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꿈의 시작(2)
꿈의 시작은 저번과 같이 르나의 시점이었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녀는 누군가를 보고 있었다. 구불거리는 금발을 지닌 남자였는데, 음울함이 담긴 그의 얼굴은 언뜻 보면 병자 같기도 했다.
[ 메이븐 사제님이 이야기 해주신 모양이군요. 내가 여기 있다는 걸... ]
그는 낮게 웃더니 시드 스넷타의 밤이 어떠냐는 실없는 이야기를 했다. 정황상 이곳은 시드 스넷타일 것이다. 눈사람이 잔뜩 있는 그 곳은 아닌 거 같은데…. 나는 최대한 주위를 보고자 했지만 르나의 시선은 곧게 남자를 향했다.
[ 이전에 당신과 만났던 곰, 그것은 저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그러고보니 마나 허브, 고마웠다는 이야기를 깜빡했군요. 저는 낮 동안에는 마나 허브를 계속 먹어야 하는 몸입니다만…, 사람일 때는 허브에 거부반응이 일어나서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지요. ]
곰? 또 다른 모습? 나는 의아해하다가 이내 촌장님이 알려 주신 소문을 떠올렸다. 가족을 잃은 드루이드가 곰이 되었다는 이야기…. 그렇다면 이 남자가 소문의 주인공인 곰인가.
[ 제게 용무가 있는 것 같은데…. 당신도 혹시 여신의 꿈을 꾼 건가요? 티르 나 노이로 자신을 구하러 오라는…? 그렇다면 아마도 제게 티르 나 노이로 가는 방법을 물어보러 왔겠군요. ]
나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여신이라니……, 르나도 혹시 나랑 같은 꿈을 꿨던 걸까?
르나를 꿈 속에서 보기 전, 나는 검은 날개를 단 아름다운 여신이 티르 나 노이라는 세상으로 와달라는 부탁을 하는 꿈을 먼저 꾸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르나도 같은 꿈을 꾸었다는 건 어느 정도 두 사건과 연관이 있다는 것 아닐까?
내가 생각하는 동안 남자는 방금까지 보여줬던 온화한 모습에서 싸늘하게 돌변해 거절했다.
[ 포기하시지요. ]
그의 단호한 말에는 많은 것이 담겨져 있었다. 비록 나는 알 수 없는 것들이지만…. 파편처럼 느껴지는 감정은 후회, 실망, 그리고 체념.
르나는 그의 감정을 읽었을 터인데도 포기하지 않았다. 남자는 그런 그녀에게 [ 영원의 땅, 티르 나 노이 ] 라는 책을 읽으라 권했다. 그것으로 르나의 호기심이 거두어지길 바라면서.
일찍 일어나려고 했던 의지와는 다르게, 나는 늦잠을 잤다. 일어나니 팔라라가 중천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멍하니 농장을 보고 있길 10여분, 그 후 겨우 겨우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시드 스넷타와 달리 맑기만 한 티르 코네일에는 시원한 북서풍이 불어왔다. 나는 적당히 식사를 떼우고 풀 밭에 다리를 끌어모아 앉았다. 낮 동안 시드 스넷타로 가려했던 계획은 꿈으로 인해 변경해야 할 것 같다.
복잡한 머릿속을 차곡차곡 정리해보았다. 르나는 아무래도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은 아니나,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는 것 같았다. 마치 내 행보를 미리 알려주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녀가 꿈을 통해 일러주는 그 경로대로 똑같이 행동해야 하는가? 알 수는 없다. 그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르나 또한 보지 않았으니.
하지만 확실한 건, 여신의 말에 나 또한 동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신에 관련된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없다. 다만 티르 나 노이가 파괴되려 하고 있다는 전언이 걸렸다.
티르 나 노이에 대해서는 이 곳 사람들에게 몇 번 주워들었었다. 낙원이자, 사람들의 이상향. 인간은 이곳에서 고통과 노화를 버리고, 이들의 눈물과 분노는 힘을 잃는다. 그러나 보통 전설이 다 그러하듯 티르 나 노이는 그 아무도 갈 수 없다는 신비의 세계.
때문에 사람들은 티르 나 노이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고 한다. 성공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지만….
나는 문득 꿈 속의 남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 당신도 혹시 여신의 꿈을 꾼 건가요? ]
그는 분명 당신‘도’ 라고 했다. 그러면, 르나와 나 말고도 꿈을 꾼 자가 더 있다는 뜻인가?
“…….”
가만히 앉아만 있어서 알 수 없는 것들이 많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일단 던바튼으로 가서, 서점에서 관련 책들을 좀 훑어봐야겠다. 주민들에게 물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던바튼으로 가는 길은 멀지만 문게이트가 있어서 금방 도착할 수 있다. 나는 붕 뜨는 기분을 느끼며 새로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았다. 밀레시안들은 보통 던바튼에 많이 모여있는 편이라, 나 또한 던바튼에는 자주 온다. 가끔 사소한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도움을 받을 때도 있었다.
나는 가지각색의 모습으로 자리하는 밀레시안들을 구경하며 서점을 향해 갔다.
“안녕하세요, 아이라.”
“어머. 안녕하세요, 솔라 씨! 오랜만에 보네요. 뭔가 찾으시는 게 있나요?”
막상 왔는데, 어떤 책을 찾아야 할 지 잘 모르겠다…. 나는 결국 아이라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혹시 여신에 대한 책이 있을까요?”
“여신이라면….”
“아! 검은 날개를 단 여신이에요.”
내가 조건을 붙이니 아이라가 아! 하고 감탄을 뱉었다.
“모리안 여신을 말하는 거죠? 좀 유명한 책인데 [ 돌이 된 여신의 이야기 ] 라고, 모이투라 전투에 관련한 여신의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모이투라 전투요?”
“흐음…, 솔라 씨는 밀레시안이니 잘 모를 수도 있겠네요. 모이투라 전투는 옛날, 인간이 마족에게 대항해 싸운 두 번의 전쟁을 뜻해요. 책을 보시면 알 수 있는 내용이니 한 번 보시겠어요?”
아이라는 선뜻 내게 책을 건네었다. 대금을 치루려고 하니 손사래까지 치며 나를 말렸다.
“어차피 이건 아이들 교육 용으로도 널리 퍼진 책이니 부담가지실 필요없어요. 저도 재고처리가 필요한 참이었거든요.”
살짝 윙크하는 아이라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미소를 지은 아이라가 궁금한 점이 더 있다면 자신말고 학교 선생인 스튜어트에게 가보라고 첨언했다. 나는 대화의 말미에 또 한 가지, 고민하던 사항을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아, 그리고…, [ 영원의 땅, 티르 나 노이 ] 도 있나요?”
* * *
나는 한적한 곳에서 두 권의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책은 별 것 없이, 허구가 어느정도 섞였을 역사와 전설을 요약한 내용이었다. 참고로 [돌이 된 여신의 이야기] 에는 티르 나 노이에 대한 언급도 있었지만 정말 얼마 되지 않았다.
[ 에린에서 육체를 잃은 그녀의 영혼은 신들의 땅인 티르 나 노이로 가버렸고, 지금은 그곳에서 티르 나 노이를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
흐음….
나는 책을 덮어 인벤토리 구석에 넣어두었다. 책 두 권을 읽은 것만 해도 수시간은 지난 터라, 어느덧 하늘에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시드 스넷타의 곰은 사람이 된다.
지체없이 나는 문게이트로 향했다. 알비 던전 쪽에 문게이트가 하나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다행히도 기억이 맞았는지 바로 도착할 수 있었다.
저번처럼 이상한 구조물을 통해 시드 스넷타로 진입한 나는 생각보다 어두운 사방에 조심하며 앞으로 직진했다. 날뛰는 코요테를 피하고, 눈밭을 걸어 수많은 눈사람을 지나고…, 마침내 또 하나의 구조물을 발견했다.
그 너머는 꿈에서 르나가 보았던 시드 스넷타였다. 나는 저 멀리 서 있는 남자를 보았다. 정말 있어. 작은 중얼거림이 입김을 타고 흩어졌다.
남자는 나를 발견한 듯, 시선을 고정했다. 나는 기묘한 기분에 다급하게 그에게 걸어갔다.
“당신은…, 조난자는 아닌 것 같군요.”
나는 잠시 해야 할 말을 골랐다. 꿈 이야기를 하기에는 이 자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고, 이상한 첫마디였다.
그래서 결국 꺼낸 말은 이것이었다.
“혹시 르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아시나요?”
“아니요. 제가 만난 사람의 이름을 다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기억할 만큼 안면이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역시, 이 자도 르나를 몰랐다. 꿈 속에서 둘은 분명 마주했을텐데도. 그러나 어느정도 예상했던 사실이기에 나는 무덤덤했다.
“용건은 그게 다입니까?”
“…사실, 어쩌다 보니 알게 된 게 있는데.”
“편하게 말씀하시죠.”
“모리안 여신의 꿈을 꾼 사람을 알고 계시죠? 아니면 본인이라던가.”
남자는 미간을 좁혔다. 단정한 생김새 때문에 험악하지는 않았지만 감정의 기복은 느끼기 충분했다.
“당신도 모리안 여신의 꿈을 꾸셨습니까…? 그렇다면 티르 나 노이로 가는 방법에 대해 물어보러 오셨군요.”
호기심에 불과하지만 어느정도 맞는 말이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말을 이었다.
“모리안 여신의 꿈을 꾼 건 제 동료, 루에리입니다. 지금은 행방을 알 수 없죠. 사실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괴로운 표정을 애써 떨쳐낸 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타르라크라고.
“루에리, 저, 그리고 마리까지…. 우리 셋은 티르 나 노이를 찾다가 사라진 세 전사라고 불립니다. 그 여정을 처음 본 당신에게 모두 말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모리안 여신의 말대로 티르 나 노이를 찾지 말라고 당부해드리고는 싶군요.”
꿈과 비슷한 흐름이었다. 내 눈앞의 타르라크도 르나와 같이 내게 [ 영원의 땅, 티르 나 노이 ] 에 대해 읽을 것을 권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책은 이미 읽어봤어요. 티르 나 노이가 실제하지 않은다는 요지의 책이었지요. 하지만, 타르라크. 당신은 티르 나 노이에 가본 거죠?”
타르라크의 태도가 그랬다. 그는 이미 티르 나 노이의 실체를 두 눈으로 확인했을 것이다. 그러니 티르 나 노이가 실제하지 않으니 찾지 말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내 말의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타르라크는 침묵을 택했다.
침묵은 길지 않았으나 그 사이에 타르라크는 많은 것을 생각한 모양이었다.
“맞습니다. 후후…. 말해두지만, 티르 나 노이는 낙원따위가 아닙니다. 그곳은 마족의 땅이지요. 그저 여신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혈기왕성한 모험가들을 마족의 땅으로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그게 제가 당신에게 관심을 끊으라고 한 이유입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