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즈카호] 전원을 차단합니다.
인공지능생명체 카호와 그 주인인 코즈에.
천천히 눈을 뜨는 생명체는 모두 사랑스러울까. 오토무네 코즈에는 그동안의 제 노력의 결과로 눈을 뜬 '히노시타 카호'를 멍하니 바라 보았다. 아무도 찾지 않는 거리에 빛바랜 건물들 속 그것은 누가 뭐라해도 유일한 빛깔을 지니고 있었다.
"코즈에, 씨...?"
"응, 카호."
"카...호?"
다소 어리둥절한 듯, 그동안은 익숙하게 내뱉던 이름을 의아하게 입에 담는다. 코즈에는 그런 카호를 기껍게 맞이했다. 이마에 새겨진 '16'이란 숫자는 이내 사라졌다. 지금부터 갈 곳은 아마 누구도 발견하지 못할, 고즈넉하고 차분한 공간이 될 것이다.
빗물이 모든 것을 흘려보냈다. 드물게 내리는 비가 마침 오늘인 것도 하늘이 내려준 기회일 것이다. 어둑어둑한 시선, 썩어버린 비 특유의 냄새는 피 냄새 따위 감춰버렸다.
간단히 배울 수 있는 사회 체험이라고 했던가. 코즈에는 제 부모가 소개해준 센터에서 억지웃음을 지으며 사람들과 인사를 했다. 그런 코즈에를 향해 책임자처럼 보이는 사람이 나와 코즈에를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해주었다. 손뼉을 치는 와중에도 이 일은 아주 간단한 활동이라는 말을 덧붙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저 조용하게 코즈에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바깥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코즈에는 그 시선을 이정표 삼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여전히 싸라기눈이 내린다. 기계들은 산성화된 날씨에 적응하지 못하므로 오로지 실내에서만 가동할 수 있다는 규칙이 만들어진 지 벌써 3년이 지났다. 인간만은 괜찮은 이 세상에서 여전히 기계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끝없이 많다는 방증이었다.
코즈에는 여러 목적으로 사용된 기계들이 전시된 곳에서, ai 정교화를 위해 일정 기간 동안 대화를 해야 했다. 기간은 1년, 꽤 공을 들인다는 느낌을 받았더니 이번 기계를 사갈 예정인 주인이 거금을 들였다고 한다. 코즈에는 비밀유지를 지킨다는 칸에 자필서명을 하고 도장을 찍었다. 홍채 인식까지 걸지는 않겠다는 말에 주변에서 안도하는 한숨이 들려왔다.
"그러면 정식으로 일하는 건 다음 주 월요일부터입니다. 시간은 1시부터 4시까지 총 3시간. 기계의 반응이 이상하다면 보고하고 퇴근해도 좋아요."
확실히 간단한 일임은 분명했다. 누군가는 가상으로 꾸며진 기계와 이런저런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으며, 누군가는 원하지도 않는 말을 내뱉어야 해서 정신적인 고통을 호소했다. 하지만 코즈에의 경우, 일상적인 대화-그것도 가족을 대하는 태도로-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다른 이들에 비해 노동강도는 낮으면서 벌이는 섭섭지 않았으니, 코즈에를 점점 불편하게 대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고작 알바임에도 깍듯하게 대하는 직원들의 태도가 두드러졌다. 이쯤 되면 도대체 어떤 기계이기에 이 정도까지 공을 들이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코즈에는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방문을 열었다.
한순간에 실내가 아니라 실외라고 착각할 만한 풍경이었다. 바람이 불어오는지 머리카락 몇 가닥이 살랑거렸다. 바깥엔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이곳엔 따뜻한 햇볕이 내리비추고 있었다.
공간은 그렇게 넓지 않았다. 4인용 탁자와 의자가 3세트는 들어갈 수 있는 정도였고, 그 안에 2인용 둥근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었다. 아직 아무도 없는가 싶어 주변을 둘러보니, 코즈에가 들어온 곳과는 다른 쪽에 있던 문이 열렸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하자 걸어 나온 '그것'이 미소를 띠며 가깝게 다가왔다. 코즈에는 그 기세에 공기가 달라지는 걸 느끼며, 조심스럽게 마주 앉았다.
"굳이 그쪽에 앉으시는군요."
첫인사도 없이 물음이나 다름없는 말에 코즈에는 잠깐 생각했다. 결국 해야 하는 것은 대화였으니, 방금 던져진 말에 어느 정도 일반적인 수준의 말을 이어나가야 했다. 코즈에는 가볍게 웃으며 기계와 시선을 맞추었다.
"대화는 행동에서부터 시작하죠. 눈을 마주하고, 상대방을 향해 열린 자세를 하고, 마지막으로 믿음을 주는 것."
"믿음..."
"어때요, 대화를 해도 된다는 신뢰를 주었나요?"
"네. 잘 부탁드려요."
"저야말로, 잘 부탁해요."
코즈에가 의자를 끌어당겨 자세를 정돈했다. 살짝 고개를 틀고, 몸을 상대방 쪽으로 기울였다. 불필요한 설명은 생략했다. 어쩐지 기계와 대화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바닥부터 시작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 기계는 의외로 코즈에의 설명에 기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코즈에는 기계의 흥밋거리가 모두 책에서 파생되었다는 사실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동의할 수는 없지."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즐거운 게 아닐까요? 코즈에 씨도 즐겁게 읽으셨다고 하셨잖아요?"
"히노시타 씨,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즐길 수 없는 부분도 있단다. 자, 그만 일어날까?"
"아~! 또 피했어! 정말이지, 코즈에 씨는 항상 이야기가 달아오를 무렵이면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고 해요!"
"아니란다, 보렴. 벌써 4시잖니."
"어라, 정말이다..."
정겹게 대화를 이어나가면 3시간은 순식간에 흘러버린다. 알람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니. 이 아이는 얼마나 대화에 집중했던 걸까. 코즈에는 '히노시타'를 일으켜 세웠다. 그저 기계를 만든 제작자가 붙인 명칭이었으나, 마치 이를 이름처럼 부른 지 2주가 흘렀다. 모든 대화는 히노시타의 렌즈를 통해 녹화되고 있기에 인공지능 담당자들이 사고의 작동 구조를 분석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했던가.
코즈에는 이따금 그 '히노시타'와 대화하는 건 즐거운지 묻는 다른 아르바이트생들을 마주치곤 했다. 빠른 배움을 위해선 학습자가 학습 내용에 흥미가 생겨야 했고, 기계의 내적 동기에 첫 만남부터 '거리감'이 큰 영향을 미쳤다. 코즈에는 그 생각 하나로 시비를 거는 잡담을 제 머릿속에서 치워버렸다. 코즈에는 나름대로 이 일에 진지하게 임하고 있었다.
"내일 보자, 히노시타 씨."
심지어 코즈에는 어느 순간 자신보다 나이가 많으니-제조연도라고 해야 하는지 진중하게 고민하는 모습에 안색이 새파래진 것은 비밀이다.- 반말을 해도 된다는 권유를 받아들여 성의 없는 반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 코즈에의 태도에 히노시타는 다소 즐거운 듯이 보였으나, 감정 혹은 이상 반응에 분석은 모두 인공지능 담당자들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코즈에는 조금은 부드러워진 분위기와 딱딱하지 않은 말투로 말미암은 친밀감을 느끼며 조곤조곤 대화를 이어나갈 뿐이었다.
"아, 내일은 안 돼요!"
"어머, 다른 일이 있니."
"음... 어쨌든 안 돼요! 월요일에 만나요!"
"그래. 그때까지 잘 지내렴."
"하하... 네. 응. 잘 가요."
평소와 다름없는 인사를 주고받으며 먼저 문을 열었다. 인간이 사용하는 통로와 기계가 사용하는 통로를 철저하게 구분해둔 책임자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때문에라고 해야 할지. 코즈에는 때로는 만나고 싶은 인물도 만날 수 없는 복도를 지나치며 카드키를 찍었다. 퇴근 시간이 화면에 뜨며, 다음 일정이 자동적으로 스크린에 뜬다. 월요일, 11시. 정말로 히노시타의 말처럼 일요일이 아닌 월요일로 일정이 잡힌 걸 확인하며 코즈에는 안심했다. 아직 거짓말을 배운 단계는 아니구나. 이따금 주의사항이라고 이전에 발생했던 문제점들 몇 개를 알려주곤 했는데 그중에 단연 곤란한 상태는 거짓말을 하는 기계라고 했었다. 히노시타가 그럴 애로 보이진 않았으나, 만일 그런 상황이 닥치면 코즈에는 대응하기 어려울 테니까.
"오토무네 씨. 마침 잘 만났습니다."
"아..."
"내일 일정 관련입니다. 아마 스케줄 확인하셨을 텐데."
"네, 월요일 출근이라고."
인공지능 파트의 부장을 맡고 있는 사람이었다. 가끔 스쳐 지나갈 때 가벼운 묵례 정도만 하는 사람이었다. 일부러 말을 걸어온 것을 보니 꽤 중요한 안내 사항일까 싶어 코즈에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일요일에 꽤 중요한 업데이트를 할 예정이라서요. 까다롭기도 해서, 시간이 조금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와 관련해 기계가 따로 언급은 없고요?"
"네."
대규모로 벌어지는 업데이트는 적어도 3일 전에 미리 모든 직원에게 알려주기 때문에 이렇게 국소적으로 실시하는 업데이트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마도 이건 히노시타만 받는 예외적인 업데이트일 것이다. 코즈에는 앞으로의 대화 주제에 영향이 미치는 사안이 있을까 귀를 기울였다.
"기계가 별말 없으면 됐습니다. 아직은 착한 아이네요."
"네...?"
"아뇨, 그만 퇴근하셔도 됩니다. 시간을 오래 끌어 죄송합니다. 만약 업데이트가 무사히 진행되면 그대로 월요일에 출근하시면 되고, 문제가 생기면 일요일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짧게 묵례를 하고 떠난 담당자를 멍하니 바라보던 코즈에는 다시 발을 돌렸다.
업데이트는 차치하고, 센터 사람들이 히노시타를 칭하는 호칭이 꺼림칙했다. '히노시타'란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한 날 키득대던 소리가 아직도 선명한데.
오늘은 드물게 눈이 내리지 않는 날이었다.
참혹했다. 이건 부당하다. 대체 인간이란 어쩜 이렇게 잔혹한 짓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가 있는가. 오토무네 코즈에는 대화를 이어나갈수록 미묘하게 발견되는 동일한 증상이 기분 탓이길 바랐다. 하지만.
"케흑, 아, 코즈에 씨."
"...안녕, 히노시타 씨. 머리핀, 어울려."
"아. 에헤헤... 오늘도 기억해 주셨네요. 이름 불러주는 것도요."
부당함을 항의해도 돌아오는 건, 그런 사람을 위해 만들어지는 기계라는 말뿐.
먼저 자리에 앉아 책을 읽던 히노시타가 기침을 하며 코즈에를 반겼다. 언젠가 발견한 장난감 같은 액세서리를 착용하고 있는 모습은 그제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를 언급하면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행복해한다. 호칭을 불러주는 것마저 기뻐하며 볼을 붉힌다. 너는. 너는 왜 이런 누추한 곳에 존재하는 걸까. 내가 뭐라고 이런 곳에 와 너와 대화하고 있는 걸까.
여전히 히노시타는 웃으며 코즈에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조차 녹화되고 있을 테니 최대한 무해한 모습을 보여주는 거겠지. 코즈에는 살짝 고개를 갸우뚱한 히노시타에게 선물이라며 쿠키를 건넸다.
"와! 맛있겠다! 어, 하지만..."
기쁨을 억누르고 눈치 보는 모습에 코즈에는 쓰게 웃었다. 괜찮아, 허락받았어. 란 부연 설명을 듣고서야 마음을 놓고 환하게 감사를 표하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히노시타 15'란 정식 명칭을 들었을 때보다 요즘이 더 심란하다는 사실을 이 아이는 알까. 뒤에 붙은 숫자의 의미를 알아선 안 된다고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코즈에는 무시할 수 없었다. 먹을 필요도 없는 쿠키를 맛있게 먹고, 칠칠치 맞게 입에 부스러기를 묻힌다. 코즈에는 몸을 살짝 움직여 히노시타 볼에 붙은 부스러기를 손가락으로 떼내어 주었다.
"코즈에 씨는 안 드시나요?"
"이런 쿠키는 그냥 먹는 것보다는."
"아! 지난번에 말해주셨던 홍차인가요?"
"응. 티타임이라도 하면 어떻겠니."
"좋아요! 이번에 읽었던 책에서 주인공이 가향차에 대해 평가하는 부분이 있었는데요."
"후후, 궁금하구나."
재잘재잘하는 목소리를 흐름으로 삼아 차를 우리고 살짝 벽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구름이 많은 날을 연출했네. 히노시타는 즐겁게 홍차가 우러나오는 시간을 기다리다가 종종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하늘에서 찾고 싶은 거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아, 저 구름은 고양이를 닮았어요."
"어머, 정말이네."
"고양이는 콜록, 사람을 많이 경계한다던데, 진짜인가요?"
"그렇네... 예전에 키웠던 고양이가 그랬지."
"정말요? 고양이 이름은 뭐였어요?"
아무렇지 않게 대화는 이어졌다. 코즈에는 벌써 히노시타의 기침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데에 익숙해진 자신이 경멸스러웠다. 기침을 하던 아이에게 괜찮은지 몸 상태를 물어보았다가 받았던 낭패감이 서린 눈빛.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내려진 퇴거 명령. 부당하다고 느끼면서 이 행위를 하릴없이 지속하고 있는 오토무네 코즈에란 얼마나, 볼품없는 인간인가.
"아, 따뜻해요..."
"혀를 데이지 않도록 조심하렴."
"으음, 그때는 너무 신나서 벌컥벌컥 마신 탓이에요. 이젠 안 그래요!"
"그래. 학습이 빨라서 자랑스럽구나."
"어? 그래요?"
"왜 그러니?"
"헤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나저나 실은 최근에 만난 사람 중에-"
히노시타는 단답이 나올 법한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는다. 그건 코즈에도 마찬가지이지만, 어쩐지 항상 주어진 시간보다 더 함께 있고 싶다는 바람이 담긴 것 같은 태도 때문에 코즈에는 종종 착각에 빠지곤 했다.
내게 허락된 3시간이 지난 뒤에도 너와 함께 하고 싶다.
너는 고작 병간호가 있어야 하는 가정용 인공지능 탑재 생명체였다. 히노시타를 사겠다고 계약금을 지불한 부호가 그런 아이를 원했으니까.
오늘도 어김없이 4시가 되자마자 코즈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다른 알람은 필요하지 않았다.
일주일이나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동안 일급은 나오니 걱정하지 말라는 연락에 빈정이 상했다. 어느새 이 일을 그만둬야 하는 시간이 1달이 채 남지 않았다. 계약 종료일이 다가올수록 애만 타는 건 자신이었다. 고작 24시간 중 3시간밖에 만날 수 없다. 그 소중함을 놓치고 싶지 않았으나 코즈에는 허락이 없으면 센터 건물에 들어가지도 못한다.
붕 떠버린 시간을 어떻게 보내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역시나 언제나 그렇듯 책을 몇 권 읽었다. 책 내용에 집중하기보다 책 속 문장을 차용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 어떨까 상상하는 것에 불과했으나, 시간은 그럭저럭 흘러갔다. 3일째에 읽은 책이 6권이나 되는 건 조금 놀라웠지만,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다.
다음에 읽을 책을 찾기 위해 오랜만에 인터넷을 켰다. 이런 거 없어도 잘 살았기에 역시 어색했다. 하지만 히노시타도 결국 다양한 기술의 발전으로 만들어진 생명체니까,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마음은 있었다. 작가의 다른 책도 검색해보다가 우연히 화면의 왼편에 길쭉하게 뜬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당신의 '진짜 가족'이 되어줄 히노시타 시리즈, 곧 상용화 예정!
아연한 표정이 되어 인터넷 창을 닫았다. 아득해지는 머릿속엔 오로지 히노시타의 수줍게 웃는 얼굴만 가득 찼다. 코즈에는 검정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새하얗게 변해야 할 온 세상이 어딘지 어두운 느낌이 들었다. 암전, 다시 암전이다.
코즈에는 그 길로 센터를 찾아갔다. 다른 건 필요 없었다. 히노시타가 제대로 있는지 확인만 하고 싶었다. 서둘러 달려가느라 머리에 묻은 눈도 제대로 털어내지 못했다. 주변의 이상한 시선을 무릅쓰고 달려간 곳은 굳게 닫혀 있었다. 인기척을 느끼면 알아서 열리던 문이 어째서 오늘만큼은 멈춰있는 건지. 코즈에는 애타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서둘러 건물 전체를 둘러보았다.
"아..."
시끄러운 시동 소리가 들리는 곳을 청각에 의존하여 쫓아가 보니, 건물 뒤 주차장에서 트럭 한 대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검은 봉투를 잔뜩 실은 트럭은 곧장 좌회전하여 유유히 사라졌다. 천천히 트럭이 남긴 바퀴 자국을 따라가 보았다. 트럭이 지나간 길가에 부품 한 조각이 떨어져 있었다.
몰랐으면 편했을 것이다.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가는 게 더 나았을 수도 있다. 낭패감에 젖는 것이, 절망감에 무너지는 것보다 수십 배는 상냥한 결말이었다.
코즈에가 선물해준 액세서리는 퍼석한 머리카락과 함께 진흙탕을 뒹굴었다. 새하얀 눈은 바닥에 떨어져 먼지 쓰레기와 합쳐져 도저히 깨끗하다고 볼 수 없었다. 너는 마치, 땅에 닿기 직전의 눈 같았는데.
머리핀을 집어 들면 도저히 히노시타가 머리에 달고 있었으리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악취가 풍겨왔다. 약품 냄새 같기도 했고, 바닥에 떨어지면서 묻어버린 흙 따위의 냄새가 섞인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코즈에는 냄새를 맡았다.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울렁거리는 속을 겨우 부여잡고 냄새를 맡았다.
오토무네 코즈에는 허탕을 친 것처럼 기운 빠진 상태로 집에 도착했다. 축축하게 젖어버린 옷은 상한 곳이 많아 버리는 수밖에 없었고, 진흙에 빠진 듯이 몸이 무거웠다. 몸은 씻어도 씻어도 흙탕물 냄새가 났다. 몸에서 나는 냄새는 잊을 수 없었다. 마치, 버려진 히노시타의 머리핀 같은 냄새였으니까.
그런 진흙 위에 필 꽃과 같은 너를, 나는 앞으로 며칠이나 더 볼 수 있을까.
16번은 다르겠지. 그런 말을 얼핏 들은 것 같았다. 일주일 만에 찾은 센터는 활기가 넘치는 공간이었다. 다들 바쁘게 움직이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은 많았지만 그 표정의 기저엔 기쁨이 담겨 있었다. 코즈에는 오늘도 안내받은 방 앞으로 다가갔다. 문은 자동으로 열리지 않았으므로 직접 힘을 주어 문고리를 돌려야만 했다.
"아, 코즈에 씨. 오랜만이에요."
변함없는 히노시타가 책 한 권을 펼친 채 서 있었었다. 머리엔 어떠한 액세서리도 달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태연한 척하려던 코즈에는 무너져내렸다. 자신을 걱정하는 '기계'를 버티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홀로 생각해두던 이름이 자연스럽게 내뱉어졌다.
"응, 오랜만이네. 카호 씨."
어리둥절한 반응이 카메라에 잡혔다. 에메랄드를 닮은 청록색 눈동자가 이쪽을 바라본다. 이제 이 주변의 CCTV는 3대. 이전보다 1대가 줄었다. 코즈에는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이 좁은 공간에서 미묘하게 어긋난 지점에 있는 CCTV를 부수는 자신을 상상했다.
길고 긴 계획이 드디어 성공했을 때, 코즈에는 제 몸이 성하지 않다는 건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어차피 카호는, 알 필요 없는 상태였으니까.
눈을 깜빡이던 '카호'는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이 집안을 돌아다녔다. 버려진 건물은 구시대의 유물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전축을 만지던 코즈에는 아는 곡을 몇 개 발견했다. 카호 귀에 들려줄 수 있는 노래가 늘었다. 코즈에는 대충 천장을 살펴보며 먹을 수 있을 만한 걸 찾았다.
"아, 버터가 있어요! 코즈에 씨!"
"어머, 그럼 오랜만에 쿠키를 만들어 볼까."
정말로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저 그런 말을 하며 카호와 함께 웃었다. 코즈에가 물건들을 살피는 걸 본 카호 역시 이곳저곳에서 쓸만한 도구를 찾아다녔기에, 어쩌면 말뿐만이 아니라 진짜로 요리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코즈에는 자연스럽게 땀이 흐르는 카호의 이마를 바라보았다. 잔기침이 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카호는 코즈에 곁에서 즐겁게 콧노래를 불렀다. 익숙한 공간이 아님에도, 문을 열고 나가야 하는 것도 잊은 게 확실히 도망치면서 머리를 부딪친 게 좋은 쪽으로 작용한 듯했다.
이런 운에 모든 걸 맡겨서는 안 되었지만.
코즈에는 그저 제 곁에 달라붙은 따뜻한 존재를 품에 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놀란 표정을 지었던 카호는 웃으며 목에 팔을 감아왔다. 상체를 숙여 완전히 끌어안으면 이대로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들었다.
"까치발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그래도 코즈에 씨가 갑자기 안으셨으니까요...! 응... 왠지 하고 싶었어요."
"그래."
아마도 카호가 말하는 저 '왠지'는 각인된 프로그램일 수도 있다. 혹은 데이터를 통해 분석된 자동 반사와 같은 행동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코즈에는 그저 웃으며 넘어가기로 했다. 여전히 카호가 미소짓고 있다. 진흙이나 다를 바 없는 자신의 곁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로. 모른 척을 하며.
1. 이곳에 있는 사람은 오토무네 코즈에, 단 한 사람뿐이다.
1. 기상은 7시 반에, 취침은 11시로 고정되어 있다.
1. 한가한 시간엔 전축을 이용해 노래를 튼다. 단, 소리가 80dB보다 크면 안 된다.
1. 책은 반드시 하루에 한 권 읽는다. 그리고 사람에게 해당 책과 관련된 이야기를 한다...
'히노시타 카호'는 오늘도 눈을 뜨자마자 시간을 확인했다. 벽에 걸린 시계는 깨진 지 오래였기에 체내에 심어져 있는 자동 시계를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배터리가 미약하게 닳았다. 더 떨어지기 전에 얼른 아침 식사를 하고, 코즈에와 함께 하루를 보내야 했다. 카호는 제 옆에 잠든 코즈에를 가볍게 흔들어 깨웠다.
"자요, 코즈에 씨. 오늘은 수프니까 스푼을 잘 써야 해요."
코즈에 손에 이 빠진 스푼을 쥐여주었다. 어쩔 수 없다. 초창기 이곳에 왔을 때 열심히 탐색했으나 쓸 만 한 게 이런 것뿐이었다. 코즈에도 심호흡 몇 번 하고 사용하는 데 익숙해졌으니 지금은 참고 넘어가는 것에 가까웠다.
"카호, 일일이 손에 쥐여주지 않아도 괜찮다니까."
"제가 해주고 싶어서 그래요!"
코즈에의 말에 카호는 괜찮다며 가슴을 폈다. 오히려 시켜줬으면 하는 일이 한가득인데, 코즈에는 뭐든 혼자서 하겠다며 카호의 도움을 거절하니 더 기운이 빠지기도 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지. 코즈에는 기대어 달라는 카호의 말에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기념으로, 아앙~"
"그런 건 어디서 배운 거니..."
"어제 읽은 책이 로맨스 책이었어요! 그보다 얼른요! 식으면 맛없어요!"
"참... 앙..."
"어때요? 맛있어요?"
"응. 맛있네. 고마워, 카호."
감사 인사를 듣고 나면 역시 기분이 너무 좋아져서 카호는 흥흥거리는 콧노래를 멈출 수 없었다. 몸도 살랑살랑 움직일 수 있는 게 확실히 오늘은 몸 상태도 좋다. 기침은 안 해도 되려나? 그런 날도 있을 수 있겠지. 응. 계산을 끝내고 식기를 정리했다. 차가운 물로 닦아내기 전에 천으로 덩어리를 닦아냈다.
오늘은 주변을 산책했다. 운이 좋게도 눈을 떴는데 하늘이 맑았다. 이렇게 태양이 내리쬐는 날은 얼마 없었기에, 카호는 들뜬 마음을 숨기지 않고 코즈에를 끌어당겼다.
팔짱을 끼고 어두운 건물들을 지나 꽃이 핀 곳을 찾아다녔다. 그야, 코즈에가 '카호'는 꽃이나 다름없다고 말해주었으니 이런 들판에 핀 꽃을 보고 싶어지기 마련이었다.
카호는 코즈에의 느린 발걸음에 맞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걸어 나갔다. 시멘트의 약한 부분은 닿기만 해도 바스러지기 때문에 일부러 카호가 먼저 걷는 게 맞았으나, 나란히 걷는 것도 기분이 좋았으므로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런 카호의 욕심을 다 들어주던 코즈에도 이따금 카호의 팔에 기대어 오곤 했다. 그 체온이 좋아 카호는 저절로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아, 보세요. 저기 꽃이에요!"
"어머... 카호는 정말 눈이 좋네."
"헤헤. 고마워요! 얼른 가봐요. 아마 저건 장미일 거예요."
분명히 책에서 읽었을 때에 장미는 5월 즈음에 핀다고 했으나, 지금은 11월. 그러니 장미가 아니어야 했지만 이곳은 정말로 신기한 일투성이라서. 아마 장미가 맞을 것이다. 계절에 맞지 않게 피는 꽃들은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많으니까. 생명력이 강하기 때문에 아직까지 살아있는 여러 종의 꽃들에 굳이 왜 이런 계절에 피어났니, 하며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없다. 카호는 가까이 다가가 붉게 핀 장미를 조심스럽게 손으로 만졌다. 눈이 조금 쌓인 것 말고는 상처 하나 없었다.
"여기요, 코즈에 씨!"
"어머, 나에게 주는 거니?"
"네!"
직접 사랑을 말로 표현하는 건 세련되지 못한 사람이나 하는 일이라고, 1달 전에 읽었던 연애소설에서 알려주었다. 2년 전에 읽었던 책과 모순되기는 하지만 코즈에한테는 이쪽이 더 알맞았다. 코즈에는 두 볼을 붉히며 장미의 향을 감상했다. 준다는 낱말을 사용하긴 했지만 실제론 꽃을 뽑지도 않았고, 둘이 나란히 꽃 근처에 무릎을 꿇고 대화를 하는 것뿐이었다. 그럼에도 코즈에는 행복해하니까. 코즈에의 표정에 담긴 감정이 오로지 긍정적인 것들로 만개하였기에 카호 역시 마음이 포근해졌다. 아마도, 따뜻해졌을 것이다.
"고마워, 카호. 장미는... 여전한 향을 풍기는구나."
"비록 계절은 다르지만, 콜록, 장미는 장미니까요."
"그래... 네가 여전히 카호인 것처럼."
"네?"
"아니, 아니란다. 슬슬 돌아갈까? 하늘이 심상치 않구나."
"아차... 네! 얼른 가요. 손, 잡아주실래요?"
"응."
코즈에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집 문을 열었다. 카호는 그 뒤를 따르며 방안의 온도를 체크했다. 외출하기 전보다 0.1℃ 정도 낮아졌다. 이러다간 감기에 걸릴 수 있으니 카호는 열을 데울 방법을 고민했다.
"흐읏, 카호..."
"하아... 여기서는 안 되나요?"
"아니... 괜찮지만."
카호는 말랑말랑한 사람의 피부를 느꼈다. 오늘은 유달리 느낌이 좋은 날이었다. 로맨틱한 분위기라고 표현하는 곳도 있겠지. 코즈에는 목까지 붉어진 얼굴로 카호를 밀어냈다. 지금은 부끄러운 감정이 조금 더 앞서는 모양이다. 음, 5% 정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을 의심치 않고 믿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은 코즈에였고, 카호 역시 여러 책을 통해 사람의 진심은 언어로 표현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언어도 존중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 책도 더러 있었으니까.
코즈에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리던 카호는 제 손가락을 간지럽히는 감촉에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이번 웃음은 98%의 확률로 코즈에 눈에 들어갈 것이다. 역시나 방금까지만 해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코즈에가 카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안도감, 행복함, 충만함, 뿌듯함, 자랑스러움...? 마지막은 잘 모르겠지만 카호는 방안의 온도와 코즈에의 체온을 비교했다. 적당히 달아오른 몸에 포근하다고 느낄만한 공기다.
코즈에는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히는 카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반복되는 일상은 즐거우면서도 미묘한 변화를 눈치채게 한다. 카호는 여전히 자신보다 체온이 낮은 코즈에를 부축하며 의자에 앉았다. 코즈에만큼은 아니지만 홍차를 맛있게 탈 수 있게 되었으나, 코즈에는 점점 말수가 적어졌다. 한 모금을 하고 난 뒤 맛있다고 칭찬해줬는데.
"코즈에 씨, 이번 홍차는 어떤가요? 3분을 정확하게 맞추었답니다!"
"..."
"으음... 카호 입에는 이게 지난번보다 쓴지 아닌지 헷갈려요. 어때요? 코즈에 씨 입맛에 맞나요?"
"..."
"코즈에 씨? 아, 코즈에 씨..."
버그가 발생한 것 같았다. 이상하다. 코즈에 씨가 날 바라보고 있는데 눈에 제대로 담기지 않는다. 렌즈에 문제라도 생겼을까. 분명히 오류가 나면 누...군가가 와서 고쳐주곤 했다. 업데이트도 받았다. 그리고 조금만 더 기다리면 코즈에 씨가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어라, 여기는, 문이, 밖에 태양이 없어, 눈이, 눈이 내리고 있다.
"코즈에 씨. 어디 있어요?"
돌아오는 말이 없다. 의자에 앉아있던 ---- ---는 카호를 봐주지 않았다. 카호는 조용히 슬픔에 잠겼다.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이건, 이전에도 흘린 적이 있었다.
그게 언제였는지 열심히 데이터를 살펴보았다. 어제, 아니다. 1달 전, 아니다. 그러면... 7개월 전. 이거다.
"아... 그랬구나."
머릿속 버그가 완벽하게 사라진 느낌이었다. 눈앞에서 눈물 흘리던 사람의 잔상이 하나 떠올랐다. 한껏 인상을 찌푸리고 싶으면서, 최대한 웃으려고 노력하던 사람이었다. 사랑한다고 속삭여주던 사람이었다. 따뜻한 체온을 나누어주던 사람이었다. 눈뜰 때부터 감을 때까지 시간을 공유하던 사람이었다.
때로는 노래를 불러주었다. 노래를 들려주기도 했다. 함께 즐겁게 춤을 추기도 했고, 조용한 공간에서 책을 읽기도 했다. 따뜻한 차를 마시며 날씨 얘기를 했었다. 갓 구운 빵이 너무 달다고 웃어 본 적도 있다. 쿠키를 너무 많이 구웠다며 당황해하다가 제가 다 먹어치우니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그리고 잠들기 전 언제나 만나서 다행이라고 말해주었다. 내가 나라서, 사랑스럽다고, 사랑한다고, 끝없이 말해주었다.
그리고 끝내 슬퍼하며 피를 흘리던 모습이 재생되었다.
"존재 가치 불만족. ...전원을 차단합니다."
바깥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함박눈이었다. 그 눈에 건물들이 부식되어 가고 있었다. 카호가 흘린 눈물이 카호 몸체를 상하게 할 때까지, 눈은 그치지 않고 계속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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