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데모크라타 12월 17일자
쇼맨앤솔
1984년, 그가 서른여섯 살 때의 일이다.
네불라는 스페인 비야보나의 교도소에 입소하고 나서 한 번도 같은 방을 쓰는 재소자들과 말을 트고 지낸 적이 없었다. 일종의 ‘신입방’ 시절, 그는 아무하고도 얘기하지 않고 신문만 읽었다. 신문을 쳐다봤다는 말이 더 적절할 것이다. 여기는 스페인 교도소였고 네불라는 스페인어를 읽을 줄 몰랐으니. 하지만 16페이지쯤부터 시작하는 국제면의 참혹한 사진과 특징적인 고유명사의 알파벳만 알아볼 줄 알면 많은 것이 설명이 되었다.
2주차에 네불라는 독방에 격리되었다. 베룸 학살의 사진과 명단을 보고 그는 괴수처럼 울었다. 일종의 난동을 부린 것이니 징벌적 의미로 들어간 독방이라 모든 유흥거리가 반입 금지였고, 신문도 예외는 아니었다. 거기서 사흘을 보내고 나서 다시 혼거실로 돌아갔을 때는 방이 바뀌어 있었다. 네불라는 그동안 모아두었던 신문을 요구했지만 다른 재소자들이 폐지인 줄 알고 써 버려서 교도관들도 어쩔 수 없었다.
새로운 방에는 파라디수스인이 한 명 있었다. 그의 이름은 두플리키로, 살집이 푸근한 곱슬머리의 50대 남성이었다. 네불라는 유명세에 비해 워낙 조용한 죄수였기 때문에 그가 새로 들어왔을 때도 두 파라디수스인 사이에는 별 일이 없었다. 둘은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 서로 침묵을 지키고 데면데면하게 지냈다. 그동안 네불라는 방을 바꾸면서 잃은 엘 데모크라타지 12월 17일자 신문을 구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베룸 학살에 대한 특집 기사가 꽤 크게 실려 있었고, 무엇보다 거기에 베리타스의 사진이 있었다. 두플리키는 조용히 네불라를 주시했다. 그는 기이할 정도로 넓은 교도소 내 인맥을 총동원하여 신문을 구해 들고 네불라를 찾아갔다.
"찾고 계신 것 같길래.”
네불라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신문을 받아들었다.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두플리키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감사는 무슨, 같은 파라디수스인끼리 이 정도는 당연한 겁니다.”
네불라는 신문을 받아들고 떨리는 손으로 펼쳤다. 척 보기에도 그는 스페인어에 까막눈이었다.
“읽을 줄 몰라요?”
네불라는 쑥스러운 듯 우물쭈물 대답했다.
“한 번도 이 기사가 정확히 어떤 내용인지 몰랐어요. 그저 고유명사와 사진, 그리고 숫자……. 끔찍하게 커다란 숫자들만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뿐이죠. 스페인어 잘 하시던데, 혹시 번역해 주실 수 있다면 어떻게든 보답할게요.”
두플리키는 신문을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고, 네불라는 순순히 신문을 넘겼다. 두플리키는 신문을 훑어보더니 말했다.
“대가는 필요 없습니다. 저 무기징역수거든요. 스페인이 사형제를 폐지하지만 않았어도 진작 총살당했을 텐데 말입니다. 여기서는 기껏해야 좋은 침대 정도를 바랄 수 있겠죠. 하지만 당신이 제게 해 주실 수 있는 더 좋은 게 하나 있어요. 무엇이든 가능해요?”
“무엇이든 가능해요.”
주저하지 않는 네불라의 태도에 두플리키는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어요?”
네불라는 다소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플리키는 단숨에 말했다.
“절 용서해 줘요. 그것 외에는 어떤 조건도 없어요. 저한테서 무슨 말을 듣던지간에 절 용서해 줘요.”
네불라는 다소 주춤했다. 그는 본인이 무기징역수라고 했고, 파라디수스인이었다. 이 시기에 비야보나 감옥에 수감된 파라디수스인 무기징역수면 끔찍한 전쟁범죄자이거나 독재 부역자 둘 중 하나였다. 그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 두플리키가 웃었다.
“성직자들이 매일 하는 일이 그거잖아요, 그냥 그 일을 당신이 해 주면 돼요. 제가 고해신부를 찾아갈 수는 없으니까요.”
“왜죠?”
“제가 카톨릭을 척결하는 선봉에 섰거든요. 예수쟁이 사백 명을 죽였어요. 이 세상에서 뿌리 뽑아야 할 죄악을 하나만 고르라면 그건 종교예요. 미토스가 그렇게 말했잖아요. 종교는 역병이다. 게다가 미토스는 말만으로 끝내지 않았죠. 시대의 질병에 메스를 들었어요. 다들 그렇게 배웠죠, 미토스 만세!”
네불라는 할 말을 잃었다. 두플리키는 그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그분의 뜻대로 베룸에 찾아갔습니다. 베룸은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공식 집계상으로는 27명이 죽었지만 사실은 200명도 넘게 죽었을 겁니다. 제가 삼십 명은 죽였으니까. 왜 공식 집계와 실제 사망자 수가 이렇게 차이나는지 아십니까? 식별 가능한 시신만 통계에 포함시켰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시뻘건 게 피흘리는 것 같았죠. 포격은 어른 아이를 가리지 않았고, 파필리오와 포에나는 평화 공원에서, 베리타스는 극장에서 죽었어요. 실바는…….”
“베리타스!”
두플리키가 말했다.
“베리타스 때문이었군요, 이 신문을 그렇게 구하고 싶어 하셨던 게……. 여자 형제입니까, 아니면 애인? 아무튼 베리타스는 극장에서 죽었습니다. 당시에는 전쟁터였지만. 사망자 215명, 부상자 954명. 아마 당신이 언급했던 어마어마한 숫자가 이거겠죠? 10년의 정권, 한 명의 독재자, 수천의 시신, 수만의 유족, 그리고 여섯 명의 대역…….”
네불라는 두플리키의 손에서 신문을 낚아챘다.
“지금 번역하고 계신 거예요?”
“번역해 달라면서요?”
“전 당신을 용서한다고 말한 적 없어요.”
“하지만 전부 들어 버렸으니 약속을 지키셔야죠.”
“저는 당신을 용서할 수 없어요. 그럴 자격도 없고요.”
두플리키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기독교인 사백 명을 죽였다면서요? 베룸에서 삼십 명을 죽였고? 그때 죽은 사람들이 아니면 누구도 당신을 용서할 수 없어요. 그 유령들이 당신을 용서할 일도 없을 거고요.”
두플리키는 자세를 고쳐 잡고 타이르듯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당신이 법정에서 고발하기 3년 전부터 미토스가 대역을 쓴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저한테 훈장을 달아 준 사람이 텔레비전에서 본 것과 다른 사람이었거든요. 물론 티를 내면 숙청이니 저만 알고 있었죠. 비슷하게 생기긴 했지만, 분명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게 당신이었죠. 맞아요, 확실히 당신이었습니다. 제가 왜 훈장을 받았는지 기억 납니까? 물론 당신은 훈장만 백 번은 넘게 수여했겠죠. 군복 입으면 다들 비슷해 보이니까 누가 누군지 분간도 안 갈 거고요. 하지만 제가 힌트를 많이 드렸잖아요.”
네불라는 주춤거렸다. 그는 괴로워했다.
“……사백 명. 기억나요. 그 정도로 화려한 전적을 세운 군인은 드물었으니까.”
“조금 더 기억력이 좋으시다면 베룸에서의 30명에 대한 훈장도 떠오르실 겁니다. 그때는 다른 대역이었나? 아무튼. 저는 끔찍한 짓을 했고, 잘 때도 훈장을 달고 잤습니다. 훈장만이 저를 용서했으니까. 이게 잘한 일이라고 말해줬으니까. 당신이 한 일이 그런 겁니다.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당신이 한 일이 그런 겁니다. 하지만 이제 훈장은 모두 압수당했고…….”
두플리키는 억지로 웃어 보려 했으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많은 것 바라지 않습니다, 속으로는 절 역겨워해도 괜찮습니다. 한 번만 더 제게 훈장을 달아주실 때 했던 그 말씀을 그 목소리로 들려 주시면 안 됩니까? 그럼 다시 깊은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 아직도 다 외우고 있습니다, 귀하는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였으며…….”
귀하는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였으며, 이 뛰어난 업적과 헌신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국가와 국민을 대표하여 이 훈장이 귀하의 훌륭한 봉사와 헌신에 대한 감사의 상징이 되길 바란다. 네불라의 머릿속에서 아마 천 번도 넘게 연습한 그 멘트가 어지러울 정도로 울리기 시작했다. 그는 드디어 자신이 했던 일을 직면했다. 신문이 비춰줬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가 했던 일이란, 악마의 일을 인간에게 가능케 하는 것이었다. 이게 내가 했던 일이야, 이게 내가 했던 일이야……. 네불라는 교도관을 소리쳐 불렀다. 두플리키는 망연해지더니 12월 17일자 엘 데모크라타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네불라는 비명을 지르며 그를 막았지만 너무 늦었다. 두플리키는 교도관 도착 즉시 독방에 격리되었고, 무슨 곡예를 부린 건지 사흘 안에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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