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정) _ 5
부화뇌동
네불라는 이제 홀로 그 빈방, 상자의 모양을 모방한 공간 안에서 주어진 것들 사이에 남게 되었다. 모든 주어짐이 부유를 상징하지 못하는 듯, 주어진 의자, 주어진 테이블은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새것에 가까웠지만 빈곤이었다. 광원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사방이 막힌 이 상자 안에서 날개뼈를 감싸고 있는 근육을 움찔거리며 네불라는 혹시라도 다시 시도해 보자면 광원을 발견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경련하는 근육의 부위를 천천히 목으로 옮기고, 목덜미를 빳빳하게 세워 고개를 들었지만, 광원이란 단어와 아주 상관없는 인생을 살아온 탓에, 혹은 그 단어를 떠오르지 않은 채 그것을 찾으려는 모순이 발생한 탓에 허탕이 되어버렸다. 알고 있음과 인지는 다른 문제였다. 대신 아주 희미한 선들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인간이 아닌 물질로, 정적의 존재를 마주한 그는 이젠 정적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선들은 상자의 모서리들로, 이 공간의 벽면, 즉 끝과 부딪혀보지도 않고 막혀있음을 증명하는 수단이다. 선은 세 개가 모이기 시작하면 실재든 면을 구성해 내는 창발적 재능을 갖는 특징을 지니는데, 그 안이 채워진 면적인지는 실제의 문제다. 모서리를 쫓는 네불라의 눈꺼풀이 감겼다 뜨이며 속눈썹 사이사이 점막의 공간에 유분과 체액이 스몄다.
전등도, 램프도, 그 어떠한 가스등도 네불라는 찾아내지 못했다. 그가 이 방에 갇힌 후 그를 스쳐 간 세 명의 사람과 세 개의 카드를 보내고 난 뒤, 여섯 모서리를 사방의 목덜미 근육을 수축하고 이완해 가며 다 더듬고 난 뒤에서야 떠올린 네불라는 급격히 풀리는 긴장감과 몰리는 긴장감—놀랍게도 둘은 공존할 수 있으며 자주 함께 도래한다—은 눈 밑을 떨게 했고 그 경련이 전신으로 퍼지기 전, 자신의 등을 등받이에 기울였다. “저기요.”. 다시. “누구 없나요? 정말로요.” 다시. 그리고 또다시. 네불라는 분명 문장을 구사하며 빈 공간에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 말을 듣는 사람이 부재하기 때문에 소리는 소리에서 그쳤다. 그 결과 누군가를 원하는 처음의 두 문장만이 누구든 들었을 때 이해할 만한 언어로 기록으로 남을 수 있었다. 정말, 이란 단어부터는 소리가 제멋대로 얽히기 시작하여서 떠들고 떠들고 또 떠들려서 휘둘려졌다. 그 끝의 파장이 날카롭게 깎이기도 했고, 투명하게 고꾸라지기도 했다. 그리고 의미 없는 헛소리에 소리만큼이나 네불라는 비록 분명하게, 여전히 무력한 몸을 의자 위에 얹힌 상태였지만 두 팔꿈치가 부딪혀 박수를 치거나, 대관절 고관절이 퍼뜩 접혀 탄력을 잃은 뒷허벅지의 가죽이 팽팽하게 당겨져 찢기기 직전까지 오른쪽 다리가 올라가 발바닥으로 자기 뺨을 몇 번이나 후려치는 게 아닌가 하는 신체적인 행위가 겉껍데기로 한 겹 쌓이듯 걸쳐졌다. 정말로 그가 가슴은 움푹 파이고, 척추의 정렬은 좌우로 흔들려 기조가 없는 노인이 되어버렸지만, 아마 그도 그 탓에 자신이 무엇을 해냈는지 인식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의미 있게 기록할 것은 그가 마지막으론 헛소리가 아닌 대상이 필요한 누군가를 원하는 원하고 필요해하는 말을 해냈다는 것이다. “저는 네불라라고 해요.”
사람도, 카드도 인사할 겨를 없이 사라졌다. 카드에 적힌 글은 어째서 잉크가 아닌 레터프레스를 활용했는지. 글자마저도 색이 없으니 홀로 남은 작은 노인은 자신의 존재감을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다. 공장에서 짜인 실과 거친 셔츠, 고무와 섞인 서스펜더, 석유와 자신의 멜라닌 구두. 피부 아래 근육 사이 스며든 지방. 콧볼과 가라앉은 볼이 닿아 접힌 곳에서 공기와 닿지 못해 산패하지 않은 기름. 언제 끼인지도 모를 손톱 밑의 때. 긴장감에 발기한 유두. 미묘하게 바닥과 수직을 이루지 못한 발목의 꺾임. 평생을 살면서 이만큼 내사를 해냈던 순간이 있었을까. 개인이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는 것은 자신을 보는 것과 다름이 없었고 만들어진 자신을 본인 앞에 세우는 일이다. 여기서 모순은 발생했다. 노인은 스스로를 구성하는 신체를 실감할 수는 있었다. 살덩이와, 그 순간에도 이미 많이 닳아버린 염색체를 가지고 호흡하는 미시적 세포까지 실감할 수 있었다.
건조한 손으로 손바닥을 펴고 마른세수를 하며 손톱 옆 거스러미가 피부를 긁었지만 네불라는 개의하지 않았다. 내사를 통해 꺼낸 자신이 이제 맞은편에 앉아있다. 텅 빈 자신. 네불라는 물질적 자신만 읽어낼 수밖에 없어 한계를 안고 이젠 투사되는 대상. 마지막 대화 상대임을 직관이 알렸다. 눈을 감은 네불라. 호흡을 해 숨을 달구는 노인.
눈꺼풀이 감겼다 뜨이며 속눈썹 사이사이 점막의 공간에 유분과 체액이 스몄다. 광원은 꺼졌다. 눈을 떠도 광원은 꺼진 상태였다.
누구는 흰 상자에 남겨지고. 네불라는 너무나 많은 것이 꽉 차 있는 자신의 방에서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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