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

[아론의 사제/아네이디] 불을 삼키다

일단 무늬는 계연시작글...(여기는 재업)

* 아론의 사제 기반 캐릭터 페어(이자 오너끼리는 합의되었고 얘들끼리만 서로 계연/짝사랑인줄 아는)의 계연 스타트 글을 가필수정했음

* 몸의 관계가 그냥 언급만 되어있음

* 글 내에 특정 시나리오의 스포일러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건 달이 기울었다 차는 것처럼, 결국에는 터져나올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첫인상은 그야말로 괴팍했더랬다. 이 이름의 전임자들은 얼마나 사이가 좋았는지 둘이 나란히 천국의 문을 두드렸다는데, 그런 거에 저희는 상관이 없겠다 싶었던 것도 옛말이다. 말 그대로 생과 사를 넘나드는 경험을 같이하고, 남들은 이해하지 못할 기이함을 공감할 수 있는 유일한 사이라면, 결국 그 틈에서는 어떠한 형태로든 애정이 커나갈 수밖엔 없을 테니까.

이디스는 제 나이의 반절이나 간신히 채우는 파트너가 늘 기꺼웠고 언제나 반은 농담으로 남은 반은 진담으로 모호하게 대했을지언정, 병아리 사제님이 제게 기울이는 눈빛의 집요함을 알았다. 문자 그대로 알고만 있었기에 적당히 뭉개고 있었더니만.

“이디스, 당신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바싹 긴장한 입매, 자꾸만 삼키는 마른침, 슬쩍 비껴갔다가 맞춰지기를 반복하는 시선. 그래, 이건 결국 넘쳐흐를 잔이었다. 그걸 감지하고서도 이디스는 여즉 그래왔던 것처럼 습관성으로 능청을 떤다.

“흐음? 우리 꼬맹이가 무슨 쓸데없는 고민으로 미간을 찌푸리고 있나.”

“아 쫌. 그놈의 꼬맹이 소리! 제가 당신보다 어리고 작다지만 애는 아니거든요?! 머리도 팽팽 돌고!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이게 누구 때문인데?!”

콕 찌르니 톡하고 튀어 오른다. 예민하고 머리가 좋은 병아리가 무얼 생각하는지는 대체로 유추하기 쉽다. 이성적으로 헤아리는 답이란 으레 쉽게 잡히는 법이므로. 때문에 이 애를 충동질하면 어디로 튈지도 마찬가지로 훤히 보였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피해왔다. 그렇지만 오늘은 어디로 공을 던져 교란해도 틀림없이 원점을 찾아 돌아올 테지. 지금껏 뿌려둔 많은 속임수와 현란한 안개는 마침내 저 애의 영민함 앞에 명백하게 흑과 백을 나뉠 것이다.

정말로, 그저, 예감했던 시간이 찾아왔을 뿐이다. 이 순간이 오리란 걸 예전부터 알고 있었음에도, 이디스는 여전히 두려웠기 때문에, 여기서 얼굴을 일그러뜨릴 바에야 웃기로 한다. 스스로 흐물텅한 미소가 과연 먹힐 것인지 의심이 들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하하, 그래. 그럼 우리 병아리 사제님은 뭐가 불만인지 말해봐.”

많고 많은 죄는 입에서 시작된다 하셨지. 이디스는 입에 숯불을 문 것 같은 환상에 빠진다. 이사야는 스랍이 입에 가져다 댄 숯불로 악이 사라지고 죄는 사해졌다 하였다(이사야 6:6-7).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마침표가 아닌, 불의 시작이 아닌가. 속절없이 부어지는 일곱 대접처럼 저의 허락에 작은 사제의 입에서는 쏜살같이 불티가 튄다.

“이제 당신도 충분히 알겠지만, 난 불명확한 게 정말 싫어요. 그러니 이 애매모호한 관계에도 이름 정도는 붙여봐야겠어요. 이를테면 연인. …물론 당분간만요.”

“당분간?”

그랬다. 너는 제 과거를 불살라 먹은 악마의 정체를 밝히고 까발리기 위해 이 고배를 기꺼이 마신 자였다. 비록 그것을 분명한 언어로 정의한 적은 없었지만 행동을 보면 명백했다. 에둘러 찔렀던 말에도 부정하지 않는 모양새를 긍정으로 받은 제가 이 애의 불명확함을 싫어하는 성질머리를 놓고서 낄낄 웃었던 게 꽤 전이었을 텐데. 이럴 줄 알았다면 그때 웃지 말았어야 했다.

말을 쏟아내기 전에는 속으로 끙끙 앓았을지언정 유창하게 흘러나온 선언에 저는 빈 웃음조차 던지지 못하고 녹음기처럼 말꼬리나 되풀이했다. 반박도 부정도 비웃음도. 자기가 어림한 그 무엇도 찾아볼 수 없자, 아네스는 오히려 반색하며 들입다 못 박았다. 문득 얘는 지금 이 대화의 주도권을 자기가 쥔 걸 알기는 할까 따위의 생각도 스쳤다.

“네. 오늘부터 백 일만. 우리의…여하튼 그걸 연애라고 정의해보자구요.”

“입술 부비고 몸 섞던 그것들을 말이지-?”

“아악 쫌! 당신은 사제란 사람이 수치심도 뭣도 없냐고!”

“하하! 아무렴, 주님의 피조물이 당당해야지.”

“아오, 정말 입만 살았지! 그래서, 대답은요?!”

평소처럼 농담 따먹기를 주고받고서야, 방패의 이름을 가진 사제는 간신히 결심을 세웠다. 낙하 훈련과 비슷할지도 모른다는 엇나간 감상도 든다.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이 교차하며, 그 친구들과 비슷하나 또 전혀 다른 이 애에게 말을 옮기기로 한다. 그리하여 유안 길모어-이디스는 이번에야말로 입 안에 담긴 숯불을 삼켰다.

“나한텐 별 차이는 없지만 우리 병아리 파트너 사제님이 그러시다면야. …어차피 우린 백 일 후에라도 계속 구마 파트너잖아. 안 그래?”

“당연한 소리를 자꾸 하네. 아니다, 당신, 자꾸 죽을 짓만 골라 하는 버릇은 고치고 그런 말 하지 그래요?”

잠깐 덧씌운 타이틀이 떨어지더라도 곁에 있겠다는, 바로 그 긍정에 힘입어 저를 불살라 버릴 불은 화인처럼 찍혔다.

“그래. 그럼 해보자구. 그 정의된 연애라는 거.”

각오를 정하고 삼킨 숯불이 뱃속에 자리 잡았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