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Et in Arcadia ego
정신에 광기 한 자락 없는 이들은 지옥에 대해 논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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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1
잊어버리기 위해 의식적으로 할 일을 찾아다녀도 한가할 때면 페제킬레는 하릴없이 들판을 걸었다. 바짓단에 풀물이 들어 색이 변해버렸는데, 그조차도 신기할 따름이다. 쉰내나는 합성 화학 염료가 아니라… 무어라 형용해야 하는가? 지난 수 세기, 이 풍경을 눈에 담은 이는 없었다. 이것을 그리워하던 수천 권의 책만 메아리처럼 되풀이될 뿐. 그리고 페제킬레는 언제나 물가에서 걸음을 멈췄다. 낚싯대는 항상 늘어져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등 뒤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크게 숨을 내쉬고 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
“뭐 좀 잡았나?”
셋, 하면 나무 뒤에서 바구니 가득 사과를 담아 돌아온 메이즈가 외치듯 묻는다. 이번 화해는 저 쪽이 먼저군. 페제킬레의 눈은 돌아 상대를 바라보고는 다시 수면을 향했다. 그는 저 낚싯대를 던진 이래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게 언제였더라, 저번 주? 지난 달? 몇 년 전이었을지도 모르지. 이따금 줄이 팽팽해진 것을 본 적 있기 하나, 마주 당겨본 적은 없었다. 그러므로 대답할 것은 하나다.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몰라?”
“뭐야?”
살아가며 숨 쉬는 동안 네 생각을 하기로 했음에도 페제킬레는 끊임없이 자신에 대해 스스로에게 피력해야 했다. 낭떠러지에 내던져진 인간은 나사가 하나 빠진 결단을 내려야 될 텐데, 그건 미치지 않기 위해서일 테지. 그러나- 이 지옥의 가장자리서 영원히 고통받을 텐가, 저 어둠 속에 떨어져 안주할 텐가? 아마, 대답을 결정짓는 대신 차라리 사고를 정지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애초에 정신에 광기 한 자락 없는 이들은 지옥에 대해 논하지 않는다. 역사상 과실 하나에 깨달음을 얻고, 세계의 증명을 위해 전쟁터에 스스로 뛰어드는 이 치고 제정신인 위인이 있던가?
-없다. 그들은 세상의 끝에서 그들이 모름을 인정했고, 돌아와서 앎에 대해 설파했다. 그러니 그 인류의 역사에 비추어 보아,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에 익숙하다는 것은 너무나도 부조화스러운 일이 아닌가! 페제킬레는 생각했다.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가? 그러니까… 무엇으로 제정신을 유지해야 하는가? 우리는 얼마나 여기에 있었을까?
"며칠을 거기 죽치고 있길래 터가 좋은가 했더니."
"그런 거 볼 줄 몰라. 뭐 해 봤어야 알지……."
"그래, 그 말도 이제 몇 번째 듣는지 몰라!"
우리는 얼마나 여기 있어야 할까? 한숨을 쉬는 얼굴에서 속마음을 못 읽어낼 것도 없었다. '저 인간, 낚시는 핑계였군' 하는 표정으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다가와 곁에 앉는 메이즈를 보며 페제킬레는 외려 안도감까지 느꼈다. 정답은 되지 않더라도 좋은 대안은 언제나 곁에 있었다. 다만 문제라면, 대안일 뿐이라… 페제킬레는 쓸데없이 낚싯대 끝부분을 매만지다가, 메이즈를 바라보았다. 언제나와 같은 상냥한 눈이 이쪽을 볼 때 화가 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제는 잘 모르겠다. 부러 크게 하품을 하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물 흘러가는 소리가 좋아."
메이즈는 그 곁에 찰싹 붙어 눕고는 생뚱맞은 소리를 했다.
"그거 알아? 이것도 무슨 우스개소리로 들은 건데, 쥐가 버린 배는 반드시 침몰한다고."
"그건 꼭 무슨 저주라도 받은 것 같군."
"달리 보면, 마지막까지 붙잡고 포기하지 않는 게 바로 쥐라는 거지."
그러니까, 그게 바로 저주란 거야. 생각을 굳이 입 밖으로 내는 일은 없으나, 페제킬레는 분명 그렇게 중얼거렸다.
'떨어진' 뒤로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영원히 지구에 머물고 있었을 인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우리도 좀 더 어른스러운 사람이 되어 만났을 수도 있지 않았나 하는 그런 실없는 상상이었다. 세상에 변함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변해가는 것을 느낄 때, 안주하기를 최대 덕목으로 삼는 이가 홀로 방치되어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그는 비이성적으로 화를 내거나 웃거나, 또는 도망쳐 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가라앉은 뒤 돌아가면 언제나 그 자리에 변함없이 있는 모습은 안도를 주는 동시에 그 변화를 절절히 느끼게 했다. 나는 당신의 기저에 깔린 나약함을 기억했다. 그 근원을 잊더니 메이즈는 스스로 앞을 보기 시작했고, 페제킬레는… 이 기분을 조급함이라 표현하는 것이 적절한가? 그래, 그들의 관계에 대해 조급해했다. 올바로이 세워진 것은 함께 같은 보폭으로 걸어나가는 것일진대, 어느 순간부터 메이즈는 홀로 앞서 걷고 있는 듯 보였다. 원류는 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쥐는 할 수 있었어. 그리고 아마 스스로는 절대 인정하지 않겠으나 그는 그 변화를 두려워했다. 벌렁 뒤로 누워버리면 얼굴 옆을 스치는 풀이 익숙하니 어색해서, 그는 이곳에서 분명 이방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말했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살기 위해 도망치겠지."
그리고 메이즈는 다시 한 번,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다.
“네가 불타올라 형체조차 남지 않아 잿가루 찾을 길 없다면 말이야.”
"아침에는 내가 미안해."
"언제나 말했듯, 나는 이해해."
#S2
하지만 이해가 괜찮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당연하게도.
메이즈는 페제킬레의 모든 것을 감내할 수 있었으나, 마찬가지로 그것을 표용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작은 잔에 물을 넘치도록 붓고 뚜껑을 덮은 채 내리누르기만 한다면 터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할 수 있어?
불변은 존재하지 않았다. 평생 쓸 줄 알았던 기계는 기름칠 하지 않으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퍼지기도 하고, 어딘가 고장이 나서 부품을 갈지 않으면 작동조차 하지 않는다. 동물은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데 먹는 행위로 취향이란 것을 만들어 버리곤 하지.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안주가 아니라 적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이란 것은 그렇게 변덕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말이야— 변하지 않아야 가장 이상적이라 여기고 있는 것 좀 보라. 메이즈는 뺨을 스치는 풀의 흔들림에 맞춰 숨을 쉬었다. 그는 분명 그럴 줄 알았다. 그가 물었다.
"페이."
"왜?"
"바람이 불어. 안아줄래?"
"안 돼, 임무 중이잖아."
핑계대기는. 메이즈는 턱을 살짝 치켜들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낚시가 임무라 주장하는 건 둘째친다 한들, 눈을 감고 잠이나 청하는 이를 보아라. 메이즈는 코웃음을 치고 다시 머리를 떨어뜨렸다. 그가 말했다. 그리고 분명 대답을 알고 있었다.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해."
"음, 싫어."
"그게 싫은 거야, 아니면 이게 싫은 건가?"
"몰라."
"나랑 이야기하기는 어때, 그것도 싫나?"
별로 기대도 안 했지만.
"이걸 한 문장으로 축약해야만 한다면… 그래, 지금은."
그는 유의미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을 걸었고, 화답하는 공허한 대답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각한 뒤, 눈을 감았다. 나는 언젠가 되돌아오지 않을 수면에 외치는 것도 지치고야 말겠구나. 사랑이라 주장하는 우리의 집착은 누구도 보답받지 못한 채 갈 길을 잃고야 말겠지. 이 환상에 붙여진 이름의 대지모신이 처음으로 품은 것은 빛도, 생명도 아니라 어둠이었으며- 바로 그곳이 원류가 부르길 지옥이니까. 메이즈는 찰나의 변덕으로 다시 눈을 뜨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그러면 내일은 그럴 마음이 들겠어?"
대답하지 않는 목울대가 침음을 토해낼 때, 살아 숨쉬며 움직이는 심장이 옆에서 분명 크게 고동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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