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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페커미션 46. 빈 문서 1

1차-테리온x캐럴(B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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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지에 줄을 감은 목각인형 두 개가 허공에서 춤을 춘다. 사방 어두운 가운데 옅은 조명 하나 아래서 달그락, 달그락, 나무 부딪히는 소리가 얇고 서늘하게 울린다. 두 인형이 관절이 없는 것마냥 휘적대며 서로 부딪혔다 떨어지길 반복한다. 조종하는 이가 형편없는 실력을 가진 듯 움직임은 두서도 없고 의미도 알 수 없었다.

분위기는 서늘하기 짝이 없는데 느껴지는 것은 한기가 아닌 더위라는 것에 괴리감이 든다. 조금 후덥지근한가 싶던 열기가 쌓이고 쌓이며 이내 불쾌한 땀이 주르륵 흐른다. 달그닥, 끼긱, 달그락, 비명 같기도 한 소리가 거슬려 참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무어라 소리를 치기 전, 한 인형의 실이 모조리 끊어지며 실이 엉켜 뒤틀린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땀이 줄줄 나는 가운데에도 느껴지는 서늘하고 소름 돋는 추락에 끝이 없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땅과 부딪히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저 영원히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그렇게 저에게서 멀어지는 것은…….

캐럴은 눈을 떴다.

마치 잠에 든 적 없는 것처럼 형형하게 눈을 뜬 캐럴은 이불을 젖혀 뒤로 밀어냈다. 두터운 이불과 긴 잠옷이 답답하고 더워 견딜 수가 없었다. 여태껏 잘만 잤는데 왜 갑자기 이렇게 더워진 건지 알 수 없었다. 캐럴은 신경질적으로 옷을 벗어 그 옷으로 땀을 닦아내 구석에 있는 옷무덤 위로 처박았다. 그대로 힘없이 한참을 앉아있던 캐럴은 겨우 몸을 일으켜 옷장 문을 열고는 혀를 찼다. 더는 입고 잘 만한 옷이 없었다.

귀찮았다. 그러나 옷을 아예 안 입고 다니는 것도 싫었다. 지팡이가 어디 있더라. 그러나 그는 언제 어디다 두었는지, 어디다 두기는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제 지팡이를 찾는 대신 그냥 곁에 뒀던 테리온의 지팡이로 마법을 운용했다. 남의 지팡이로 마법을 쓰면 집중해야 하는 것도 번거롭고 오류가 나면 그건 그것대로 귀찮았으나 캐럴은 제 몸과 이불, 옷무덤에 차례차례 지팡이를 휘둘렀다. 남의 지팡이로 오류가 나는 것보다 제 지팡이를 찾으러 돌아다니는 게 훨씬 귀찮았으므로.

마법을 몇 번 쓰면 땀에 젖었던 몸도 눅눅한 이불도 쌓인 채 도리가 없어 보이던 옷무덤도 순식간에 깨끗하게 변했다. 중간중간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옷은 새로 사면 되니까. 캐럴은 옷무덤을 뒤적여 위아래 세트인 긴 잠옷을 꺼내었다가 도로 옷무덤 위에 돌려놓고는 다시 옷무덤을 뒤적여 짧은 옷을 꺼냈다. 몸에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집의 냉난방이 잘못된 것 같지도 않으니 그냥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더운 모양이었다.

캐럴은 곧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매일의 온도에는 편차가 있다지만 겨울에 더위를 느낀다고? 의문을 품던 캐럴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느릿하게 알아챘다. 정확하게 며칠인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5월이었다. 겨울용 이불과 잠옷으로 자기에는 무리가 있는 계절. 벌써, 5월이던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캐럴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깥은 이미 봄꽃마저 다 져서 나무들이 그저 푸릇해지고 있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캐럴의 감각으로는 그저께쯤까지는 겨울이었던 것 같고, 어제쯤엔 조금씩 봄이 오는가 싶었는데 오늘 갑자기 초여름이라니.

캐럴은 아무 생각 없이 이불을 돌돌 말아 옷무덤 위에 처박고 여름 이불을 꺼내 편 다음 다시 침대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테리온이 본다면 잔소리를 하고도 남았을 꼴이었지만 캐럴은 그닥 개의치 않았다. 본인이 실제로 잔소리를 하기 전까지는 제멋대로 굴 셈이었다. 늘 그렇듯이.

침대에 누우면 곧 졸음이 밀려왔다. 그러고 보니 아까 꾼 꿈은 대체 뭐였을까. 내용 따위 없이 불쾌하기만 한, 하지만 언젠가 꿨던 것도 같은 꿈. 캐럴은 멍하니 벽을 보다 고개를 저었다. 생각할 필요도 없었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자고 싶었다.

다음에 눈을 뜨면 배가 고팠다. 아침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해가 넘어가기 시작한 오후가 된 모양이었다. 냉장고는 열지 않아도 어떤 꼴이 되었을지 뻔했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건 그저께 먹은 초코바를 끝으로 모조리 동났다. 무언가가 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돌리니 렉스가 부리로 창문을 쪼고 있었다. 창문을 열어주면 렉스는 발톱 사이가 미어터지도록 편지를 가득 쥐고 들어와 보란 듯이 탁자 위에 뿌려놓았다. 마치 타박이라도 하는 것처럼.

“아, 렉스…….”

캐럴이 이마를 쥐고 신음을 흘렸지만 렉스는 도리어 빽빽 울었다. 인간의 언어로 하면 정신 차리라는 잔소리쯤 될까. 주인을 닮아서 아주 성격이 나빴다. 캐럴은 인상을 쓰며 렉스에게 훠이훠이 손짓을 했다.

“잔소리 하지 마. 테리온이 할 잔소리만 해도 귀 따가운데 너까지 그러냐.”

캐럴의 한 마디에 렉스가 우는 소리를 뚝 멈추었다. 그 모습에 캐럴은 제 안의 순위에서 렉스를 테리온 위로 올려주었다. 적당히를 아는 녀석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렉스가 먹을 생고기도 없었던가. 종종 렉스가 스스로 작은 동물을 사냥해 먹는 듯했기 때문에 크게 위기감을 느끼진 않았지만 그래도 캐럴은 미안함을 느꼈다. 주인이 가고 난 뒤에도 저를 위해 일해주고, 더불어 잔소리도 적당히 하는 착한 녀석인데.

어차피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지경이기도 했으므로 캐럴은 입은 잠옷 위에 적당히 얇은 코트만 걸치고 끼니를 때우러 나가기로 했다. 이리저리 엉망인 머리를 대충 손으로 빗고 눈곱을 떼는 것으로 외출 준비를 마친 캐럴은 생각했다. 빵과 우유 정도는 정기 배달 서비스를 이용해 봐도 좋을 거라고. 그동안은 테리온이 장 봐오면서 같이 사 오면 되는 걸 왜 웃돈을 주냐고 타박하기에 서비스에 눈도 주지 않았지만 테리온도 없는데 나가기도 귀찮은 지금은 그런 서비스가 유용할 터였다.

“조금만 기다려. 밥 좀 먹고 네 밥도 사 올 테니까.”

집을 나서며 렉스에게 남긴 말에 렉스가 조그맣게 우는 소리를 낸 것도 같았다.

거리로 나선 캐럴은 조금 낭패감이 들었다. 햇볕이 언제 어느새 이렇게 뜨거워졌지? 보온 기능이 있는 로브를 입은 사람들을 빼면, 얇은 외투라도 걸친 건 캐럴 본인밖에 없었다. 로브를 찾기 귀찮아서 아무거나 집어 들어 입는다는 게 제법 계절과 괴리된 우스운 꼴이 되었다.

……아무렴 어떻단 말인가. 캐럴은 저가 그렇게까지 덥지 않으니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집에서 가장 가까운 식당으로 향했다. 대충 소화가 잘 될 것 같은 걸로 골라 주문하니 주인장이 뭐라고 한 마디 하고 싶은 얼굴로 저를 보고 있었다. 캐럴이 주문이 아닌 무슨 말이라도 하기를 기다리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캐럴은 그 표정을 무시하고 고개를 돌렸다. 귀찮기는. 타인에게 받는 동정 따위 필요 없었다. 테리온이 있었다면 걱정이라고 정정하기라도 했겠지만 테리온은 이제 없으므로 캐럴은 제 맘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불만이 있으면 본인이 오던지.

반 이상 남은 음식이 어쩐지 꺼림칙했지만 어쩌겠는가. 들어가는 게 그 정도인 것을. 캐럴은 근처 가게에서 빵과 우유를 배달해달라고 한 다음 일 년 치를 선불했다. 원래 그 정도까지 선금을 낼 필요는 없었지만, 그 가게 주인도 음식점 주인처럼 자신에게 뭐라고 하고 싶은 모양이어서 홧김에 일 년 치를 선불해 버렸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일 년간 얼굴 볼 일은 없을 테니까.

배도 적당히 찼고 음식 배달 서비스도 시켰으니 이제 볼 일은 생고기 사는 것만 남았다. 푸줏간이야 많았으나 렉스가 잘 먹는 고기를 사려면 좀 떨어진 푸줏간까지 걸어야 한다. 렉스는 먹이를 특히 까다롭게 가리는 편은 아니었으나 제 마음에 드는 고기를 먹을 때면 눈빛부터 달랐다. 문득 걷는 것조차 귀찮아져서, 렉스는 까다로운 놈도 아니니 대충 아무 날고기나 사줄까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테리온이 기르던 녀석인데다 테리온보다 성격도 좋고 일도 잘 해주고 있었으니 기특하다고 할 만했다. 게다가 테리온은 동물들과 정체불명의 교감을 나누고는 했으므로, 렉스가 캐럴이 제게 소홀했다며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는 울음소리도 다 알아들을 가능성이 컸다.

귀찮았지만, 사서 잔소리를 듣는 취미도 없었으므로 캐럴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는 곧 제 결정을 후회했다. 아무거나 잘 먹는 놈에겐 아무거나 사줄걸. 아니, 그들과 마주칠 줄 알았더라면 집을 나서지도 않았을 텐데. 캐럴은 먼저 반대편에 시선을 고정한 채 못 본 척 다른 길로 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 했다.

“캐럴 라이트.”

아, 귀라도 쑤셔 막고 다녀야 했는데. 캐럴은 절로 멈칫한 제 몸까지 원망하며 천천히 몸을 틀었다. 불러도 못 들은 척 자연스럽게 갔으면 좋았을 텐데, 부른다고 걸음을 멈췄으니 상대를 안 할 수도 없었다.

후회를 곱씹으며 고개를 완전히 돌리면 한 무리의 마법사들이 저를 보고 있었다. 캐럴도 익히 아는 자들이었다. 테리온과 깊은 유대를 가지고 있을, 자신이 테리온을 숨겨줬다는 이유 하나로 마뜩잖은 저에게 시비를 걸지 않는, 테리온과 친했던 동료들. 개중 가장 친화력이 좋은 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안 더워?”

그래, 시비를 걸지 않으면서도 마뜩잖음을 나타내는 첫 문구로 나쁘지 않았다. 캐럴은 순순히 대답했다.

“니가 알 바 아냐.”

그들은 테리온의 친구였지 자신의 친구는 아니었다. 테리온이 살아있었을 적에야 그를 봐서라도 좀 더 친절하게 굴었겠지만 이제 와 친절하게 굴어서 뭣하려고. 퉁명스럽게 답을 하자 몇몇의 얼굴이 구겨졌다만 그 역시 캐럴이 알 바는 아니었다.

“시비 건 거 아니야. 얼굴이 창백한데 옷까지 아무거나 입고 나온 것 같아서 물어본 거야.”

“아, 그래. 그럼 대답할게. 안 덥고, 안 창백하고, 잘 입었어.”

“야. 너는 꼭 그렇게 말해야겠냐?”

“그럼 어떻게 말하면 되는데? 나 렉스 먹이 사러 가느라 바빠. 그럼 이만.”

“아니, 잠깐만…… 렉스를 네가 키우는 거야?”

“그러면 안 돼? 걔가 내 편지도 같이 가져온 게 언제인데.”

“아니, 잘 키우고 있다면야 다행이지만…….”

“그럼 간다.”

이번에야말로 쓸데없는 대화 따위 잇지 않고 제 갈 길 가겠지. 그렇게 생각했지만, 캐럴의 생각보다 그들은 끈질겼다. 캐럴이 느릿한 걸음으로 그들을 지나치는걸 보던 한 남자가 억누른 것을 터트리듯 불쑥 말했다.

“너, 테리온 묘지에 가보긴 했어?”

“…….”

“너 장례식에도 추도식에도 안 왔잖아.”

“…….”

“적어도 묘지엔 가봐야 하는 거 아냐?”

울분에 찬 목소리가 사정없이 귀를 두들겼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둔기가 되어 캐럴의 심장을 내리쳤다. 햇살은 강렬했고 들리는 목소리는 무거웠으며 저는 순간 누가 머리채를 잡아 휘두른 것처럼 현기증이 났다. 그러나 캐럴이 어떻든 간에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테리온이 남긴 건 다 갖고 있으면서 묘지에 한 번도 안 가는 게 말이 돼?”

“진정해, 캐럴도 뭔가 사정이 있었을,”

“내가 거기 왜 가는데.”

울컥해 말을 잇는 자와 그를 말리려는 자 사이로 작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한마디에 정적이 흘렀다. 얼빠진, 혹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저를 보는 눈빛에 찔려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지? 선을 넘은 건 그들이었다. 그리고 캐럴은 어쩐지 몹시 저열해지고 싶었다. 마법사답지 못한 저열한 레벨까지 추락하고 싶었다. 자기파괴적인 충동이 불쑥 솟아올랐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너 뭐라고,”

“내가 거기 왜 가는데!”

캐럴이 시비를 건 자의 멱살을 잡았다. 저를 뜯어말리는 손길을 뿌리치며 캐럴은 멱살을 꽉 붙잡고 소리쳤다. 상대방이 무어라 저를 힐난하는 지는 들리지도 않았다. 햇볕이 살을 찌르고 눈이 부시도록 날이 밝고 세상이 빙빙 도는 것처럼 어지러워도 잡은 멱살을 놓지 않고 힘껏 소리질렀다.

“너희들 마음대로 결정하고 처리한 걸 내가 왜 보러 가야 하는데!”

“그때는 한마디도 안 한 주제에 지금 와서 이러는 거야?”

“너희에게도 말할 자격 따윈 없었어!”

“너 진짜 테리온이랑 동거 좀 했다고 이따위로 굴어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본인 의사 하나도 없이 결정한 걸 내가 왜 따라야 하는 거냐고!”

그 말을 끝으로 말리는 사람들이 손에 몸이 뒤로 밀쳐졌다. 힘에 밀려 비틀비틀 뒷걸음질 치던 캐럴은 의외로 더 쏘아붙이지 않는 상대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너희가 멋대로 다 정한 거잖아. 본인만 빼놓고 너희들이 뭐라도 되는 듯이 장례식이며 추도식을 계획했잖아. 너희들의 결정 어디에 테리온의 의사가 있었는데? 걔가 해달라고 하긴 했어? 너희들이 뭔데 당사자 없는 데서 당사자를 빼놓고 결정해!”

“야, 너…….”

다시 현기증이 일었다. 하늘이 빙글 도는 것 같았다. 저가 제대로 땅을 밟고 있던가? 그러나 캐럴은 용케 넘어지지 않고 몸을 다시 돌렸다.

“렉스 먹이 사러 갈 거야. 다 꺼져.”

그러고는 흔들리는 땅을 조심스럽게 밟아 걸었다. 누군가에게는 휘청이며 걷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죽어도 부축받고 싶지 않았다. 사실, 몇 번이고 현기증이 일어도 금방 가라앉았기 때문에 부축도 필요 없었다. 보라. 제 등 뒤로 수군대는 소리가 사라지면서 현기증도 같이 사라지지 않나.

캐럴로서는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장례식이건 뭐건 그 식의 주인공은 테리온인데, 테리온의 의견을 구하기는커녕 자기들끼리 뜻이 이렇느니 저렇느니 끼워맞춰가며 좋을 대로 일을 처리하지 않았는가. 그런 무례하기 짝이 없는 예식에 발끝이라도 담글까보냐. 뭐, 대거리를 하니 저를 붙잡지 않는 걸로 봐서 최소한 양심에 찔리는 게 있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캐럴은 푸줏간에서 낚아채듯이 고기를 받아 집으로 향했다. 늘 하던 대로 렉스 먹이용으로 고기 준비해달라고 했을 뿐인데 푸줏간 주인마저 저를 향해 이상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었다. 다들 제게 뭐가 그리 불만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저와 상관없는 사람이 자신을 싫어하건 말건 아무래도 좋을 일이었지만 가는 데마다 좋지 못한 취급을 받으면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테리온의 지팡이로 순간이동을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므로 캐럴은 집까지 뛰듯이 걸어 돌아왔다. 숨이 턱까지 차는 게 몹시 불쾌했다. 짧은 외출로도 기력이 죄 빨려 나간 것 같았다. 밥을 사 먹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고기를 사고 밥을 포장해서 집에 왔다면 숟가락 뜨기도 귀찮아 배를 곯았을 게 분명했으니까. 캐럴은 힘없이 손을 휘적이며 렉스용 밥그릇에 고기를 산더미처럼 얹어주고는 소파에 눕듯이 앉아 신경질적으로 편지들을 뜯어보았다. 사업에 대한 건 대충 보아 문제없을 만해 보이는 것들에 사인을 해서 렉스가 보낼 편지를 모아두는 곳에 던져두었고 답하기도 귀찮은 안부편지들은 뜯지도 않고 어딘가로 내던졌다.

결국 눈앞에 남은 건 매장을 한 번 방문해 직접 보아달라는 내용의 편지뿐이었는데, 캐럴이 보기엔 굳이 방문하지 않아도 될 일들로 굳이 자신을 부르는 것 같아 괘씸해서 안 가도 알아서 잘하라고만 답장을 적어 그 또한 보내는 편지 위에 던져두었다. 최근에 방문하지 않았더라면 캐럴도 직원들을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캐럴은 분명 최근에 매장을 직접 보고 지시를 내리고 점검하지 않았던가? 신년맞이 행사며 봄 신상까지 알차게 검토해줬는데 왜 징징거리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든 편지 확인도 마쳤겠다, 렉스가 밥을 먹고 저 편지들을 보내면 대충 오늘의 일도 끝이었다. 이제 다시 누워도 된다는 뜻이었다. 다시 침대로 돌아가기도 귀찮아 소파에 모로 엎어졌다. 느릿하게 시간을 흘리고 있다 보면 잠이 오겠지. 그러나 캐럴의 기대는 이번에도 깨어졌다. 렉스가 그 많은 먹이를 다 먹고도 부족하다는 듯 제 주위로 날아와 빽빽거렸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렉스 먹이에 소홀했던 죄가 있던지라 가라앉으려는 몸을 겨우 일으키고 날고기를 추가로 더 얹어주었다. 다만 투덜거리는 건 멈출 수 없었다.

“너도 주인 닮아 대식가지 아주.”

남은 고기를 다시 보존마법이 걸린 그릇에 집어넣으며 캐럴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기다려 봐, 테리온이 오기만 하면 네가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다 일러바칠테니까.”

그러고 보니 테리온이 올 시간이 다 되었는데, 지금 어디 있는 거지?

무심코 시계를 바라본 캐럴의 심장이 땅에 떨어져 터져나갔다.

시계에는 오직 자신밖에 없었다. 제 얼굴이 박힌 시곗바늘이 집을 가리키고 있었고,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그래,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처럼, 시곗바늘은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아. 맞다. 테리온은 죽었지.

훅, 하고 현기증이 일었다. 어지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 이번에야말로 몸이 휘청이며 바닥을 향했다. 온몸이 딱딱한 바닥에 부딪혀 통증이 일었지만, 그것을 느낄 수 없을 만큼 어지러웠다. 세상이 얼마나 돌았을까. 겨우 고개를 든 캐럴은 그대로 바닥에 먹은 것들을 모두 게워내었다.

테리온은 돌아올 수 없다. 그러니 렉스가 과식했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없었다. 죽었으니 제 장례식에 대해 의견을 낼 수도 없고 추도식을 할지 말지 결정할 수도 없고 저가 어딜 가든 말든 참견할 수도 없고 저가 어떻게 살든 잔소리를 할 수도 없었다.

속에 있는 모든 것을 게워 낸 캐럴은 지팡이를 휘둘러 제 토사물을 치워버렸다. 제게 맞지 않는 지팡이 때문에 마법이 잘못되어 바닥에 금이 갔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 지팡이, 지팡이가 어디 있더라. 아니, 어차피 상관없던가. 지팡이를 찾기에 캐럴은 기력이 없었고 바닥엔 온갖 잡동사니가 널려있었다.

마지막 인내심을 끌어모아 렉스에게 편지를 보내달라고 부탁한 다음 캐럴은 테리온의 지팡이를 들었다. 심상찮은 기색에 렉스는 저가 보낼 편지들을 그러모아 허둥지둥 밖으로 날아갔다. 캐럴은 렉스가 날아가자마자 지팡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어차피 다 필요없는 것들이었다. 태반이 테리온의 것이었고 나머지도 쓰지 않은 지 오래인 잡동사니들 뿐이었으니. 캐럴은 미친 사람처럼 눈을 번득이며 마구 지팡이를 휘둘러댔다. 그것은 정리라기보다 구분 없이 물건을 죄 한곳에 모아 버리는 것에 가까웠다. 다, 다 필요 없었다. 그렇지 않은가, 어차피 테리온은― 죽었으니까.

방 안이 온통 엉망이 되었다. 부서진 것과 부서지지 않은 것과 구겨진 것과 구겨지지 않은 것들이 모두 둘둘 바람에 뭉쳐가고 있었다. 그래, 다 없어지면 좋을 것이었다. 캐럴은 차라리 시원한 기분으로 지팡이를 휘둘렀다. 얼마나 휘둘렀을까, 달각, 하는 소리가 캐럴의 귀를 스쳤다. 뭔가 부서지는 소리려니 하고 넘겨도 좋았지만 캐럴은 무심코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거실 벽 쪽에서 무언가가, 마치 벽돌 하나가 밀려 나오듯이 네모나게 튀어나와 있었다.

이 집에서 살면서 저런 걸 설치한 일 따위 없었다. 애초에 벽 한쪽이 튀어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캐럴은 쓰던 마법을 멈추고 튀어나온 벽에 손을 가져다대었다. 회오리바람에 뭉치던 물건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온갖 소리를 냈지만, 캐럴은 듣지 않았다.

마치 벽돌 같다고 생각하면서 튀어나온 부분을 잡아당겼더니 정말로 벽돌이 빠지듯 네모나게 벽 일부가 빠지며 구멍이 났다. 짜증으로 뛰던 심장이, 이제는 긴장으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자신의 기억에 집에 이런 걸 설치한 적이 없으니, 이건 분명히. 테리온이 만든 것이다.

구멍 안에는 작게 양피지가 돌돌 말려있었다. 캐럴은 직감했다. 그 누구도 찾지 못했던 테리온의 유서일 거라고. 위험에 노출된 채 살았던 그가 쉽게 찾지 못하도록 꼼꼼하게 숨겨둔 마지막 기록일 거라고.

캐럴은 떨리는 손으로 양피지를 꺼내 펼쳤다. 여러 가지 부탁이며 당부, 인사들로 꽉 채운 양피지를 끝까지 다 읽은 캐럴의 심장에서 증오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머글본에 대한 소리가 상당한 양을 채우고 있었던 탓이었다. 또, 머글본이었다. 그래, 제 부모님을 죽이고 테리온도 죽게 한 그 머글본들. 그들이 제 모든 것을 앗아갔다.

머글본은 다 죽어야 해.

이미 사멸한 주장이 캐럴의 안에서 다시 부활하고 있었다.

캐럴은 떨리는 손으로 양피지를 꺼내 펼쳤다. 여러 가지 부탁이며 당부, 인사들로 꽉 채운 양피지를 다 읽자 저도 모르게 팔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허탈하고 막막해 가슴 속에 커다란 구멍이 난 것 같았다. 그놈의 머글본. 부모는 머글본에게 죽었고 테리온은 머글본을 지키다 죽었다. 그렇게 죽을 거였으면서도 테리온은 양피지의 상당수를 할애해서 머글본 걱정을 잔뜩 하고 있었다.

도무지, 저항할 수가 없는 존재들이었다. 부모님을 앗아가고 테리온마저 홀려버린 그것들의 존재가 캐럴을 압박하는 것 같았다. 마치 자연재해처럼, 그들이 다가와 캐럴에게서 무언가를 앗아가면 당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들을 만나면 또 다시, 무엇이 더 남았는지 알 수 없으나 또 무언가를 가져갈 것이다.

캐럴은 겨우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 테리온의 지팡이를 옆자리에 두고 캐럴은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극복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절망을 만나지 않으려면 이대로 계속 자는 것이 최선일 것 같았다. 그는 온몸을 웅크려 둥글게 말고는 머리 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캐럴은 떨리는 손으로 양피지를 꺼내 펼쳤다. 마지막 글마저 테리온다워서 무어라 불평 한 소리 할 수조차 없게 만드는 면이 있었다. 눈으로 읽으면 금방일 글을 캐럴은 읽고 또 읽었다. 읽다가, 문득 깨달았다.

이 글은 어딘가, 수상하다.

일단 철자가 틀린 단어가 너무 많았다. 그리고 틀린 철자에 v가 유난히 많았다. 잘 쓰이지도 않는 철자가 왜? 그리고 그것을 알아챈 순간, 마치 바닷속에 들어간 것 마냥 먹먹해진 머릿속으로 테리온의 목소리가 마치 파도처럼 밀려왔다.

벤투스와 바니타스는 은근히 닮은 단어 같지 않아?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아니 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서. 이걸로 마법을 만들면 뭘 만들 수 있나 싶고.

아, 바니타스인지 사니타스인지 모르겠고 밥이나 줘. 오늘 네 차례잖아.

맞다. 젠장......

흐흥, 기대할게.

그래, 그런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그래, v로 시작하는 마법 언어들 중에는 분명 그렇게 부르는 것도 있었다. 마법 주문으로 쓰일 일이 없어 캐럴조차도 슥 보고는 잊어버렸던 고대의 한 단어.

캐럴은 거실 한가운데에 널부러져 있는 물건들을 뒤적여 깃펜과 빈 양피지를 찾아내었다. 그리고 테리온의 유서에서 틀린 철자만을 모아 나열했다. 글자는 총 30개. 그것을 빈도순으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았다.

aaaaaaa

ttttt

nnnn

iiii

vvv

mm

ss

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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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대체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캐럴에게는 강력한 힌트가 있었다. 그래, vanitas라는 단어. 일단 그는 vanitas로 한 단어를 만들어 쓰인 만큼 리스트에서 지웠다. 아니, vanitas라는 단어를 두 개 만들어도 될 정도로 알파벳은 충분했다. 일단 두 개를 만들어둔 다음 캐럴은 고대언어에 대한 지식을 쥐어 짜내 이리저리 철자를 배치하고 바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캐럴은 문장 하나를 완성해 냈다.

Vanitas vanitatum et omnia vanitas.

이게 무슨 뜻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데도 어쩐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 문장으로 뭘 해야 하는 지도.

캐럴은 마치 홀린 듯이, 테리온의 지팡이를 들고 주문을 외듯 문장을 읊었다.

거짓말처럼 매끄럽게 마법이 시전 되었다.

벽을 가득 채운 크기로, 어떤 장면이 보였다. 조금 보기만 해도 머글의 방이라는 건 금방 알 수가 있었다. 제법 난잡한 방에서 어떤 여자가 열심히 노트북이라고 부르는 물건을 여러 손가락으로 누르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마법이지? 당황한 캐럴은 한동안 손가락 말고는 변하지 않는 방 안 풍경을 살펴보다 여자가 움직이는 손가락 쪽에 집중했다. 여자가 손가락을 놀릴 때마다 하얀 바탕에 활자가 채워져 가고 있었다. 낯선 언어였으나, 이상하게도 내용이 곧바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캐럴은 경악했다.

여자가 손가락을 판에 누를 때마다 자신의 오늘 하루가 전개되고 있었다. 저가 꾼 꿈이며 아침에 땀을 흘리며 깨어난 것, 옷을 무더기째 세탁한 것과 아무 옷이나 잡히는대로 입고 다시 자는 것, 그리고 저녁에 다시 깨어나는 것…….

그러다 여자가 어떤 손 모양을 하면 다른 글씨가 가득한 창이 나타났는데, 그걸 무심코 읽은 캐럴은 더욱 경악했다. 그건 캐럴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있는, 어떤 크리스마스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다 읽기도 전에 창이 다시 바뀌고는 오늘 하루가 계속 기록되고 있었다.

갑자기 테리온이 즐겨 읽던 책 내용이 생각났다. 제 4의 벽이라던가, 그걸 허문다던가, 하는 이상한 내용의 글이었다. 캐럴은 전혀 관심이 가지 않아 신경을 끄고는 곧 잊어버렸는데. 그 책의 내용이 갑자기 생각나면서 캐럴은 눈앞의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 세계의 진실이 보였다.

캐럴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세상은 저 여자의 글로 인해 구축되고 돌아가는 세상이었다. 모두 다 누군가가 만들고 이야기하고 쓴 이야기의 결과물이 자신의 세상이었다. 그리고 저 여자가 서술하는 대로 캐럴은 움직이고 말하고 화내고 쓰러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분명 틀림없이, 목각인형을 조종하던 것도, 한 인형의 끈을 잘라버린 것도, 저것일 터였다.

아, 너구나, 조종하던 게.

울컥, 온갖 감정이 치고 올라왔다. 분노, 회한, 증오, 허탈함, 부정, 긍정, 역겨움, 짜증, 압박감, 고통, 열등감, 패배감, 허무함, 그리고 더는 알 수 없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머리끝까지 넘쳐흘렀다. 캐럴은 헛구역질하기 시작했다. 더는 토할 것이 나오지 않았지만 역겨워 죽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부모를 머글본을 통해 앗아간 것도, 테리온을 그런 식으로 죽게 한 것도 모두, 모두, 저 여자가.

죽여버릴까.

살심이 훅 솟아올랐다. 그러나 마침 여자가 판 두드리는 걸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몸이 멈칫 멈추었다. 자신을 볼 수 있을 리 없는데도 이쪽으로 얼굴을 향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압박감이 들었다. 마치, 세계 전체가 자신을 짓누르는 것 같은…….

그러나 여자는 곧 제 쪽에서 시선을 거두고 노트북이 있는 책상 너머로 기지개를 켜며 걸어갔다. 어떻게 죽여야 좋지? 고민하던 캐럴은 형형한 눈으로 방치된 노트북을 보다 문득, 깨달았다.

지금 쓰는 ‘이야기’를, 자신이 이어서 쓴다면?

앞서 쓰인 내용을 지운다면? 아니, 굳이 이야기를 지우고 다시 쓸 필요도 없었다. 지금까지 쓰여있는 그대로 내버려 둬도 좋았다. 이후의 전개를 크게 비틀 필요도 없었다. 무슨 전개가 되든, 한 문장만 추가하면 캐럴이 원하는 바는 이루어질 터였다. 그래.

분명 관에 안치해 무덤에 묻혔을 테리온이 뛰는 심장 그대로 기적처럼 살아 돌아왔다.

이 한마디만 적어서, 어떻게든 ‘완결된 이야기’로 만들 수 있다면.

갑자기 뜬금없는 이야기가 되어도 좋았다. 캐럴의 간섭으로 인해 세상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었다. 한 문장만 더할 수 있다면, 그걸 완성본으로 마무리 지어 저가 보던 크리스마스 이야기처럼 더 이상 손대지 않고 그대로 완성 절차를 거친다면. 딱 한 문장만 더한다면.

그러면.

여자는 없었지만, 노트북 화면에는 지금 저가 하는 생각이 실시간으로 화면에 기록되고 있었다. 갑자기 밥이 먹고 싶어졌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적힐까? 생각하면 정말로 적혔다. 이거 진짜야? 미쳤어, 테리온은 어떻게 이런 마법을 만들 수 있었지? 이런 마법을 만들고도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 역시 멍청해서는 대단한 걸 만들어도 제대로 쓰지를 않으니,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캐럴은 어쩐지, 지금이라면, 어쩐지, 건너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발짝만 앞으로 내딛으면 건너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노트북이란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의 격차는 조금 있을 수 있으나 캐럴은 어쩐지 저 여자가 돌아온다 해도 질 것 같지 않았다. 아니, 질 수 없었다.

그래서 캐럴은 망설임 없이 그것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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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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