안?”
루에리가 의아함과 약간의 불신을 담고 되물었다. 아, 하긴. 루에리는 아직도 모리안 여신에 대한 오해가 남아있었지. 나는 잠시 고민했다. 말하지 않으려는 건 아니고, 어떻게 설명해야할 지 생각을 정리하는 차원이었다. 타르라크에 대해서도 이제는 말해줘야겠고.
“설명하자면 긴데…. 일단 루에리, 네 동료 타르라크는 살아있어.”
“…타르라크가 살아있다고?”
온통 잃기만 한 사건 속에서 타르라크의 생존은 루에리에게 한 줄기 희망일 터였다. 나는 그에게 차근차근 지난 일을 설명해주었다. 말 솜씨가 좋지 않아 조리있게 설명하진 못했지만, 루에리는 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아무런 참견도 하지 않았다.
깊은 허무의 붉은 눈동자가 조금씩 의지를 찾아갔다. 그는 짧지만 많은 감정을 끌어안은 감사 인사를 내게 전했다.
“고맙다.”
진솔한 인사에 부끄러워진 건 나였다. 어쩌면 나는 이들이 잃어버린 동료들을 되찾고 희망을 바랄 수 있는 삶을 꾸려나가는 걸 보고 싶어했을지도 모른다. 루에리, 타르라크, 그리고 나오가 된 마리까지…. 그들의 흔적을 되짚어보면서 나도 모르게 애정을 갖게 되었으니까.
그래서 웬만하면 곧바로 루에리에게 타르라크와 나오를 만나게 해주고 싶었지만, 일단 프라이스와의 만남이 우선이다. 루에리는 아쉬워하면서도 받아들였다.
프라이스와 만나기로 한 장소인 가이레흐 언덕에서 나는 서신철을 꺼내었다. 엔더가 해독하는 대로 바로 들고 온 터라 무슨 내용인지 아직 모른다. 굳이 프라이스를 기다릴 필요 없이 우리가 먼저 읽기로 했다.
머리를 맞대고 서신철을 읽는 우리의 낯은 곧 어두워졌다.
“이게 사실이라면….”
“리안의 건강이 나쁜 것도 에스라스의 짓이었군. 이멘마하의 참극이라 했나. 그 일 또한 에스라스가 꾸민 일이고.”
“…그게 정말 에스라스의 짓이었단 말인가.”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프라이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평소의 자유분방한 걸음이 아닌, 기사처럼 절도있는 걸음이었다. 그는 우리에게서 서신철을 건네받고 내용을 훑더니, 루에리를 바라보았다.
강렬한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루에리의 붉은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붉은 눈동자를 찬찬히 살핀 프라이스는 이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곧 그의 입가에서 놀랄만한 진실이 밝혀졌다.
“죄인 리다이어, 감히 묻겠습니다. 전 영주님의 첫째 아드님이자 리안 영주님의 형제가 맞습니까?”
“이미 그 자리는 버린지 오래야. 그보다, 어쩐지 단련된 몸이다 했어. 팔라딘이었군?”
“미약하나마 팔라딘을 이끄는 자였습니다. 하지만 보다시피 저 또한 버린 지 오래인 자리입니다.”
“…편하게 말해. 그보다 왜 당신이 죄인이라는 거지? 단지 에스라스에게 속아넘어간 거라면….”
프라이스는 한으로 얽매인 목소리로 루에리의 말을 끊었다.
“리안 영주님께서,”
그건 오랜 체념과 후회로 뒤범벅된 고해였다.
“그 날, 마족과 싸우다가 날아간 제 칼에 맞으셨으니까요.”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가라 앉았다. 나는 슬쩍 두 사람의 표정을 살폈으나 둘 다 조금의 미동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덕분에 공기는 살얼음판처럼 얼어붙었다.
그러니까 리다이어, 즉 프라이스는 과거 팔라딘의 단장이었다는 말이지. 방금 전의 말과 서신철의 내용을 조합해볼 때 그는 에스라스의 음모에 휘말려 이멘마하의 참극 당시 자리를 비었다가 급히 돌아왔으나 그의 칼은 의도치 않게 리안 영주를 해쳤고.
고의는 아니다. 그러나 리안을 해친 건 명확히 에스라스의 의도 또한 아니었을것이다. 칼이 날아가는 경로를 읽고 리안을 그 앞에 대령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프라이스가 아란웬과의 밀회 때문에 자리를 비우지만 않았더라면…, 그런 일도 없었을 테지.
한참 후에, 루에리는 제가 내린 결론을 털어놓았다.
“어쩌면 네 칼로 인한 부상이 리안을 꼭두각시로 만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
“….”
“하지만 일단 지금은 에스라스의 모략을 밝히고 리안을 만나러 가는 것에 집중하겠어. 당신에 대한 내 원망은 그 이후부터야.”
루에리는 프라이스를 일으켰다. 그 묵묵한 행동에 다정함이나 친절함 따윈 없었지만, 루에리는 나름대로 프라이스의 처지를 봐준 셈이다. 현재 루에리의 목표는 프라이스에게 복수하는 것이 아닌, 리안을 구하는 것이니까.
그렇게 둘의 일이 얼추 정리되고 우리는 다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얻은 증거는 서신철과 마리오네트 포션 샘플. 이것으로 한 영지의 재상을 끌어내리기엔 아직 부족하다. 게다가 우린 아직 에스라스의 궁극적인 목적도 알지 못했다. 아무리 봐도 단지 이멘마하의 영주가 되기 위한 행적 같지는 않았다.
이미 에스라스는 섭정으로 영주와 맞먹는 권한을 갖고 있지 않은가? 그 외의 무언가가 에스라스를 움직이게 하는 거라면…. 그 쯤 되자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있었다.
영주성으로 들어가는 수많은 금.
그건 단지 사치 용도일 뿐일까?
내 의견을 전달하니 프라이스는 참고하여 조사하도록 해보겠다고 답했다.
대화는 결정적인 소득 없이 끝났다. 아직 에스라스의 청사진의 일부만이 밝혀진 까닭에 추측성 발언만이 무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으로의 행동 양상은 에스라스의 뒷 공작을 파해칠 증거 찾기를 주로 결정했다.
다음 약속을 잡고 프라이스가 떠날 때는 이미 저녁놀이 지고 있었다. 나는 드디어 루에리에게 시드 스넷타로 가기를 제안했고 그는 받아들였다.
그의 친구, 타르라크가 낮에는 곰으로, 밤에는 사람으로 머무는 시드스넷타. 사계절 내내 눈이 쌓이는 혹독한 땅 입구에 우리는 다다랐다.
두 명분의 발자국은 하늘에서 끝없이 내리는 눈에 금세 자취를 감췄다. 오래된 전설의 뒷이야기처럼, 아무도 알지 못하게끔 말이다.
길을 걷는 내내, 이따금 내 의무적인 말에 대답만 하던 루에리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내가 어릴 때, 아버지는 어느 날부터 나를 외면하기 시작했어.”
“….”
조금씩, 그는 품에 안고 있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아버지가 그에 대한 소문을 지워나가기 시작한 일.
루에리의 운명에 대해 아버지가 에스라스와 나눈 의미심장한 대화.
그리고 영주성을 떠나기 전 리안과 나눈 약속….
“내가 바란 건 별 거 없었어. 단지…, 소중한 걸 지키고 싶었다. 가족이든, 친구든, 내 삶의 의지든. 하지만 난 가족도 지키지 못 했고, 친구도 잃었고, 의지조차 굳건하지 못 했어.”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루에리는 한꺼풀 벗겨낸 듯 조금 후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때문에 나는 조용히 경청했다.
“운명이란 정말 얄궂지. 모르간트가 내게 세상을 벌할 힘을 준다고 했을 때, 흔들렸다. 한 번도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한 것들을 되돌릴 수 있을 것만 같았어. 알아. 그건 올바르지 못하단 거. 그런데 그때…, 네가 나에게 기회를 줬다.”
“내가?”
“그래, 네가.”
“난…, 딱히 한 일이 없는 것 같은데.”
내가 얼떨떨하게 말하자 루에리가 낮게 웃었다. 우리가 만난 이래로 처음 보는 미소였다. 타르라크가 묘사한 것처럼 명쾌하지도, 호탕하지도 않은 그 웃음은 내게 깊숙히 와닿았다.
“본래 그런 거다. 누군가가 건넨 의미 없는 호의가 어떤 이들에겐 뜻 깊을 수도 있는….”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나보다 두어 걸음 뒤에서 멈춘 루에리를 뒤돌아보았다. 차가운 눈이 폴폴 내려와 머리며 어깨며 쌓여있는게 처량맞기 그지 없었다.
루에리는 제 투박한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그렇게 화두를 뗀다.
“그 아이에게도…. 내가 손을 건넬 수 있었을 텐데.”
이어진 조용한 혼잣말은 쌉싸름한 후회를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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