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작업 및 기타 샘플

크레페커미션 44. 영원히 영원히

2차 - 켄토x유이(HL)

* 커미션 페이지:

* 신청 감사합니다!

[켄토유이] 영원히 영원히

타치바나 유이나는 서쪽으로 걷지 않는다.

그래서 친구들이 혼수를 보러 가자고 했을 때 유이나는 상당히 당황했다. 큰 이유는 없다, 그저 서쪽을 향해 걷지 않기 때문이었다. 자신도 참 하찮은 이유라고 생각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아무리 사소한 규칙이라고 하더라도 유이나 본인에게는 굉장히 중요해서, 아무리 급한 때라도 절대 어기지 않았다. 설령 입사 면접에 지각하게 되더라도 말이다.

물론 서쪽으로 단 한 걸음도 옮기지 않는다면 유이나는 집 옆에 있는 편의점에 가기 위해서 지구를 한 바퀴 돌아야 할 것이다. 그의 규칙은 그렇게까지 빡빡하지는 않았다. 서쪽을 향하더라도 단거리를 걷거나, 다른 방향으로 걷다가 서쪽으로 걷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단지 걷는 내내 한 방향으로만, 오직 서쪽으로 걷는 것만이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친구들이 산책 삼아 걸어가자고 하는 쇼핑몰은 서쪽으로 쭉 걷기만 하면 나오는 곳이었다. 대중교통이나 택시를 타도 루트는 똑같았기에 큰 의미도 없었다. 그래서 유이나는 난처해졌다. 단순히 쇼핑몰로 놀러 가자고 하는 거라면 다른 곳에 들렀다 가자고 하면 되지만 이번에는 자신의 고민을 덜어주자며 다 같이 혼수를 보러 가자는 것이니 거절하기도, 다른 데로 주의를 돌리기도 애매했다.

유이나는 후회했다. 도와달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근황을 나누다 보니 말이 나온 것뿐인데, 이럴 줄 알았으면 이야길 꺼내지 않을 것을. 유이나는 머리를 쥐어짜고 생각했다. 서쪽으로 쭉 걷지만 않으면 되는데, 중간에 북쪽이나 남쪽 어디로든 돌아서 갈 수만 있으면 되는데, 마땅히 들렀다 가자고 할 만한 장소가 없었다. 밥도 먹었고, 후식도 먹었다. 원래는 이쯤 되면 헤어지는 게 일반적이었기에 규칙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하필이면 오늘, 혼수 이야기를 꺼낸 시점에서, 모두가 다음 일정이 없을 줄이야.

그래도 규칙을 어길 수는 없었다. 규칙을 세운 이유는 딱히 없지만 오랫동안 지켜온 규칙이고 규칙을 어긴다고 생각하면 심한 거부감이 들었다. 주저하면서도 유이나는 말을 꺼냈다.

“다들, 마음은 정말 고맙지만……. 지금 꼭 보러 갈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이미 반쯤 동거하고 있고, 그이의 집엔 이미 식기나 가구 같은 건 두 명이 쓸 만큼 있는걸.”

“와, 약혼자 재력 자랑하는 거야?”

“부럽다, 유명한 번역가랑 약혼이라니! 나도 어디 그런 남자 없나.”

“그걸 찾는 시점에서 이야기 끝난 거 아냐?”

“너무해!”

주위가 왁자지껄해졌다. 유이나는 이대로 넘어갈 수 있을까 잠시 기대했지만, 일은 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자, 자, 어쨌든. 나는 반대야. 약혼이랑 결혼은 다르지! 계속 쓸 물건들을 새로 갖추는 게 좋잖아? 가전제품도 가구도 그렇고, 이런 걸 결혼할 때 안 바꾸면 언제 바꾸냐?.”

“맞아. 게다가 누군가는 꼭 욕한다? 결혼하면서 진짜 아무것도 안 들고 온다고?”

“그래, 있다니까. 게다가 결혼하면서 아무것도 안 하면 남편이랑 싸울 때 절대적으로 불리해져.”

“맞아, 맞아. 결국엔 지게 된다니까. 유이나 너 약혼자 집으로 들어가는 거지?”

“어? 어어. 그렇지 뭐……. 그 집이 훨씬 넓기도 하고, 이사하기도 번거롭고…….”

“그러면 진짜 욕먹는다. 무슨 트집을 잡아서라도 혼수는 해서 가.”

“그래, 그리고 언제 또 다 같이 시간이 나겠어? 이런 건 여러 사람이 봐야 좋은 거야.”

“그렇긴 하지만…….”

친구들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한 명씩 유이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에이, 미안해서 그래? 야, 이것도 취미야. 내 돈 안 나가는 쇼핑이 얼마나 재밌는데?”

“맞아, 맞아. 유이쨩은 평소엔 똑 부러진 것 같으면서 이럴 때 말랑하다니까.”

“미안해하기는, 귀여운 구석이 있네, 유이쨩?”

“그래, 일단 가서 보자. 나 쇼핑몰 도착하면 화장실부터 갈래.”

낭패였다. 이렇게까지 말해주는데 거절하기란 쉽지 않다. 자신의 입사 면접은 스스로 망칠 수 있어도, 타인의 선의를 망칠 용기는 없었다. 다들 유이나를 위해서, 그를 걱정해서 부러 시간을 내어주는 게 아닌가. 그 호의를 서쪽으로만 걷기는 싫다는, 스스로 말하기도 이상한 이유를 들어서 내칠 수는 없었다.

유이나는 결국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크게 잘못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기서 다른 말을 할 용기도, 그렇게까지 해서 규칙을 지켜야 할 논리적인 이유도 없었다. 한 번 정도는 괜찮을 거야. 유이나는 자신에게 속삭였다. 생각해보면 너무 이상한 규칙이지 않은가. 서쪽으로 쭉 걸어가면 안 된다니. 그래 어쩌면 이상한 규칙에서 벗어날 기회일지도 모른다. 애써 좋게 생각하려 애쓰며 유이나는 친구들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걸을수록 제 걸음이 조금씩, 점점 더 무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이상했다. 가슴도 조금씩 답답해지는 것 같고, 머리 한구석이 둔중하게 눌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기가 규칙을 어기는 걸 이렇게까지 싫어했던가? 아니, 아니었다. 다른 규칙은 상황과 필요에 따라 종종 어기고는 했다. 더 중요한 규칙도 종종 어기며 살아왔는데 겨우 서쪽으로 걷는 게 이렇게까지 스트레스로 다가오다니?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이상해서 유이나는 무거운 발을 억지로 들어 올리며 계속 걸었다. 등에 식은땀이 흐르고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지만 그럼에도 멈추지는 않았다. 스치는 주위 풍경을 보지 않으려 애쓰면서 계속해서, 억지로 웃고 대답하고 맞장구치면서.

그러나, 그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힐 지경이 되자 도저히 거부감을 숨길 수가 없었다. 함께 걸으며 떠들던 친구들도 하나둘 유이나의 이상을 알아채고는 걸음을 멈췄다. 가장 가까이 있던 친구가 유이나의 어깨를 잡고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아, 유이나? 어디 아파?”

“아, 아냐. 난 괜찮아.”

“안색이 너무 안 좋은데? 갑자기 아파? 걷기가 힘들어?”

“아니, 정말 괜찮아. 으응, 아무래도 운동부족인가봐.”

“그럼. 좀 쉬었다 가자. 너 이대로 걷다가는 쓰러질 것 같아.”

“그 정도는 아닌데, 정말…….”

그저, 규칙을 어기는 것에 대한 거부감일 뿐이었다. 정말 별일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스트레스 반응이 나오는 자신이 이상한 거다. 더 걸으면 괜찮아질 수도 있었다. 게다가 한 번 규칙을 어기고 나면 다음에 또 어길 때에는 괜찮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유이나는 계속 걸어가려 했지만 친구들은 당연하게도, 그를 잡아 세웠다.

“그 정도 맞아. 세상에 땀 좀 봐, 좀 심각한데? 별로 걷지도 않았잖아.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냐?”

“일단 좀 앉아서 쉬자. 쉬어도 안 되면 병원에 가고.”

“맞아, 바로 저기 교회 안뜰에 벤치 있으니까 거기 앉혀야겠다. 아파서 잠시 쉬겠다고 하면 교회에서 뭐라고 하진 않겠지?”

“그래, 설마 뭐라고 하겠어. 종교시설인데. 얼른 가자.”

그 말에 유이나는 반사적으로 흐릿해진 눈을 들었다. 이 근처에 교회가 있었던가? 이 동네에서 제법 살았지만 그런 건 보지 못했는데, 교회라니. 눈으로 주변을 훑던 유이나의 눈에 갈색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 보였다. 십자가가 걸려있는 걸 보니 저기가 바로 교회인가 보았다…….

“아, 아아, 아아악!”

갑자기 수십, 수백 개의 바늘로 찌르는 듯한 두통이 느껴졌다. 머리 구석구석을 날카롭게 베는 듯한 고통에 유이나는 머리를 감싸 쥐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주위에서 뭐라고, 걱정하는 것 같은 소리가 나는 것 같았지만 그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너무 아파서 목에서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꺽꺽거리며 몸을 웅크렸다. 저며지는 머리의 상처 단면에서 기억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떻게 잊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하고 아픈 기억들이 스며나와 머리를 가득 채웠다. 아아, 그래, 잊고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잊고 있었다.

 

전 약혼자는 그들의 싸움에 휘말려 죽었다.

도와달라고 목이 찢어지게 외쳐도 와주지 않았다.

부축하느라 움직이지 못하는 새에 그것들은 저 멀리 사라져 갔다.

마치 그들을 따라가는 것처럼, 약혼자의 숨도 그에 맞춰 서서히 흩어져 갔다.

자신의 사랑을 죽였으면서, 누구 하나 뒤돌아보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그 잘난 면상을 돌려 폐허를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굳게 결심한 복수는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멍청한 그는 한 줌의 의심도 없었다.

그랬는데…….

 

형체를 알 수 없는 흉측한 무언가가 타치바나에게 속삭였다.

―그래, 세계는 다시 쓰였지.

―너는 전부 다 잊고, 원수와 함께 울고 웃으며 사랑한 거야.

―원수를 구원이라 믿으면서 미래를 약속했지.

―멍청한 것.

―어리석은 것.

―후카미야가 돌아보지 않아서 네 약혼자가 죽었어.

―후카미야 때문에 죽었어.

―후카미야가 죽였어!

 

형체를 알 수 없는 흉측한 무언가가 유이나에게 속삭였다.

―말도 안 되는 억지라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잖아?

―켄토가 그런 싸움을 먼저 일으킬 만한 사람이야?

―켄토는 그저 가해자를 막으려 했던 걸지도 모르잖아?

―사실은 알고 있잖아?

―구해주지 않은 것은 죄가 아니라는 걸

―그렇기에 단죄할 수도 없다는 걸

―싸움의 원인을 제공한 쪽이 잘못이라는 걸

―원망은 가해자에게 해야 한다는 걸

―기껏 원망한 주제에, 끝까지 미워할 수도 없었으면서!

 

형체를 알 수 없는 흉측한 유이나가 말했다.

―내 약혼자는 죽었는데 가해자는 이미 누군가가 단죄해 버렸어.

―가해자가 죽었으니 그걸로 끝? 일은 끝났으니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라고?

―이 원한은 그럼, 어떻게 해야 해?

―도저히 버릴 수 없는 이 분노를 어디로 겨누란 말이야?

―나는 분노할 권리도 없는 거야?

 

형체를 알 수 없는 흉측한 것들이 한데 모여 머리를 맞대었다.

―무엇도 할 수 없다면.

―무엇도 고를 수 없다면.

―잊어버리자.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오답을 낼 수도 없다면.

―잊어버리자.

―전부 잊어버리자.

―다 묻어버리자.

―그러니까 절대로, ……, ……, …….

 

눈을 뜨니 새하얀 천장이 흐릿하게 보였다. 형광등 불빛에 눈을 찡그리며 시야를 돌리면 제게 다급히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안개 낀 시야를 애써 집중해 보면 그건 약혼자인 켄토였다. 걱정하고 안도하는 표정이 흐릿한 시야 때문에 이상하게 보여서 괜히 웃음이 나왔다. 그는 제게 무어라 말을 걸고 있었는데, 귀가 먹먹해서 뭐라는 건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는 무어라 몇 번 더 말하더니 벌떡 무언가를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았다.

흰 가운을 입은 누군가가 다가올 즈음에야 그의 눈과 귀가 트였다. 깨끗해진 시야로 켄토가 정신없이 제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유이나의 어깨에 얼굴을 묻는 것이 보였다. 의사가 이런저런 말을 하더니 제 상태를 체크하고는 검사결과를 늘어놓았다. 아무 문제 없이 건강한 몸이지만 빈혈이 약간 있으며 혈류가 제대로 돌지 않아 갑자기 정신을 잃은 것 같으니 조금 쉬었다가 집으로 가서 철분제를 챙겨 먹으라는 소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의학용어와 섞여 귀에 들어왔다.

그랬던가, 빈혈기였던가. 유이나는 그제야 자신이 쓰러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친구들과 밥을 먹고 카페에 갔던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이후가 완전히 백지였다. 아무래도 친구들과 헤어지기 전에 갑자기 기절한 모양이었다. 켄토의 말로는 친구들이 구급차를 부르고 조금 전까지 함께 있어 주다가 각자의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참으로 고맙고 미안한 일이었다. 휴일에 기껏 다 같이 모여서 즐겁게 놀았는데 기절해 버리다니. 고마움과 미안함을 담아 나중에 식사라도 대접해야 겠다고 생각하며 유이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켄토는 하루쯤 입원하는 게 어떻겠냐고 말렸지만, 유이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게도 몸은 아무 이상 없이 멀쩡했다. 오히려 자고 일어나서 그런지 힘이 넘치는 것같은 기분이었다. 유이나는 침대 옆으로 내려와 제자리에서 가볍게 뛰어 보였다. 정말 괜찮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그 행동은 켄토를 기겁하게 했고 그의 잔소리를 늘렸지만, 그의 주장도 꺾었다.

켄토는 집에서 유이나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도록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며 조수석까지 유이나를 부축하고는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주차해 둔 차를 빼려는데 유이나가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우리 곧바로 집에 가는 거야?”

“당연히 곧바로 가야지. 왜?”

“음…….”

무언가 이리저리 생각하던 유이나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면서 말을 이었다.

“가는 길에 아이스크림 사면 안 돼?”

“아이스크림?”

“응, 갑자기 배라가 먹고 싶어서. 밑으로 조금만 둘러 가면 큰 매장 있잖아. ……안 될까?”

“안 될 거야 없지만, 쓰러졌는데 괜찮겠어?”

“괜찮다니까! 못 믿겠으면 이번엔 체조라도…….”

“알았어, 알았으니까 가만히 있어 줘. 아이스크림 말고 다른 건? 먹고 싶은 거 없어?”

“없어. 장은 어제 봤으니까, 당신이 요리해 주는 거면 뭐든 좋아.”

“알겠습니다, 공주님.”

조금 난처해 보이는 켄토의 표정에 유이나가 깔깔 웃었다. 아무래도 켄토는 유이나보다 요리가 서툴렀으니까. 하지만 이 정도의 어리광은 괜찮았다. 그의 약혼자는 워낙 상냥한 사람이다 보니 이럴 때 오히려 아무것도 안 시키면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발을 동동 구르니까. 하여튼 좋은 사람이라니까, 라고 생각하며 유이나는 좌석에 몸을 기대었다. 일견 천진해 보이기까지 한 모습에 켄토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운전대를 잡았다.

켄토는 요즘 제 약혼녀가 걱정이다. 워낙 병약해서 자주 쓰러지기 때문이다. 본인은 전혀 약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지만, 잊을 만하면 쓰러지는데 건강하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병원에서는 빈혈 외에는 전혀 문제없다고 하지만……. 좀 더 철분 함량이 높은 영양제를 알아봐야 할 것 같다.

그는 남쪽을 향해 부드럽게 운전했다. 그래도 식욕이 있다는 건 건강에는 좋은 신호니까 괜찮겠지, 스스로를 위로하며. 그의 약혼녀는 가끔 가던 길을 벗어나 미식을 즐기는 버릇이 있었다. 제법 귀여운 버릇이라고 생각한다. 켄토는 크게 의문을 가지지 않고 유이나가 가자는 대로 함께 가서 어울려 준다. 그는 선량하기에,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래서 유이나는 서쪽을 향해 걷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