릭베논 - 여름, 그날, 흉터
스텔라비스 합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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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신전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퇴근한 시각, 베논은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며 한숨을 내쉬었다. 잦은 야근으로 쌓인 피로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늘 꼿꼿하게 서 있던 어깨는 굽어졌고, 절대 굽어지지 않을 것 같던 고개는 자석에 이끌리듯 끊임없이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손등으로 콧대에 걸친 안경을 밀어올리고 검지로 뻑뻑한 눈을 부볐다. 불편한 의자를 피해 쇼파에 엉덩이를 댄 것이 문제였을까. 밀려오는 잠과 씨름하느라 아직까지 정해진 일의 절반조차 끝내지 못했다.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끄응, 하는 소리가 답지 않게 튀어나왔다. 장시간 앉아있었던 통에 허리가 쿡쿡 쑤셔왔다. 이래서는 몸이 금방 상하겠는데.
환기를 시킬 생각으로 잠금장치를 풀고 창문을 열었다. 모든 것을 구멍 낼 기세로 쏟아지던 장대비는 그쳐 있었다. 습기를 머금은 시원한 바람이 얼굴에 눌어붙는다. 풀벌레의 목청 좋은 울음소리는 조용한 신전 뒤뜰을 가득 울렸다.
양팔을 높게 치켜들고 등을 젖혔다. 언제부터였는지 몰라도 하늘을 가득 채웠던 먹구름은 사라졌고, 가려졌던 달은 모습을 드러내며 거침없이 빛을 뿜어댔다.
여름이었다. 낮 동안 지글지글 끓어오른 땅이 늦은 밤이 되면 열기를 뿜어내는 계절.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젖은 풀 내음이 폐 안쪽으로 가득 차올랐다.
가늘게 뜬 눈을 굴린 건 갑자기 일어날 재난이라던가, 뜬금없이 나타날 마물에 대비하기 위한 습관이었다. 별 다른 뜻 없이 닿은 시선 끝에 누군가 서 있다.
둥그런 은빛 정수리 위로 삐죽 올라온 머리카락 두 가닥, 바람을 맞으며 무겁게 흔들거리는 새하얀 망토, 잔디밭에 서있음에도 흙먼지 하나 없는 구두. 비에 젖은 낫이 그의 어깨에 걸터진 채 날 선 빛을 내고 있었다. 아우릭인가.
등을 보이고 있던 몸이 천천히 돌아갔다. 그러자 창백에 가까운 연인의 옆모습이 보였다. 짙은 주황빛이 드리운 눈동자가 달을 향하고 있다.
왜 저기에 있는 거지. 마물이 나타났다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고 해도 모를 리가 없다. 거기다 신경이 쓰이는 건 저 표정이었다. 은은하게 머금고 있던 웃음이 없는 얼굴. 서늘하다 못해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베논은 걸치고 있던 안경의 콧대를 한 번 더 밀어올렸다. 집무실과 신전 뒤뜰의 높이 차이 때문에 아우릭의 턱 끝을 약간 가리는 망토의 안쪽 부분까지 보였다.
가슴까지 내려간 흰 넥타이와 풀어진 검은 셔츠의 단추, 그리고 목과 쇄골을 감싸듯 깊게 자리한 흉터까지.
*
첫째 날.
아우릭이 크게 다친 적이 있었나.
목에.. 그런 상처가 난 적이 있었던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졸음이 물러가고 머릿속을 가득 채워버린 호기심 때문이었다.
같이 목욕을 즐겨 하던 어린 시절에는 없었던 것 같은데. 있었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너무 오래 전이고 그 시절만 해도 서로의 몸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적어도 저는 그랬다.
착각을 한 걸 수도 있다. 멀리서 보기도 했고, 달이 밝았다고 해도 어두운 밤이었으니 머리카락이 내려와 그려놓은 그림자를 피로에 찌든 뇌가 원하는 대로 받아들인 걸지도 모른다.
넘어지거나 맞아서 난 자국이 아니라 무언가 목을 타고 올라가며 맨살을 갉아먹은 것처럼 생긴 게, 참 희한한 모양이었다. 밖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긁힌 듯한 흉터.
야니크가 서재에는 별의 힘이 폭주하는 내용에 대해 적힌 책이 있다. 사용자의 조절 능력이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강한 힘을 내려고 애를 쓰면 생기는 위험에 대해 경고하는 이야기. 너와는 연관이 없는 이야기이니 헛된 독서에 낭비할 시간으로 훈련을 하라는 가주의 명령을 따라 앞부분 몇 장만 들춰보다 말아버렸던 책. 그것과 관련이 있는 걸까?
고개를 살짝 저었다. 피비앙스가에서 그런 문제가 일어났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숨기는 일도 정도가 있지, 아우릭 정도의 능력자가 폭주를 했다면 주변이 폐허가 되었을 것이다. 감추려는 시도조차 못하고 들켜버렸겠지.
마지막 서류 작성을 끝으로 손가락 사이에서 끊임없이 빙글빙글 돌던 펜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제야 본인이 멍하게 허공을 훑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넓게 깔린 카펫에서 두바퀴 구른 펜은 금방 멈췄다. 주워들기 위해 허리를 굽히려는데 시야에 들어오는 팔 하나.
고개를 들었다. 먼저 펜을 주워 건네는 나인은 분명 웃고 있지만 짜증이 난 듯 보이는 표정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몇 번이나 노크를 했는데, 조용해서 안 계신 줄 알았어요.”
“무슨 일이지.”
“대답이 없던 일에 대해 먼저 사과하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눈썹을 치켜올렸다. 결국 들어와서 날 봤으면 된 거 아니냐는 뜻이 전달됐는지, 미소를 짓던 그의 입꼬리가 빳빳하게 굳었다. 숨을 크게 내쉬며 펜을 받아내자 부대장은 완쪽 옆구리에 끼고 있던 서류를 탁 소리가 나도록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단장님은 안 계시나보네요.”
“단장을 찾는 이유가 뭔가.”
“뭐겠어요.”
가느다란 검지가 종이 위에 적힌 이주 전 화요일의 날짜를 가리켰다. 제 시선이 닿은 걸 확인했는지 이번에는 손가락을 그대로 내려 하단에 있는 도장 칸으로 향했다. 네 개의 네모 중 비어있는 딱 한 곳으로.
베논은 짧게 한숨을 쉬며 무릎을 짚고 쇼파에서 일어났다. 어지러움에 바닥이 천장으로 솟구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안경을 벗고 손등으로 눈두덩이를 꾸욱 눌렀다. 어둠 속에서 펑펑 터져나가는 밝은 빛.
순간 몸이 휘청였다. 어어, 하는 소리가 들리고, 팔을 덥석 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괜찮으세요?”
매일이 반복이었다. 출근 시간이 지나도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는 아우릭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밀린 오전 업무를 처리하느라 늦은 시간까지 야근을 하는 날들. 언제쯤이면 제 시간에 퇴근을 할 수 있을지.
사랑하는 만큼 얄미웠다. 그는 친구로서도, 연인으로서도, 상사로서도 어느 하나 만족스럽지 않은 자였다. 분명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었다.
눈을 가리던 손으로 길게 내려오는 앞머리를 밀어올렸다. 깨지기 쉬운 물건이 위태로운 곳에서 떨어져 버릴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붙잡고 있던 나인은 한걸음 물러섰다.
묘하게 일그러지는 그의 얼굴. 무언가를 고민하더니 이내 테이블 위에 내려두었던 서류를 집어 들고, 돌아서서 단장 책상 앞으로 향한다.
“단장님은 제가 찾아볼게요. 상태를 보아하니 하루 종일 일만 하신 것 같은데 가서 식사를 하시던, 잠을 주무시던 하세요.”
그러다가 쓰러지겠다는 소리는 무시했다. 그러든지 말든지 네가 알 바 아니라는 날카로운 말이 튀어나오기 일보 직전인 걸 보면 피로가 쌓인 게 맞다.
잠과 식사 중 하나를 고르라면 전자였지만 아까부터 이상할 정도로 속이 살살 쓰려오고 있었다. 곰곰이 따져봐도 거른 건 어제 저녁 한 끼 뿐인데 어째서 이러는지. 식당으로 가서 푹 끓인 죽이라도 한 그릇 먹어야겠다.
“오늘 아침은 뭐지?”
먹을 메뉴는 정해졌으니 궁금하지 않았지만, 서류를 내려놓고 그대로 나가려는 상대의 등에 큰 소리로 물었다. 열린 문에 반 정도 가려졌던 뒷모습이 멈칫거리더니 어처구니 없는 대답이 들렸다.
“아침은 구운 빵에 잼을 바른 거였고, 지금 식당으로 가시면 드실 수 있는 건 갓 지은 따뜻한 밥이랑 맑은 국물이네요. 날이 더워서 시원한 면 요리도 만들어 놨어요. 참고로 점심이고요.”
죽에 든 건더기는 작게 썰리고 뭉개져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입에서 구르는 맛으로 대충 당근, 고기 이 정도겠거니 예상만 할 수 있을 뿐. 뜨끈하고 묽은 것이 들어가자 열을 내며 펄펄 날뛰던 위벽이 가라앉았다.
빈속에 풀칠만 하는 수준이었지만 이 정도면 괜찮다고 일어서는 제 손에 약 한 병을 꼭 쥐여주던 오든과 다 먹을 때까지 쳐다보던 제이드.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고 타박하면서도 병뚜껑을 열었다. 덕분에 덜 아픈 걸지도.
베논은 테이블 위에 빈 약 병을 내려두고, 안경을 쓰려다가 다시 쇼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리고 천장을 보며 길게 누웠다. 구두를 신은 발이 팔걸이 밖으로 빠져나갔다.
열린 창문에서 습하고 더운 바람이 흘러들었다. 지금 잠을 자면 산더미처림 밀려버릴 일거리가 두려웠지만, 오른쪽 팔을 굽혀 머리 아래 베고 눈을 감았다. 애쓰지 않아도 의식은 순식간에 꿈으로 넘어갔다.
와본 적 없는 숲속에 실수로 떨어진 물건처럼 누군가 덩그러니 서 있다. 자세히 보니 그건 나다. 낮인 것 같은데 주변은 어둡다.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들 탓이다. 무릎을 굽히고 쪼그려 앉으며 무언가를 집어 드는 나. 커다란 신발이다. 흙을 밟고 있는 맨발은 온통 까지고 상처투성이다. 발톱은 깨져있고 뒤꿈치는 까져서 피가 나고 있다.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꿋꿋하게 벗겨진 신발을 다시 신은 나는 앞으로 걸어나간다. 목적이 뭐길래 이렇게 급하게 가는 걸까.
머리 위에서 우거진 나뭇잎들이 서걱거린다. 눈앞에서 윙윙거리던 작은 날벌레들이 부는 바람을 버티지 못하고 멀리 날아갔다. 굵은 가지가 뚝뚝 꺾일 것 같은 불안감에 달리는 속도는 점차 빨라진다. 이윽고 보이는 작은 틈에서 빛이 보였다.
흩날리는 망토와 삐쭉이며 정돈되지 않은 은빛 정수리, 물에 흠뻑 젖어있는 낫, 먼지 하나 없는 구두. 누군지 단번에 알아보고 어깨를 두드리기 위해 팔을 뻗었다. 동시에 튀어나온 돌부리에 발가락을 부딪히고 넘어졌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몸을 반바퀴만 돌린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옆모습. 눈이 주황색으로 번뜩거린다. 웃음기 없는 표정은 서늘하다.
나는 일어설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멍하게 그 모습을 본다. 늘 끝까지 잠겨있던 넥타이가 가슴까지 내려와있다. 벌어진 와이셔츠 사이로 보이는 목에, 흉터가,
눈을 떴을 땐 이미 저녁이었다. 아직도 잠이 덜 깬 건가, 싶어 눈을 비볐지만 깔린 어둠은 사라지지 않았다. 복도를 오가는 사람들의 발소리도, 수다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 보니 퇴근 시간마저 지난 모양이었다.
..일났군, 삼십 분만 누워있을 생각이었는데 어쩌다가.
끄응, 소리를 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어깨에서 가슴까지 스르륵 내려가는 무언가. 자세히 살펴보니 집무실에는 없던 담요였다. 누가 왔다 간 걸까. 단원들이라면 제가 답을 하지 않았으니 함부로 들어올 리가 없다. 들어왔다고 해도 잠을 자고 있는 걸 확인하자마자 몹쓸 짓을 한 사람처럼 바짝 굳은 채 살살 물러났겠지.
작게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천장에 달린 에어컨이 최대한 조용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적당히 선선한 공기가 여름임을 잊게 만들었다.
눈을 느리게 꿈벅거리던 베논은 흘러내린 담요를 꾹 쥐었다. 제 시선이 닿을 곳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손바닥만 한 종이가 에어컨 날개에 붙어 팔랑거리고 있었다.
다리를 내리고 쇼파에서 일어섰다. 까치발을 들고 팔을 높게 뻗으면 어렵지 않게 닿을 수 있을 만큼 긴 쪽지였다.
‘일어났으면 바로 퇴근할 것.’ 간단하게 적힌 용건. 이름이 따로 쓰여있지는 않지만 정갈한 글씨체는 이런 행동을 한 것이 누구인지 말해주고 있었다.
“..아우릭..”
걸음을 옮겼다. 활짝 열어놨던 창문 또한 닫혀있었다. 잠긴 고리를 풀고 유리를 힘차게 밀자 불어오는 후덥지근한 공기.
신전 뒤뜰은 어제 새벽보다 고요했다. 힘차게 울던 풀벌레들이 줄어든 건지, 그나마 풀린 피로에 정신이 돌아와서 무의식적으로 필요 없는 소리들을 걸러내는 건지 모르겠지만.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 시선이 닿는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던 어제의 연인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둥근 달빛은 인상이 써질 정도로 강했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았던 아우릭의 표정과 창백하던 옆모습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반짝이던 눈동자 안에 담고 있던 건 단순히 큼직했던 달뿐이었을까.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고 묻고 싶었다. 그 자리에서 소리쳐 불렀다면 답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다못해 꿈에서라도 말해볼 것을. 그러지 못했던 이유는 한가지, 처음 보는 흉터 때문이었다.
평생 감추고 살 생각인 남의 비밀을 우연찮게 엿보게 된 기분. 보면 안 될 것을 봤다는 묘한 죄책감과 함께 쿵쾅거리며 심장이 뛰었다. 제 속에서 울리는 소리가 어찌나 큰 지, 몰래 훔쳐보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들킬까 봐 걱정이 됐다.
빤히 쳐다보고 있는 시선을 느끼지 못했는지 그는 곧 몸을 돌려 신전 바깥으로 사라졌고, 제가 본 것이 꿈이 아니라는 증표처럼 젖은 잔디 위로 발자국만이 남아있었다. 오늘은 그마저도 보이지 않는다.
들고 있던 쪽지를 반으로 접고, 한 번 더 반으로 접었다. 손바닥보다 작아진 것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열었던 창문을 닫았다.
테이블 위, 빈 약 병 옆에 놓여있는 리모컨을 집어 들어 천장을 향했다. 버튼을 누르자 삑, 소리와 함께 꺼지는 에어컨. 이주 전이 마감이었던 서류가 언뜻 스쳐 보였다. 비어있던 네모칸 안에는 단장의 직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
둘째 날.
오늘은 어제보다 더웠다. 해가 강해서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작은 창문을 가리느라 커튼을 쳐놔야 했다. 한여름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공기까지 후덥지근하지는 않았다. 보이는 창문마다 전부 열어놓은 집무실 안에서 서류만 읽고 펜을 몇 번 움직이기만 하고 있으니 그렇게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다.
베논은 안경을 밀어올리며 깨알같이 적힌 글자를 훑었다. 습관적으로 앞에 놓아둔 머그잔을 들자 무거운 감 없이 훅 올라온다. 움찔 놀라며 잔 안을 살폈다. 곱게 갈린 차의 흔적만 남아있다. 조금씩 홀짝거리다 보니 벌써 다 마셔버렸다. 미리 넣어둔 새로운 티백은 아직 다 우러나오지 않았을 텐데.
들고 있던 잔을 내려두고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이제 막 집어 든 보고서만 읽고 나면 얼추 시간이 맞을 것이다.
얼마 전부터 낮이면 울어대던 새가 보이지 않는다. 가끔 올라와 집무실 내부를 살피듯 둘러보던 고양이도, 도토리를 쥐고 창문 앞에서 쉬어가던 작은 다람쥐도 보이지 않는다.
꼭 죽은 건물 같다. 나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아무도 살펴보러 오지 않아서 무너져 내릴 일만 남은 낡은 창고 안에 갇힌 게 아닐까. 간간이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만이 그건 뜬금없는 네 착각이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베논 있어?”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나더니, 좁은 틈으로 아우릭의 얼굴이 불쑥 들어온다.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밝은 미소를 띤 표정. 제 눈꼬리가 단박에 가늘어지는 게 느껴졌다.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냐니, 단장이 제시간에 출근했으면 반갑게 인사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제시간이라니, 벌써 시계의 작은 바늘이 1을 가리키고 있는데. 인상을 구기며 쥐고 있던 보고서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왔으면 자리에 앉아 일하도록.”
“그건 싫은걸. 어제 많이 했거든. 오늘 또 했다간 쓰러질지도 몰라.”
그렇다고 오늘 할 일이 없는 건 아니라는 대꾸가 목젖을 툭툭 쳤다. 일을 하지 않을 거라면 대체 왜 왔냐는 잔소리는 턱 끝까지 차올랐다.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이제야 제대로 쳐다보는 거냐고 능청을 떠는 연인은 책상 앞까지 다가와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오늘 아침 식사는 하고 왔어? 어제 퇴근은 잘했고?”
“밥은 먹었다. 어제는, 눈 뜨자마자 퇴근했으니 괜찮,”
“약을 먹을 정도면 쉬어야지, 일만 하다가 탈이라도 나면 내가 세울 면이 없어지잖아~”
끝을 보기 전에 툭 끊어진 말허리에 베논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제 표정을 보고는 만족한 것처럼 생글거리는 얼굴 위로 장난기가 스몄다. 그럴 줄 알았다는 뜻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게 바로 다음 행동을 위해 기다린 반응이라는 뜻처럼 보이기도 했다.
넓게 깔린 부드러운 카펫에 굽이 닿을 때마다 뚜걱거리는 구두 소리가 잔잔하다. 모서리를 검지로 훑으며 책상을 돌아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그를 향해 의자를 돌렸다. 뭘 하려는 거지?
“생각해보니까 어제 까먹고 간 게 있어서.”
“뭐지? 물건이라면 아무것도,”
“아니, 물건이 아니라.”
다가온 검은 손가락이 안경의 콧대를 잡았다. 피할 수도 있지만 가만히 올려다 보기로 했다. 그의 손에 절반 정도 가려진 시야. 자연스럽게 꽉 잠긴 넥타이와 셔츠로 쳐다보았다. 저 아래 무언가에 갉아먹힌 것처럼 움푹 파인 흉터가.
귀 옆을 훑고 빠져나가는 안경다리. 멀어지는 렌즈를 통해 보이는 풍경이 콩알만 하다. 눈을 감았다 뜨자 그림자가 지도록 가까워진 얼굴. 상체를 숙이고 남은 손으로 볼을 어루만지며 길게 뻗은 엄지로 입술을 간질거린다.
“저 좁은 쇼파 위에서 어찌나 곤하게 자는지, 깨울 수가 있어야지.”
..아.
입술을 어루만지던 엄지가 사라지고, 그의 입술이 와닿았다. 의도를 알아채고 세우고 있던 허리에 힘을 풀며 뒤로 기댔다. 푹신하게 등을 감싸는 의자 받침. 도장을 찍듯 꾸욱 눌리는 것이 불편해 작게 입을 벌리자 기다렸다는 듯 파고드는 혀. 고소한 향이 났다. 피비앙스 저택에서 식후마다 나오는 커피의 맛.
볼을 어루만지던 손이 뒷목을 감싸 쥔다. 가볍게 치열이 훑어지는 느낌에 읽고 있던 보고서를 내려두었다. 옆에 있던 펜을 건드렸는지 도르륵거리며 책상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가 났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대낮이었고, 일을 해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닫힌 문 바깥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복도를 오가고 있었다. 이성은 누군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며 이쯤에서 관두라는 비상벨을 울려댔다. 제가 거절한다면 억지로 밀어붙일 사람이 아니란 것쯤은 안다. 그렇지만, 이렇게 마주 보게 된 건 오랜만이다. 언제 마지막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두 팔을 들어 올려 그의 목에 둘렀다. 이런 제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우릭은 손가락을 세워 옷깃 아래로 넣고 뒷목을 간질었다.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점차 기울어지는 무게를 이기지 못한 의자가 끼익거리며 울었다. 서로의 혀가 얽혔고, 자연스럽게 이어질 행동들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동시에 든 생각은 제어를 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은근슬쩍 한쪽 팔을 내리고 꽉 잠긴 그의 넥타이에 손을 댔다. 집무실 안은 밝았다. 단추 하나만 풀어내면 그날 봤던 흉터를 가까이서 확인할 수 있다. 이번에 처음 봤는데 놀랐다는 척하며 언제 생긴 거냐, 왜 생긴 거냐 물을 수도 있다.
느릿하게 넥타이 매듭에 검지를 끼워 넣었다. 맞붙어 있던 입술이 떨어진 건 거의 동시였다.
목 뒤를 감싸 쥐고 있던 손이 사라졌고, 나 또한 그의 목에서 손을 떼어냈다. 명백한 거부였다. 만지지 말라는, 흉터는 내보이고 싶지 않다는 신호.
감정 없이 반짝이던 금빛 눈동자가 웃음 뒤로 사라진다. 저 미소 아래로 숨긴 본심은 뭘까. 그는 벗겨낸 안경을 다시 씌우더니 한걸음 물러섰다. 의자가 한 번 더 끼익거렸다.
“일이 많은 것 같은데, 난 이만 가볼게.”
가까이 다가왔을 때만큼 일정하고 가벼운 걸음으로 문으로 향하는 연인. 멍하게 허전해진 입술을 핥으며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상대를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
“..기다려라, 아우릭. 너도 일을,”
“안녕~”
검은 장갑을 낀 손이 팔랑거리며 좌우로 흔들렸고, 문이 닫혔다.
베논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내려두었던 보고서로 눈을 돌렸다. 바로 뛰쳐나가면 멋대로 사라지는 단장을 잡아 자리에 앉힐 수 있었지만 그럴 만한 기운이 나지 않는다.
일 년 전, 지금보다 훨씬 무더웠던 날, 늘 그렇듯 업무시간 내내 사라져 있는 이가 나무 그늘을 따라 누워있는 것을 발견하고 화를 내는 대신 울컥 쏟아버린 마음. 벙찐 얼굴이 붉게 물들었던 그 순간부터 우리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입맞춤을 했다. 더 나아간 스킨십도 수십 번이었다. 하루는 그의 침실, 하루는 그의 서재, 또 다른 하루는 그의 훈련실. 늘 쫓기는 것처럼 급하고 여유 없었던 관계. 그럼에도 제 감정이 일방적이지 않음에 감사하고 행복했다.
잘 생각해보면 나는 아직까지 그의 맨몸을 본 적이 없다. 왜 이제서야 전혀 상관없었던 사실이 신경 쓰이는 걸까. 감사는 충분하게 했고, 행복도 넘치게 느꼈으니 욕심이 나기 시작한다는 건가. 이제 와서 이런 고민을 하는 것도 우습다. 내가 욕심을 내도 되는 걸까. 지금처럼 이렇게, 넥타이를 풀어내는 것조차 거부하는 상대를.
집무실은 고요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감도는 침묵. 삐뚤어진 안경을 고쳐 쓰며 빈 머그잔을 채우기 위해 일어섰고, 일부러 힘을 주었지만 의자는 소리 없이 밀려났다.
덥다. 꽁꽁 숨어있던 더위가 느닷없이 온몸을 감싸버린 것 같다. 어디서 들어왔는지 모를 날벌레가 사람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책상을 떠나 푸드득 날아갔다. 색이 진하게 나는 투명한 주전자. 잠깐 사이 깊게 우러난 차에서는 텁텁한 맛이 났다.
*
셋째 날.
오전 내내 안정화 작업을 하느라 오후 네시가 돼서야 집무실로 돌아왔다. 베논은 손등으로 턱을 쓸며 책상 의자에 철퍽 앉았다. 흐른 땀이 새하얀 장갑을 축축하게 적셔냈다. 여름용으로 얇게 만든 제복 아래로 피부가 끈적이는 게 느껴진다.
인상을 구기며 눈을 감았다. 그 사이 쌓인 서류들이 무서울 정도로 높다.
예상대로라면 두시 전에 끝나야 했을 작업이었다. 이제서야 신전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갑자기 땅이 크게 흔들리고 나타난 골렘에게 시간을 잡아먹힌 탓이었다.
팔을 뻗어 주먹을 쥐자, 거대한 돌 틈으로 검은 기운이 우르르 올라왔다. 다가오려던 마물은 중력에 억눌려 주저앉았고, 바닥은 움푹 파였다. 자갈이 튀고 흙먼지가 날렸다. 어찌나 큰 지 분명 중심을 잃고 쓰러져 있는데도 머리 위로 드리운 그림자가 짙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단원들을 향해 답지 않게 목소리를 높였다. 침착하게 주변을 살피고 사람들을 대피시키라고 명령하자 정신을 차린 몇몇이 알겠다며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안정화 작업을 한다는 소문을 들었는지 북적북적 모여들었던 시민들은 허둥지둥 도망쳤다.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비명을 질렀다. 필요해서 꺼내놓았던 도구가 그들의 발에 채여 공중을 날았다.
골렘은 만만치 않았다. 자꾸만 빠져나가려고 꿈틀거렸고, 꽉 틀어쥔 주먹은 바들바들 떨렸다. 제 눈동자는 평소보다 짙은 검은색으로 빛나고 있을 것이다. 그날 아우릭이 능력을 사용하며 주황색으로 빛났던 것처럼.
..그날. 그날 왜 능력을 쓰고 있었을까. 나처럼 마물을 만났던 걸까. 목 아래 흉터는 언제 생긴 걸까. 별의 힘을 사용할 때마다 온몸을 감싸도는 찌릿한 느낌. 이것이 그의 피부 안쪽부터 갉아먹었을까.
불쑥 끼어든 딴 생각이 집중력을 흐리게 만들었고, 주저앉았던 골렘은 굉음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깜짝 놀라 급하게 뒷걸음질 쳤지만 날라온 공격은 정확하게 볼을 길게 파내고 지나갔다.
어찌 어찌 수습을 하긴 했지만, 멍청했다. 긴급한 상황에서 다른 생각을 하다니. 사상자가 나오지 않은 것이 기적 같은 상황이었다. 덜덜 떨리는 다리에 연신 힘을 주며 복귀하는 내내 뒤에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잊혀지지 않는다. ‘오늘 베논 부단장님 상태가 안 좋으신 것 같지 않아?’
안 그래도 더운 날이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옷이 땀에 절어버릴 만큼 강한 태양이었다. 바람 한 점 불 지 않았고, 숨을 쉴 때마다 위에서 내리쬐는 빛과 달궈진 바닥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명치가 콱 막혔다. 떨어져 나간 살점과 드러난 피부 아래쪽이 따끔거렸다. 씻고 나서 약을 발라야 할 텐데.
오늘 출근을 한 후, 처음 들어오는 집무실의 공기는 갑갑했다. 꾸역꾸역 들어찬 더위가 빠져나가도록 창문을 열고 환기라도 시키고 싶었으나 일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다친 사람이 저 뿐이라는 안도감과 집중력이 너무도 쉽게 흐트러져 버렸다는 자괴감이 두 다리 위로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하아..”
젖은 손등으로 눈가를 가렸다. 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쌓인 서류들을 처리하고 나서,
난데없이 쾅 소리가 울렸다. 화들짝 놀라 꼴사납게 어깨를 떨었고, 손을 내리며 눈을 크게 떴다. 언제 왔는지 화가 난 듯한 표정의 아우릭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아까부터 계속 불렀는데 왜 대답이 없어?”
“..못 들었다.”
“단원들이 부단장님 다쳤다길래 와봤더니, 조용해서 놀랐잖아.”
신전 안을 돌아다니다가 오전 일에 대해 들은 모양이었다. 책상 위에 넓게 펼쳐진 검은색 다섯 손가락. 말없이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쓰러진 줄 알고 큰 소리를 냈나 보다. 고개를 옆으로 돌렸지만, 턱이 잡혀 다시 앞을 보았다.
“이게 뭐야, 얼굴에 흉 지겠네.”
그의 눈썹이 팔자로 늘어졌다. 잔뜩 속상하다는 얼굴로 약간 다친 상처를 이리저리 살피는 눈길. 연인은 주머니를 뒤적여 반창고를 꺼내들었다. 연필꽂이에 있는 펜 하나를 집어 들어 반창고 위에 ‘부단장님 아프지 말기’ 라는 작은 글씨와 큼직한 하트를 쓰더니 종이를 떼어냈고, 유리로 만들어진 장식품 다루듯 조심스럽게 상처에 붙여주었다. 땀을 많이 흘려 씻어야 한다고 하기 전에 아, 하고 짧은 신음이 먼저 나왔다.
“이거 봐. 반창고 위로 벌써 피가 묻어 나오잖아. 어쩌다 이렇게 다쳤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상체를 곧추세우고 손부채질을 하며 천장을 올려다본다. 곧 에에, 하며 터져 나오는 짜증.
“덥지 않아? 왜 에어컨도 안 켜놨어?’
“그건,”
방금 집무실에 들어와서 그렇다는 대답을 하려다가 말을 멈췄다. 그리고 눈동자를 한차례 굴렸다.
“더우면 옷을 조금 풀어라.”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절대 하면 안 된다고 못 박아놓은 일을 몰래 해버린 아이처럼 손발이 저릿거렸고, 등에서 식은땀이 솟아났다. 왜? 무슨 소리냐고 화를 낼까봐? 싫다고 거절할까봐? 아니면 넥타이를 풀어낸 그의 목에 흉터가 없을까봐? 그날 본 것이 단순한 착각일까봐?
아우릭은 천장을 향하던 고개를 책상 의자에 앉아있는 저와 마주 볼 수 있을 정도로 숙였다. 서 있는 그의 등 뒤로 밖에서 들어오는 햇살이 비쳤다. 그림자가 내려앉은 얼굴. 표정이 없다. 서늘함이 발끝부터 타고 올랐다.
“그럴 필요가 뭐 있어.”
가느다란 손가락이 에어컨의 리모컨 버튼을 꾹 눌렀다. 삑, 소리와 함께 건조한 바람이 흘러나온다. 찜통 같던 집무실에 퍼지는 시원함.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는 어느새 눈꼬리가 휘어지도록 웃고 있었다.
“이렇게 에어컨을 켜면 되잖아?”
“..그렇군.”
아쉬움은 없었다. 거부를 당했다는 것에 서운함도 없었다. 그날부터 이어지는 호기심에 살이 더해갈 뿐이었다. 감추고 싶은 건가, 그렇다면 이유는 뭘까.
똑똑. 누군가 노크를 했고, 들어오라는 답을 했다. 문이 열리고 크루세이더 단원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단장 혼자 있을 줄 알았는데, 평소 만나기 힘들었던 단장을 발견하고는 많이 놀랐는지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이렇게 멍하니 있으면 안 된다는 식으로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용건을 전했다. 대별지기가 간부들을 불러 모았다는 이야기였다.
베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 앞에 서 있는 아우릭의 손목을 잡았다.
“도망갈 생각은 말도록.”
“그렇게 말하면 내가 꼭 도망가려고 하던 사람 같잖아~”
“아닌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만.”
입술을 삐죽거리던 그는 얌전히 뒤를 따라왔다. 중간에 다른 곳으로 가버릴까 봐 자주 뒤를 돌아보았고, 그럴 때마다 연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불안하면 손이라도 잡아보라는 식으로 팔을 내밀었지만 그걸 무시하는 건 나였다. 여기는 눈이 너무 많다.
대별지기 집무실 앞. 먼저 도착한 리온은 아우릭을 보며 놀랐고, 안에 손님이 있으니 기다려야 한다며 복도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나인은 생긋 웃었다. 늘 저런 표정이긴 하지만, 저건 기분이 나쁠 때 보이는 미소 같다.
“와아, 단장님이 부단장님을 많이 아끼시나 봐요. 반창고에 하트도 그려주시고.”
“부러워~? 부러우면 대장님한테 해달라고 하는 게 어때? 설마 내가 해주길 바라는 거야?”
“아뇨. 그럴 리가요. 그 사랑 부단장님께 많이 드리세요.”
아, 까먹고 있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볼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보다 빠르게 손등을 감싸 쥐는 그. 떼어내지 말라는 소리 없는 명령에 한숨을 쉬었다.
문은 금방 열렸다. 지긋한 별지기가 나오며 인사를 꾸벅 했고, 예의가 아님을 알면서도 궁금해서 참을 수 없으니 용서하라는 눈길로 제 볼에 붙은 반창고를 힐끔거렸다. 민망함에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다는 말을 하던 대별지기는 푸른 눈동자의 모양이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눈을 크게 떴다.
“..아우릭?”
“안녕, 퍼디~ 마침 집무실에 있다가 잡혀왔지 뭐야.”
반갑게 인사를 하며 먼저 들어선 그는 조잘조잘 떠들기 시작했다. 시장에서 산 과자가 금방 눅눅해져서 버렸다거나, 저번에 산 보석은 볼 땐 예뻤는데 사고 나니 별로라거나, 최근에 좋아진 반찬이라던가, 대부분 쓸데없고 별거 아닌 이야기.
제게 하는 말이 아님에도 하나씩 새겨들으며 대별지기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시원하고 인공적인 바람에 벽을 따라 늘어선 푸른 화초들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회의는 금방 끝났다. 끊임없이 웅성이는 기사단 측도 문제이지만 크루세이더와 피스메이커가 친하게 지내지 못하고 있는 것도 문제라는 이야기였다.
가장 큰 문제는 그 짧은 회의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나였다. 대화를 주고받는 짧은 시간 동안 몇 번이나 들고 있던 찻잔을 놓칠 뻔했다.
자꾸만 꽁꽁 여민 그의 상의로 눈길이 갔다. 벌써 삼 일째다. 그날 이후로 꿈에 나타나는 건 물론이고, 불쑥 올라오는 궁금증에 목숨이 위태로울 뻔하기까지 했다. 그간 지내왔던 수많은 훈련의 시간들이 나를 비웃을 것이다.
리온은 급한 일이 있다며 시장으로 나갔고, 나인은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며 피스메이커 회의장으로 향했다. 베논은 회의도 참여했으니, 이제 도망가 볼까~ 라고 당당히 말하며 앞서 걸어가는 아우릭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삐죽 올라온 정수리의 머리카락은 비에 홀딱 젖어도 꼿꼿했다. 풀린 옷 아래로 봤던 흉터도 착각이 아닐 것이다.
마르는 입술을 핥았다. 은근히 풀어내려고 하기도 했고, 풀어보면 어떻겠냐고 말하기도 했다. 원래부터 이렇게 참을성이 없는 사람은 아닌데.
“아우릭.”
“으응?”
그는 걸음을 멈췄고, 이윽고 뒤를 돌아보았다. 차마 마주보기 어려워 괜히 눈동자를 크게 굴렸다. 몹쓸 것을 물어보는 걸까. 정말 숨기고 싶어 하는 일인데 곤란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입안에 고여있던 침이 꿀꺽 넘어갔다.
“혹시, 이전에, 크게 다친 적이 있나? 아니면 힘이.. 폭주했다던가.”
“....”
“얼마 전에, 네 목에 있는 흉터.. 를 봤다.”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에 한 문장을 또박또박 말하기도 어려웠다. 웃기는 모습이었다. 얼굴에는 하트가 그려진 반창고를 붙이고,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없는 적막한 복도에서, 직장에서, 그것도 업무 시간에, 일 년 가까이 사귄 연인에게 사적인 질문을 하다니. 부끄러운 짓이다.
그는 대답이 없었다. 그날처럼, 어제 입을 맞추다 멈췄을 때처럼, 방금 전 크루세이더 집무실에서 보였던 것처럼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을까.
어느 한 곳에 시선을 두기가 힘들어, 밖을 내다보았다. 여름이 되면서 길어진 해는 여전히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갑자기 복도 창문에 매미가 철썩 붙는다. 엄지를 두 개 붙여놓은 정도의 크기라 날갯짓을 할 때마다 푸드덕거리며 참새가 날아오르는 듯한 소리가 났다. 놀라서 쿵쿵 뛰는 심장과 크게 뜨인 눈. 이리저리 움직이며 자리를 잡더니 크게 울기 시작했다. 문이 닫혀 있음에도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인상을 구기며 창가로 다가가 유리를 톡톡 쳤다. 날아왔을 때만큼 커다란 날갯짓으로 멀리 날아갔다. 주변에 서 있는 나무들은 무시한 채 하늘 높이.
“그게 궁금했어?”
아하하, 가벼운 웃음 뒤로 귀엽기도 하지, 라고 덧붙는 말은 무시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돌렸다. 평소처럼 화사하게 핀 표정에 은근한 안도감과 함께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렇게 궁금하면 확인해보지 그랬어. 기회는 많았는데.”
“....”
“어제는 놓쳤지만, 그렇게 말하면 오늘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겠네? 집무실에 에어컨 틀어놨으니까 괜찮을 것 같은데. 그렇지?”
도망 못 가게 붙잡아 두려는 거 아니냐며 능청을 떠는 목소리가 한껏 올라가 있다.
쌓인 서류가 고스란히 집으로 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지만, 직장이고 아무도 퇴근하지 않은 시간이라고 이성이 끼어들었지만, 어금니로 혀를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씹었다. 다가온 기회를 제 손으로 쳐낼 수는 없다.
한산한 복도 끝, 닫힌 집무실의 문고리를 돌려 밀었다. 시원한 바람이 화끈해진 얼굴 위로 끼쳤다. 자연스럽게 허리를 감싸 안는 팔. 몸이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그날 연인은 왜 신전 뒤뜰에 서 있었을까. 능력은 왜 사용했지? 그날부터 꾸준하게 얼굴을 비춘 이유는? 궁금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전부 답을 들을 수 있을까. 슬쩍 옆을 보았다. 그는 생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마치 며칠 동안 울어서 기어코 원하는 걸 얻어낸 철부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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