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메시지

3화

꿈의 시작(3)

왜 그렇게 생각하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타르라크에게 그러한 결론을 내린 계기는 스스로에게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을 듯 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내린 결론에 대해서 완전히 동감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저에게 알려주세요. 여신이 인간을 배신했다는 증거를.”

“좋습니다. 이 통행증을 반호르의 바리던전 제단에 바쳐보시지요. 제가 이 말을 하게 된 이유를…, 알게 될 겁니다.”

나는 타르라크가 내게 건넨 통행증을 살폈다. 평범한 통행증이라기엔 오히려 부적을 닮은 모양새였다.

“그것은 마족이 던전에서 여신의 결계를 피해 다닐 때 쓰는 물건입니다. 위험할 것 같다면 친구를 한 두 명 구해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나는 마족 통행증을 인벤토리에 넣고 타르라크를 향해 고개를 까딱여 인사했다. 그도 나와 비슷하게 인사했다.

뒤돌아선 나는 아까 우연히 발견했던 문게이트로 갔다. 이런 눈 덮힌 곳에도 문게이트가 설치되어 있다니, 참으로 신기했다.

반호르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전투에 대비해 무기를 점검하는 것이었다. 전투를 좋아하진 않지만 아예 못하는 것도 아니라서 사람들의 부탁을 받으면 간혹 던전에 가기도 했다. 밀레시안은 대체로 여러가지 다양한 무기를 쓸 수 있는데 그 중에서 내가 주로 쓰는 건 쌍검이었다.

내구도가 많이 닳아있는 검을 수리하고 나니 딱히 더 할 일은 없었다. 나는 곧장 바리던전으로 가, 통행증을 바쳤다.

바리던전답게, 내부는 광산이었다. 미로처럼 얽힌 던전의 길을 찾아가며 나는 몬스터를 물리쳤다. 강력한 몬스터는 딱히 없는지라 보스룸까지는 수월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보스룸에는 블랙 위자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리석은 자여. 이곳은 네가 들어오도록 허락되지 않은 곳. 어찌 마족의 메달을 지키고 있는 자의 안식을 방해하는가!”

얼굴을 가린 흰 천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다. 천에는 붉은 색으로 마족의 문양이 그려져있었다.

“네 놈은 여신의 의지마저도 잘도 거역하는군. 신의 뜻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거역하는. 너희 인간은 살 가치가 없는 존재!”

“…여신?”

“그렇다. 모리안 여신은 나로 하여금 이 마족의 메달을 지키게 하였으니. 내 그 의지를 빼앗고자 하는 너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도록, 영원히 잊혀지도록 만들어주마!”

그 말을 끝으로 주위에 있는 위습 세 마리가 마법을 차징하기 시작했다. 볼트 마법이 나를 향해 쏘아지기 직전, 나는 아슬아슬하게 회피해냈다. 마법은 차징하는데에 시간이 걸린다. 그 점을 이용해 땅을 박차 빠르게 위습을 공격했다.

“나를 잊고 있나보군!”

‘아차!’

위습의 마법 공격에 신경쓰느라 블랙 위자드의 공격에는 대비하지 못했다. 파이어볼트 마법에 직격당한 나는 따끔한 고통을 씹으며 쓰러졌다. 하지만 큰 부상은 아니라 빠르게 재정비하고 일어난 뒤, 나는 다시 마법을 캐스팅 중인 블랙 위자드를 향해 검을 날렸다.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 조준 덕에 블랙 위자드가 쓰러졌다. 이렇게 하니 개싸움이라는 생각을 피할 수가 없긴하네. 나는 나머지 검을 들어 쓰러진 블랙 위자드가 일어나기 직전 꽂아넣었다.

행동불능이 된 블랙 위자드를 확인하고 나머지 위습들도 정리하고 나니 남은 적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뭔가 거슬려.’

뭘까.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긴 건 나인데, 어쩐지 상대의 수법에 말려들어가는 기분이다. 너무 손쉽게 이겨서일까?

어쨌든 나는 보상방으로 향해 마족의 메달을 손에 넣었다. 의외인 건, 눈에 보이는 메달의 모양이 마치 라이미라크 사제들이 들고 다니는 사제의 증표와도 꼭 닮아있다는 점이었다. 뒤집어보니 뒷면에는 알 수 없는 글이 적혀있었다.

사제의 증표와 꼭 닮은 마족의 메달이라…. 타르라크가 내게 보여주고자 했던 건 이것일까.

던전 밖으로 나오니 이제 새벽이 지나 해가 떠오르는 아침이었다. 나는 피곤한 눈가를 꾹꾹 누르곤 농장으로 향했다. 좀 자야겠어. 피곤한 것도 이유지만 잠에 들면 르나의 꿈을 꿀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정말 이번에도 꿈이었다.

르나는 던전 같이 생긴 장소에 서있었다. 하지만 전투 상황이라고 하기엔 눈 앞에 있는 고블린은 르나에게 적대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무언가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 사제의 증표라구요? 이것이? 이것은 고위 마족의 호신부인데…, 어디보자…. [둘 브라우 다이람 세넌]. 역시 마족의 것이 맞군요. ]

마족의 메달에 대한 내용이다. 나는 그의 말을 최대한 귀에 담아들었다.

[ 마족 글자는, 크크크…. 어린 시절부터 인간의 말을 배운지라 좀 잊어먹기도 했지만... 이 머리 좋은 고로, 이런 정도는 문제 없이 읽을 수 있지요. 당신의 무용에 건의를 표하여 저와 같은 고블린을 만난 기념삼아 내용을 알려드리지요….‘둘 브라우 다이람 세넌’은 ‘여신이여, 달빛을 빌려달라’라는 뜻입니다. ]

둘 브라우 다이람 세넌. …그렇게 읽는 거구나.

르나는 그 말을 듣고 다시 타르라크를 찾아갔다. 르나의 이야기를 들은 타르라크는 고로의 해석에 부족한 부분을 지적했다.

[ 틀린 해석이라고 못박을 생각은 아닙니다만…, 제가 기억하고 있는 뜻과는 좀 다르군요. ‘둘 브라우 다이람 세넌’은 바로 ‘여신이여, 당신의 마력을 내게 깃들게 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는 마족에게서 직접 들었으니, 틀림 없을 겁니다. ]

그렇다면 정말로 여신은 인간을 배신했다는 타르라크의 말이 맞는걸까. 하지만 계속해서 드는 내 의구심을 르나도 느끼는 모양이다.

[ 어쨌든, 이것으로 당신도 확실히 아셨을 겁니다. 마족은 여신의 힘을 빌려 에린으로 오고 있는 거라는 걸. 바로 여신의 힘 말이지요. 모리안 여신은, 마족의 침입을 방조하고 있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요. 만약 의심스럽다면, 고로에게 다시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

이 말에 곧바로 고로에게 간 것을 보면 말이다. 고로는 정확한 뜻을 알려주자 조금 머쓱해하더니 다른 도움이 될 정보를 내놓았다. 그건 바로 인간이 되어 던바튼에서 살아가는 서큐버스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던전의 검은 장미라 불리는 서큐버스. 그러한 동족을 배신하여 서큐버스임을 포기한 자…. 사실 누군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서큐버스였을 만한 사람이 던바튼에 누가 있지? 이성을 유혹한다는 그들의 특성상 외형이 아름다울 게 분명할 텐데….

내가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꿈 속 세계가 깨어졌다.

일어난 시각은 오후였다. 나는 던바튼을 맴돌며 사람들의 외모를 살폈다. 품평하는 것 같아서 좀 미안했지만, 이 방법 밖에 단서가 없는 걸. 말을 걸어 캐내고자 하면 숨어있는 그녀에게 곤란한 일이 생길 것 같았다.

하지만 큰 수확은 없었다. 하기야, 외모로 서큐버스를 알아채는 게 말이나 되나싶다. 예쁘다고 다 서큐버스도 아니고.

나는 문득 성당에 있을 크리스텔이 떠올랐다. 그러고보니 크리스텔은 엄청난 미인이었지. 라이미라크 사제들은 얼굴로 뽑는게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그녀의 미모는 유명했다.

하지만, 사제잖아? 서큐버스가 사제가 되어 살아간다는 건 어려운 일을 떠나 라이미라크쪽에서 받아들여주기나 하는지 모르겠다.

“…….”

하지만 내 발걸음은 결국 성당 앞에서 멈추었다. 나는 성당을 지키고 있는 크리스텔에게 다가갔다. 아르바이트를 몇 번 했지만 사실 그냥 안면이 있는 정도라 엔델리온처럼 친근하게 다가서진 못 했다.

쭈뼛대는 나를 발견하고 크리스텔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솔라 씨.”

“…혹시, [ 둘 브라우 다이람 세넌 ] 이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크리스텔은 많이 당황한 낯이었다. 나는 그 반응에 그녀가 서큐버스가 아닐까 하는 의심의 수위를 높였다. 모르면 모를까, 이런 반응을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 말은 어디서 들었나요?”

“이 호신부에 적혀있는 글자의 뜻을 찾다보니 알게 되었어요.”

내가 꺼낸 마족의 메달, 고로가 말한대로라면 고위 마족의 호신부를 보자 크리스텔은 놀란 눈치였다. 나는 그녀가 뭐라 하기 전, 속삭이듯 조용하게 말했다.

“크리스텔은…, 인간이 아닌 건가요?”

무례한 질문이었지만 내겐 그녀를 모욕할 의도가 없었다. 그 맥락을 읽어달라고 호소하듯 쳐다보자 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자신은 고르도슈, 그러니까 인간들의 말로는 마족이자 포워르로 불리는 자라고. 크리스텔이 물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나는 티르 나 노이로 오라는 여신의 꿈, 그리고 타르라크라는 드루이드를 만나 그에게 인간을 배신한 여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사정을 털어놓았다. 물론 르나의 꿈 속에서 알게 된 사실들은 적당히 얼버무렸다. 놀랍게도 크리스텔은 그 어떤 것보다 타르라크가 살아있다는 말에 감격한 눈치였다.

“이럴수가…. 역시 살아있었군요, 타르라크 씨는.”

“크리스텔은 타르라크와 아는 사이인 거군요.”

크리스텔은 먹먹한 눈으로 미소지었다.

“네…. 솔라 씨, 제게 타르라크 씨가 있는 곳을 알려주실 수 있나요? 직접 그의 얼굴을 보고 확인하고 싶어서요.”

“그 전에 한 가지, 하나만 확인할게요. 당신이 인간이 아닌 마족이라면 제게 신뢰를 먼저 줄 수 있나요. 섣불리 당신을 타르라크 씨에게 데려갈 수는 없어요.”

“…신뢰란 무릇 말로 하는 것이 아닌,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죠. 이 메모리얼 아이템을 라비던전에 바치고 확인해보세요.”

그녀가 내게 건넨 건 안경주머니였다. 나는 라비던전으로 향하면서 안경주머니를 살폈다. 내부에 이니셜이 새겨져있었는데, 추측상 타르라크의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건 타르라크의 기억이 담겨있을 터, 크리스텔은 타르라크와 어떤 관계길래 자신의 무고를 증명하기 위해 타르라크의 기억을 엿보라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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