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솔로지 샘플

Origin

감자

네불라를 만난 이후 원치 않게 한국에 관해 숙고하게 됐다. 순전히 국민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이룩한 나라, 아주 대단한 나라, 불고기 김밥과 김치. 그가 일했다는 세탁소의 사장이 한국계 미국인임을 감안하면 잘 아는 게 신기한 일은 아니다. 한류니 BTS니, 마트에 드나드는 중등 학생이 떠드는 걸 들어보면 한국이 요사이 더 유명해지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는 잘 모른다고 대답했지만, 네불라 만큼은 알았다. ‘그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던 것뿐.

가족 중에 언급을 꺼리는 건 나뿐이지만, 바로 그래서 한국이라는 나라를 오래도록 관심 밖에 처박아 두었다. 뿌리나 고향이라는 말도 싫어했다. 애초에 다른 가족과는 같아질 수 없다는 말처럼 들렸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피부색과 홑꺼풀과 눈동자 색깔은 숨길 수 없다. 바꿀 수도 없다.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지? 내가 있는 곳은 그렇게 잘난 미국 땅이고, 서류로는―여기까지 가는 건 너무 구차하다는 걸 알고 있다―나도 미국인인데.

오해는 마시길. 한국이 싫은 게 아니다. 내가 미국에서 한국으로 입양 갔다면 어떻게든 한국인과 다르지 않은 한국인이 되고 싶었을 테니까.

친부모님은 일사천리로 합의 이혼했다. 다른 어른들에게 부모님의 이혼 사실을 덤덤하게 말하면 그들은 어쭙잖은 동정심이 가득한 눈빛을 보내면서도 내 태도를 언짢게 생각했다. 그러다 한참 후에 무언가 깨달은 표정을 지으며 역시 아홉 살짜리가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고 말했다. 물론 이혼이 어떤 절차로 이루어지는지, 정확히 어떤 상황이어야 성립하는지는 여전히 모른다. 하지만 나는 부모님이 헤어지리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어서, 두 사람의 결정에 놀랄 수 없었다. 그들은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다.

너희 아빠랑 이혼했어. 엄마는 토요일 4교시를 마치고 돌아온 내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통보했다. 나는 책가방을 내려놓지 않고 엄마가 혼수로 해온 고동색 업라이트 피아노 위판에 놓인 도서관 카드를 챙겼다. 민지랑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올게요. 그날 도서관은 휴관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나를 떠넘기려다 실패하자 아예 외국에 보내버리기로 했다. 그 결정도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당사자와의 합의는 없었다. 입양특례법에 따라 국내 입양을 권고받았지만, 외할머니는 양심 없는 자식들이 때마다 찾아가 친부모랍시고 간섭하는 꼴은 보기 싫다며 차라리 미국에 보내달라고 담당 공무원을 상대로 세 시간이나 대거리했다. 고만고만한 나라에서는 큰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잘 사는 나라 가서 잘 살라고. ‘잘’이라는 말을 거듭 강조하던 외할머니는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내 손을 꼭 붙들고 꼬박 한 시간을 울었다.

미국으로 갈 때까지 외할머니 집에서 지냈다. 외할머니는 매일 같이 김치찌개와 불고기를 해주셨다. 아메리카에 가면 못 먹을 거라고, 거기 사람들이 진짜 맛을 알기나 하겠냐고. 푸릇한 야채가 그리울 때쯤 출국 날이 됐다.

매일 밤 비행하는 꿈을 꾸었다. 서른세 번 중 네 번은 추락했고 자유의 여신상을 들이박기도 했다. 불과 사 년 전 미국에서 일어난 사고의 인상도 큰 영향을 끼쳤다. 자질구레한 구체를 제외하고 현상만 구술한 결과 키 크는 꿈이라는 대답으로 돌아왔지만, 내게는 현실의 공포였다. 나는 언제나 최선의 환상보다 최악의 현실을 떠올렸다. 어차피 후자가 승리하게 되어 있다.

공항으로 가는 걸음이 무거웠다. 버림받는다는 기분이 끔찍해서, 낯선 나라에 가기 싫어서 따위의 거창한 이유가 아니라, 비행이라는 비자연적 행위가 무서웠다. 인간이 하늘을 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지 않나. 그쯤에 만화로 읽은 이카로스도 내게는 반역에 관한 이야기로밖에 읽히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해방감이 들기도 했다. 외할머니의 입에서 나온 숱한 ‘아메리칸드림’을 듣고 나면 누군들 낙관적 미래를 그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가난과 싸움에서는 벗어날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구차하고 궁핍한 생활을 청산하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위로했다.

탑승 수속과 열 시간 이상의 비행에 대한 감상은 의외로 없다시피 한다. 이륙 직후부터 착륙 직전까지 잠으로 회피했다. 나를 담당했던 직원이 기내식을 권했으나 아예 창문 쪽으로 몸을 돌리고 눈을 감았다. 굳이 회상하자면, 연안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너울에 간신히 몸을 싣고 이리저리 떠밀리는 기분이었던 것 같다.

뉴욕 공항은 특이한 냄새가 났다. 닳은 고무 타이어 표면에서 날 법한 끈적거리는 냄새였다. 나는 일부러 눈을 비비면서 늘어지게 하품했다. 펜촉을 수첩에 꾹꾹 눌러가며 무언가를 적던 직원은 내 모습에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무한히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수하물을 기다렸다. 한국을 떠나며 가지고 온 캐리어는 한 치의 거짓말도 없이 내 몸만 했는데, 그걸 들고 먼 길을 갈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진작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을 영어도 자각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걷잡을 수 없이 내 의식을 파고들었다. 파주 영어마을과는 다른, 진짜 세상에 던져진 기분이었다. 코끝이 아파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때, 샛노란 프리지어 꽃다발이 불쑥 코 앞에 다가왔다. 생글거리는 향기에 눈이 따끔했다. 다니엘, 아빠였다.

“수아?”

다리가 길쭉하고 눈동자가 새파란 남자. 첫인상은 그뿐이었다. 내가 촉촉하고 말랑한 꽃잎을 만지작거리는 동안 담당 직원과 몇 마디 나누더니 한 손으로 캐리어를 번쩍 들고 나머지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팔꿈치까지 흘러내린 가방끈을 꼭 붙잡았다. 다니엘은 오른쪽으로 갸웃하더니 무릎을 굽히고 앉아 다시 손을 내밀었다.

“이제 내가 네 아빠야, 수아.”

카세트테이프도, 디즈니 만화 영화도 아닌 눈앞에 있는 사람 입에서 나오는 영어가 낯설고 빠르고 알아듣기 어려웠다. 하지만 나는 ‘아빠’라는 단어에 무력하게 이끌려 다니엘의 손을 잡았다.

그의 집으로 가는 내내 생각했다. 가족이 뭘까, 나는 앞으로 뭘 기대하고 살아야 할까. 근원과 기원이 중요할까. 중요하다면 어떻게 간단히 버리지? 중요하지 않다면 왜 오래 슬프지? 삶은 답을 알려주지 않고 종결로 달려갔다. 지금도 달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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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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