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만남
고등학생 AU 재은재
이것도 벌써 몇 년 전인지 모르겠네. 우리 고등학교 2학년 때 축제 준비하던 날, 기억나? 그 당시의 우리는 같은 학생회였는데도 서로 이름만 알고 정확히 어떤 생김새인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그 무엇도 모르는 사이였잖아. 그냥 친구들 사이에서 건너 건너 얘기만 들었던. 그래, 그래서 난 직접 만나기 전까지 네가 진짜 까칠하고 재수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니까. 아하하, 당연히 지금은 그게 아닌 걸 알지만. 아, 미안해, 미안해. 알겠어, 농담 안 할게.
그때가 언제였지? 축제 때였으니까 대충 고등학교 2학년 말이었으려나. 한창 바쁠 때였지. 여기저기 불려 다니는 건 기본이요, 하루 종일 잡심부름 한다고 눈코 뜰 새도 없이 뛰어다녔으니까. 그러다 들어선 회실에 네가 있었어. 널 처음 마주 본 순간이었는데…… 지는 노을이 네 뒤에서 은은한 빛을 내는 게, 정말 천사가 내 눈앞에 서 있는 건가 싶었다니까. 야, 이건 농담 아니거든? 그때는 네가 천사 그 자체였다고. 얼마나 착했었는…… 아야! 아, 때리지 마, 아파! 툭하면 손부터 나가는 버릇은 여전하네.
어쨌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그때 네가 무슨 명단을 들고 있었던 것 같은데, 맞아? 기억 안 난다고? 그래애, 그러시겠지. 그때의 아주 도도하시던 강재인 씨는 나 같은 건 신경도 안 쓰였을 텐데 어련하시겠어. 내가 그때 한눈에 반해서 푸우욱 빠져버렸으니 기억하는 거겠지. 아, 아니, 야, 야! 너, 너는 뭐 이런 걸 가지고 새삼스럽게 부, 부끄러워하고 그래! 에이 씨……. 괜히 나도 얼굴에 열 오르는 거 같잖아.
어떻게 몇 분동안 이야기에 진전이 없냐. 이제 끼어들지 마, 알겠지? 아니, 그렇다고 삐치지도 말고! 참 나, 진짜 까다로운 여자네. 아오, 하여튼! 네가 그때 무슨 명단을 보고 있길래 내가 그게 뭐냐고 물었었거든. 글쎄? 별로 궁금하진 않았는데 그냥 뭐라도 말 붙여보고 싶었나 보지. 그리고 분명 네가 뭐라고 답을 했었던 것 같기는 한데 뭐였는지는 아직도 기억이 안 나. 왜냐니, 그 질문은 너와 말을 섞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니까? 떠나는 사람 급하게 잡아채는 기분으로 나도 모르게 그냥 툭 튀어나왔단 말야. 그 질문의 대답 따위가 중요했겠냐고. 뭐, 너한테 모든 신경이 집중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아, 자꾸 부끄러워하지 말래도! 누군 안 부끄러운 줄 알아? 참고 얘기하는 중인데 진짜……. 아니, 부끄럽다고 때리지도 마! 아프다니까!
어? 뭐였는지 생각났다고? 아아, 학생회 명단. 선배들이 자꾸 일 시켜서 뭐라도 하는 척 보고 있었다고? 너도 진짜 웃긴다. 한 꼼수 하는구나? 난 하라는 대로 자질구레한 일까지 죄다 했는데. 갑자기 후회되네. 그래도 그러면서 널 보게 된 건 좋은 일이지. 그때 못 만났으면 어쩔 뻔했어? 지금 이렇게 같이 있을 일도 없었을걸. 네게 그 순간이 어쨌든, 내겐 정은창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어. 뭘 모르는 척을 해. 당연히 널 만나서지. 이걸 굳이 입 밖으로 뱉어야 만족하겠어?
다행인 건 내 열정적인 구애 끝에 결국 네가 내 마음을 받아줬다는 거? 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누가 보면 네가 거절했는데 내가 계속 고백한 줄 알겠다. 난, 나 싫다는 사람한테 들이대는 놈 아니거든? 그리고 너도 나 받아준 거 보면 마음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잖아, 그치.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럼 넌 나 언제 좋아하기 시작했는데? 지금도 안 좋아한다고? 거짓말도 정도껏 해야 믿어주지, 강재인.
시치미 그만 떼고. 넌 나 언제부터 좋아했는데? 솔직하게 말해 줘. 궁금해. 뜸들이지 말고, 응? 뭐야, 자기도 나랑 똑같이 좋아했으면서. 아닌 척 진짜 잘했네, 그동안. 난 지금까지 내가 고백한 후로 네가 나 좋아하기 시작한 줄 알았어. 나 약간 배신감 든다. 그러게 누가 티 내래, 라니? 원래 좋아하는 건 티 내야 하는 거거든? 뭐든 다 아는 천재인 줄 알았더니 모르는 것도 있네, 천하의 강재인이.
그래서 우리가 이런 사이까지 발전할 수 있었던 거구나. 하긴, 너 마음 없는데 받아줄 것 같은 사람은 아냐. 하아, 근데 나 지금 너무 기뻐. 네가 날 오래 전부터, 그러니까 나랑 똑같이 좋아하기 시작했다는 게…… 정말 행복해.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거야? 으응…… 그래, 네 말이 다 맞아. 내가 널 몇 초라도 더 먼저 좋아했어. 네가 날 좋아한 것보다 내가 널 사랑한 게 먼저였어.
앞으로도 네 말이 다 옳은 걸로 해 줄 테니까, 이제 그만 자자, 응? 뭘 더 얘기해 줘. 시간이 몇 신데 아직도 그렇게 말똥하면 어떡해? 이제 더 추억팔이 할 것도 없다니까. 지금 자도 한참 늦어. 내일 늦잠 자기만 해 봐? 신부 없는 결혼식이 뭔지 아주 제대로 보여줄 테니까. 싫으면 빨리 자자, 재인아. 그래, 그래. 잘 자. 내 꿈 꿔. 응, 나도 사랑해.
포타에 썼던 거 약간 수정 후 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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