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브 나무 아래
해무
너 원래 거짓말할 때 귀 만지작거리잖아. 웃는 낯으로 제 책을 돌려주며 형은 덧붙였다. 누군가를 따라하기 위해서는 들키지 않고 그 사람을 관찰하는 게 먼저야. 그러니까, 넌 첫 단계서부터 실패한 거지. 책을 돌려받았다는 안도감보다 형한테 들켰다는 사실이 민망해 난 정신없이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자리에서 도망쳤다. 그 자리에 가만 서 있었어도 몰랐다, 고맙다, 따위의 말은 하지 않았을 테지만. 뒤에서 그러다 넘어진다! 외치는 소리를 듣고 발끝에 힘을 주었지만 두 번이나 넘어지고 나서야 시야를 벗어날 수 있었다.
*
1958년은 평년보다 시끄러웠고, 더웠고, 그만큼 불쾌했다. 이민자들이 거리에서 외치는 소리가 지직거리는 라디오 소리와 섞여 소음을 자아낼 때면 나는 읽던 책을 덮고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로 올라가 가만히 드러누워 눈을 감는다. 가끔은 네모난 집들을 왼쪽부터 하나씩 세어 보곤 했는데, 새하얀 집들은 꼭 새파란 바다에서 걸러진 소금 같다고 생각했다. 네모난 건 각설탕이니까 소금이 아니라 설탕 아니야? 둘째 누나의 말도 일리는 있었지만 몰래 찍어 먹어 본 하얀 집 벽면에서는 짠맛이 났으니 소금이 아닐 리 없다. (누나한테도 먹어 보라고 내밀어 봤지만 더러워서 싫다며 가 버렸다.)
우리 농장은 반짝이는 바다에서 뛰어가기에는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바다랑 가까우면 좋을 텐데, 하고 일하러 올 때마다 생각하지만 그 말을 들은 아빠가 그럼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둥, 안 그래도 농사가 안 되는데, 하며 푸념을 늘어놓다 머리를 쥐어뜯는 모습을 본 뒤로는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다. 키가 작은 나는 주로 누나들과 형들이 딴 열매의 크기를 나누는 일을 한다. 가끔 첫째 누나가 너는 왜 편한 일만 하느냐며 불평했지만 두 뼘만큼 더 큰 누나의 일을 대신 할 수는 없는 일이라 그럴 때면 어쩌라는 거냐며 입술을 삐죽이곤 했다. 그러고 있으면 누나는 한참을 내 앞에서 투덜거리곤 했는데 귀신 같이 나타난 둘째 형이 나를 따라하며 불쌍한 목소리로 누나한테 대신 사과하고는 했다. 미안해, 누나아. 내가 일찍 자고 많이 먹어서 얼른 누나만큼 커 볼게. 누나는 그런 형을 보고 피식거리다 다시 누나 자리로 돌아가곤 했다. 엄마랑 아빠가 싸우는 날이 나흘에 한 번 꼴로 줄어들었다는 점에서 올해 올리브 농사는 평작인 것 같았지만, 실은 개화기에 발생한 폭염 탓에 최악의 흉작을 기록할 것이라고 옆집 아저씨는 말해 주었다.
그러니까 왜 엄마랑 아빠가 싸우는 날이 줄었느냐면, 그건 전적으로 둘째 형의 노력이었다. 어느 날부터 형은 주변 사람들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전처럼 상황을 무마하거나 놀리기 위해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고 웃게 하기 위해서. 형이 아빠와 싸우고는 하루종일 화나 있는 엄마를 달래서 재운 날, 나는 티비를 멍 때리듯 보고 있는 형에게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형, 형. 있잖아, 아빠 따라하면 엄마가 웃어? 음, 따라하는 게 전부는 아니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그게 왜 궁금한데? 나도 형처럼 아빠 따라하면 엄마가 웃어 줘? ....... 아니야? ....... 나도 알려 줘. 응? 그런 게 있어. 넌 알려 줘도 못 하니까 하지 마. 그날 이후로 형은 내 앞에서 엄마나 아빠를 따라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잔뜩 챙겨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이 잦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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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형, 네불라의 이름 앞에 따라쟁이 이름표가 붙은 것을 알게 된 건 아빠가 형만 옆 마을에 사는 트럭 삼촌의 결혼식에 보낸 날이었다. 엄마는 형의 머리를 빗어 주며 결혼식에 가서 주의해야 할 사항을 내내 읊었고 아빠는 그런 형의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었다. 이제 형은 올리브를 따는 일에 몰두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몰두하는 척하지 않아도 되었다. 형이 어딘가 다녀오는 날에는 엄마 몰래 질 좋은 간식을 먹을 수 있었다. 처음 먹어본 밀크 초콜릿은 아무도 주고 싶지 않은 황홀한 달콤함이었다. 같이 먹자고 선뜻 내어준 형이 신기해질 만큼. 형은 다 헤진 옷이 아니라 새 것을 입고, 적어도 올리브 농사에는 걸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다녔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든 누군가 부르면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처럼 자신감 있게 웃었다. 사람들은 형을 합리적인 가격에 쳐주었고, 형은 아무렴 상관 없다는 듯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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