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low-een.
2023.11.01. 뮤지컬 쇼맨. #핍미션
Hollow-een.
여기, 가로 4미터, 세로 4미터짜리 방이 하나 있습니다. 슬리퍼를 내디디면 삐걱대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짙은 밤색 나무 바닥에, 상앗빛 페인트가 사면 가득 발린 방입니다. 침대 틀 하나 없는 매트리스는 방 한 귀퉁이에 몸을 바싹 붙인 채 낡은 회색 이불 아래 웅크리고 있고, 그 위로 채 정리되지 않은 빨래 몇 자락이 겹겹이 쌓였습니다. 고개를 들면 어른 손바닥 세 개 정도가 들어갈 너비의 창문이 뚫려 있는데, 먼지 쌓인 블라인드 틈으로 스며든 볕이 바람이 불 때마다 이불과 바닥 위에 조각조각 흩뿌려지곤 합니다.
창문의 맞은편에는 구색만 갖추어 놓은 낡은 원목 탁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고, 그 위로 쓰러진 탁상 달력에 10월을 알리는 장이 낙엽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공짜로 받은 달력임이 분명합니다. 반대쪽에 커다란 상표가 인쇄되어 있거든요. Goodday Mart. 유명한 대형 체인 마트의 이름입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이용해 봤을걸요? 노란색 스마일 이모티콘 딱지 같은 가게라고 해 두죠.
탁자를 옆으로 밀어내면 한쪽 벽을 빼곡히 채운 인쇄물이 눈에 들어옵니다. 포스터, 사진, 신문 스크랩, 엽서, 또 포스터… 선명한 컬러 잉크 위로 진부하기 짝이 없는 선전 문구가 반복됩니다. 정부는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 올바른 정권이 세상을 바꿉니다. 우린 계속 도전할 겁니다. 정치적 흥분을 고취하는 이미지들 사이로 한 사람의 초상화가 여기저기 그려져 있습니다. 당신도 익히 아는 얼굴이죠. 전신, 상반신, 클로즈업, 측면과 반 측면, 그리고 정면까지. 컷마다 온몸을 위엄으로 치장한 듯 과시하는 표정과 포-즈가 인상적이군요.
그리고 그 앞에 한 사내가 서 있습니다.
그가 정면의 상을 응시하면, 마주 보는 얼굴 역시 그를 바라봅니다. 뚫어질 듯한 시선이 서로를 오래도록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평가를 받는 건지, 감상을 하는 건지 모를 눅눅하고 날카로운 시간은 사내가 입꼬리를 올리기 무섭게 금이 갑니다. 과장된 각도로 비틀린 형편없는 미소. 벽면에 납작하게 붙은 얼굴도 그를 따라 웃습니다. 근엄한 실루엣은 온데간데없고, 볼품없고, 멍청한 사내 둘이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본 채 서 있습니다.
예, 거울이네요. 사실 틀림없이 포스터인 줄 알았습니다만, 세로 약 180센티미터 정도 되는 직사각형 형태의 벽걸이형 거울이 사내의 전신을 비추고 있습니다. 똑같은 제복에, 똑같은 이목구비, 똑같은 헤어 스타일을 하고서도, 그 바보 같은 안색 하나만으로 사내는 비로소 납작한 종이조각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존재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축하해요! 무수한 복제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진리, 무이한 독창성1)이 바로 이것인가 봅니다.
사내가 오른손을 들어 올리면, 거울 속의 인영은 왼손을 들어 올립니다. 후줄근하게 제복을 풀어 헤친 채 팔을 꺾어 이마 위로 손바닥을 펼쳐 보이던 사내는 자신의 포-즈를 검토합니다. 더 우스꽝스럽고 괴상한 자세를 취할수록 팔다리 관절이 요란스럽게 꺾입니다. 저것도 운동이 될까요? 천방지축 움직임이 이어지면서 점차 그의 이마에는 땀이 맺히고, 셔츠 깃은 축축하게 젖어 들고 있어요.
무엇을 위한 연습이냐 묻는다면 아마 저녁에 있을 쇼를 위해서라고 대답할 겁니다. 혹은 더 멋진 연기를 위해? 아니면 관객의 요청 사항을 반영하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대답할지도요. 또 모르죠. 악령을 죽이는 주술을 펼치고 있다며 농담을 던질 수도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10월의 마지막 밤에는 악령이 되살아나 마을을 돌아다니기 때문에, 그들과 같은 모습을 하고 그들처럼 움직여야 한다고들 하잖아요. 그런데 악령이 대체 뭘까요? 죽어 마땅한 악한 영혼을 악령이라고 정의하면 될까요? 그렇다면 아무리 죽여도 끈질기게 되살아나는 멍청한 독재자의 유령이야말로, 악령 중의 악령이라고 칭할 수 있지 않을까요?
블라인드 틈을 가로지르던 햇빛이 뉘엿하게 기울고, 길가에 심긴 가로수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집니다. 아이들이 동화 속에 나오는 괴물 분장을 한 채 한 손에는 천이나 플라스틱으로 된 호박 바구니를 들고 거리로 나오기 시작하네요. 곧 저들끼리 무리를 이루어 집집이 문을 두드리겠지요. Trick or treat! Trick or treat! 사탕을 주지 않으면 장난을 칠 거예요. 아주 무시무시한 장난을.
제가 예측하건대, 옆집에 사는 마거릿 할머니는 올해도 계피 사탕을 내어 줄 겁니다. 맞은편에 사는 토마스 아저씨는 후디니 분장을 한 채 콧노래를 부르며 아이들을 맞을 거고요. 언덕 아래 한인 마트를 운영 중인 스테파니 킴은 오늘만을 위해 신호등 사탕이라는 과자를 준비했다고 아이들에게 귀띔해 주었어요.
하지만, 언덕 끝에 있는 이 곳- 솔리타스 스트리트 44번지, 도무스 아주머니의 2층 하숙집 방문은 굳게 잠겨 있을 겁니다. 작년까지는 문 앞에 막대사탕이 담긴 바구니가 놓여 있었지만, 올해는 달라요. 매일 밤 올라갈 공연 준비를 해야 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짜내야 하며, 모든 동작을 계획대로 수행하기 위한 연습을 하느라 도무지,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을 테니까요. 곧 시계는 오후 6시 반을 가리킬 것입니다. 사내는 짐이 가득 든 카트를 끌며 방을 나서겠죠. 길거리에서 파는 2달러짜리 핫도그나 샌드위치로 저녁을 때운 뒤, 퇴근 후 한잔하러 온 뜨내기들이 들어찬 뒷골목 라이브 펍 귀퉁이에 마련된 스테이지로 향할 겁니다. 밤 9시, 오색 조명이 내리쬐는 저 조그만 단상에서 코미디 쇼가 펼쳐질 예정이거든요. 이봐요! 넘어지고, 쓰러지고, 들이박느라 붙인 반창고 위에는 빨간 리본을 감도록 해요. 그래야 관객들이 즐거워할 테니까. 오늘 하루 정도는 돈 대신 사탕을 받는 것도 좋을지도요.
그리고 여기, 가로 4미터, 세로 4미터짜리 방이 있습니다. 어른 손바닥 세 개 정도가 들어갈 너비의 창문을 통해 갈라진 노을이 비져 들어오는 방. 한쪽 벽을 빼곡히 채운 색색의 인쇄물 사이로, 한 사람 분량의 공간이 비어 있습니다.
약 180센티미터. 성인 남성 한 명이 들어가기 충분한 직사각형, 딱 그 정도의 공간이.
1) origi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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