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하도스

쇼맨앤솔

모하도스

1

분명 할리우드는 여기서 멀었다. 리오그란데 강을 따라 죽 늘어선 밀입국자의 캠프에서 할리우드까지의 거리 사이에 작은 섬나라 다섯 개를 집어넣을 수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캠프의 아이들 사이에서 ‘할리우드 놀이’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이 놀이는 국경을 넘기 전에 함께 놀았던 아이들 사이에서 시작되어 강을 건너서 미국에서도 이어졌다. 할리우드 놀이에 유별날 것은 없었다. 그냥 유년기에 누구나 거쳐 가는 역할극 내지는 소꿉놀이의 소재가 미국영화일 뿐이었다. 거기 모인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모하도스Mojados’, 즉 ‘물에 젖은 사람들’로서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 기회의 땅으로 건너온 모험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냄새나고 척박하며 냉방도 난방도 기대할 수 없이 텐트 치고 자는 환경일지언정 지금 이곳이 미국이라는 데 걷잡을 수 없는 흥분을 느꼈다. 그래서 이 역할극은 ‘할리우드 놀이’라고 부르면 세 배로 재밌어졌다. 이 놀이의 캐스팅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번엔 내가 배트맨 할 거야.”

“네가 무슨 배트맨이야. 그냥 사라 코너 해.”

“너 저번에 악당 죽인 게 나라서 삐져가지고 그래?”

“아니거든? 배트맨은 사람 안 죽인대. 그래서 일부러 내가 안 죽인 거야.”

“그건 너 같은 쫄보가 해서 그렇지. 내가 하면 죽일 수 있어.”

캐스팅 과정의 마찰은 대개의 경우 락-시저-페이퍼로 해결이 되었다. 망명길에 오른 아이들이 최신 개봉작을 볼 여유가 있었을 리 만무했으므로 캐릭터는 언제나 예고편과 포스터, 들려오는 입소문을 짜깁기해서 구축되었다. 명색이 ‘할리우드 놀이’였지만 모든 인물이 스페인어로 말했으며, 가끔씩 이상한 맥락에서 쉬운 영단어가 툭툭 난입하는 형식이었다. 이 세계에서는 다스베이더가 사실은 터미네이터의 쌍둥이이고 배트맨이 식인 상어와 싸웠다.

앙헬은 리더, 행동대장 역할을 맡길 좋아했다. 최고의 자리에 서거나 제일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 그에게는 중요했다. 언제나 정의의 조직을 앞장서서 결성하고 반드시 자신이 그 팀의 이름을 지어야 직성이 풀렸다.

“우린 ‘블루 코요테’야, 온 우주의 영웅들이 모여서 만든 정의의 연맹이지.”

에두아르도는 픽션에서 흔한 차분하고 냉철한 주인공의 두뇌파 라이벌 캐릭터를 동경했다. 그래서 짜증나게 굴지만 필요할 때는 활약하는 캐릭터를 잡았다. 그러나 본인이 그렇게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라 언제나 없던 비밀을 만들어서 알아내는 꼼수를 써서 자기 캐릭터의 똑똑함을 드러냈다. 

“적의 약점은……. 루크리치오라는 돌이야. 사실 내가 너희들 몰래 데스 스타에 잠입해서 비밀 암호를 해독했거든. 암호 해독은 복잡해 보이지만 기본을 알면 쉬워. 감사 인사는 됐어.”

그리고 마네트가 있었다. 할리우드 놀이를 하는 아이들은 많게는 여섯 명까지 불어났지만 고정 멤버는 앙헬, 에두아르도, 마네트였다. 그들 중 마네트가 유일한 여자애였다. 마네트의 역할은 좀 독특했다. 마네트는 거의 놀이가 시작하자마자 희생하려고 했다. 시시한 위기도 마네트가 몸을 던져 아군들을 구하는 역할을 하면 적당히 심각한 위기가 되었다. 그다음에는 친구들이 마네트의 죽음을 과장되게 애도했다. 복수의 이유가 되어 주기도 했다. 그러면 마네트는 유령으로 변해 친구들 주변에서 떠돌다가 가끔 중요한 이야기를 꿈에 나와서 전해줬다. 유령의 계시에 단서를 얻은 친구들이 마침내 적을 쓰러트리면, 마네트는 항상 부활했다. 그러면 아무리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 말도 안 됐어도 그럴싸한 해피 엔딩으로 할리우드 놀이는 갈무리된다. 

나뭇가지는 광선검이 되었고 헝겊이 망토가 되었다. 수천 수만 우주함대의 전쟁은 모래에 그리는 그림과 몇 줄의 설명으로 대체되었다. 이 놀이는 척박한 상황의 제약을 하나하나 우회하는 데 진정한 묘미가 있었지만, 그런 해결 가능한 제약과는 질적으로 다른 치명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다. 놀이가 유지되려면 누군가는 악역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아무도 악역 맡기를 원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작은 게임을 해서 진 사람을 시키다가 악역 역할을 맡은 배우가 재미 없어서 설렁설렁 하는 게 티가 나자 결국 아이들은 기꺼이 자기들과 놀아줄 용의가 있는 어른 한 명을 끼워줬다. 모두의 미움을 사고 벌 받아 죽는 역할만 해도 서운해하지 않으면서도 이 놀이를 비웃거나 장난 취급하지 않을 어른, 그게 바로 네불라 아저씨였다. 

네불라 아저씨를 데려온 건 마네트였다. 마네트와 네불라, 둘 다 파라디수스 사람이었지만 국경을 건너기 직전까지만 해도 초면이었다. 파라디수스는 내전으로 망한 지 3년 된 작은 국가였다. 대부분의 국민이 해외로 빠져나갔기 때문에 당시만 해도 어느 난민 커뮤니티를 가나 파라디수스인이 몇 명은 섞여 있었다. 네불라와 마네트는 각기 다른 방향에서 걸어오다가 리오그란데 강폭이 20m로 줄어드는 구역에서 만났다. 마네트는 강을 건너기 위해 준비 중인 무리에서 외따로 떨어져 멀뚱멀뚱 서서 강 건너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수심이 성인 허리까지 오는 강이 마네트에게는 위험했던 것이다. 그때 네불라가 마네트를 도와줬다. 네불라는 마네트를 번쩍 목마 태우고 강을 건넜다. 아이가 낯선 어른에게 낯 가리는 티가 나서, 네불라는 《인어공주》의 마녀 흉내를 냈다.

“인어공주야, 육지에 가고 싶다면 네 목소리를 주렴! 네가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노래한다면, 마법 상자 안에 네 목소리가 담길 거란다.”

마네트는 깜짝 놀랐다. 서로 대화는 안 나눠 봤어도 같은 파라디수스인이니까 가끔 네불라를 유심히 살펴본 적 있었는데, 그때는 분명 과묵하고 수줍음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히히히히’하는 웃음소리까지 내면서 진짜 마녀가 되어 있었다. 마네트는 네불라가 시킨 대로 노래할 틈도 없이 깔깔 웃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벌써 강 건너편, 미국이었다. 

이 인상적인 필모그래피 덕분에 네불라는 아이들의 할리우드에서 악역을 따낼 수 있었다. 네불라는 영광스러운 캐스팅 제의에 흔쾌히 응했다. 그 후로 할리우드 놀이는 한 달 동안 이어졌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놀이의 고정 멤버들이 한 달이나 망명 신청 접수를 위해 대기해야 했다는 이야기도 된다. 일단 여기서 허가를 받아야 북부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는데, 망명국이 망명자들을 쫓아내기 위해 일부러 대기 시간을 하염없이 늘리기라도 하는 듯 그들의 차례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오늘의 할리우드 놀이는 거의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에두아르도가 앙헬에게 나뭇가지 무전기로 무전을 걸었다.

“배트맨, 오버. 준비됐나? 오버. 신성한 돌 루크리치오를 획득했다, 오버. 8중 보안으로 갤럭시 연합의 창고에 숨겨져 있었다, 오버.”

앙헬이 에두아르도에게 답신했다. 

“순간이동장치로 내게 보내라, 오버.”

에두아르도는 줄무늬가 독특한 조약돌을 앙헬에게 휙 던졌고, 앙헬은 첫 시도에 낚아채는 데 실패했다. 앙헬은 조약돌을 호주머니에 넣고 외쳤다. 

“다스베이더! 나와라! 복수의 때가 왔다!”

네불라는 덤불 속에 숨어 있다가 위압적인 걸음걸이로 튀어나왔다. 

“넌 졌다. 저항해 봤자 소용없어. 신성한 돌 루크리치오가 아니라면 나를 쓰러트릴 방법은 없다. 하지만 루크리치오는 8중 보안으로 누구도 뚫을 수 없는 금고 속에 봉인되어 있으니 나는 무적이다.”

앙헬은 호주머니에서 루크리치오를 꺼내 높이 치켜들고 외쳤다.

“하지만 시고니 위버가 금고를 뚫었지! 자, 네가 죽인 사라 코너의 복수다!”

사라 코너는 마네트의 역할이고 시고니 위버는 에두아르도의 역할인데, 에두아르도는 시고니 위버가 《에이리언》 포스터 가운데쯤 있는 남자 이름이라고 착각해서 그 역할을 맡은 것이었다. 아무튼 네불라는 과장된 연기로 깜짝 놀란 척을 했다. 

“아니, 어떻게 루크리치오가 네놈 손에 들어갔지? 이제 루크리치오로 초음파공격 주문을 외우면 나는 끝장이야! 하지만 네놈이 그렇게 어려운 마법을 성공시킬 리 없지!”

보통 이 놀이에서 ‘초음파공격 주문’이라 함은 물수제비를 뜻한다. 놀이는 대개 강변에서 이루어졌는데 물수제비가 거기서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초과학적이고 신비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앙헬이 집중해서 물수제비를 뜨려고 자세를 잡았을 때, 앙칼진 목소리가 앙헬을 불렀다.

“앙헬, 내가 낯선 어른이랑 놀지 말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니?”

앙헬은 중요한 순간에 흥이 다 깨져서 짜증이 났다. 

“낯선 사람이 아니라 네불라 아저씨야, 엄마.”

앙헬의 엄마는 네불라를 가리키며 멕시코 토착어로 뭐라뭐라 쏘아붙였다. 앙헬을 풀이 죽어 엄마 손에 끌려가고, 이제 마네트와 에두아르도만 남았다. 에두아르도가 엄숙하게 말했다.

“앙헬은 배신자야.”

네불라는 어르듯 말했다. 

“친구한테 그런 말 하면 못써.”

에두아르도는 자기보다 30살은 더 많은 아저씨를 동정하듯 말했다.

“진짜 못 쓰는 건 앙헬네 아줌마지. 아저씨한테 뭐라고 했냐면…….”

네불라는 공격을 회피할 때 나오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알려주지 않아도 괜찮아.”

에두아르도는 진지하게 말했다. 

“앙헬이 왜 별말 없이 우릴 버리고 엄말 따라갔는지 알아? 자기한테 엄마가 있다는 걸 자랑하려고 그러는 거야. 지는 우리 같은 고아들이랑 다르다, 그런 티를 내려고.”

그러자 마네트가 툭 던지듯 말했다.

“난 고아가 아니야.”

에두아르도는 짜증이 솟구쳐 소리를 빽 내질렀다.

“그럼 너네 부모님은 어디 계시는데? 너 저번에 부모님 두 분 다 돌아가셨다며?”

마네트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어, 그랬지.”

“그런데 고아가 아니라고?”

“난 다른 식으로 더 많이 불렸어.”

“뭐라고 불렸는데?”

마네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 

“수페르스테스.”

물론 고립된 섬나라에서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라틴어를 멕시코인이 알 리가 없었으므로, 에두아르도는 어리둥절해졌다. 에두아르도는 네불라가 마네트와 같은 파라디수스 출신인 게 생각났다. 통역을 부탁하려고 네불라를 불렀는데, 네불라의 표정이 이상하게 묘했다. 

“아저씨, 수페르스테스가 무슨 뜻이야?”

네불라는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화들짝 몸을 떨었다. 그는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놀이 계속 안 할 거니? 다스베이더를 죽이지 않으면 사라 코너가 부활할 수 없는데.”

에두아르도는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재미없어, 앙헬도 갔는데 우리끼리 뭘 해.”

네불라가 말했다. 

“아니, 분명히 재미있을걸? 이번엔 정말로 진짜처럼 해 볼게. 오리지널이랑 똑같이 할 수 있어, 봐…….”

“됐다니까.”

하지만 마네트는 쾌활하게 말했다. 

“왜, 난 보고 싶은데!”

네불라는 옆에서 바가지를 주워 뒤집어쓰고 산소 호흡기의 소리를 흉내냈다. 아이들은 순식간에 네불라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루크, 넌 아직 네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르고 있다. 이제서야 비로소 네 힘을 발견했을 뿐이야. 내게로 오너라.”

아이들은 네불라의 흉내에 빠져들었고, 네불라는 목소리를 낮게 깔고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악당을 모사했다. 

“네가 어두운 면의 힘을 진작 알았더라면... 오비완이 네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 말도 않은 게로구나.”

엄밀히 말하면 네불라의 흉내는 다스베이더의 연기를 맡은 데이비드 프라우즈, 목소리를 맡은 제임스 얼 존스 둘 중 어느 쪽도 완벽히 닮지는 않았다. 그러나 장난으로 내는 흉내 차원을 넘어선 어딘지 범상찮은 위압감, 누구든 돌아보게 만드는 권위적인 명령자의 목소리가 그의 흉내에 실려 있었다. 마침내 네불라가 그 대사를 말한다. 

“내가, 너의 아버지다.”

사방에 정적이 흘렀다. 아이들만 조용히 한다고 이렇게까지 깊은 정적이 흐를 수는 없었다. 이제는 주변에 있던 어른들까지 네불라의 연기를 몰입해서 보고 있었다. 누군가 그 정적을 뚫고 박수했다. 곧 걷잡을 수 없는 불길처럼 네불라를 지켜보고 있었던 모두가 박수를 보냈다. 모두가 그를 보고 있었지만 네불라는 박수소리가 멎어들 때까지 바가지를 쓰고 있어서 자신을 향한 시선들을 볼 수 없었다. 그가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할 때에야 바가지가 머리에서 떨어졌다. 그는 은신처로 숨어드는 사냥감처럼 자신의 텐트로 돌아갔다. 남겨진 아이 둘은 변두리에 있는 고아들의 텐트까지 함께 걸어가면서 재잘댔다. 에두아르도가 물었다.

“근데, 수페르스테스가 그래서 뭐야?”

마네트가 대답했다.

“스페인어로는 뭐라고 하는지 잘 모르는데……. 영어 할 줄 알아?”

“너보단 잘할걸.”

“수페르스테스는 서바이버라는 뜻이야.”

“서바이버? 생존자?”

“생존자? 날 고아라고 부르는 사람들보다 생존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았어. 왜냐면 엄마 아빠뿐 아니라 우리 마을 사람들이 전부 다 죽었거든.”

“……전쟁 때문에?”

마네트는 여태껏 보여줬던 태도와는 영 딴판의, 어딘지 공허하고 서글픈 어조로 대답했다.

“미토스가 그랬어. 내가 태어나던 해 내 도시를 폭격했어.”

2

이곳 사람들은 서로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어차피 잠시 머무르다 떠나면 잊힐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그냥 친구를 만들기에는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너무 바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네불라는 달랐다. 캠프의 모든 사람들이 그 쇼맨을 알았다. 다스베이더 흉내는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모든 사람을, 픽션 논픽션 가릴 것 없이 다 따라했다. 부시 흉내가 제일 인기가 많았다. 네불라의 가장 멋진 점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니, 완전히 바라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는 모방의 원천이 될 자료를 라디오에서 수집했는데, 그에게는 라디오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라디오를 빌려주었다. 그게 그가 바라는 유일한 것이었다. 아마 파라디수스의 소식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망한 지 사 년이 지난 나라의 소식이 국제뉴스에 흘러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는 모든 것을 다 흉내낼 수 있었지만 딱 한 번 의뢰를 거절한 적이 있었다. 웬 장년의 루마니아인이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를 흉내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 독재자에게 원한이 많은 루마니아인들을 모아 놓고, 네불라가 그를 조롱하는 쇼를 해 주면 정말로 고마울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는 인권단체에서 보내 온 구호물품 중 자신의 몫 전부를 약속했다. 물론 네불라는 차우셰스쿠의 말투며 행동, 심지어 어떻게 생겼는지까지 아는 바가 없었다. 루마니아인은 그냥 적당히 최악의 인간말종을 생각해서 연기하면 된다고 말했지만, 네불라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루마니아인은 이해한다는 듯 돌아서려다, 뭔가 아쉬워 한 마디를 괜히 던져 보았다.

“파라디수스에도 있었다고 들었어요. 인간말종 독재자가요. 그냥 그 사람처럼 해도 되는데. 어차피 독재자라는 게 다 비슷비슷하잖아요.”

네불라는 말없이 웃었다. 어느 모로 보나 상황을 적당히 마무리하려 하는 그런 웃음이었다. 루마니아인은 돌아가려다, 구호 물품에 끼어 있던 치약 하나를 내밀었다.

“그래도 이거 하나는 받아요. 에이, 사양하지 마시고. 코미디언은 이빨이 새하얘야죠. 진지하게 정말로 고마워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우리를 웃을 수 있게 해 주신 것 말이에요. 어느 면에서 이건 기적이에요. 전 딸을 잃었어요. 그런데 그 후로 처음으로, 당신 덕분에 처음으로 웃었어요. 당신이 마이클 잭슨을 흉내냈잖아요! 제 딸이 마이클 잭슨을 그렇게 좋아했어요. 살아 있을 땐 평생 만날 일도 없는 슈퍼스타 때문에 암시장을 들락거리는 것만큼 철딱서니 없는 짓도 없다고 말했는데……. 근데 그날 꿈에 딸애가 나온 거예요. 미국에 오고 나서 한 번도 안 나왔는데 말이죠. 걔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진짜 마이클 잭슨은 네불라가 흉내낸 것보다 훨씬 멋있대요. 하하, 저는 제가 다시 웃게 될 줄 몰랐어요, 네불라 씨, 고마워요, 정말로 고마워요…….”

그때, 네불라는 아주 작게 뭐라고 말했다. 루마니아인이 되묻자 네불라는 ‘고마워요.’라는 말이었다고 답하고 황급히 치약을 받아 자리를 떠났지만, 루마니아인은 분명 그때 네불라에게서 ‘그만.’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네불라의 평판은 나날이 좋아졌다. 이제 어떤 부모도 자기 아이들이 네불라와 논다고 경계하지 않았다. 아우슈비츠의 구호품 중 립스틱이 섞여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착오로 들어왔다는 얘기도 있고 수감자들의 인간성을 회복시키기 위해 넣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생존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립스틱을 수용소의 여자들이 꼬박꼬박 발랐다는 증언은 일치한다. 네불라는 그 립스틱 같은 사람이었다. 사방이 벽이고 미래가 잿빛일 때 오늘을 채색하는 존재. 그러나 단 한 명, 무루스라는 파라디수스인만은 네불라를 싫어했다. 

무루스는 이 캠프에 머무른 지 여덟 달은 된 고참이었는데, 네불라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망명 심사에서 떨어졌다. 파라디수스 혁명 당시 공산 세력 반군에 가담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그는 여기까지 오는 데 모든 힘을 다 써서 심사 탈락 후 다음을 모색할 기력이 없었는지 텐트촌에서 꼼짝도 안 하며 누군가 자길 잡아다 추방할 때까지 버티기로 했다. 늘 술에 취한 채로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었기 때문에 경찰보다 먼저 다른 밀입국자들이 그를 쫓아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처음에 무루스는 네불라에게 관심이 없었다. 네불라뿐 아니라 캠프의 모든 사람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지냈다. 그러니까 그도 원래는 보이는 사람마다 붙잡고 네불라 욕을 하거나 네불라의 쇼마다 따라다니면서 야유하지는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된 건 이 주 전부터였다. 무루스는 술에 취해 있을 때마다, 즉 곯아떨어진 순간을 제외하고 언제나 자신의 혁명군 시절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영웅을 홀대하는 미국을 욕했다. 그의 이야기는 어제의 버전과 오늘의 버전이 언제나 불협화음을 냈는데, 본인으로서는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에 확신이 있는 듯했다. 한 가지 일관성이 있다면 이 무용담은 언제나 결박된 파라디수스의 독재자에게 약식 재판을 내린 후 총살한 혁명군 중 자신이 포함되었다는 이야기로 끝났다는 것이다. 그 혁명군의 수는 일곱 명일 때도 있고 스물세 명일 때도 있었지만 이 일화 자체가 생략되는 일은 없었다. 

이 주 전, 무루스는 근 3개월 중 가장 운이 좋았다. 그의 무용담을 술꾼의 헛소리 취급하지 않고 진지하게 들어 주는 방청객을 찾아낸 것이다. 아이들은 무루스가 어른들 사이에서 평판이 안 좋은 걸 눈치챌 감이 있었다. 아이들은 무루스를 피해 다녔고, 무루스도 아이들을 싫어했다. 그러나 마네트만은 달랐다. 무루스가 하도 혁명 당시 자신의 활약을 반복 재생하다 보니 마네트의 귀에도 그가 미토스를 쏴죽였다는 소식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의 말이 진실인지 확신할 수가 없더라도 마네트는 남몰래 가족의 원수를 쏴 죽인 혁명 영웅을 숭배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무루스를 욕할 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뭔가 단단히 오해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마침내 이 위대한 복수자에 대한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했던 어느 날, 마네트는 무서운 술꾼에게 말을 걸었다. 

“아저씨가 진짜 미토스를 죽였어요?”

무루스는 그 시절 극단에 다다른 사람처럼 과음했는데, 마네트의 질문에도 몽롱한 기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한 답변만큼은 아주 많이 반복해 봤기 때문에, 청산유수로 내뱉을 수 있었다. 

“12월 전투였지. 12월 중에서도 가장 추운 날이었어. 우리는 그 쥐새끼 같은 독재자가 밀항을 준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파라디수스 북서쪽 해안에서 급습하기로 했지…….”

무루스가 아이에게 얘기하는 것임에도 자신의 레퍼토리를 조금도 수정하지 않아서 마네트는 군대 용어가 난무하는 무루스의 이야기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덕분에 그가 터무니없이 적군의 수를 불려서 과장하고 있음을 알아채지도 못했다. 마네트는 서둘러 미토스의 처형 부분을 듣고 싶어했으나, 무루스는 모든 수순을 밟으려 했다. 

“……미토스를 처음 생포해서 묶어놨을 때, 누군가는 그런 놈도 정식 재판을 거쳐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렇게 되었다가는 정치질로 빠져나와 천수를 누리다 죽을 게 뻔하잖아? 엄청난 토론이 벌어졌지, 그리고 결국 즉결처분 쪽이 이겼어. 다들 그 작자 때문에 한 사람쯤은 잃어봤으니까. 나 역시 이번 전투에서 동생을 잃었고……. 미토스는 재갈이 물린 채 그 얘길 다 듣고 있었지, 자기 생사를 두고 벌이는 그 얘기들을. 겁에 질린 꼴이 정말로 쥐새끼 같았어, 재갈을 풀자마자 되도 않는 말들을 쏟아내면서 살 궁리를 하는 게 얼마나 구차하던지……. 나는 그놈의 말을 한 마디도 믿지 않았어. 지금까지 별 것도 아닌 놈한테 너무 많은 발언권이 주어졌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래서 영원히 입을 닥치게 했지.”

마네트는 눈을 반짝였다.

“미토스를 쏴 죽인 거예요?”

무루스가 덤덤하게 말했다.

“아니, 그냥 재갈을 다시 물렸어. 총살은 그 다음날 새벽, 해가 뜨기 전에.”

무루스는 술을 한 병 더 따서 마셨다. 그후로 신세한탄이 약간 이어졌지만 마네트는 미토스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에 흥분해서 그 후의 이야기를 거의 듣지 않았다. 다음날 네불라는 전날 마네트가 할리우드 놀이에 처음으로 빠진 이유를 물었다. 마네트는 신이 나서 무루스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마네트의 말을 다 듣고, 네불라는 이렇게 말했다.

“어른들이 하는 말을 다 믿으면 안 돼.”

네불라는 어제 일처럼 생생한 것이 눈 앞에 보이기라도 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사람은 집에서 자살했어, 지문이나 DNA도 다 일치했고. 너는 그때 너무 어려서 못 봤겠지만, 신문마다 그 얘기가 실렸어.”

마네트는 가장 친한 어른이 자길 지지하지 않아서 풀이 죽었다. 

“근데 거짓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자세했단 말이야, 술에 취한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자세하게 말해?”

네불라는 가라앉은 채로 말했다.

“스스로 거짓말을 믿어 버리면 그럴 수 있어, 다른 사람을 그 사람으로 착각했거나…….”

“다른 사람? 바보도 아니고 어떻게 다른 사람을 대통령으로 착각해?”

네불라는 소리 없이 웃었다. 

“배역은 다 정했니? 놀이는 언제 시작할 거야?”

“아니, 오늘은 빠질 거야.”

“또 무루스 아저씨 찾아가게?”

“물어봐야지, 미토스가 자살했다는 얘긴 어떻게 된 거냐고.”

네불라는 잠시 말이 없다가 소용없는 한 마디를 던졌다.

“오늘 놀이에 네가 없으면 정말로 아쉬울 거야.”

마네트는 네불라에게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사라졌다. 오늘의 무루스는 그렇게 과음하지는 않았다. 누군가 자기 이야기를 믿어 주는 게 알코올에 상응하는 취기를 주었던 모양이다. 마네트가 나타나자 손을 흔들어서 반기면서 웃음 비슷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기도 했다. 마네트는 활기차게 무루스에게 네불라가 아저씨 이야기를 하나도 믿지 않았다고 전했다. 서운한 얘기를 하는 것이었지만, 아직 네불라 아저씨를 좋아했기 때문에 뒷담화처럼 들리지는 않을 정도로만 하소연했다. 무루스는 8개월만에 처음으로 타인의 말에 호의적으로 맞장구쳤다. 분명 분위기는 화기애애한 축에 속했다. 미토스의 자살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도 무루스는 신문을 어떻게 믿냐는 말로 가볍게 넘겼다. 서방세계가 공산주의자들을 파라디수스의 혁명 영웅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서 그들의 활약 대신 가짜 뉴스를 내보낸 것이라면서. 마네트의 마음은 상당히 무루스 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에, 마네트는 무루스가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네불라를 반박해서 기분이 좋았다. 마네트는 웃으면서 다른 얘기도 했다. 

“네불라 아저씨가요, 아저씨가 다른 사람을 대통령으로 착각했을 수 있다고 그랬어요. 말도 안 되죠! 어떻게 매일 TV에 나오는 대통령 얼굴을 못 알아봐요?”

그 얘기를 듣자마자 무루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지금까지 뉴스를 부정하고 신문을 회피하면서 주문처럼 지키던 믿음이 있었다. 올바른 적을 처형했다는 믿음, 다시 그는 기억의 수렁 속에 발목을 붙잡혔다. 재갈이 풀리자마자 자긴 미토스가 아니라고 애원하던 포로, 필사적으로 자신의 신분을 날조하던 쥐새끼, 고작 다섯 번째 대역을 붙잡기 위해 동생이 죽었을 리가 없다는 확신 하나로 묵살했던 사형수의 변명. 

한 가지 의문이 있다면, 무루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네불라, 대화조차 나눠본 적 없는 네불라가 어떻게 자신의 가장 큰 불안에 적중했냐는 것이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겠지만, 정말로 우연의 일치라면 악마가 자신을 괴롭히려고 묻어두고 있었던 의심을 다시 꺼내어 네불라의 입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무루스는 과거를 외면하기 위해 더 강렬한 감정을 붙잡았다. 바로 네불라를 덮어놓고 증오하는 것이다. 무루스는 왜 그를 싫어하는 건지 잊어버릴 정도로 네불라를 싫어하게 됐다. 의식적으로 결심한 것은 아니고 얼떨결에 그렇게 되었다. 네불라가 위선자이고, 아이들을 미혹한다고 믿게 되었다. 망상적 사고가 심해지자 그가 파라디수스에서 독재 부역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마네트조차 그를 피하게 되었다. 

3

무루스가 어떻게 생각하든 사람들은 계속 네불라를 좋아했다. 공공의 적이 그를 싫어하니 예전보다 더 그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무루스가 야유로 네불라의 쇼를 망치려고 애를 써도 언제나 그것을 덮는 환호에 꺾였다. 군중은 언제나 네불라에게 무루스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라고 말했고, 네불라는 언제나 무루스와의 마찰을 피했다. 그 모습은 약간 관대함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네불라는 내일 버스를 타기로 했다. 그는 일단 국경심사대에 들어서자마자 허무할 정도로 금방 도장을 받았다. 심사관은 파라디수스 출신이고 공산주의자가 아니면 다른 것은 묻지 않았다. 아이들은 네불라를 축하해 주면서도 아쉬워했다. 오늘의 할리우드 놀이가 마지막일 테니까. 

놀이는 예전처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앙헬이 팀을 만들고, 에두아르도가 수수께끼를 풀고, 마네트는 죽어서 유령이 되었다. 모두들 이것이 마지막 놀이라는 생각에 놀이에 걸맞지 않은 진지함을 갖추고 역할에 임했다. 네불라는 지금까지 거쳐 온 모든 악당을 조금씩 흉내냈다. 그의 우스꽝스러운 사악함이 한창 빛을 발할 무렵, 불청객이 난입했다.

“애들한테서 떨어져, 위선자 새끼.”

아이들은 중요한 놀이가 중단되어서 짜증을 냈고, 마네트는 눈을 끔뻑이며 무루스를 바라보았다. 네불라는 침착하게, 아마 이 캠프에 온 지 처음으로 무루스에게 말을 걸었다. 

“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를 텐데 왜 저를 그렇게 싫어하시는 거예요?”

무루스는 네불라를 쏘아보며 말했다.

“네가 내 욕을 하고 다니는 걸 알아, 그것도 아이들한테. 비열한 놈.”

네불라는 흔들리지 않았다.

“제가요?”

“내가 거짓말쟁이라고 말하고 다녔잖아, 네가 뭘 알아? 고작 신문만 본 주제에, 내 행동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아? 넌 내 과거를 한낱 허풍으로 취급하고, 날 거짓말쟁이라고 매도했지, 그것도 아이들한테…….”

네불라는 그제야 이해했다. 그는 씩씩거리며 서 있는 무루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무루스 씨, 미토스는 자택에서 자살한 채로 발견되었어요. 지문도 DNA도 전부 일치해요.”

“신문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파라디수스에서 살면서 신문을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어. 하지만 내가 쐈다고, 내가 그 자식 얼굴을 확인하고 쐈단 말이야…….”

“그 사람 제복 입고 있었죠?”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역시 미토스 따까리였던 거지?”

“그 옷만 제대로 갖춰 입으면 다른 사람도 그 사람처럼 보여요. 물론 어느 정도 닮긴 해야죠.”

“너 지금 내가 닮은 사람을 착각하고 죽였다고 말하고 있는…….”

“가능한 일이에요.” 

무루스는 소리를 빽 질렀다. 

“내가 내 가족을 죽인 사람 얼굴도 헷갈릴 머저리로 보여? 그 작자가 내 약혼자를 끌고 갔고, 내 어머니를 총살했어. 내가 그런 작자의 얼굴을 잊어 버릴 것 같냐고…….”

네불라는 무루스가 아무리 날뛰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약간은 채념의 표정이 얼굴에 서려 있었다.

“결국에는 비극을 직면해야 할 때가 와요.”

무루스는 그 말보다는 뻔뻔함에 자극받은 것 같았다. 그는 네불라의 뺨에 주먹을 날렸다. 네불라는 맞은 채로 꺾어진 고개를 바로 들지도, 얻어터진 뺨에 손을 가져다대고 진정시키지도 않았다. 그는 땅을 쳐다본 채 무루스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며 말했다. 

“미토스는 대역배우들을 뒀어요. 그리고 다섯 번째 대역이 미토스 대신 공산 세력에 의해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아마 그 사람이 그 사람일 거예요. 어차피 미토스를 위해 일하던 사람을 죽인 건데, 저는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어요.”

무루스는 굳어졌다. 

“대역배우 같은 건 예전부터 돌던 음모론이야, 정신 제대로 박힌 사람이면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믿지는 않는다고, 그건 불가능해…….”

네불라는 고개를 들어 무루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불가능하다고요?”

“그래, 불가능해.”

“우린 불가능 너머를 꿈꿀 것입니다.”

네불라는 완벽한 연설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 비극적인 상황의 돌파구를 찾아낼 것입니다. 반동 세력을 척결하고 테러리스트에게 보일 자비는 없을 것입니다. 평화의 적이 흘린 피 위에서 파라디수스를 재건할 것입니다!”

네불라는 열광적으로 팔을 휘휘 저으며 망국의 독재자를 모방했다. 무루스는 이 일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네불라를 한 대 더 패 주려고 했는데, 귀를 찢는 비명에 집중을 잃었다. 마네트는 완전히 무너진 상태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이 모든 대화는 라틴어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거의 모두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네불라는 흥분 상태에서 빠르게 빠져나와 딱 한 마디만 했다.

“저는 네 번째였어요.”

무루스는 뭘 해야 할지 망설였다. 네불라를 한 대 더 때려줘야 하나? 한 대로 충분한가? 국경심사대로 가서 네불라가 독재 부역자였다는 걸 폭로해야 하나? 인생의 가장 찬란한 복수가 거짓이었음을 확인했으니 강물에 뛰어들어야 하나? 네불라의 말을 믿을 수는 있나? 그는, 그 모든 행동을 실천으로 옮기기 전에, 거의 반사적으로, 겁에 질린 마네트에게 달려갔다. 그는 마네트를 달래 줬다. 네불라는 마네트를 슬쩍 쳐다봤다. 마네트는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네불라의 시선을 피했다. 네불라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그 자리를 떠났다. 

네불라는 다음날 아침 가장 빨리 도착한 버스를 타고 국경지대를 떠났다. 아마 뉴저지로 갔을 것이다. 가끔 사람들이 무루스에게 대체 네불라의 그건 뭐였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물어봤다. 무루스는 그때마다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네불라, 그놈은 누구 따라하는 걸 잘 했잖아? 나한테 복수한 거야. 내가 그놈을 괴롭히긴 했으니까……. 하지만 선을 넘었어, 선을 넘었다고. 날 속이려고 독재자의 대역배우 같은 허무맹랑한 얘기가 진짜인 것처럼 연극을 한 거야. 그러니까 이건 파라디수스 역사에 대한 이해가 좀 필요한데…….”

그 후로 무루스는 마네트를 책임지는 사람이 되었다. 냉전 분위기가 조금 완화되었을 때, 그는 미성년자의 보호자 자격으로 구호 단체의 도움을 받아 망명 자격 취득에 재도전했고 성공했다. 두 생존자는 미국에 정착했고, 마네트는 학교에 들어갔다. 3년이 지났다. 무루스는 이민자 커뮤니티에서 파라디수스 농담을 하는 술집 코미디언에 대해 전해 들었다. 무루스는 코미디언의 이름을 알아봤다. 그때 그 말이 떠올랐다. 비극을 직면해야 한다나? 그는 문득, 네불라를 찾아가서 다시 한 번 진실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에게는 마네트가 있었고……. 마네트에게는 자랑스러운 아빠가 필요했다. 마네트는 미토스를 처형하는 순간의 무용담을 여전히 감격에 차서 들었으니까. 그는 대중교통으로 두 시간 거리의 술집 앞까지 갔다. 문 너머로 손님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는 문을 빼꼼 열고 안을 엿보았다. 정말로 그랬다. 멀리서 보니까 그 제복을 입고 있으면 다른 사람도 그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가슴이 떨려 술집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밖에서 코미디언이 나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다……. 

네불라가 밖으로 나오자 모른 척 지나쳐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마네트에게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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