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솔로지 샘플

베터 걸

회색앵무

   “굿 걸이시죠?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혹은 중동아시아계로도 보이는 한 여성이 스타벅스의 동그란 원목 테이블 너머에 앉아 있었다. 익숙한 거리의 익숙한 가게. 의자도 탁자도 그대로였으며 바뀐 건 입구의 깔개 색깔 뿐이었다. 용과 리프레셔를 받아 온 여성은 드디어 숨을 쉬겠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음료를 빨아들였다. 그는 아직까지도 바보 같은 표정을 하고 있을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반가워요. 나는 베터 걸이에요.” 순간 이 모든 상황이 참기 힘들 정도로 아득해졌다.

   “…반가워요.”

   “보내 주신 편지는 잘 읽었어요. 먼저 사과할게요.” 그는 내 손을 꼭 붙잡은 채로 정중하게 말했다. 나는 그 손을 뿌리치며 대답했다. “제 편지를 받아야 하는 건 제인인데요, 그쪽이 아니라?” 제대로 된 이유를 듣길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제인이 평소에 편지를 받을 곳이 없으니까요. 누군가 사랑한답시고 접근하면 많이 곤란하지요.” 그렇겠지요. 베터 걸은 오래도록 타인을 돌본 사람이 가지는 특유의 주름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거울을 볼 때마다 끔찍하리만큼 붙어있던 그 미소. 예쁜 모양의 우유거품이 떠 있는 라떼를 가만히 노려보고 있으니 베터 걸이 간간히 말을 걸었다. 여전히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분위기를 풀기 위한 간단한 자기소개와 질문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간 혐오스러운 말들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그래, 내가 없으니까 다시 보모가 필요해졌겠지. 이번엔 전쟁터에서 데려온 거야? 베터 걸의 고향은 몇 년 전부터 꾸준히 BBC 인터넷 뉴스 세계란의 한 쪽을 채워주던 곳이었다.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무기를 팔았다지. 그래, 너무나 흔한 일이다. 빌어먹을 별의 저주받을 사람들. 저주받은 사람들.

   “알겠어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그래서 지금 저는 왜 여기에 있는 거죠?” 나는 이빨 사이로 뱉어낼 욕지거리와 조롱들을 라떼와 함께 삼켰다. 대신 상식적인 질문을 아슬아슬하게 건져냈다. 베터 걸은 머뭇거리다가 한 음절씩을 꼭꼭 씹어내듯 말했다.

   “먼저 알고 싶었어요. 왜 제인을 다시 찾아왔나요?”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글쎄, 그 괴짜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제인을 만나야 할 것 같았어. 꼭 얼굴은 봐야 할 것 같았어. 그런데 뭘 위해서? 사과하기 위해서?

   “굿 걸은 그걸로 좋아요? 제인에게 뭘 사과할거죠?” 베터 걸이 말한다. 나는 다시 말문이 막힌다. 내가 제인을 방치했지. 술을 마시는 동안 그 불길 속에 너를 놓아두었지. 그렇지만, 그렇지만.

   베터 걸이 재차 묻는다. “무슨 말을 할 셈인가요. 나는 너희 부모에게 선택받아 공짜로 널 위해 일했는데, 너를 두 시간 정도 내버려둬서 미안해. 라고? 아니면 국제적 노동 외주 문제에 대해 제인과 토론하러 왔나요?” 베터 걸의 얼굴에서 미소는 사라지고 문장은 빨라졌다. 아니, 그건 아니지. 하지만, 하지만.

   “왜 저에게 그런 식으로 묻는 거죠?” 내가 항변하자 베터 걸은 아차 싶었는지 괴로운 표정으로 사과를 거듭했다. 사과를 듣고 싶은 게 아니야. 우리가 어긋난 지점을 알아야만 해. 내가 아무 말이 없자 베터 걸은 어렵게 덧붙인다. “어쩌면 처음부터, 제인이 굿 걸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 수 있어요.”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 전화로는….”

   “물론 제인이 편지를 읽고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요. 그런데 정말 괜찮을지 어떻게 알겠어요?”

   맥이 탁 풀렸다. 그것이 무슨 말인지 나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게 진심일지, 그냥 호기심일지, 설마 원망이 남아 이번 기회로 복수하려는지. 저는 알 수가 없어요.” 베터 걸은 일부러 주어를 흐렸다. 내가 숨이 막혔던 만큼 그도 숨이 막히는 것이다. 내가 장님이었던 만큼 그도 장님인 것이다. 지금 다음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저주스러울 수 있는가.

   “‘사회적 압박과 고정관념들’이라고 예쁘게 묶어 두기는 참 쉽지요. 그런데 그 수천가지를 모두 생각할 수는 없어요. 우리에게 위험부담은 너무나 크니까. 당신은 알잖아요? 물론 굿 걸이 반드시 제인을 봐야겠다면 막지는 않겠어요. 하지만 저는 혹시 모를 사고를 막기 위해 먼저 물어보는 거예요. 제인 보다는 굿 걸이랑 이야기가 더 잘 통할테니까요.” 그는 어느 새 흐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이미 한계에 있었다. 언제나 한계에 있었다. 굿 걸이 되기 위해, 굿 걸보다 나은 베터 걸이 되기 위해. 진정한 나 따위는 언제나 다른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밑바닥에 우리의 자리가 있을지언정 세상의 바깥에 우리의 자리는 없으니까. 다시 그 사람 생각이 났다. 이번에는 어째서 그가 떠오르는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기도하듯이 손을 모으고 우리는 한참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잠깐 화장실에 다녀올게요. 생각해 보시고 결정해 주세요.”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베터 걸은 성큼 성큼 걸어 나갔다. 눈물을 모두 털어내려는 것처럼. 그리고 전화벨이 울렸다. 번호를 확인하지도 못하고 무거운 손가락으로 초록색 수화기를 스와이프했다.

   “수! 아 아니, 이제는 매니저님이죠! 미안해요. 혹시 오늘 밤 들어오는 할로윈 물품들 검수 좀 도와줄 수 있어요? 사람이 모자라가지고. 네, 네. 오늘 밤 안에요. 특근 수당은 제대로 챙겨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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