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꽃물

금색의 갓슈벨 / HL 커미션

포말 by 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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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블랑제님의 커미션입니다.

*금색의 갓슈벨 제온X코루루


‘착한 마음을 가진 마물이라니. 어불성설이다.’

 

웃음이 끊이지 않는 교정 안에서 제온은 언젠가 제가 품었던 생각을 떠올리며 작게 조소했다. 보랏빛의 자수정을 박아놓은 듯 오묘하게 빛나는 그의 눈동자가 운동장을 뛰노는 어린 왕의 금색 머리카락을 좇았다. 제 형을 발견한 갓슈가 함께 놀자며 손을 흔들었지만, 제온은 부드럽게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여타 마물에 비해 고결한 핏줄을 타고난 탓에 남들보다 조금 더 먼저 어른이 되어야 했던 제온은 아직 이 어수선한 마계 학교의 분위기가 낯설었다.

 

‘내가 왕이 되었더라면 이렇게 행복한 웃음이 울려 퍼지는 일은 없었겠지. ……역시 네가 왕이 되어 다행이구나, 갓슈.’

 

마계가 일상을 되찾았지만, 제온은 아직 또래의 마물과 어울리기 어려웠다. 그들이 제게 품었을 공포와 분노가 그리 쉽게 사그라질 리 없었다. 그렇다고 딱히 외롭거나 섭섭한 마음은 없었다. 애초에 외로움이란 걸 모르고 자랐으니 혼자인 건 익숙했다. 그저 갓슈가 왕위에 오르고 일원으로 받아들여졌으니 형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었다. 제 악행으로 갓슈마저 받아들여지지 못했다면 그보다 슬픈 일은 없었을 테니.

다행히 이 바보 같을 정도로 착한 마물들은 그런 자잘한 일은 마음에 품지 않고 갓슈를 친구로, 또 왕으로 대해줬다. 기특한 것들. 제온은 감히 기꺼운 마음으로 운동장의 아이들을 살폈다. 개중에는 유독 눈에 띄는 분홍 머리의 아이도 있었다.

 

‘코루루……랬던가. 갓슈에게 착한 왕의 꿈을 꾸게 한.’

 

또 뭐에 화가 났는지 소리 지르며 갓슈의 목을 조르는 티오의 옆에서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른 채 그녀를 말리는 분홍 머리의 아이. 입을 가리고 작게 웃는 그 아이.

끈질기게 따라붙는 시선에 코루루가 문득 교실로 시선을 던졌을 때는 이미 나부끼는 커튼만이 아롱아롱 손을 흔들었다.

 

 

소년, 꽃물

 

 

“갓슈, 갈까?”

 

돌아갈 집이 같으니 형제는 등하굣길을 함께 하는 날이 많았다. 흉흉했던 첫 만남이 무색하게 한 번 죽이 맞은 쌍둥이는 그 이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원래 사이가 좋았던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함께 돌아가자는 형의 말에 갓슈가 드물게도 말끝을 흐렸다.

 

“우움……. 오늘은 좀 어렵겠구려. 코루루가 잠시 할 이야기가 있다더군.”

 

교실 뒷문으로 먼저 후다닥 뛰어나가던 코루루의 뺨이 머리카락처럼 분홍빛으로 물들었던 걸 떠올린 제온이 알만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백이로군.

홀로 궁에서 버텨낸 탓인지, 제온은 또래 아이들보다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아니, 적어도 갓슈 정도의 눈치만 아니라면 코루루가 그에게 품은 연심은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눈에 훤했다. 하필 친한 아이들이 칸쵸메, 우마곤 수준이라 그렇지.

 

“그럼 먼저 가야겠네.”

“움! 집에서 보세나.”

 

동생의 고백 장면을 지켜보는 무신경한 형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갓슈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나오는 길에 여전히 복도 벽에 기댄 채 발끝을 꼼지락거리는 코루루가 있었다. 귀엽게 말린 분홍색의 머리카락이 잔뜩 긴장한 마음을 따라 흔들리는 걸 보면서, 제온은 구태여 못 본 체 그녀의 곁을 스쳤다. 코루루의 곁을 지나칠 때 코끝을 콕콕 찌른 꽃향기에 제온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사랑에 빠진 여자애는 저런 향이 나는 건가.

몇 걸음 가지 않아 우당탕탕 뛰어나오는 갓슈의 요란한 소리와 꽃망울이 터지는 듯한 코루루의 웃음소리가 뒤에서 울려 퍼졌다. 둘의 즐거운 음성을 들으며 주홍 노을에 길어진 제 그림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제온은 걸음을 재촉했다. 그저 이 모든 것들이 제 삶에는 없는 것들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그렇게 씩씩하게 손 흔드는 갓슈와 헤어졌을 터인데.

어째서인지 얼마 뒤, 제온은 벽에 등을 기댄 채 훌쩍이는 소리를 엿듣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두고 온 물건이 떠올라 다시 돌아온 교실에서 홀로 울고 있는 코루루를 마주칠 줄이야.

 

“흐윽……. 흐, 윽. 우으…….”

 

쪼그리고 앉아 몸을 동그랗게 만 코루루가 훌쩍일 때마다 작은 등이 떨렸다. 쥐어짜낸 고백에 돌아온 것은 다정한 거절이었다. 갓슈의 앞에서 필사적으로 버텼던 코루루의 눈물은 텅 빈 교실에서 터지고 말았다.

이럴 때 시오리 언니가 있었더라면……. 그럼 언니한테 폭 안겨서 마음껏 울었을 텐데.

서러운 마음은 이제 볼 수 없는 다정한 인간의 모습까지 그려내 여린 마음을 채찍질했다. 정신없이 눈물을 쏟아내던 코루루는 문득 평소에 느껴지던 시선이 다시금 따라붙는 걸 느끼고 몸을 흠칫 떨었다. 언제나 고개를 돌리면 사라지고 없던 시선의 주인은 오늘만큼은 그 동그란 두 눈을 피하지 않은 채 코루루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두운 교실에서 달빛처럼 내리쬐는 제온의 눈동자는 인형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예쁜 보석 같았다.

 

“……제온?”

 

코를 먹었는지 맹맹한 소리에 제온이 작게 웃었다. 그가 웃는 걸 처음 본 코루루는 울던 것도 잊은 채 입을 헤 벌리고 그를 살폈다. 사실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갓슈와 똑같이 생긴 얼굴이라니. 다만 그 제온이 미소 짓는 걸 처음 본 코루루는 그의 웃는 얼굴이 무척 예쁘다고 생각했다. 같은 얼굴이지만, 전혀 다른 형제의 미소에 코루루는 어쩐지 제온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여전히 서럽게 눈물을 뚝뚝 흘리는 얼굴에 제온 역시 문득 갓슈를 떠올렸다. 그녀는 본인과 닮아있던 갓슈에게 끌린 것일까 하는 아무래도 좋을 의문이 들었다. 묻고 싶은 말이 많은데, 그렇다고 굳이 입 밖에 낼 만 한 것들은 아닌지라 제온의 입술이 달싹이다 닫히기를 반복했다.

결국 그가 말 대신 꺼내 든 것은 곱게 접힌 흰 손수건 한 장이었다. 코루루는 이 나이 또래 남자아이에게서 볼 수 없는 손수건의 등장에 제법 놀란 눈치였다. 고맙다는 말을 들을 생각은 아니었는지 미련 없이 휙 돌아서 나가는 그의 등에 대고 코루루가 허둥지둥 “고마워!”하고 외쳤다. 한 번을 돌아보지 않는 그의 모습에도 코루루는 손 흔드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모두 아직 제온 벨을 내심 두려워하는 걸 알고 있었다. 피도 눈물도 없고 폭군 그 자체라는 왕의 쌍둥이 형. 글쎄. 코루루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실연한 여자애에게 손수건을 내미는 그가 이전과 같은 폭군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

 

“자, 제온.”

 

의외의 조합에 티오는 물론 교실의 몇몇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시선을 교환했다. 코루루가 내민 흰 손수건을 받아 든 제온은 여전히 별말이 없었다. 그는 시답잖은 위로는 안 하느니만 못하단 걸 알고 있었다.

제온의 작은 배려에 코루루는 금세 웃음을 되찾았다. 베시시 웃는 얼굴은 여전히 슬픔이 묻어났지만, 그렇다고 감정에 매몰되지는 않았다.

 

“고마워!”

 

역시 닮았다.

제온은 환하게 웃는 코루루의 모습에 슬며시 미소 지었다. 갓슈가 그녀에게 감화해 말도 안 되는 목표를 노리게 된 걸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에 하나 저 역시 방황하던 시절 코루루를 만났더라면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일어날 리 없는 일을 상정하는 건 제온의 성격상 맞지 않았지만, 세상의 부정적인 감정을 모두 지운 듯한 코루루의 미소를 보고 있노라면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이 불쑥 찾아들곤 했다.

 

“제온의 손수건 아니오?”

“갓슈!”

 

분명 껄끄러운 일이 있었을 텐데도 여전히 친구로서 마주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제온은 잠시 묻어뒀던 질투의 감정이 불쑥 치고 올라오는 걸 느꼈다. ‘무엇에?’라고 묻는다면 정확히 답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천하의 제온 벨은 이제 분홍색만 보이면 어깨를 움찔 떨었다. 운동장에 핀 분홍 꽃이 그랬고 티오의 새로운 분홍 머리핀이 그랬고 칸쵸메가 애지중지 아끼는 딸기 맛 사탕이 그랬다. 자잘한 분홍색이 눈앞에서 어지럽게 춤추다 보면 저 멀리서 온통 분홍인 코루루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저렇게 분홍색투성이인 애가 손을 흔드니 무엇이든 물들기 쉬운 새하얀 제온은 자꾸만 시선으로 그녀를 좇았다. 발끝에서부터 야금야금 분홍으로 물드는 줄도 모르고 관심을 호기심으로 포장한 채 시선을 던졌다.

갓슈, 티오와 함께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또 한 번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코루루와 눈이 마주쳤다. 예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더는 커튼 뒤로 숨지 않는다는 것.

 

“제온!”

 

코루루가 제 이름을 더 자주 부르게 됐다는 것.

코루루의 분홍이 제 뺨에 물든 줄도 모르고 그는 애써 태연한 얼굴이었다. 경망스러워 보이지 않도록 손을 올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 제온이 제 흰 망토 자락을 꽉 쥐었다. 손바닥에 송골송골 배어 나오는 땀이 낯설었다.

소년의 마음에 불쑥 들어온 소녀가 온통 꽃을 뿌렸다.

새하얀 소년이 폭 파묻힐 정도로 소복한 향기로운 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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