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봐, 형원아
민챙 / 몬엑 알페스
*김익명님의 커미션입니다. (10,000자)
*몬스타엑스 이민혁X채형원
*오메가버스au
이민혁은 심미안이 뛰어난 편이었다. 거울만 들여다봐도 있는 게 곱상하니 잘생긴 제 얼굴이니 어지간한 건 눈에 안 차 그런가 싶지만, 하여튼 예쁘고 잘생긴 건 기가 막히게 찾아내고 좋아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저는 싸가지 없이 굴어도 남이 싸가지 없는 건 못 참으면서 예쁜 애들은 다소 싸가지가 없더라도 웃으며 넘어가 줄 수 있는 게 이민혁이었다. 뭐, 물론 본인은 싸가지 없는 게 아니라 돌려 말하는 게 조오금 어렵고 논리적인 거라고 말하지만. 어쨌든 술에 잔뜩 취한 채형원이 옹알거리면서 “너 착하게 좀 말해.”한 이후부터는 자제하고 있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철없던 그 시절엔 왜 저만 나쁜 새끼 만드나 억울한 마음도 있었지만, 지금이야 형원이 얼마나 참고 참다가 한마디 했을지를 아니까 민혁은 마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 형원이는 원래 저런 말도 못하는 애거든. 근데 나한테만 저렇게 솔직하게 말을 해준다니까? 그게 또 저를 특별취급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기까지 했다.
민혁은 유독 형원이 하는 말에 유했다. 아마 기현이 저더러 “야, 싸가지 좀 챙겨가면서 말해.”했으면 난리가 났겠지. 한바탕 시원하게 싸우고 그냥 서로 싸가지 안 챙기는 거로 결론이 났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채형원은 아니거든. 섬세하고 다정해서 저 손해 보는 것도 그리 대단치 않게 생각하는 형원을 보고 있으면 ‘와, 어떻게 저런 애가 세상에 존재하지?’하는 마음이 들곤 하는 것이다. 예쁜데 착하기까지 하대.
민혁은 그게 참 마음에 들었다. 저와 정반대 같은데 또 죽은 잘 맞는, 어쩌면 원래 하나였는데 둘로 갈라져 태어난 건 아닐까 싶은 그가.
아, 좋은 점이 하나 더 있구나.
“오메가는 대체 무슨 향기가 나?”
TV에 나오는 어느 알파와 오메가의 첫 만남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형원이 민혁을 돌아봤다. 무슨 달달한 솜사탕에 폭 둘러싸인 기분이었다느니 말하는 남자의 황홀한 목소리에 형원의 눈이 반짝였다. 형원은 대체로 낭만을 좋아했다. 알파와 오메가의 본능에 따른 행위를 몸소 겪은 적 없는 그에게는 매체에 비치는 일면이 퍽 낭만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그렇게 예쁘고 착한 채형원은 베타이기까지 하다는 소리였다. 알파와 오메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알파인 이민혁이 건드릴 수 없을 그 선 밖의 인간.
형원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장난치던 민혁이 시원하게 앞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은은하게 풍기는 그의 체취, 자신과 같은 섬유유연제 같은 것들이 어우러져 민혁의 숨 가득 들어찼다. 페로몬 따위보다 훨씬 감미로운 채형원의 향이었다.
“별거 없어.”
생각해 봐, 형원아
민혁의 인생 굴곡을 그래프로 치환하면 몇 번의 큰 사건으로 출렁이는 선이 그려졌다. 탄생, 알파로의 발현, 형원과의 만남, 동거, 데뷔 같은 것들. 그 인생에서 그리 많지 않은 큰 사건 중 형원과 관련한 것만 세 개였다.
예쁜 것에 본능적으로 끌리는 성정인지라, 민혁은 형원을 보자마자 마음에 쏙 들었다. 그가 친해지겠노라 마음먹은 것 중 이루지 못한 건 없었고 매사에 무던하고 누군가에게 간택 당하는 길냥이의 삶이 익숙한 형원도 저를 잘 챙겨주고 예뻐하는 게 눈에 보이는 민혁이 싫지 않았다.
결정타로 기꺼이 제집으로 들어와 지내도 좋다는 민혁과 그 가족의 배려에 형원은 그야말로 푹 빠지고 말았다. 민혁은 그때마저도 형원이 베타라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가 오메가였더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테니.
좁아터진 침대에 장정 둘이 꼭 붙어 자면서도 수학여행 온 고딩처럼 낄낄 웃고 떠드는 밤이 즐거웠다. 민혁과 형원이 그리는 미래에는 당연히 서로의 모습이 있었다. 바늘 가는데 당연히 실이 같이 가야지.
“나중에 너 파트너 생기면 어떡하냐?”
어느날 형원이 넌지시 물은 말에도 민혁은 별생각이 없었다. 파트너는 파트너고 채형원은 채형원인데? 그렇게 말하면 형원은 이해하기 어려운 눈치였지만, 그렇다고 말꼬투리를 잡아오진 않았다. 그는 민혁과 답 없는 입씨름을 해봐야 저만 피곤하단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아, 형원씨. 잠깐 할 얘기 있는데 괜찮아요?”
민혁이 발견한 보석은 당연히 남의 눈에도 예뻤다. 데뷔 이후로 그를 보는 눈이 늘어갔고 형원은 이리저리 불려다니는 일이 잦아졌다. 제 말에는 따박따박 토 달고 말만 잘하면서 초면인 사람 앞에만 서면 얼어붙는 형원이 또 싫은 소리 못하고 시든 꽃처럼 끌려나가는 걸 보면서 민혁이 못마땅한 듯 입안에서 혀를 굴렸다.
평소라면 그냥저냥 넘겼을 해프닝이지만, 오늘 그 남자는 동물의 왕국이나 다름없는 연예계에서도 이름난 난봉꾼이었다. 추접하게 놀기로 유명한 그가 형원에게 순수한 마음으로 다가왔을 리 없었다. 명실공히 형원의 세콤인 민혁이 출동할 차례였다.
형원은 민혁이 따라붙은 줄도 모르고 이 어색한 공기에 어쩔 줄을 몰라하며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대기실이 죽 늘어선 복도 끝 비상구는 오가는 사람이 적어 항상 어두컴컴했다. 손을 휘휘 저어도 센서 등이 불을 밝히지 않아 형원이 애꿎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아, 갑자기 떨리네. 하하.”
마치 복학한 경철이형 같은 말로 운을 뗀 남자의 음성에 형원이 커다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원래도 인기가 많긴 했지만, 연예계에 들어서고 부쩍 남자로부터 대시 받는 횟수가 늘어난 형원은 지금 이 상황이 그의 고해 타임이란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수세에 몰린 형원은 차라리 이 사람을 들이받고 도망갈까 극단적인 생각까지 들었지만, 또 멤버들 얼굴이 주마등처럼 차라락 스쳐 지나가 차마 행동에 옮기진 못했다.
텅.
저를 벽으로 밀어붙이는 산만 한 남자의 과감한 행동에 형원이 왐마야 식겁한 마음을 삼킬 때, 두꺼운 비상구의 철문을 텅텅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형원아, 거기 있어?”
민혁의 밝은 음성에 남자의 몸이 형원에게서 후다닥 멀어졌다. 그는 괜히 헛기침을 쿨럭쿨럭 토해내고는 “멤버가 찾나 보네.”하고 뒷머리를 연신 쓸어내렸다. 어색하게 웃은 형원이 “어어, 민혁아.”하고 대꾸하자 기다렸다는 듯 굳게 닫혀있던 비상문이 활짝 열렸다.
“아, 선배님도 계셨어요? 둘이 뭐, 할 얘기 남았나?”
겁도 없이 선배를 위아래로 훑어본 민혁이 생글생글 웃으며 묻자, 형원이 옆구리를 아프지 않게 쿡 찔러왔다.
“아냐, 아냐. 가려던 참이었어.”
“그치? 내가 방해한 거 아니지? 스탠바이래서 너 찾았지.”
스탠바이는 얼어 죽을 스탠바이. 앞에 대기가 얼마나 밀렸는데.
저를 밀어대는 형원의 힘에도 두 다리 꼿꼿하게 선 민혁은 노골적으로 실망한 티를 내는 선배에게 손을 불쑥 내밀었다. 얼떨결에 그 큰 손을 마주 잡자, 아프다고 소리지르기엔 또 애매한 정도의 힘이 그의 손을 꽈악 물었다.
“제가 팬이라.”
민혁의 저 말뜻은 겪어본 이라면 다 안다. 다음에 또 걸렸다간 사회적으로 매장해버리겠다는 무언의 협박과 일맥상통했다. 두 번 짧게 흔들린 손이 떨어지기 무섭게 민혁은 형원의 어깨에 제 팔을 걸어 그 어두컴컴한 곳에서 끌어냈다.
머뭇거리다 선배를 향해 꾸벅 인사하는 모습에도 답답할지언정 화가 나진 않았다. 이 모든 과정에서 채형원이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대체로 개새끼는 착해서 거절도 할 줄 모르는 형원의 성격을 알고 일부러 접근해오는 놈들 쪽이었다.
“너 근데 어떻게 알았냐? 나 저기 있는 거.”
형원이 한결 편해졌는지 민혁의 뒤를 따라 걸으며 옹알거렸다. 기분 좋은지 말투에 웃음기가 묻어났다. 민혁은 좀 어이가 없다. 방금까지 그 남자 때문에 피가 확 식는 것 같았는데, 또 저 훙훙 웃는 소리를 들으니까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오는 게 스스로 느끼기에도 좀 호구 같았다.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이상하게 형원 앞에서는 배 뒤집어 깐 강아지마냥 이러는 제 꼴이 자신도 이해가 안 갔다.
“죄송한데 너는 내 손바닥 안에 계시거든요?”
“뭐래.”
이거 봐. 남들 다 좋다는 저를 찬밥 취급하는데도 싫지가 않았다.
언제까지고 제 곁에 있을 채형원 이름 석 자를 생각하면 민혁은 두려울 게 없었다. 민혁을 보고 페로몬을 질질 흘려대는 오메가들이 넘쳐나도 자기 관리가 철저한 우성인자인 그는 딱히 동할 게 없었다. 무엇보다 형원보다 눈을 잡아끄는 이가 없었다.
모든 게 만족스러웠다. 형원이 누군가에게 불려 갈 때마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나서기 어려운 순간이 닥치면 조금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민혁은 그래서 너 뭐 돼? 하는 그 말도 싫었다. 괜히 찔려서. 그럼에도 언제나 그를 위해 나설 수 있는 건 형원은 민혁이 잡아끌면 끄는 대로 기꺼이 따라와 주기 때문이었다.
투덜거리는 그 작은 음성에도 웃음이 났다. 거봐. 너랑 나는 떨어질 수가 없다니까. 민혁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한 오만이 슬금슬금 몸집을 불려 갈 무렵, 차마 웃어넘길 수 없는 일이 터지고 말았다.
오랜만의 휴가에 밀린 게임을 타파하던 민혁은 주헌의 전화를 받고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질겅질겅 씹던 오징어 다리가 입에서 툭 떨어져 바지를 더럽히는데도 아무 반응을 할 수가 없었다. 작은 화면 속 캐릭터가 푹푹 칼에 찔리더니 휙 고꾸라졌다. 까맣게 꺼져버린 화면 위로 GAME OVER 붉은 글씨가 둥실 떠오를 무렵에야 민혁이 가까스로 혀를 놀렸다.
“뭐라고?”
전화기 너머에서 주헌이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크게 넘어왔다.
“형원이형 쓰러졌다고!”
*
신나게 쇼핑 나갈 땐 언제고 흰 침대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는 조그마한 얼굴을 들여다보며 민혁이 연거푸 얼굴을 쓸었다. 아직 채 날아가지 못한 달달한 복숭아향에 침이 꿀꺽 넘어가는 저 자신이 싫을 지경이었다.
“아니, 미친……. 형원아. 너 지금 그렇게 누워있을 때가 아니라니까?”
누구에게도 향하지 못한 원망 섞인 투정이 병실에 흩어졌다.
갑작스러운 일에 윗옷도 못 챙겨 나온 민혁은 잠옷에 슬리퍼 차림이었다. 이런 일이 아주 없지도 않다는 의사는 담담한 목소리로 민혁의 평화에 바위를 던졌다.
“오메가네요. 그동안 쌓인 피로에 스트레스까지 겹쳐서 쓰러진 것 같아요. 한 이틀 입원해서 상태 지켜보기로 하죠.”
채형원이 오메가란다. 후천적으로 발현한.
하필 주헌이 형원의 짐을 챙기러 숙소로 떠난 사이 홀로 듣게 된 그의 형질 변화에 민혁은 숨이 턱 막혀왔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피로에 두 눈을 끔벅이자 짙은 쌍꺼풀이 들러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민혁은 차라리 제가 다 기절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친구끼리 으레 우정 테스트랍시고 하는 소리가 있다.
‘너 내가 사람 죽이면 어떡할래?’
‘당장 신고하고 포상금 받지.’
앗, 이게 아니지. 상상 속에서 절 감옥 보내고 포상금을 두둑이 챙긴 형원을 쫓아낸 민혁은 다시 상상력을 총동원했다.
‘내가 알고 보니까 엄청 유명한 도둑이야. 숨겨주면 너한테도 좀 떼주겠대. 그럼 어떡할래?’
‘얼마나 떼줄 건데?’
큰일났다. 민혁을 대하는 형원의 태도는 상상 속에서조차 한없이 장난스러웠다.
기가 막힌 눈길로 곤히 잠든 형원을 가만히 바라보던 민혁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그의 옆에 턱을 괴고 엎드렸다. 기다란 속눈썹이 눈 아래로 커튼을 쳐 어두운 그림자가 진 형원의 얼굴은 시끄러운 제 속과 달리 한없이 평온해 보였다.
민혁은 우정 테스트의 마지막 질문을 꺼내 들었다.
‘우리가 알파랑 오메가라고 하면, 너 어떡할래? 전처럼 지낼 수 있어?’
민혁의 상상 속 형원은 동그랗고 큰 눈으로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민혁은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형원이 입술을 달싹이자, 민혁이 재빨리 선수 쳤다.
‘난 전처럼 못 지낼 것 같은데.’
상상 속 형원이 뭐라고 대답하려 했는지 민혁은 알 수 없었지만, 굳이 알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대답 없는 통통한 아랫입술을 물자 복숭아라도 깨무는 것처럼 달큰한 향이 과즙처럼 퍼졌다.
민혁은 슬그머니 눈을 떠 여전히 꿈속을 헤매는 형원의 얼굴을 바라봤다. 저 얼굴에 반응한 제 아랫도리에 그가 머리를 긁적였다. 살짝 내려간 이불을 꼼꼼히 덮어주고 땀에 젖은 앞머리도 불편하지 않게 넘겨준 그는 어디에 말도 못 할 제 시꺼먼 속내를 한숨과 함께 걷어냈다.
거봐, 형원아. 난 전처럼 못 지내.
*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바뀌어버린 인생에 적응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형원은 히트의 억제를 도와준다는 꺼림칙한 약통을 받아들고 입꼬리를 아래로 쭉 끌어내렸다. 푹 쉬면서 영양제까지 맞았더니 몸 상태는 오히려 전보다 좋았다. 이런 약을 받아먹을 정도로 이상이 느껴지진 않는다는 소리였다.
“주기적으로 복용해줘야 몸도 적응하니까 잊지 말고 꼬박꼬박 챙겨 드세요. 부작용 같은 게 느껴지면 바로 내원하시고요.”
“아……. 네.”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한 형원이 모자를 한 번 더 깊게 눌러썼다. 혹여 누군가 “몬엑 형원 오메가 됐대!”라고 소문이라도 낼까 덜컥 겁이 났다. 공인인 성인 남성은 알파와의 잠자리보다 사회적 지위가 더 걱정이었다.
그룹 생활 중이니 같은 그룹 내 알파도 조심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울컥 화도 치밀었다. 하필 이럴 때 생각난 건 민혁의 본가 좁디좁은 침대에 구겨져 함께 잠을 청하던 스무 살의 청춘들이었다. 큰 눈동자에 눈물이 차려는 걸 가까스로 삼켜낸 형원은 이후에 이어진 주의사항을 한 귀로 흘린 뒤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왔다.
그룹 내 유일한 오메가가 된 형원을 보고 멤버 모두 괜찮을 거라며 그의 등을 토닥였지만, 민혁만큼은 예외였다. 멤버들의 격려에 언제 침울했느냐는 듯 눈을 접어가며 웃는 형원의 모습에 그가 불만스러운 듯 다리를 달달 떨었다.
“야, 형원아. 너 그거 쉽게 생각하면 안 돼.”
“넌 또 뭐가.”
“너 알파가 얼마나 저질인 줄 아냐? 걔들은 한 번 눈 돌면 본능밖에 안 남는다니까?”
“넌 안 그러잖아.”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민혁의 말문이 턱 막혔다. 저 오동통한 입술 꽉 깨무는 상상까지 해놓고 염치도 없다 싶지만, 민혁은 원래 좀 뻔뻔한 구석이 있었다.
“당연하지.”
생긋 웃는 그 얼굴에 형원은 “거봐.”하고 또 냉큼 안심해버렸다. 이럼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저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형원의 앞에서 고개를 저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형원이 믿고 있다면 그에 부응해주고 싶었다. 민혁은 본래 지키지 못할 말은 원래 안 하는 편이었는데, 졸지에 지키기 어려운 약속을 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뭐, 내가 잘 지켜봐야지 어떡해.’
심란한 민혁의 마음을 알 리 없는 형원은 멤버들이 괜찮다, 괜찮다 하니 정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채 이전과 다를 바 없이 편한 생활을 영위했다. 기분 좋은 날은 적당히 치대고 좋은 향기 폴폴 풍기고 예쁘고…….
“혹시 잠깐 따로 볼 수 있을까요?”
파리도 꼬이고.
민혁이 속으로 욕을 씹어 삼켰다. 형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저 흑심 품은 알파 뒤를 쫄래쫄래 따라 나가버렸다. 아니, 무슨 맹수 굴에 직접 들어가는 초식 동물도 아니고.
서둘러 몸을 일으킨 민혁이 드러누워서 다리를 쭉 뻗고 있는 기현에게 소리를 빽 지르니 그는 “왜 또 지랄이야.”하고 스멀스멀 다리를 거둬갔다. 하여튼 팀에 하나뿐인 오메가가 생판 모르는 알파한테 불려 가든 말든 저희 할 일에 정신 팔린 멤버들을 흘겨본 민혁이 혀를 끌끌 찼다. 채형원 생각해주는 거 나밖에 없다, 뭐 이런 생각이나 하면서.
한 박자 늦게 그들을 따라나선 민혁은 항상 그랬듯 어두컴컴한 비상구로 곧장 향했다. 이건 뭐 데자뷰도 아니고. 이제 평소처럼 적당히 시간을 두고 문을 두드렸다가 형원을 데리고 돌아가면 될 일이었다.
문제는 철문 안쪽에서 들린 남자의 소리가 이민혁의 신경에 매우 거슬렸다는 것뿐.
“형원씨, 오메가였어요?”
“네……. ……느에? 아니, 아닌데요.”
“저번에 가방에 억제제 약통 있는 것 같던데.”
웃음기를 머금은 음성에 민혁의 얼굴이 삽시간에 식어버렸다.
굳게 닫힌 철문을 발로 꽝 차서 열자 어수선하던 복도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어디 하이에나한테 물려온 사슴처럼 불안에 떠는 형원을 보자마자 민혁의 눈이 돌아버렸다.
여기서 우성 알파의 페로몬을 풀면 상황은 손쉽게 해결될 터였다. 민혁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검은 본능이 스멀스멀 발끝에서부터 피어오르는 걸 느낀 그가 제멋대로 공간을 휘감으려는 페로몬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아프도록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제야 오메가로 발현한 형원이 제 페로몬을 견딜 수 있을 리 없었다.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린 숨을 천천히 토해낸 민혁이 평소처럼 웃는 얼굴로 형원의 등을 토닥였다. 아직 잘게 떨리는 등에 또 한 번 욱했지만, 민혁은 형원이 놀라지 않도록 최대한 감정의 동요를 감췄다.
“형원아, 들어가 있어.”
“……너는?”
겁을 잔뜩 집어먹어 놓고서도 형원은 민혁의 걱정이 우선이었다. 형원도 눈앞의 저 남자가 알파라는 것쯤은 알았다. 오메가가 되고 나니 본능이란 게 알파를 단숨에 알아채는 달갑지 않은 능력만 몰고 왔다. 같은 알파끼리는 싸움도 잦다고 했으니, 형원은 혹시 민혁이 싸움에라도 휘말릴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복도에서 일어난 소란에 멤버들이 몰려오지 않았더라면 민혁의 옆에 있겠노라 더 고집부렸을지도 모르겠다.
형원이 대기실까지 들어가는 걸 확인한 민혁의 눈이 살벌하게 희번덕였다. 남자의 그리 대단치도 않은 손목을 큰 손으로 움켜쥐자 열성 알파의 입에서 우스울 정도로 같잖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채형원 덕에 산 줄 알아라, 너는.”
“아으……. 씨발, 아프다고!”
“다시는 쟤 불러내지 마. 한 번만 더 눈에 띄면 진짜 죽여버릴 테니까.”
휙 내던진 남자의 손목은 벌겋다 못해 퍼렇게 멍이 들었다. 그리 유명하지 않은 그룹의 멤버는 사회적으로나 유전적으로나 제가 결코 이길 수 없을 민혁을 분한 눈으로 흘겼다.
“짝이면 짝이라고 표시를 해놓던가…….”
남자를 버려두고 나가던 민혁의 귀에 간질간질한 말이 꽂혔다. 짝? 내가? 채형원이랑?
그 말 한마디에 수영장 안에 푹 잠겨 걷는 것처럼 주변의 소음이 사라지고 귀가 먹먹했다. 어째 걸음도 물속을 걷는 것처럼 둥실둥실 하다. 그동안 꽉 막혀있던 문제가 해결된 듯 속이 다 시원했다.
짝이란 말에 기분이 왜 좋지? 채형원이 짝인 게 좋은 건가? 걔랑 떨어지지 않아도 되는 게 좋은 건가? 아냐, 질문 다 꺼져봐. 처음으로 돌아가.
기다란 복도를 걷는 동안 지난 10년의 발자취를 되짚어가던 민혁의 기억이 어느 한 지점에서 일시정지 버튼을 꾹 눌렀다. 제 옆에 누워서 눈만 빼꼼 내놓은 채로 웃던 채형원의 모습에서.
‘우리 꼭 같이 데뷔하자.’
대단한 언약이라도 하는 것처럼 비장하던 여물지 못한 두 소년의 모습을 떠올린 민혁은 가벼워진 마음에 결 좋은 뒷머리를 탈탈 털었다.
명제가 도출됐다.
이민혁은 채형원을 좋아한다.
그것도 제법 역사가 긴 것 같다.
빌어먹을 형질이니 뭐니 하는 것들로 벽을 세우고 친구인 척 자신을 속여왔으니 내내 답답하던 것도 이제야 이해가 갔다. 그런 형원 옆에 다른 알파가 서 있는 모습은 상상할 수 없었다. 민혁은 이런 일에 자신 있는 편이었다. 누군가 저를 좋아하게 만드는 일. 하물며 제게 향하는 형원의 호의는 타인보다 깊은 것이었다.
그런 형원을 제 곁에 잡아두는 것만큼 자신 있는 일도 없었다.
초조하게 민혁을 기다리던 형원은 벌컥 열리는 문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가 표정이 오묘하게 일그러졌다. 분명 한바탕 하고 왔으리라 생각했건만 민혁은 뭐가 그리 좋은지 샐샐 웃는 채였다.
“……너 안 싸웠어?”
“내가 왜?”
됐다, 말을 말자.
작게 한숨을 폭 내쉰 형원이 “고마워.”하고 작게 웅얼거렸다. 그 말에 잠시 눈을 도로록 굴린 민혁이 입술을 씩 끌어올렸다. 크기가 다른 한쪽 눈을 찡긋 감은 그가 형원의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고마우면 이따 나 좀 보자.”
훅 끼치는 더운 바람에 몸을 움찔 떤 형원이 서둘러 몸을 떼고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떨어뜨린 민혁이 살짝 붉게 달아오른 형원의 귓바퀴를 만족스럽게 바라봤다.
*
텅 빈 거실 소파에 앉은 민혁이 제 옆을 톡톡 두드렸다.
“앉아.”
형원이 미심쩍은 눈길로 주먹 하나 들어갈 정도의 거리를 벌리고 앉았다. 민혁의 해맑은 미소는 분명 뭔가 꿍꿍이가 있을 때 나오는 것이었다.
이따 보자는 말이 같이 게임이라도 하자는 건가 싶었는데 형원의 예상은 쉽게도 빗나갔다. 편한 차림의 민혁은 마치 스무 살 언저리의 그 시절과 같아 보였다. 저희의 추억을 떠올리는 그 모습에 형원은 제 의심을 스스로 물렸다.
한결 편해진 그 얼굴을 흘끗 살핀 민혁은 제 계획대로 따라와 주는 그 모습에 웃음이 터질 것 같은 것을 필사적으로 참느라 혼났다. 옛날에 입던 옷과 비슷한 스타일의 맨투맨이 아직 남아있어서 다행이었다. 형원은 추억이나 노을, 흘러가는 구름 따위의 감성적인 것에 약한 편이었고 민혁은 그런 형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넌 좀 오메가로서 경각심을 가져야 될 필요가 있어.”
“갑자기?”
“어허. 갑자기라니. 너는 오늘 그런 일 당해놓고도 갑자기란 소리가 나오냐?”
“내가 당하고 싶어서 당했냐구우…….”
억울하니 말꼬리가 늘어지는 모습에 하마터면 귀엽다고 육성으로 내뱉을 뻔한 민혁이 제 뺨을 찰싹 때렸다. 깜짝 놀란 형원은 드디어 이민혁이 미쳤구나 싶었지만, 오늘 도와준 은혜가 있으니 일단 그 말은 목구멍 아래로 삼켜냈다.
“너한테 되게 좋은 냄새 나는 거 알아?”
“무슨 냄새?”
“왜, 있잖아. 전에 TV에서 무슨 솜사탕 어쩌고 하던 알파 인터뷰 기억 안 나?”
“……아아!”
언젠가의 일을 떠올려낸 형원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흠칫 놀라 제 목덜미를 감쌌다.
“나한테서도 그런 냄새가 난다고?”
“야, 말도 마. 장난 아니라니까? 넌 복숭아향 나.”
“그때는 향 별거 없다며?”
“별거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니야. 진짜 향 미쳤어.”
“……진짜 역겹다.”
“역겹기는. 엄청 좋은데.”
침울해진 형원을 달래주자 또 이 마음씨 착한 어린양은 기분이 한결 나아진 게 눈에 보였다. 민혁은 조금 깊어진 눈동자로 주먹 하나만큼 떨어져 있던 엉덩이를 바싹 끌어 형원 옆으로 붙었다.
“형원아. 넌 너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랑 네가 좋아하는 사람 중에 누굴 만나야 된다고 생각해?”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평소에도 시시콜콜한 주제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좋아하는 형원은 금세 질문에 몰입해 골몰했다.
“으음. 그래도 나 좋아해주는 사람 만나는 게 더 낫지 않나.”
사실 민혁은 이 질문의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스무 살 때부터 형원의 이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 개수작을 부리려니 잊고 있던 기억까지 되살아나는 걸 보며 민혁은 확실히 내가 형원이를 좋아하는구나 한 번 더 확신했더랬다.
형원은 본디 평화주의자에 좋은 게 좋은 거다 주의인 사람이었다. 언쟁은 싫고 내가 그리 손해 보는 게 아니라면 어느 정도 타인의 의견에 맞춰 양보할 줄 아는 성정의 소유자였다. 제가 손을 덥석 잡아도 뿌리치지 않는 형원의 모습에서 민혁은 재차 용기가 생겼다. 된다, 돼! 어떻게든 구워삶으면 채형원 넘어온다!
“내가 너랑 사귀자고 하면 어쩔래?”
“뭔 소리야? 너 뭐 잘못 먹었어?”
이렇게 말할 줄도 알고 있었다.
민혁은 굴하지 않고 형원이 좋아하는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생각해 봐, 형원아.”
“……뭘?”
“좋든 싫든 넌 이제 오메가가 됐어. 오늘 너 데려간 것도 알파고 이 바닥에 널린 게 알파라는데 이런 일이 오늘로 끝일까? 아니. 이제 시작이야, 그거.”
형원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은 채 민혁은 그의 두 손을 꽉 붙잡았다.
“근데 마침 내가 알파네? 짝도 없고.”
“……아니, 그래도 우리끼리 사귀는 건 좀 그렇지.”
“왜? 뭐가 그래?”
“막말로, 너 나 좋아해?”
“어.”
“거봐. 좋아하지도…….”
잠시 입을 벙긋거리던 형원의 두 눈이 천천히 커졌다.
“…………뭐라고?”
“나 너 좋아하는데.”
숨길 게 뭐 있나.
민혁은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불쑥 들이밀고는 “깨달은 건 얼마 안 됐는데, 한 10년 됐나 봐.”하고 폭탄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민혁은 좋은 건 좋은 거고 싫은 건 싫은 게 확실한 사람이었다. 책임지지 못할 감정이었으면 뱉어내지도 않았을 그 마음은 한 번 터져 나오자 걷잡을 수 없이 와르르 쏟아졌다. 입 밖으로 내면 낼수록 ‘아, 나 얘 진짜 좋아하네.’하는 확신이 굳어질 뿐이었다.
“생각해 봐, 형원아. 너도 나 좋아할걸?”
이민혁의 무서운 점은 저 뻔뻔함에 있었다. 형원은 너무도 당당한 그의 말에 내가 얘를 좋아했었나 감정을 되짚기까지 했다. 진짜 웃긴 건 좋아하긴 한다는 거다. 그게 러브든 라이크든.
혼란에 빠진 형원을 바라보며 민혁은 이제 조금만 더 하면 형원이 홀라당 넘어올 걸 뻔히 알았다. 형원은 대체로 몰아붙이는 것에 약했으니까.
“다른 알파하고 다르대도 난 너 보면 서.”
형원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뭐가 서는데? 무서워서 묻지도 못하겠다.
“그래도 참는 거 보면 기특하지 않냐? 다른 알파들은 다 짐승이여, 짐승. 생각해 봐, 형원아. 그런 놈들하고 내가 같아?”
“……아니. 너는 다르지.”
“그치? 근데 알파랑 오메가가 짝이 있으면 다른 사람이 못 건드리거든.”
그러고보니 의사가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형원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자 민혁은 고개를 살짝 모로 꺾었다. 제가 형원의 얼굴에 약하듯, 형원 역시 제 얼굴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생각해 봐, 형원아.”
촉, 닿았다가 떨어지는 말랑한 입술의 감촉에 형원의 얼굴이 삽시간에 달아올랐다. 약하게 푼 페로몬에 형원의 눈이 술에 기분 좋게 취한 것처럼 몽롱해졌다. 민혁의 페로몬에 반응해 형원에게서 퐁퐁 솟아나는 복숭아향이 미치도록 달았다.
형원의 입술 감촉이 남아있는 제 입술을 뾰족한 혀를 내어 핥아낸 민혁이 다시 한 번 입술을 겹쳐왔다. 살짝 벌어진 입으로 거침없이 들어온 뜨거운 혀가 형원의 입안을 부드럽게 훑었다. 혀끝과 아랫입술을 집요하게 물고 빠는 축축한 마찰음에 형원의 입에서 가쁜 숨이 터졌다.
민혁이 쪼옥 소리 내며 떨어지는 입술에 번진 제 흔적을 엄지로 훑어 닦아냈다.
“사랑 그거 원래 양쪽 다 좋아서 시작하는 경우 드물잖아.”
그런가?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해.
형원은 제가 대답을 했는지 안 했는지도 헷갈렸다. 눈앞에서 저를 어여뻐해주는 민혁의 손놀림이 좋아 그저 그 큰 손바닥에 작은 얼굴을 마음껏 부비고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래에 우리 곁에는 서로밖에 없겠더라고.”
“근데 넌 영원 같은 거 안 믿잖아.”
영원을 믿지 않는 알파를 어떻게 믿느냐는 제법 뼈있는 말에, 민혁은 형원의 말랑한 뺨을 아프지 않게 쥐었다.
맞는 말이다. 영원이라는 것은 검증되지 않은 추정에 불과했다.
논리와 근거가 확실한 것을 믿고 약속하는 민혁에게 있어 그 단어는 그리 쓸모있는 것은 아니었다. 민혁은 “누군가”를 “영원히” 사랑하는 것은 영원이라는 추상적인 단어가 아닌 그 누군가를 믿는 것이라 생각했다.
민혁에게 있어 영원을 대신하는 것은 10년 동안 형원 그 자체였다. 10년째 변하지 않는 채형원을 보고 있노라면 인생을 걸어도 좋겠다 생각될 정도로 민혁은 그를 믿고 사랑했다.
“영원이랑 형원이랑 어차피 발음도 비슷해.”
“뭐가 비슷해.”
“어쨌든 둘 다 안 변하는 건 똑같더라고.”
바짝 붙인 이마에 붉어지는 형원의 얼굴을 보며 민혁은 확신했다.
채형원, 넘어온다.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생각해 봐, 형원아.”
생각해 보라는 말에 아이러니하게도 생각이 멈춰간다.
웃는 얼굴은 속셈 없이 진실하게 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때때로 형원이 부끄러울 정도로 진심만을 부딪쳐오는 이민혁 그 자체였다.
“넌 내가 싫어?”
얄미운 이민혁.
그렇게 말하면 좋아한다고 대답할 거 뻔히 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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