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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페커미션 45.5. 그늘이 말하기를

1차 - 이안+달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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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안] 그늘이 말하기를

달리아는 밤눈이 밝았다. 선천적인 것인지 혹은 그의 생존본능이 기른 것인지는 모르지만, 달리아는 그믐밤에도 어느 정도 형체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어둠을 무서워하기에는 그보다 훨씬 무서운 것이 많은 인생을 살아왔다. 게다가 공포에서 도망친 곳은 언제나 어두웠기에 달리아에게 어둠은 공포가 아닌 안식에 가까웠다. 장례 또한 어둠에 감싸이는 과정이라는 걸 생각하면 어둠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그래서 달리아는 깊은 밤까지 일해야 하는 지금의 직장에 불만 한 점 없었다. 비록 요즘은 만족도가 조금 떨어지긴 했으나…….

절로 한숨이 나왔다. 어제 그렇게 많은 사람이 다녀갔는데, 오늘도 사람이 찾아온다고 한다. 오늘의 방문객은 탐정이라고 했었던가. 이번에 발생한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 때문에 달리아는 전에 없는 인파를 경험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경찰 두 명과 신문기자 몇이 오간 정도를 인파라고 할 수는 없다고 말하겠지만, 달리아의 인생에서 그 정도면 인파라고 부르기 충분할 정도의 수였다. 게다가 그 모든 사람이 남자라는 걸 생각하면……. 그는 작게 어깨를 떨었다. 솔직히 말해서 전혀 반갑지 않았다. 탐정 나으리께서 오신다니 또 남자겠지.

사람을 만나는 게 과히 유쾌하지 않은 달리아는 정문 쪽은 바라보고 싶지도 않아서 부러 등을 지고 후문 쪽을 바라보았다. 큰 길가에 있는 정문과는 달리 거의 쓰이지 않는 후문 쪽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묘 몇 개를 제외하면 온통 수풀밖에 없었다. 그 폐허 같은 느낌을 달리아는 제법 좋아했다.

그때부터였다, 달리아의 예상이 빗나간 것은. 분명 작은 짐승과 수풀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야 할 후문 쪽에 자그마한 불빛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묘지에서 종종 보이는 불빛과는 달리 노랗게 반짝이는 불빛은 마치 가스등 같았다.

‘사람……?’

그러나 대체 누가 굳이 저런 길을 헤치며 온단 말인가. 그것도 이 한밤중에. 오늘 올 사람은 한 명뿐이라고 들었는데 방문자가 더 있는 걸까? 썩 좋지 않은 기분이 들어 달리아는 뒷문 쪽에서도 눈을 돌리려 했다. 칸막이 뒤쪽에 칸마다 가지런히 잠든 시체들이 보고 싶었다. 특유의 냄새에 방문자가 코를 쥐든 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러나 달리아가 고개를 돌리던 찰나, 곁눈에 뭔가 이상한 것이 잡혔다. 반사적으로 다시 불빛을 바라본 달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드레스?’

어떤 여자가 달도 없는 밤에 수풀 가득한 뒷문을 헤쳐서 온단 말인가. 좋지 않은 목적이 있는 걸까? 하지만 광인이거나 밤손님이라면 저렇게 단정한 정장을 차려입지는 않았을 터다.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실루엣만 봐도 분명 풍성하게 치맛자락을 부풀린 정장이었다. 깔끔하게 옷을 입고 풀숲을 헤치며 이쪽으로 오는 여자라니 대체 누굴까.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온다는 탐정이 남자라는 이야기는 못 들었다. 왜 후문으로 들어온 건지는 모르지만 여자 탐정일 수도 있지 않은가? 달리아는 나빴던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 채 더욱 자세히 인영을 관찰했다.

키가 훌쩍 크고 튼튼한 골격을 가진 아가씨였다. 외모를 자세히 알아보기는 힘들었지만 어렴풋이 보이는 것으로는 하층민은 절대 아니었다. 문득 움직임을 멈추고 점잖게 짜증을 내는 낮은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오감을 전부 다가오는 실루엣에 집중한 달리아는 이윽고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짜증을 낸 다음의 몸짓은 이전의 몸짓보다 훨씬 더 뭐랄까, 남자 같았다. 하지만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여자가 남자처럼 자란 걸까, 아니면 남자가 여장을 한 걸까.

점점 더 인영이 다가오자 더 많은 것이 보였고, 달리아는 창문 옆 커튼에 몸을 가리고 얼굴만 빼꼼 내밀어 방문객을 관찰했다. 겉모습은 더할 나위 없는 레이디이지만, 달리아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아, 여장을 한 남자구나.

자신이 남자를 싫어하는 걸 알고 여장했을 리는 없으니 몹시 희한한 사람이었다. 왜 여장을 하는 걸까. 그것도 최소한 중산층 이상 되어 보이는 사람이, 그것도 탐정이. 무어, 누가 여장을 하든 말든 달리아가 알 바도 아니었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남자들보다 거부감이 덜 한 건 사실이었지만…….

달리아는 뒷문을 열어 방문객을 맞았다. 상대가 여자 이름을 대며 여자처럼 인사하는 것으로 보아 남자라는 걸 밝히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달리아는 여장하셨네요, 라는 말을 꾹 참고 또 다른 궁금한 것을 질문했더니, 당황한 탐정이 휘적대며 앞문 쪽으로 향했다. 정문이 따로 있다는 걸 몰랐던 모양이었다. 탐정으로서의 능력이 조금 의심되었다.

손으로 벽을 때리는 것까지 본 달리아는 남자라는 확신을 굳히고 앞문으로 가 탐정 나으리를 안으로 들였다. 하지만 그 이후의 대화는 달리아를 다시 혼란에 빠트렸다.

탐정은 한 번도 제 말을 중간에 자르지 않았다. 그로서는 아주 오랜만에 하는 긴 대화였고 그만큼 어설펐는데도 탐정은 제 말을 다 듣고 나서 질문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모두가 자신의 말을 중간에 잘랐다. 개중에서도 남자들은 더 자주 제 말을 잘라댔다. 심지어 저를 가엽게 보아준 상사도 종종 중간에 말을 자르고 이런 말이 맞냐고 되묻는데, 다른 남자들은 어떻겠는가. 대화할 때마다 하려는 말을 멋대로 추측하거나 이상하게 압축하는 일이 다반사였기에 달리아는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는데.

여자인가?

한차례의 대화가 오간 다음, 달리아는 물을 끓이며 고쳐 생각했다. 혹시, 어쩌면, 몹시 남성적인 방법으로 자란 레이디인 건 아닐까. 자신의 직감이 항상 옳지는 않을 수도 있지 않은가. 정말 그런 거라면, 지금까지 달리아는 몹시 실례되는 생각을 한 게 되지 않은가. 아, 세상에. 달리아는 미안한 마음을 가득 담아 정성껏 차를 우렸다. 제 미각이 약간 둔하기는 하지만 상사가 알려준 방법에 최대한 맞춰서 우렸으니 괜찮을 것이었다. 달리아는 탐정 아가씨가 별 말 없이 차를 음미하는 걸 보고는 안심했다.

이후의 대화도 정말이지, 남자를 상대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죽음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얼마 만에 만나는 건지! 설령 자신만큼 사랑하지는 않아도, 탐정 아가씨는 죽음을 충분히 존중하고 아끼는 게 분명했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훌륭하다고 해도 좋은 태도를 보여주는 여자라니. 달리아는 오랜만에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차오르는 걸 느꼈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기분 나쁜 것과는 거리가 먼 어떤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달리아는 드물게 문밖으로 나와 탐정 아가씨를 배웅해 주었다. 자신 나름대로 최대한 성의를 표시한 것이었다. 궁금한 게 더 생겨서 계속 왔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마저 들 때였다.

“……연약한 여성에게는 무척 힘들고 무서운 일일 텐데요.……”

그 한마디에,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탐정이 여자라면, 절대로 ‘연약한 여성’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진짜 여자였다면, ‘나는 괜찮지만 보통은’ 같은 식으로 말했을 것이다. 그야 위험한 일을 하는 여자는 소수이고, 자신이 특이한 것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같은 여자라는 걸 전제하고 상대의 안위를 걱정하니까. 그러나, 저, 자신은 여성이 아니라는 듯한 저 말투는.

지금껏 즐거웠던 만큼 기분이 바닥 깊숙이 처박혔다. 탐정은 마지막 말을 끝으로 뒤돌아보지 않고 길을 나섰고 달리아는 탐정이 저 멀리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주름을 잔뜩 잡은 치마 뒷자락 끝이 어둠으로 사라질 때까지, 계속해서.

머리를 가득 채우는 이것을 사람들은 분노라고 부르던가. 달리아는 이를 갈았다.

‘나를…… 속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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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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