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페커미션 47. 반짝이는 게 모두 금은 아니라지만
1차 - 이안 + 달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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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안] 반짝이는 게 모두 금은 아니라지만
아, 경정님, 어째서 정보원을 하필 이딴 자식에게 물려주셨단 말입니까.
요한나는 하늘을 한 번 보고, 땅을 한 번 본 다음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런던 경시청이 머저리만 모여있는 상종 못 할 집단은 아니라지만, 제 옆에서 젠체하며 거들먹거리는 자만 보자면 정말 런던의 머저리만 골라 모아둔 집단인 것만 같았다. 정보원의 최종 인계 결과가 윌슨 전 경정의 의지는 아니었다지만 이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
윌슨 경정이 제 정보원과 접선시켜 준 건, 당연하겠지만 옆에 있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경찰이라면 정보원이 소중하기 마련이었고 누군가에게 넘겨준다면 신중을 기하겠지. 문제는 넘겨받은 사람이 새로 이어받은 정보원을 옆에 있는 멍청이에게도 소개해 줬다는 것이다. 운이 나빠 평소 실적이 좋지는 않지만, 해결한 사건은 모두 기가 막히게 일을 처리하는 부하를 위해서.
이래서 사내놈들이란 글러 먹었다니까. 의리니, 뭐니 하는 것에 취해서 동료를 좋게 보는 것도 유분수지. 불스트로드 경감은 그냥 일을 못 했다. 그래, 그냥 일을 못 하는데, 가끔 자신이 끼어든 사건에서 쿠키 부스러기를 잘 주워 먹은 것뿐이었다. 요한나가 아니라 이안이 해결했다면 이안의 이름만 높을 것이, 요한나가 해결하는 바람에 ‘여자에게 무엇이든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는 지레짐작이 작용해 불스트로드의 명성까지 덩달아 올라간 것이다.
요한나는 수사자료도 보고 정보도 부탁할 겸 경시청을 방문했다가 그 정보를 부탁해야 하는 사람이 불스트로드 경감이라는 걸 알고는 도로 뛰쳐나올 뻔했다. 하지만 자신의 호오와는 별개로 사건조사는 해야 했으니 결국 그에게 알아볼 것들을 부탁해야 했으며, 경시청 다음으로는 어딜 갈 거냐는 말에 현장으로 간다고 대답했다가 경감 본인까지 어정거리며 따라오겠다고 했을 땐 정말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착잡한 심정으로 요한나는 경감을 한 번 보고는 얼굴을 돌렸다. 경시청에 먼저 들를 생각을 했던 게 후회되었다. 아, 남의 정보원은 왜 탐냈단 말인가. 후회는 흘러 흘러 본인의 탐정 자질에 대한 반성까지 가 닿았다. 더 유능한 탐정이 되어 정보원을 더 많이 확보하리라……. 요한나가 마음속으로 반성하는 동안 불스트로드 경감은 저 혼자 저벅저벅 걸어가다 뒤늦게 요한나를 돌아보았다.
“뭐요, 현장을 다시 보고 싶다고 한 건 아가씨잖소.”
“네, 네, 그랬죠.”
너와 하고 싶다고 한 적은 없었어.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요한나는 입을 꾹 다물고 푸트니 베일 묘지의 정문으로 들어갔다. 들어간 순간부터 요한나의 눈이 날카롭게 주변을 훑었다.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묘지가 다수, 길은 닦여있었으나 돌로 정비해 두지는 않았으며 듬성듬성 풀이 나 있어 수색하기에 까다로운 현장이었다. 범행 전후로 비라도 왔으면 으슥한 곳에 발자국 정도는 있지 않을까 기대할 수 있겠으나 야속하게도 런던의 궂은 날씨는 범행 이후론 성질이 죽었는지 오늘까지 비 한 줄기 내리지 않았다.
그래도 요한나는 무언가 수상한 게 있지는 않은지 바닥과 주위 나무들을 살펴보며 천천히 나아갔다. 불스트로드 경감이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요한나는 뭐라든 한 귀로 듣고 흘렸다. 멍청이의 투정을 받아주면 이쪽도 멍청이가 되는 법. 그러나 그런 보람도 없이 현장은 처음 보았을 때와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거 뭐가 있다고 미적대는 거요? 한 번 와봤다면서?”
“네, 출발할 땐 이미 해가 지기 직전이어서 현장을 보지는 못했고요. 겨우 관리인과 이야기를 한 정도죠.”
“그래, 이 불스트로드에게 묘지에 당분간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라느니 전보로 잔소리나 하고 말이지.”
“정중하게 요청했죠, 그리고 요청을 들어주신 건 경감님이시고요.”
“그랬지, 아가씨는 제법 좋은 감을 갖고 있으니까. 그래, 그 여자의 감 그거.”
여자도 아니고 여자의 감도 아니고 논리에 입각한 추론이다, 멍청아. 그렇게 쏘아붙일 수는 없어서, 요한나는 대놓고 한숨을 쉰 다음 묘지 앞문부터 찬찬히 현장을 살폈다. 묘지에는 구색만 겨우 맞춘 초라한 무덤이 주로 있었지만, 이따금 그래도 정성 들여 관리한 듯한 무덤도 보였다. 형편이 좋지 않은 중산층이나 고인에게 각별히 대할 여유 정도는 있는 하층민의 것이리라는 짐작이 들었다. 무덤이 줄지어 있는 지대 뒤로는 나무며 풀이 조금씩 나기 시작해서 정문에서 대각선 방향에 있는 관리소를 지나면 수풀이 우거졌다고 할 만큼 잡초가 많이 자라나 있었다. 요한나가 어젯밤 개고생을 하며 걸어온 곳이었다.
“왜 갑자기 다 탄 담뱃재 씹은 것 같은 표정을 하는 거요?”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 표정을 볼 시간이 있으면 현장을 조사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럴 만한 인간이었더라면 애초에 멍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요한나는 고개를 젓고는 다시 지면을 섬세하게 살피며 두 개의 무덤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지금까지 본 바로는 경찰의 조사와 크게 다른 게 없어 보였다. 오면서 본 바 다른 무덤에 크게 눈에 띄는 점은 없었고, 피해를 입은 두 무덤은 낡아서 경곗돌까지 삭아버린 무덤 세 개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위치해 있었다.
애런 터너의 무덤 위에 얹혀있던 시체의 주인을 찾는 건 쉬웠다. 묘지에는 애런 터너가 묻히기 하루 전에 묻힌 시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무덤의 주인은 닉 벡스로 간경화로 인해 사망하였는데, 애런 터너와는 달리 그다지 가족들의 애도 속에 묻히진 못했던 모양이었다. 혹은 너무나 가난해서 무덤에 쓸 돈이 없었던지.
무덤을 순서대로 판다면 삭아버린 무덤 세 개가 새 무덤 둘 사이에 있을 리 없었지만, 이는 애런 터너의 무덤이 문제라기보다는 닉 벡스의 무덤이 문제였다. 닉 벡스의 무덤은 누구도 묘를 쓰고 싶지 않을 만한 애매한 위치에 마치 억지로 구겨 넣은 것같은 모양새로 자리 잡았다. 거리는 고작 무덤 세 개만큼 떨어져 있었으나 두 무덤의 차이는 극명했다.
애런 터너의 무덤은 뒤까지 수풀이 잘 정리되어 있었으며 방문하기도 쉬웠고 근처에는 아름드리나무가 있어 그늘이 넉넉하게 무덤을 덮은 반면, 닉 벡스의 무덤은 묘지의 바깥쪽 중에서도 완만하고 낮은 낭떠러지 가에 세워둔 울타리 바로 옆에 있었다. 낭떠러지 가에서 자란 비틀어진 나무는 반쯤 죽어서 초라하게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묘의 모양은 직사각형이 아니라 마름모라고 해도 좋았다. 어차피 사용하지 못할 땅이면 돈이라도 받자는 생각이 선명하게 보이는 위치였다.
원래대로라면 두 시체 모두 잘 묻혀 평평해야 했을 땅에 구덩이가 두 개 나 있었다. 도로 파내져 경시청 시체안치소에 가 있을 두 시신에 마음속으로 애도를 표하며 요한나는 먼저 애런 터너의 무덤부터 살펴보았다.
제일 먼저 눈길을 끈 것은 묘지 옆에 부러져 떨어진 커다란 나뭇가지였다. 뜯긴 단면은 마치 작은 거인이 화가 나서 한 손에 잡아 부러뜨린 것같은 모양새였고 떨어진 나뭇가지는 지금에 와 부러진 것이 원통한 것처럼 떨어져 있었다. 나뭇가지 끝부분에는 단면 근처에 무언가 쓸린 것 같은 자국이 굵고 두텁게 나 있었다. 요한나는 수첩을 펴서 연필로 무덤의 위치를 적어둔 아래에 나무와 나뭇가지의 단면 및 쓸린 자국을 그리고 치수를 재어 정확한 흔적의 크기와 너비를 기록했다.
“그런 사소한 것까지 다 적으면 종이 낭비밖에 더 되나?”
바라보기 지루했던지 불스트로드가 형편없는 개소리를 해댔다. 요한나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주변을 더 둘러보다가 망설임 없이 구덩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억, 이봐요!”
관 또한 조사를 위해 옮겨졌지만 운구하다 떨어진 나뭇조각이며 색이 차이나는 흙덩이 같은 건 남아있었다. 요한나는 최대한 움직이지 않으려 노력하며 관에서 떨어진 나뭇조각이며 흙덩이를 작은 주머니에 나누어 넣었다. 새로 떨어진 나뭇잎 몇 외에는 특별한 게 없음을 확인한 다음 요한나는 당당하게 불스트로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경감은 투덜거리며 요한나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아가씨 요즘 너무 먹은 거 아니요?”
“무례하시군요! 탐정 도구를 여럿 가지고 다닐 뿐인데.”
“아하.”
물론 보통 여자보다 무게가 더 나가는 게 맞았지만, 요한나는 뻔뻔한 얼굴로 탐정 도구라는 변명을 만능처럼 둘러댔다. 다행히도 이전에 경감이 보는 앞에서 치마 주머니 안의 온갖 물건을 늘어놓은 전적이 있어 그다지 의심받지는 않았다. 요한나는 사이에 놓인 세 무덤의 주인 이름을 차례로 적어두고 상태를 본 다음 닉 벡스의 무덤에서도 똑같은 짓을 반복했다.
벡스의 무덤 근처에도 나뭇가지가 있었지만, 터너의 무덤 주변과는 달리 자연적으로 말라 비틀어 떨어진 것이나 바람에 날려온 것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빈 구덩이 안에도 잡풀 몇 개가 바람에 날려와 떨어져 있었다. 나뭇가지들을 한참 뒤적이던 요한나는 아하, 하고 탄성을 내뱉으며 나뭇가지들 사이에서 유난히 굵은 것 하나를 꺼내었다.
“흥미롭군요.”
요한나는 집어든 나뭇가지에 대한 사항도 꼼꼼하게 치수를 재어 적은 다음 경감에게 내밀었다.
“뭐요?”
“증거품이요.”
“증거품? 이 가지가 말이오?”
“물론이죠. 보세요, 저기에 꺾인 커다란 나뭇가지와 마찬가지로 단면 부근에 쓸린 자국이 있죠? 자연적으로 꺾여 떨어졌다기보다는 힘으로 꺾은 것 같은 단면도 마찬가지고요. 물론 자국은 훨씬 옅지만 유사한 자국이에요.”
“그게 뭐가 어쨌단 말입니까?”
“……저기 있는 큰 가지와 함께 증거품으로 보관하시라고요.”
“뭐요? 저 큰 걸 나 혼자 들고 경시청까지 가라고?”
“마차에 탈 때는 짐칸에 올려두시면 되잖아요.”
“이봐요, 튼튼한 가지가 부러진 건 이상하긴 하지만 바람이 세게 분 날 떨어졌을 수도 있잖습니까? 이게 무슨 증거씩이나 된다고,”
“이번 사건 해결하고 싶지 않으신가 봐요?”
“아니, 그건 아닌데…….”
“제가 언제 틀린 말을 한 적 있나요?”
“그것도 아니긴 한데……. 뭐, 이번에도 여자의 감 그런 거요?”
“…….”
경감은 아무리 정답에 이르는 추리 과정을 설명해도 들을 당시에만 놀라워할 뿐, 다음 사건이 되면 요한나가 찾는 것을 모조리 여자의 감으로 생각하는 괴이한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이젠 설명하기도 지쳐서 요한나는 말없이 그저 나뭇가지를 가리켰다.
불스트로드 경감은 못마땅하기 짝이 없다는 얼굴을 했지만 결국 요한나의 말대로 커다란 나뭇가지 두 개를 들고 어정어정 경시청으로 돌아갔다. 어쨌거나 요한나의 말을 들어서 틀린 적은 없었으니까. 그가 마차 삯 아낄 겸 같이 가자고 권했지만, 요한나는 고개를 젓고는 같이 타고 가는 대신 세 시간 뒤쯤에 묘지 앞문으로 마차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뭐 어쩌려고 그러는 게요?”
“온 김에 주변인 조사 좀 하려고요.”
“거, 뭐냐, 야간 묘지기 말이오?”
“관리소장도 있다면 더 좋겠죠.”
“거 참. 뭐, 알겠습니다. 말려도 소용없을 테니 좋을 대로 하시오.”
“잘 아시네요.”
이 무슨 포기한 말괄량이 같은 대접이란 말인가. 요한나가 속으로 걸쭉한 욕을 내뱉든 말든, 경감은 마차를 부르러 가겠다며 요한나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응?”
“거, 진술받으러 가면서 할 차림인지는 보고 가시죠.”
그렇게 말하고는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걸음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뭐지, 왜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어정어정 걷는 거람. 갸웃하며 가방 안에 있는 작은 거울을 꺼내본 요한나는 바로 이유를 알았다. 흙이며 풀 조각이 얼굴과 옷에 잔뜩 묻어있었다. 요한나는 얼굴에 묻은 흙을 닦아내는 대신 기가 찬 듯 바람 가득한 웃음을 푹푹 내뱉었다.
“아, 그러니까 레이디에게 멋지게 배려하고 돌아서는 본인 같은 거라도 상상한 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멋이라고는 하나 없이 어정어정 걷는 꼴이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징그럽다고 생각하면서 요한나는 가방 안에 받은 손수건을 쑤셔 넣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하녀에게 꼭 태워달라고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아직 얼굴을 닦기 전에 조사할 것이 남아있었다. 불스트로드 경감을 먼저 보낸 까닭은 여기부터는 조사하려고 하면 엄청난 잔소리가 따라붙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직 묘지 전체를 조사하지는 않았다. 그래, 풀이며 나무가 무성한 후문 근처 말이다. 도대체 거기서 무엇을 찾을 수 있겠냐는 말부터 자기가 레이디라는 것을 완전히 까먹은 거냐는 둥 현장도 아닌 데를 조사해서 뭐 하겠냐는 둥 별소리를 다 듣느니 다른 핑계를 대고 먼저 보내는 게 좋았다.
요한나는 관리소에 너무 가까이 가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수풀을 가로질렀다. 가장 먼저 구별한 것은 어젯밤 자신이 낸 흔적과 다른 흔적을 구분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흔적을 구분하는 건 퍽 쉬웠다. 어찌나 씩씩했던지 후문에서 관리소까지 거의 일직선으로 풀이 밟히고 꺾인 흔적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풀은 여름이면 하루에도 금방 자라 알아보기 힘들다지만, 요한나는 자연을 이길 각오를 한 것마냥 드레스 밑단으로 길을 온통 쓸며 걸어 왔으니 오늘도 흔적이 꽤 선연히 남아있었다.
‘자, 내 것은 찾았고, 혹시 다른 흔적이 남아있나?’
자신이 낸 흔적 그대로 더듬어 후문으로 나아가며 요한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얼마나 주위를 둘러보았을까, 후문 근처까지 다다르자 자신이 낸 길 외에 다른 흔적이 얼핏 보였다. 조심해서 걸은 것 같지만 풀이 밟힌 흔적이 관리소 반대쪽으로 희미하게 보였다. 범행은 밤에 이루어졌을 테니 완전히 흔적을 남기지 않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그 흔적을 따라가던 요한나는 흙이 조금 깊게 파인 흔적 위로 풀이 길쭉하게 꺾인 곳을 찾아냈다. 꼭 사람 몸통만큼 길고 넓게 짓눌린 흔적을 보아하니 거창하게 넘어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요한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 잘 보이지도 않는 밤중에 서둘러 범행을 저지르려면 조급해지기 쉬우니까 말이지. 다만 걸리는 부분이라면……. 사람이 넘어진 흔적치고는 그다지 크지 않다는 건데. 덜 눌린 바깥쪽 풀들이 다시 자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몸집이 작은 사람인 건지 장담할 수는 없군.’
인류학자뿐만이 아니라 식물학자도 찾아야 하는 걸까. 자문이 많이 필요한 사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요한나는 흔적을 꼼꼼하게 스케치하고 흔적의 크기를 재어 기록했다.
카메라를 들고 오게 할까, 생각도 했지만, 카메라는 들고 다니기엔 너무 큰 데다 가격도 비싸고 풀의 눌린 자국 같은 세밀한 것까지 나오지는 않아서 탐정 도구로 쓰기에 적합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카메라를 들고 여기까지 오게 하면 풀숲이 엉망이 되어 있던 흔적도 다 지워질 터였다.
넓게 눌린 자국을 지나면 드문드문 묘지 쪽으로 작게 흔적이 이어졌다. 범행 현장과 가까운 길까지 이어진 것을 확인한 요한나는 작은 지도를 펼쳐 자신의 흔적과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의 경로를 표시하고는 수첩 사이에 끼워 넣었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주간과 야간의 교대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운이 좋다면 관리소장까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요한나는 일단 얼굴이며 몸에 묻은 풀을 처리하기로 했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어두운색 옷을 입긴 했지만, 옷의 색으로는 가릴 수 없을 만큼 지금 자신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작은 손거울을 꺼내 얼굴이며 머리칼을 정돈하고 화장을 고친 다음 옷에 묻은 풀들도 최대한 떼어낸 다음 요한나는 관리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상쩍은 묘지기와 만날 시간이었다.
‘달리아 벨? 방금 야간 묘지기라고 하지 않았나? 여자 이름인데?’
‘맞습니다. 상당히 젊은 여성이죠.’
‘흠, 야간업무에 여성을 쓰는 건 확실히 흔치 않은 일이지만, 그게 문제인 건 아닐 테지?’
‘그렇습니다. 직업이 문제가 아니라, 음……. 존재 자체가 수상하다고 할까요.’
‘응? 그건 또 희한한 말이군.’
‘여태껏 수상하거나 특이한 사람은 나름 많이 만나봤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정도라니 오히려 흥미로운데.’
‘네. 일단, 타인과의 교류가 거의 없다는 건 말 몇 마디만 들어도 알 수 있었습니다만, 그것 외에도……, 뭐랄까, 평범한 구석을 찾는 게 오히려 빠른 사람입니다. 게다가 대화의 특정 주제에 과도하게 반응하기도 하고요.’
그래. 이를테면, 죽음이나 시체 같은 것에 말이다.
경정, 아니 에드 윌슨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요한나는 조심스레 관리소로 향했다. 이렇게까지 부정적인 의미로 독특한 사람을 만나기도 쉽지 않을 텐데. 그러나 요한나가 파악한 대로라면 달리아 벨, 이 자가 범인일 경우 오히려 당당하게 자신의 범행을 밝히고 스스로 감옥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았다. 자신이 믿는 바 그대로 행동한 것일 테니까.
요한나는 관리소 앞문에 서서 가볍게 똑똑 문을 두드렸다. 오늘은 온다는 연락을 하지 않았으니 갑작스러운 방문일 터. 성급한 사람처럼 빠른 간격으로 문을 두드리면 허둥지둥 나오느라 관리소 안에 정보가 될 만한 것들을 더 많이 흘려두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걸 노리며 다시 똑똑 문을 두드린 순간.
“누…구, 시죠?”
문이 천천히 열리며 한없이 느릿한 목소리가 들렸다. 요한나가 기대한 바는 단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을 듯 한없이 여유로운, 혹은 한없이 권태로운 분위기. 문을 천천히 연 달리아 벨은 어제와 전혀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아, 탐정……님.”
달리아 벨은 전혀 당황하지도 않았고 어제와 다르지도 않았다. 그에게서 풍기는 소독제 냄새와 어딘가 비릿한 냄새, 독한 방부제 냄새도 그대로였고 굳은살과 흉이 많은 손도 그대로였으며 독특한 머리 모양도 그대로였고 소매를 걷고 일하기 쉽도록 만들어졌으나 더러워진 곳은 없는 작업복과 펜던트까지도 똑같았다. 다만 자신을 보는 표정까지도 처음 보았을 때와 비슷한 무표정이었는데, 어제 대화했을 때 표정의 변화가 요한나에 대한 호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말하는 주제 때문이었다고 하면 그 또한 이상할 게 없었다. 허를 찌르지 못했다는 낭패감을 삼키며 요한나는 웃었다.
“안녕하세요, 또 찾아뵙게 되었네요.”
“아……, 네에…….”
얼굴 표정이 조금 변하는 듯하다 다시 돌아온다. 요한나는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의 얼굴에 흐르는 불쾌감을 잡아내었다. 자신의 방문이 불쾌하다면 그 이유가 뭘까. 머릿속으로는 온갖 생각을 팽팽 돌리면서도 겉으로는 여유로운 척하며 오히려 더욱 살갑게 말을 붙였다.
“여쭤볼 것이 더 있어서 왔는데 시간 괜찮으실까요?”
“……으음. 그게…….”
“어머, 바쁘실까요? 오늘 새로 들어온 망자는 없었을 텐데요.”
당연한 일이다. 일단 경찰이 현장에 드나드는 사람을 체크하고 있는 데다 괴이하기 짝이 없는 일이 벌어진 묘지에 관을 안치할 마음이 들지도 않을 테니까. 다 안다는 듯이 말하면 달리아는 입을 달싹이다가 도로 다물어버렸다. 아무래도 바쁘다는 핑계를 대려던 모양이었다.
“여쭤볼 게 많아서 그러는데, 혹시 괜찮으시다면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달리아 벨 같은 부류는 뻔뻔하게 밀어붙여야 어쩔 줄 몰라하며 여지를 줘버린다. 사람과의 교류가 없는 부류는 상대가 당연한 것처럼 말하면 원래 당연한 건가 싶어져, 저도 모르게 거기에 휘둘리게 되니까. 요한나는 달리아가 뭐라 할 시간도 주지 않고 밀어붙였고, 달리아는 요한나를 내심 불쾌해하면서도 요한나의 말에 완전히 말려들어, 결국 그를 안에 들이고 자리까지 안내했다.
“말……씀, 드……릴 수……, 있는…… 건……. 이, 전에…… 다…….”
한층 느려진 말투에 사라진 어미, 마주치지 않는 눈. 무엇이 하루만에 그의 태도를 바꾸게 했을까? 눈을 마주치지 않는 만큼 더욱 편하게 달리아를 뜯어보며 요한나는 말을 이었다.
“이해하셔요, 조사라는 게 원래 이렇답니다. 똑같은 질문을 묻고 또 묻지요. 같은 답을 계속 하다 보면 새로 떠오르는 것도 있고, 미처 생각지 못한 자세한 사항을 더 말씀해주시는 경우도 있거든요. 아마 형사분들도 몇 번 더 들르실 겁니다.”
이번이 끝이 아니라는 말에 달리아의 표정의 더욱 굳었다.
“그……래도……, 제……가 말……씀, 드……릴 수, 있……는 게, 너, 무 없어……서…….”
“괜찮습니다. 천천히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 보셔요.”
“으음…….”
“자아, 지난 대화로 여쭈어보았지만 다시 한 번 여쭤볼게요. 벨 관리인께서 일하시는 시간은 언제부터 언제까지인가요?”
“그… 러니… 까……, 저……녁, 7……시부, 터, 아……침 7시…… 까지, 입니……다.”
“주간근무와 바꾸거나 시간을 조정하는 일은 없나요? 범행일 당시에도 그랬고요?”
“어……. 네에, 그……, 일, 이 일어……난 날……에, 는, 그랬어……요.”
“일어난 날에는 그랬다는 건, 안 그런 날도 있다는 건가요?”
“네…에, 주…간 근무……와 바……꾸지, 는 않지……만, 가……끔 코……핀스, 씨…가 늦거……나, 일……찍, 가고……싶…어 하…셔서.”
“코핀스 씨라면 주간 관리자인 그 분이시죠? 그럼 실제로는 12시간보다 더 일할 때도 있다는 말씀이시고요?”
코핀스라니 퍽 묘지관리인다운 성씨였다. 주간 관리자는 아무래도 그다지 성실하지 않은 모양이었고, 달리아 벨은 그의 요구를 심심찮게 들어준 모양이었다. 성격 때문에 거절을 못 한 것일 수도 있지만 요한나는 그보다는 기꺼이 코핀스의 요청을 잘 들어주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네…, 네……. 요즘…, 에는 아……니지…만, 이……전에, ……가끔.”
호오, 그렇단 말이지. 요한나는 수첩 내용을 확인하며 계속 질문했다.
“그래요……. 그럼 주요 업무는 어떻게 되지요?”
“마…, 말…… 그대……로, 묘……지를……, 관리하…는…….”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어떤 식으로 관리를 하지요?”
“그러…니…까, 음……, 새…로 무덤……이 들…어올 자리…나……, 매장…한 후……의 자, 자…리를 정…리하고……, 시체가 들어…오면 잘 단장해드리고…, 훼…손된 무덤은 없…는지 돌보…고, 쓰……레기…… 같, 은 것… 도, 줍…고…….”
“그리고요? 더 중요한 일이 있지 않나요?”
“네…? 이…, 일은… 이 정도……인데요. 중요…한, 일…, 이라면, 시체를 잘 단장하는…….”
“하지만 명칭은 묘지관리인이잖아요. 그보다도 중요한 일이 있을 텐데요.”
“네……?”
정말로 뭔지 모르겠다는 양 눈을 조금 더 크게 뜨는 모양이 한없이 어색해 보였지만 진실해 보였다. 저것이 연기라면 눈 앞의 관리인은 대단한 거짓말쟁이이리라. 근데 세상에는 진실하기에 더 문제인 것도 있었다.
“관리를 하려면 순찰해야 하지 않아요?”
“아……, 아……!”
이제야 생각났다는 탄성까지 진실해 보여서 문제였다. 관리를 하려면 순찰을 해야 한다는 자각이 없는 관리인이라니.
“마…, 맞아…요. 쓰…레기…… 주우면…서, 네……, 한 바……퀴 돌아……요…….”
“쓰레기 줍기가 순찰보다 우선인 건가요?”
“그……렇지…만, 소…장님께…서, 이, 런… 묘지를 도굴……하…는 멍…청……이는, 없……다고.”
요한나는 제 이마라도 한 대 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일견 맞는 말이긴 하지만 사건이 발생한 이상 순찰의 중요성은 알아야 할 게 아닌가? 게다가 관리인이 순찰을 안 하다니, 관리의 본질은 대체 어디로 갔느냔 말이다.
“하지만 도굴은 실제로 일어났죠.”
“맞아요…….”
요한나를 여전히 꺼리면서도 사건에 대한 유감은 변함없는 듯 달리아가 고개를 떨구고 침울하게 주억거렸다.
“그 날도 순찰을 도셨구요.”
“쓰레……기를, 주우면……서, 네……. 해, 가 거…의 지기……, 직전에…….”
“수상한 사람이나 미심쩍은 걸 본 적은 없나요?”
달리아는 고개를 살짝 들고는 좌우로 저었다. 없다는 이야기겠지. 그야, 해가 거의 지기 전이면 달리아의 업무시간 초반에 순찰한 게 된다. 그 이후로는 나가지 않았다고 전에도 이야기했으니 범행이 일어날 법한 한밤중에는 순찰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 이후에 관리소에 계실 때에도 보거나 들으신 게 없으시고요?”
“네……에. 보통……, 밤……에는 사…람…이 잘, 오지…… 않…는 편이고……, 항……상 조…용한 편…이고……. 방……문객…은 없, 었… 으니까…….”
“음, 그렇군요.”
요한나는 고개를 끄덕여 준 다음 몇 가지를 더 물었다. 가장 최근에 온 방문객은 누군지, 그 외의 잡무는 무엇이 있는지, 찻잔은 개인용품인지 같은 시시콜콜한 것까지 묻고 답하는 동안 달리아의 말은 다시 조금씩 빨라지고 시선도 점차 위로 올라왔다. 없어졌던 친근감이 다시 생기기라도 한 걸까.
마지막으로 관리소 뒷방의 시체안치실과 곁에 딸린 창고까지 둘러본 요한나는 마지막으로 수첩을 정돈하며 지나가듯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궁금해졌는데요. 사건에 대한 질문은 아닙니다만……. 방문객도 없고 일도 없는 밤이면 보통 뭘 하시나요? 멍하니 앉아서 보내기엔 12시간은 긴 시간일 텐데요.”
“그…, 렇죠. 보통은……. 신문…이나, 책…을 읽, 어요. 바느질…거리를 가……져오기…도 하고, 겨울……이…면 뜨…개질……도 많이, 하고…….”
“싸 온 도시락을 먹는다거나?”
“네…, 네에. 사서…, 먹는 게… 많기는…… 하지만요…….”
“그렇군요. 쓸쓸하면서도 평화롭겠어요.”
“네…에……, 네.”
“좋아요. 수사에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안한 밤 되시길.”
요한나는 치맛자락을 들어 올려 가볍게 인사한 뒤, 미리 가져온 가스등에 불을 붙이고 관리소를 나섰다. 천천히 걸으며 요한나는 생각했다. 저 관리인은 거짓말은 못 하는 성격이군.
멍청하기는 해도 부탁을 잊지는 않는지, 마침 저 멀리서 불스트로드 경감이 불러주었을 마차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요한나는 손을 들어 마차를 세운 뒤 좌석에 앉아 길게 숨을 내쉬었다. 달리아 벨은 이 사건의 범인이거나, 또 다른 범죄에 가담했을 것이다. 너무 수상쩍어서 도리어 결백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아닌 모양이었다.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어둠과 고요, 어둑한 가스등과 밤짐승 우는 소리가 불안과 의문으로 들뜨던 달리아의 마음에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혹시 탐정이 잊어버린 것이라느니 어쩌느니 하며 다시 돌아올 경우를 대비해 밖을 보며 기다리던 달리아는 마차에 달린 가스등이 빠르게 사라지는 것을 본 다음에야 창문에서 눈을 떼고 안쪽 시체 안치실로 향했다.
보통 누가 죽어서 시체가 새로 들어오지 않는 이상 쓰이지 않는 곳이었으나 달리아는 오히려 여기서 자주 시간을 보냈다. 달리아는 옆방보다 조금 더 두꺼운 안치실의 벽을 쓰다듬으며 더없이 상냥하고 자상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이상하죠, 로저스? 정말이지, 저 탐정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너무 헷갈려요. 날 속였는데, 남자인데, 살아있는데, 그런데……. 정말, 죽은 여자처럼 내 말을 듣고, 날 관리인이라고 불러요. 내 착각일까요? 아니면 탐정의 비열한 술수일까요? 정말, 모르겠어요. 아아, 역시, 죽은 게 좋아. 싸늘하고 딱딱한 당신은 적어도 날 혼란스럽게 하지 않잖아요. 당신의 단단하고 차가운 가슴만이 날 위로해 주었는데……. 맞아, 맞아요, 살아있는 건 역시 필요 없어.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아아, 최대한, 문드러지지 않게 해줄게요, 날 사랑해줘요…….”
달리아의 모습은 방금 전과는 달리, 영혼이 바뀐 것처럼 분위기도, 표정도 훨씬 더 살아있었다. 아니, 살아있다기보다는 기괴했다. 빛을 오랫동안 보지 못해 시체처럼 하얀 피부에 오른 홍조는 오히려 맞지 않는 분을 바른 것처럼 이상했는데, 그 위에 있는 두 눈은 가스등의 불빛이 반사된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형형하게 빛났다. 동공이 가끔씩 눈꺼풀 위로 사라졌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달리아는 마치 아편을 먹은 것 같은, 소름 끼치도록 기묘하면서도 요사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손목을 툭툭 꺾는 이상한 손짓으로 끊임없이 벽을 쓰다듬으며, 마치 그 벽이 무엇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안은 눈곱을 주렁주렁 달고 겨우 일어났다. 체력에는 나름 자신있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과한 자신감일지도 몰랐다. 아니, 아니었다. 이건 신체의 지구력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였다. 정신적으로 지치면 몸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알았으니 좋다고 해야 할지. 어제 한 일이라고는 현장을 조사하고 관리인을 심문하고 나와 경시청에 가서 떼를 써서 몽타주를 얻어내 저와 불스트로드 경감의 정보원들에게 쭉 돌린 다음 두 피해 시체의 부검 결과를 듣고 온 것뿐이다. 구두 밑창이 닳도록 탐문을 다닌 것도 아니고, 먼 거리를 이동하거나 하루 종일 뛰어다닌 것도 아닌데 이렇게 피곤한 것은 확실히 정신 쪽의 피로가 원인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듣는다는 행위는 사람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집중력이 필요한 행위이다. 물론 말소리의 뜻을 파악하는 정도로 듣는 것이야 그리 애쓸 필요가 없지만, 타인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받아들여 제 머릿속의 지식으로 다시 정리하는 것은 상당한 집중력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맹세컨대, 달리아 벨과 긴 대화를 두 번 하느니 차라리 인도 시골 한복판에 떨어져서 현지인에게 영국까지 가는 길을 알아내는 게 덜 피곤할 것이다. 느리고 더듬거리는데다 단어의 이상한 부분을 강조하는 버릇이 있어 가끔 무슨 단어를 말하는지조차 알아듣지 못하고 맥락으로 추론해야 했다. 물론 그 맥락이 나오는 시간도 한없이 느렸다.
하지만 어쩌랴, 달리아 벨은 단순한 참고인도 아닌 용의자인 것을. 이번 사건은 맡지 않는 게 좋았을까 싶었지만 이번 사건이 단순한 괴담이 아니라 진실이라는 걸 알았다면 분명 흥미로워했을 테니, 이렇게 고생하는 건 피할 수 없는 운명인 셈이었다.
이미 해는 뜬 지 오래, 잔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얼른 내려가서 함께 아침 식사를 해치워야 한다. 이안은 서둘러 몸을 씻고 면도칼로 여기저기를 제모한 뒤 실내복을 대충 걸쳐 입었다. 그대로 나가려는데, 노크소리가 나더니 문이 조금 열리고 하녀인 수잔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손님이 오셨어요. 내려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수잔을 비롯해 이 집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부를 때 별 이유 없이 아가씨로 부르지 않는다. 이안으로 있어도 될 때는 절대 아가씨라고 부르지 않고, 요한나로서 있어야 할 때는 절대 도련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즉, 지금 온 손님은 탐정 요한나의 손님이라는 뜻이었다. 이안은 목소리를 한 톤 높여 대꾸했다.
“명함을 받았나요?”
“네에, 주시며 터너 부부라고 하셨습니다.”
역시. 방문자는 요한나의 의뢰인들이었다. 사건을 맡은 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남의 집에 방문하기엔 너무 이른 시간에 굳이 찾아오다니. 이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알았어요, 곧 차림을 하고 나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전해주시겠어요?”
“네, 아가씨.”
수사에 진전이 될 만한 이야기를 가져왔으면 좋겠는데. 그리 생각하며 이안은 얼른 요한나가 되어 외출복을 꼼꼼히 차려입고는 2층에 있는 제 방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갔다. 응접실에 앉아있는 터너 부부는 아침임에도 빈틈없이 차려입고 곧은 자세로 앉아있었다. 입은 옷은 유행에 맞지는 않았으나 깔끔하고 단정했으며 수심 어린 눈빛을 하면서도 표정은 차분하고 단단했다.
“부적절한 시간에 방문드려 죄송합니다. 하지만 잊어버리기 전에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괜찮습니다. 탐정에게 단서를 주기 위해서라면 언제든 방문하셔도 실례가 안 되지요.”
“감사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어요.”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될 만한 단서를 준다면야 한밤중에 방문한다 한들 무엇이 문제겠는가. 터너 부인의 말에 요한나는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곤 상체를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실은, 제가 장례식 당일에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이었는데요. 그……. 정말이지 수상한 사람이 있었어요.”
“수상한 사람이요?”
“네에. 저희 아버님 마지막 가시는 모습이 단정하도록 도와주신 분이신데요. 저희 아버님께서는 낮에 돌아가셔서 당연히 낮에 일하는 관리인이 일하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런데?”
“나중에, 아버님 무덤을 다시 팔 때 관리소장님 옆에 있었던 관리인과 아버님을 염해주신 분은 다른 분이셨어요!”
“…….”
“그게 갑자기 오늘 떠올랐어요. 그래서 염해주신 분에 대해 기억을 떠올려 보니, 말이 거의 없으신 데다 머리카락이 엉망이라 얼굴을 반은 가리고 있었고요, 가끔 하는 짧은 말도 느릿하고 이상한 어투였어요. 당시에는 너무 바쁘고 정신이 없었는데 생각해 보면 이상한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어요! 그 사람이 혹시 이 사건과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요?”
요한나는 제 이마를 한 대 치고 싶은 기분을 꾹꾹 눌렀다. 정확한 시간 기록과 꼼꼼한 수사는 기본이거늘, 자신이 이걸 놓치고 있었다니. 분명 자신은 달리아가 시신을 염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사망 시간도 알고 있었으나 염하기 시작한 것은 저녁일 거라고 무심코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앨런 터너 씨를 염했던 시간이 정확히 언제였나요?”
“오후 여섯시쯤이었을 거예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주간 관리인이 일할 시간이군요.”
“맞아요! 그래서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리고 되짚어 볼수록 이상한 구석만 기억났죠. 침착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이런 건 되도록 일찍 알려 드려야 한다고 생각해서 찾아오게 된 거랍니다.”
“부디 이해해 주십시오, 이 사람이 이렇게 다급하게 구는 건 결혼하고도 처음 보았으니까요.”
터너 부인에 이어 터너 씨가 고개를 꾸벅이자 요한나는 손을 내저었다.
“아뇨, 오히려 대단히 감사합니다. 저희 탐정 같은 사람들에게 빠른 정보는 무엇보다 중요하지요. 잘하셨습니다. 다만 말씀을 들으니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요한나는 함께 가져온 가방을 열어 작게 접은 몽타주를 꺼내어 부부 앞으로 살짝 밀어주었다.
“혹시 이 사람이었나요?”
터너 부인은 몽타주를 보자마자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맞아요. 이 사람이에요. 몽타주가 있는 걸 보니 역시 이 사람이 범인인 거죠!”
“아뇨, 범인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몽타주는 주변 인물 조사를 위해 그린 겁니다.”
“아…….”
흥분해서 자리라도 박찰 기세였던 터너 부인이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다시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사실 주변 인물을 조사하는데 몽타주까지 쓰지는 않지만 일반인이 그런 사실 여부를 알 수는 없으니 대충 둘러대었다. 아무리 그래도 달리아는 용의자일 뿐 범인이라고 확정된 건 아니다. 주요 용의자로 올릴 가능성이 매우 크긴 하지만, 어쨌든 아직 범인이라고 정해진 건 아니었다.
“설명드리지요. 이 사람은 푸트니 베일 묘지의 야간 관리인입니다.”
“……아!”
“근무 시간 외에 일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범인인 것은 아니니까요.”
“그렇군요. 제가 그럼 괜한 사람을…….”
요한나는 안색이 흐려지려는 터너 부부를 달래었다.
“또 그렇다고 해서 범인이 아니라는 것도 아니니까요. 아직은 수사단계이므로 어떤 정보든 주시면 도움이 됩니다. 이번에도 아주 잘하신 거예요. 적극적인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무고한 사람을 트집 잡은 거라면 큰일이잖아요.”
“설명하신 부분에 틀린 점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에 걸리신다면, 약속드릴게요. 부인의 표현에 제 판단을 맡기지 않고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며 조사하겠습니다. 혹시 또 다른 수상한 사람이 있으면 언제든지 오시거나 전보로 알려주셔요.”
“지금은 딱히 수상한 사람이 더 생각나지는 않아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아, 저는 정말이지, 무고한 사람을 트집 잡았다고 생각하면…….”
“전혀 아닙니다. 이쪽에서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던 바가 있으니까요. 무고한 이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열심히 조사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건 사건과는 상관이 없지만, 두 분의 의견을 듣고 싶은데요.”
요한나는 이야기의 주제를 돌려, 터너 부부가 만난 관련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어보았다. 이 질문에 대한 터너 씨와 터너 부인의 대답은 수첩에 적는 대신 머릿속에 일단 차곡차곡 넣어두었다. 수첩에 적지 않는 것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질문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으니까. 두 사람의 대답은 딱 단정하게 사는 부부다운 평가여서 요한나는 속으로 조금 웃었다. 또 생각나는 게 있다면 언제든 방문하시거나 전보를 달라는 말에 부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꾸벅 인사했다.
“정말 감사해요, 꼭 진실을 밝혀주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작별인사를 한 다음에도 부부는 몇 번이고 고개를 꾸벅이며 집으로 향했다. 자신들의 추측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며 왔는지 가는 뒷모습에 기운이 없어 보였다. 그럴 만도 하지, 한 번 보기만 해도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만한 인물이니까.
부부를 배웅한 다음 요한나는 제 가방을 챙기고 기운차게 2층으로 올라가 필요한 온갖 도구를 비밀주머니 여기저기에 쑤셔 넣었다. 여장해서 유일하게 좋은 점이라면 치맛자락 안에 많은 물건을 숨길 수 있다는 것이리라.
“아이고! 어떤 아가씨가 그렇게 경망스럽게 뛴답니까!”
수잔의 탄식이 들리든 말든, 요한나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는 날 듯이 뛰어 내려와 현관으로 향했다. 반성할 건 해야 하지만, 어쨌든 아침부터 정보가 들어왔다는 건 좋은 일이다. 오늘은 왠지 좋은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요한나는 서둘러 마차를 잡고 목적지를 힘차게 말했다. 그는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도 용케 손을 놀려 덜 적은 것들을 수첩에 꼼꼼히 정리했다. 그 아래에 의문점을 연달아 적고는 연필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했다.
달리아 벨은 애런 터너의 사망일 본인의 근무 시간이 아닐 때 일했는데, 주간 관리인 대신 일하는 것에 대해선 ‘최근에는 그렇지 않지만’이라고 말했다. 기억에 없을 만큼 주간관리인 대신 일을 많이 했든지, 혹은, 일부러 대신 일하고 그것을 얼버무렸든지, 어쨌든 진술에 일관성이 없다는 건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마침 요한나의 목적지는 푸트니 베일 묘지의 관리소장이 사는 집이었다. 오늘 방문하기로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었는데, 문을 열어준 사람은 하인이나 하녀가 아닌 관리소장 본인이었다. 입주 사용인을 두기에는 형편이 넉넉지 않아 시간제로 사용인을 쓴다는 내용의 변명을 들으며 집안으로 안내를 받은 요한나는 응접실로 들어가기도 전에 많은 것을 알아내었다.
중년에 접어든 존 호퍼 관리소장은 부인과는 이혼했거나 따로 사는 중이었고 슬하에 자식은 없었다. 벌이가 마땅치 않지만 씀씀이도 많지 않아 그럭저럭 생활이 되는 모양이었고, 더러운 사람은 아니지만 정리 정돈에도 관심이 없으며 어제도 입은 듯한 옷을 구김이 간 채로 입는 타입의 단정하다고는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종교에 독실하지 않으나 방종한 편도 아니며 아닌 척 새로운 소식을 좋아하기도 했다. 요즘 많아진다는 과학 신봉자이려나, 생각하며 요한나는 응접실 소파에 앉았다.
“이미 경찰에 할 말은 다 했습니다만, 무엇을 알고 싶어서 오셨는지.”
“이해해 주셔요, 사람은 같은 일을 여러 번 생각하다 보면 잊고 있던 사소한 일이 떠오르기도 하거든요. 아마 경찰도 다시 올 겁니다.”
“젠장. 아, 숙녀의 방문은 흔치 않아서 대접할 게 마땅치 않은데, 브랜디라도 한 잔 하시겠소?”
“아, 괜찮습니다. 근무 중이니까 술은 어렵기도 하고, 여기 오래 머무를 것도 아니니까요.”
“괜찮다면 되었지만, 나중에 뒤늦게 불평하지 마시오.”
경찰이 온다는 말에 인상을 찌푸리기는 했지만 관리소장은 일단 묻는 데에 성실하게 답했다. 이전 진술과 다른 점이 없다는 점에서 과학 신봉자다운 정확함이라고 생각하며 요한나는 지나가듯이 말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애런 터너 씨를 염한 게 주간이 아니라 야간 관리인이라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아, 아아. 그 말을 깜빡했군. 그렇소, 달리아가 시신을 맡았지.”
“근무 시간이 아닌데도 일을 하다니 성실하신가 봐요.”
“뭐, 그렇다기보다는 길버트놈이 불성실하다고 하는 게 맞겠지만 말이오. 아, 길버트는 주간 관리인인데, 시신을 대하는 건 길버트보다 달리아가 훨씬 잘합니다. 길버트는 그 핑계를 대면서 일을 달리아에게 맡기기 일쑤고요. 아마 연락을 받고 터너 씨 댁이 아니라 달리아네 집으로 먼저 갔을 거요. 그리고 일을 떠맡겼겠지. 늘 그런 식이오.”
“벨 관리인이 불만을 가질 만도 한데요.”
“뭐, 워낙 표현을 안 하는 데다 성격 자체가 무던한 이라서 말이오. 자기 일에 자부심이 있기도 하고, 길버트놈이 달리아에게 일을 떠맡기는 만큼 월급을 가감해서 주고 있으니 딱히 불만 가질 일은 아니지.”
“그렇군요. 터너 씨 때도 마찬가지로, 아무 불평 없이 일을 맡으실 만큼 기꺼이 일하시는군요.”
“그렇소.”
“그렇다면, 후문의 풀을 제거하는 일은 관리인의 일이 아닌 걸까요?”
갑자기 방향을 바꾼 질문에 관리소장이 미간을 구기며 대답했다.
“거, 보기 안 좋은 건 압니다. 하지만 아직 거기까지 묘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후문으로 다니는 사람도 없는 데다 풀이라는 건 베어도 베어도 자라나는 법이 아니오? 그냥 내버려 두면 여름에 무성하다가 겨울에 죽고 그러지. 봄이 올 즈음에 죽은 풀 한 번 걷어내는 식으로 관리하고 있소이다.”
그건 관리가 아니라 방치가 아닐까? 어이가 없을 정도로 방만한 운영방식이었다. 하지만 요한나는 그런 말을 하는 대신 주제를 옮기기로 했다.
“아, 그래서 창고에 큰 낫이 없던 거군요.”
“그렇소. 쓸 일이 별로 없으니까. 작은 낫이면 모를까 큰 낫은 뭐, 묘지 부근에 휘두를 수도 없고 말이오. 풀 담아 버릴 때 쓸 도구야 있지만. 저기 후문 뒤쪽으로 좀 가다 보면 소각장이 있거든. 거기다 버리지.”
“후문 뒤쪽이면, 폐가가 몇 있는 황야 같던데요.”
“그렇소. 사람들이 폐가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지나치기도 하지.”
“그렇군요. 그런데 큰 낫이 없는 건 이해했습니다만, 창고의 비품 개수가 기록과 다르던데 그건 어떻게 된 건가요?”
“아, 기록과 다르오? 별로 신경을 안 써서. 거기에 뭐 귀중품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낡아빠진 것들까지 훔쳐 갈 사람이 있다면 그 양반 형편이 어떨지는 훤히 보이니 그냥 가져가게 두는 것도 적선이 아닐까, 생각해서 그대로 두고 있소이다.”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제대로 돌아가는 게 하나도 없는 묘지구만. 요한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수첩을 정리했다.
“뭐, 더 궁금한 게 있소? 묘지 관리소에 못이 몇 개 박혔는지까지도 알아본 것 같은데.”
“아하하, 정보는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사건과 관련해서는 더 궁금한 게 없습니다만, 혹시 개인적인 의견을 좀 들을 수 있을까요?”
이전과 마찬가지로 요한나는 관련인들에 대한 관리소장의 의견을 들을 때에는 수첩에 기록하지 않고 가볍게 물어본 것처럼 굴었다가, 방문을 마치고 새로 마차를 잡아탄 다음에야 들은 내용을 기록했다. 수첩엔 제법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적혀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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