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솔로지 샘플

분장

너는 웃는다. 나는 네 억지 웃음을 구분할 수 있다. 웃고 싶지 않은데 웃어야 할 때 너는 입꼬리를 위로 끌어 올리기만 하고 눈은 접지 않는다. 거꾸로 말하면 나는 네 진짜 웃음을 구분할 수 있다. 네가 진짜로 즐거워서 웃을 때 너는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세게 눈을 찡그린다. 무지개처럼 휘어지는 눈꼬리. 그 아래 구겨지는 주름살. 주름이 아니고 보조개야. 보조개가 아니고 애교용 주름이야. 뭐야, 그럼 결국 주름이네. 네 말이 맞네. 와하하. 우리는 같이 웃었다. 너는 말한다. 너 웃을 때 옆에 있는 사람 치는 거 알아? 나는 대답한다. 몰랐어. 너는 또 말한다. 너무 세게 치지 마. 먼지 날려. 먼지 쌓인 소품 창고 구석에서 우리는 한참을 떠들었다. 어차피 여기 먼지 소굴인데? 내 질문에 네가 대답한다. 먼지 많이 마시면 목 상해. 베리타스, 너 내일 공연하잖아. 너는 웃는다. 나는 네 억지 웃음을 구분할 수 있다. 방금은 가짜 웃음이었지, 그렇지? 공연무대에 오를 일이 없는 너는 먼지를 실컷 마셔도 괜찮다는 말일까.

너와 나는 극단에서 만났다. 너는 나보다 반년 먼저 들어온 선배였는데 기수로는 동기였다. 극단 성격에 맞는 여자 배우가 구해지지 않아서 너의 극단은 구인에 꽤 애를 먹었다. 추가 모집의 추가 모집, 추가 추가 모집의 추가 추가 추가 모집을 거듭해 겨우 뽑힌 게 나였다. 안녕하세요, 올해 처음 연기를 시작한 베리타스라고 합니다. 배우들 앞에서 자기소개를 하고 몇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너는 저 멀리서 계속 뭔가를 정리하고 있었다. 박스에서 의상을 꺼내 옷걸이에 걸었고 망가진 소품은 고쳤다. 몸은 선배들 사이에 있었지만 마음은 네게 쏠려 있었다. 뭐 하는 사람일까? 첫째는 궁금증이었다. 좀 튀는 거 아니야? 둘째는 아니꼬움. 재수가 없었다고 해야 하나. 나는 너의 행동이 새로운 방식으로서의 텃세라고 생각했다. 주연을 여러 번 꿰찼다며 언제든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라는 말로 자신을 소개한 피터에게 물었다.

“저 분은 누구예요?”

“어이, 네불라! 와서 인사 좀 해라.”

피터가 너를 불렀을 때 너는 고무로 만들어진 와인 병을 손수건으로 열심히 닦는 중이었다. 가짜 와인. 무대 위에 있는 것들은 대부분 가짜다. 가짜가 아니면 안 되기 때문에 가짜다. 와인 병이나 잔이 진짜라면, 떨어질 경우에 산산조각이 날 거고 배우들은 다칠 테다. 피를 흘리면서 연기하고 싶은 배우는 아무도 없겠지. 그리고 그런 꼴을 보고 싶은 관객도 없을 거다. 합의된 허구. 그런데도 너는 그 병이 마치 진짜 유리라도 되는 양 광을 냈다. 조심스럽게 병의 입구를 쥐고 어루만졌다.

“못 들으신 것 같은데요.”

너는 계속 병을 닦았고 기어이 피터가 네게 다가갔다. 피터는 키가 아주 컸다. 키 크다는 이야기를 꽤 들었던 나보다도 한참 컸다. (내가 극단 오디션에 합격한 이유 중에는 커다란 덩치도 한몫했다는 이야기를 동기에게 전해 들었다. 여름에 올라갈 공연에 키 큰 여자가 나온다나. 그 연극은 작가가 도망가는 바람에 결국 무산되긴 했지만. 어쨌든 합격했으니 된 거 아닌가, 라고 생각했다. 큰 키는 언젠가 도움이 된다. 특히 무대 뒤에서는 더더욱이나. 조명을 포함해서 공연에 필요한 대부분의 물건은 사람보다 키가 크다. 나는 그것들과 접근성이 좋았고, 배우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필요한 인재라는 걸 진작 알았다) 그런 피터 옆에서 너는 유독 작아 보였다. 작아 보였던 게 아니라 그냥 진짜 작은 거였나? 너는 피터를 올려다 봤다.

“어, 피터. 무슨 일이야?”

높고 얇은 목소리. 하지만 경박하다거나 격이 떨어지는 느낌은 아니었다. 깔끔하고 정돈된 느낌이었다. 투명하고 아름답지만 날카로웠다. 한겨울 지붕 밑에 달린 고드름처럼. 조심하지 않으면 찔리고 말 거야, 너의 첫인상은 위협적이었다.

“베리타스야. 오늘 처음 왔는데 인사는 해야지. 드디어 우리가 찾던 여자 배우라고.”

“안녕하세요, 베리타스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기수로는 동기니까 친하게 지내고.”

“네불라야. 잘 지내 보자.”

“응, 나도.”

네가 손을 내밀었고 나는 망설임 없이 맞잡았다. 두어 번 흔들다가 놓았다. 피터는 만족했는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우리는 네가 늘어 놓은 소품들 사이에 덩그러니 남았다.

“오디션 때 연기 좋더라.”

“그걸 기억해?”

“니나 했잖아.”

니나의 혼잣말을 독백 연기로 준비했었다. 니나는 뻔하다. 갈매기는 뻔하다. 체호프는 더 뻔하다. 니나는 독보적인 여배우가 되고 싶었겠지만 수많은 배우들 입에 오르내린 뒤로는 전혀 독보적이지 않게 되었다. 평범한 나도 니나를 연기하게 되었으니까. 

“보통의 니나는 어딘가 외로워 보이는데, 너는 아니어서 신기했어. 즐거운 일로 인생이 가득한 사람 같았다고 해야 하나.”

너는 와인에서 가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표지도 책등도 가름끔도 있는 완벽한 책처럼 보이지만, 안에는 아무것도 써 있지 않은 가짜 책. 너는 그걸 한 장씩 넘겨 가며 찢어진 곳이 없는지 확인했다. 가짜인데 그게 대체 뭐가 중요해? 하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칭찬 맞지?”

너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디션 때를 복기해본다. 그때 네가 심사위원들 사이에 앉아 있었나? 기억이 흐릿했다. 내가 또렷하게 기억하는 건 오디션에서 절었던 대사뿐이었다. 니나가 뜨레고린 부부를 보면서 놀라워하는 부분. ‘저렇게 유명한 여자 배우가 울다니. 그것도 저런 쓸모없는 일을 가지고 울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야, 게다가 작가 선생님도 이상해. 대중의 사랑을 받는 유명한 작간데. 온갖 신문에 기사가 실리고, 초상화가 팔리고, 여러 나라의 언어로도 번역될 만큼 훌륭한 분인데. 하루종일 낚시만 하면서 잉어 두 마리를 잡은 일에 그렇게까지 기뻐하다니! 나는 유명인들이란 오만하고 범접할 수 없는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했어. 가문과 부를 무엇보다도 중시하는 군중에게 자신의 영광과 명성으로 복수하면서 군중을 경멸할 줄 알았어. 그런데 저렇게 울고, 낚시질이나 하고, 카드 게임을 하면서, 웃어대고 화를 내기도 하잖아. 마치 보통 사람들처럼!’ 나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무려 세 번이나 다시 말해야 했다. 그 바람에 나머지 대사는 잔뜩 격양된 채 뱉을 수밖에 없었다. 대중의 사랑, 사랄, 사, 사랑. 사랑, 사랑을 받는. 오디션 이후로는 갈매기를 꼴도 보기 싫었다. 하필이면 살던 곳이 바다 근처라 매일 갈매기가 날아들었고 볼 때마다 쏴 죽이는 상상을 했다. 1막에서 총이 등장했으면 2막이나 3막에서는 반드시 발사되어야 한다는 체호프의 말을 되새기며.

“칭찬이라고 생각할게.”

책이 북 찢어졌다.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지 칭찬은 아니었어. 네가 말했다. 빈정이 팍 상했지만 나는 이제 막 극단에 들어온 신입이었고 어쩔 수 없이 웃음으로 상대했다. 언젠가 상대 역할로 만나면 좋겠다. 또 보자, 이만 갈게.

대사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호흡을 교정해 주는 사이가 된 건 그날 이후로 꼬박 두 달이 되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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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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