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난히 따뜻한 날이었다. 평년보다 10도나 높으니, 아침에 입고 나갔던 코트는 팔에 든 채로 귀가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씻을 건가? 권동림의 물음에 이영오는 일단 끄덕였다. 쇼핑백은 테이블에 올려두고 바로 욕실로 몸을 틀었다. 팔을 걷어붙인 채 일했더니 팔꿈치부터 소매까지 셔츠의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아, 맞다.”

“차에 두고 온 거 있어?”

“아뇨. 같이 씻을래요?”

“어쩐 일로.”

“안됩니까?”

아니면 말고. 그리고 이영오는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말아 올리듯 쥐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정시에 퇴근했으니 식사를 준비할 시간은 넉넉했다. 안방 욕실에서 곧장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어쩐지 체육관에 가겠다는 소리도 안 했군. 연휴 동안 쉬었으니 당연히 갈 것 같았는데. 출장으로 며칠 빠지게 될 때면 기어코 호텔 헬스장이라도 이용했으면서.

욕실 문은 반쯤 열려있었다. 갈아입을 옷과 속옷이 가지런히 문 앞에 있었고, 얼굴을 가까이하자 금방 더운 김이 끼쳤다. 인기척에 돌아본 이영오는 들어오라는 듯이 고개만 까딱였다. 둥글게 비비던 손바닥은 금방 거품투성이가 됐다. 익숙한 향이었다.

“선물을 생각했었는데요.”

“선물?”

“밸런타인데이잖습니까.”

“그랬지.”

그렇지 않아도 쇼핑백을 들고 오지 않았나. 아무리 브랜드명을 몰라도 패키지 디자인이 내용물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법한 것이었다. 분홍색 상자에 다크초콜릿 색 리본이라면 뻔하니까.

거품을 덜어간 그의 손이 이영오의 머리를 만졌다. 정수리부터 목뒤까지 크고 따뜻한 손이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이영오는 다시 말을 이었다. 머리를 맡기자 몸에 들어갔던 힘이 빠져 어깨가 자연히 내려갔다.

“밖에 있는 것도 선물이긴 합니다.”

그 초콜릿을 고르는 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는 무언가를 받을 때 특별히 더 좋아하거나, 더 싫어하는 것이 없었다. 이럴 때면 오래전 은사 같기도 했다. 물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한 것이라는 말을 하는, 청탁금지법 때문에 5만 원 이하로만 선물이 가능한 상대. 그렇지만 그는 공직자가 아니니 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일단 필요한 것이 생기면 스스로 해결하는 습관이 든 어른인 탓도 있었다. 그건 이영오도 마찬가지였고, 같이 살면서 닳은 생필품을 함께 구입하는 게 더 많았다. 그래서 초콜릿 외에 무언가를 더 생각해 보고 싶었는데.

“그리고…… 지금 저도.”

회식이 아니면 최대한 외식을 삼갔고, 점심은 꼬박꼬박 그가 싸준 도시락을 먹었다. (물론 수고로움은 권동림의 몫이었다……) 도시락통과 가방이 귀엽다는 소리도 들었다. 조카 줄 걸 잘못 사서 그냥 자기가 쓰기로 했다고 되지도 않는 변명도 했다. 환불 안 된대요? 안돼. 그 후로 한두 번 정도만 같은 질문을 들었고, 이제는 다들 익숙해했다.

그런 이영오의 패착 요인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로 연말과 연초에 잡힌 모임, 둘째로는 연휴 전 본가에 방문한 것, 셋째로는 오늘 문자 메시지를 늦게 확인한 것. 편의점에서 판 초콜릿 하나 사서 건네주는 건 체면 구기기밖에 더 되지 않아서 일찍이 예약을 해뒀는데, 그걸 일이 바빠 까맣게 잊고 있었다. 상단에 뜨는 ‘[Web발신] 매장 픽업 안내…’를 보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는데. 회의 간식이랍시고 받은 초콜릿을 보고서야 아차 싶었다. 일이 바빠 늦은 점심시간을 보내고 찾은 초콜릿은 그래도 괜찮아 보였다. 매장에서 시식용으로 건네주는 것도 맛보지 못하고 나왔다. 어차피 카카오 함유량이 30%든 50%든 제 입맛엔 거기서 거기였다.

머리를 헹구고, 옅은 화장을 살살 지워냈다. 입술에 얹었던 색 역시도 그가 골랐던 것 중 하나였다. 젖은 눈꺼풀이 몇 차례 깜빡이며 물기를 털어냈다. 따뜻한 욕실에 김이 서려 거울이 희뿌옇게 변했다. 시선은 다시 그에게 고정된다.

“그래도 이 정도면 권동림 씨 기여도가 꽤 높은 몸이 되었죠. 한 80% 정도는.”

그래? 그가 느긋하게 대답하면서 목에 걸린 줄을 더듬었다. 머리카락이 목걸이에 걸리지 않도록 치워줄 뿐 이음새를 풀지는 않았다. 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한데 뭉쳐져 곧은 어깨를 타고 내려왔다. 손길에 이영오 역시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흐트러뜨렸다. 이마를 보이게 젖히더니 살짝 웃는 게 장난기만 다분했다.

“초콜릿은 내일 먹읍시다.”

“나가서 입으로 줘도 돼.”

“지금 키스부터 할 건데요.”

아무리 그래도 그의 입에 구색 맞추기용으로 산 초콜릿부터 밀어 넣을 수는 없다. 팔을 둘러 콧대를 비비니 숨이 한결 가까워졌다. 그 특유의 살 내음에 섞여 풍기는 향이 좋았다. 오늘 유치원에서 순서를 지키는 걸 배웠나? 아,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