릭베논 - 이제 결혼할까?

스텔라비스 웨딩 합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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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똑똑. 가볍게 손목을 튕기며 두드려서 나는 노크 소리. 문에 달린 작은 창을 커튼으로 가려 만든 짙은 어둠 속에서 힘을 잃고 흔들리던 베논의 고개가 아래로 푹 꺼졌다. 감겨있던 눈꺼풀이 무겁게 떠지고 초점이 흐린 검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졸았나. 신전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짧은 시간도 버티질 못하다니. 쌓인 피로가 생각보다 많은 모양이다.

 “무슨 일이지.”

 그 사이에 푹 가라앉은 목소리가 듣기 싫다.
 마차 문이 열리고, 환하게 들어오는 빛에 인상을 찡그리며 주변을 살폈다. 신전과 야니크가를 자주 오가며 안면을 익힌 마부와 계절에 비해 조금 얇아 보이는 정장을 차려입은 이가 긴장한 표정으로 나란히 서 있다.
 저 남자는 처음 보는 이다. 상기된 볼과 옅게 풍기는 포도주 향. 차림새로 봤을 때 넥타이가 자리 잡고 있었을 가슴은 비어 있었고, 전체적으로 빳빳하고 풀을 먹인 것 같은 옷깃에 비해 셔츠 단추는 세 개쯤 풀려 있었다.
 어두워야 마땅할 밤거리는 번쩍거렸다. 깜박깜박 빛을 잃어가는 가로등의 사이를 연결하는 밝은 등불 탓이다. 붉은 종이 위로 그려진 별이 안에서 흔들리는 불꽃에 노랗게 빛났다. 끝에 매달린 스타 캐처. 오가는 사람들을 따라 흔들리는 것이 구슬 딸랑이는 소리를 냈다.
 마차가 지나가야 하는 거리에 자리 잡은 가게들은 전부 문을 활짝 열고 있었다. 가을치고는 쌀쌀하지 않다고 하나 저렇게 활짝, 그것도 오랜 시간 열어 놓았다간 냉기가 돌아 손님이 하나도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문을 머릿속에서 꺼내 읽은 것처럼 앞에 서 있던 남자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만, 오늘은 제 친구들의 결혼식이라서 이 근처 가게를 통 크게 빌렸습니다! 그래서 이 거리를 마차로 통과하기는 어려우실 것 같습니다.”

 이 길은 사용하지 못하니 돌아가라는 뜻인가.

 긴장한 남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마 마부에게 이 마차의 행선지와 타고 있는 사람에 대한 말을 들어서겠지. 술기운을 얻어 용기를 냈지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눈동자는 제 앞에 있는 이가 얼마나 긴장을 하고 있는 중인지 알려준다.
 고개를 왼쪽으로 약간 기울여 마부와 남자의 뒤에 서 있는 커플을 보았다. 그들과 마차 사이의 거리는 하얀 턱시도와 하얀 드레스를 입은 채 서로를 마주 보며 웃고 있는 얼굴이 피로에 찌든 시야에 선명하게 담길 정도였다.
 그들은 손을 잡고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어찌나 사랑이 가득한지, 얽히는 시선에서 곧 꿀이라도 뚝뚝 떨어질 것 같다. 입술이 계속 움직이는 걸 보니 대화를 하고 있는 것 같았고, 무슨 말인지 들리지 않았지만 재미있는 내용을 이야기하는 듯 그들은 웃기 바빴다.
 목에 꽉 조인 나비 모양의 넥타이와 온통 새하얀 턱시도, 전체적으로 뚝 떨어지는 라인이지만 어깨에 레이스로 포인트를 주어 심심하지 않게 만들어진 드레스를 보다가 눈을 감았다. 얽힌 손가락에서 반짝이는 반지의 디자인이 궁금해진다.

 “..이 길 말고 다른 길로 돌아가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남자는 한시름 덜었다는 표정으로 가슴을 쓸어내리고 조심해서 돌아가시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통통 튀어 파티를 하는 곳으로 가는 모습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마부는 이제 출발하겠다는 말을 하며 문을 닫았다. 다시 찾아온 어둠.

 베논은 손바닥을 펼쳐 가슴 위에 얹었다. 볼록 튀어나온 반지의 감촉이 느껴진다. 훈련을 하거나 능력을 사용하면 망가질 수도 있으니, 손가락에 끼지 말고 목에 걸고 다니라고 당부하던 아우릭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

 “대체 언제 끝나? 일은 왜 맨날 이렇게 많아~ 이러다 해가 지고 나서야 데이트를 하겠어.”

 오랜만에 단장 집무실에서 마주한 아우릭은 투덜거리기 바빴다. 눈으로는 서류를 살피고 손으로는 사인하면서 입으로는 징징거림이 끊이질 않았다. 도망치려는 기색도 없다. 커다란 단장용 의자가 어색하지 않았다. 일도 안 하고 매일 돌아다니면서도 남의 물건을 취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저것도 참 신기한 재주다. 가진 권력이 어울리는 재주.
 날씨가 좋다며 우리 같이 데이트 가자고 찾아왔을 때부터 이런 상황을 예측할 수 있었을 텐데, 붙잡혀서 밀린 일만 처리해야 할 걸 알면서도 왜 왔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어제 오후 복도를 걷다가 코피를 쏟았으니, 아마 그때 주변에 있었던 누군가에게 소식을 듣고 제 상태를 살피러 왔을 것이다.
 반듯한 자세와 진지한 표정만으로는 그의 어깨에 걸터진 단장 망토는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이런 모습을 다른 단원들이 봐야 했다. 물론 입을 다물었을 때.

 “그거야 아우릭, 네가 늘 자리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있잖아. 근데 왜 일이 많아?”
 “내일도 있다면 내일 일은 줄어들겠지.”
 “음, 내일은 아마 없지 않을까아?”

 온 얼굴이 화사하게 피도록 짓는 미소. 턱을 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치 ‘그래도 괜찮지?’ 라고 묻는 듯한 표정에 마주 웃어줄 뻔했다. 말도 안 될 일을 저런 식으로 뻔뻔하게 요구하는 부분이 귀엽지만 지금은 그렇게 느낄 타이밍이 되지 못한다.

 “그럼 오늘 해야 할 일이 더 늘겠군.”

 그는 급하게 손을 휘저었다. 잘못 들은 거다, 내일도 출근할 거다 줄줄 쏟아지는 변명에 귀를 닫은 베논은 마감일이 넉넉하게 남은 서류까지 전부 정리해 연인의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겨우 어깨 높이만큼 내려왔던 서류인데 다시 앉은키를 훌쩍 넘길 정도로 높게 쌓여버렸으니, 성격상 적반하장으로 화를 낼만한 상황이기도 했다. 반항의 의미로 드러눕거나 칭얼거림이 늘 줄 알았는데 의외로 조용했다. 예쁘게 휘었던 눈으로 원망스러운 빛을 보내는 그의 입에서는 불만이 터져 나오지 않았다.
 진지한 눈동자가 서류 위를 훑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집은 펜으로 사각사각 사인을 하는 모습을 보다가 무심코 숨을 삼켰다.
 웃음까지 지운 얼굴에서 시선이 떨어지질 않았다. 눈치를 채면 어쩌나, 그런 걱정은 소용없었다. 이미 제가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언제까지 보고 있을까, 궁금해하는 중이겠지.

 문득 어제 퇴근길에 봤던 커플이 떠올랐다. 마주 보기만 해도 행복해하던 그들. 함께 할 미래를 약속하고, 웃고 떠들며 모두의 축복을 받았던 그들.
 앞으로 다가올 기쁨도 슬픔도 모두 함께하겠다고 다짐하던 목소리가 닫힌 문틈으로 들렸었지. 이어지는 웃음은 마차가 멀리 떨어졌을 때도 들렸다.
 다른 곳에서 태어나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자란,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만나서 같은 미래를 꿈꾼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그런 것이 가능한 일인 걸까, 그렇게 생각했었다. 남과 어울리는 것이 힘든 제 성격으로는 설사 가문을 위한 배우자가 생긴다고 해도 오래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가까이 지내는 친구 하나 없는 상황에서 결혼은 무슨.
 베논은 아랫니로 윗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그렇지만 아우릭이라면 다르지 않을까. 처음으로 남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을 때 거부 없이 받아준 그다. 싹튼 감정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릴 때 정답을 알려준 것도 그였고,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준 것도 그였다. 우정으로 지낸 시간보다 사랑으로 지낸 시간보다 많은 우리는 같은 미래를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아우릭.”
 “으응. 왜애?”

 종이가 팔락이며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어깨를 틀자 명치 위에 있던 반지가 왼쪽으로 약간 굴렀다. 쿵쿵 뛰는 심장 박동이 둥근 링 위로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었다.

 “우리 결혼할까.”

 만난 지 오래되었으니까, 퇴근 후에도 얼굴이 보고 싶으니까, 그런 유치하고 쓸데없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하지 않아도 알 거라고 생각했다.

 아우릭은 멈칫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있을 제 얼굴을 천천히 살피는 눈동자. 무슨 말을 더 해야 할까. 아니면 ‘결혼’ 이라는 단어를 지금이라도 주워 담아야 하는 걸까.
 느릿하게 훑는 시선에 발가 벗겨진 기분이 들었다. 펜을 쥐고 있던 손을 치우고, 허공에 들었던 손을 내리자 절반 정도 들춰져 있던 서류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검은 손가락이 펜을 내려놓고, 책상을 톡톡 치자 집무실 가득한 침묵 사이로 거슬리지 않을 정도의 소음이 퍼졌다.
 연인의 등 뒤로 보이는 창문 밖. 커다란 구름이 잠시 해를 가렸다가 흘러갔다. 바람이 빠른 모양이었다. 나뭇잎 서걱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보면 아마 위쪽만.
 두꺼운 커튼이 끈으로 묶여 벽 한쪽 구석에 치우쳐 있었다. 천장에 닿은 책장에는 이스델라에서 유명한 책들이 빈틈없이 꽂혀 있었고, 수도를 전부 그려 넣은 지도가 돌돌 말린 채 보관되어 있었다. 아직 정리되지 못한 서류들이 바닥에 쌓여있고, 그 앞으로 펼쳐진 보드라운 카펫이 집무실 바닥의 대부분을 덮고 있었다. 거의 살고 있다시피 한 공간을 괜스레 둘러보다가 마르는 입술을 혀로 핥았다.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었다.
 장갑 안으로 가득 차는 땀을 닦아낼 수 없어서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의 입술 사이로 으음, 하는 소리가 나오자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을 하기 전으로 되돌아가고 싶어졌다.

 “으음…”
 “.....”
 “베논. 나랑 결혼하고 싶어?”

 그래. 그렇다고 대답을 해야 했다. 입술을 달싹였지만 혀끝까지 나온 말을 가로막은 건 그의 대답이었다.

 “난 싫은데.”

 예쁜 미소였다. 화사하기도 했다. 혹시 제가 대답을 잘못 들은 건 아닐까, 고민이 들 정도로 밝은 얼굴.
 침묵이 이어졌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만 했다. 그가 제게 고백을 하던 순간에 기분이 이랬을까.
 아무리 오래 지나도 바래지 않을 기억이 가슴속에서 넘실거렸다. 빠른 대답을 해주지 못한 것이 이제서야 후회되었다. 고민 했을 텐데, 혹여나 같은 감정이 아니면 어쩌나, 많이 생각하고 오래 고민한 끝에 한 고백이었을텐데, 하루라도 더 빨리 대답을 해 줄걸. 뭐가 어렵다고 일주일이나 끌었을까.
 베논은 저도 모르게 멈추고 있던 숨을 가늘게 뱉었다.

 “..그래.”





*

 어린 시절, 처음으로 참여한 귀족가 파티는 화려함 그 자체였다. 빛이 넘쳐흐른 것처럼 보이는 샹들리에, 벨벳 재질의 두꺼운 커튼, 틀이 아니었다면 아무것도 없다고 착각할 정도로 반짝하게 닦인 유리창, 한눈에도 비싸 보이는 옷을 걸친 사람들. 둥근 테이블 위에는 쉽게 구하기 힘든 류의 음식들이 가득했고, 파티장을 오가는 서빙을 하는 이들의 손에는 억 소리가 날 정도의 고급 와인이 잔뜩 놓인 쟁반이 들려있었다.

 키가 테이블보다 조금 작았던 어린 베논은 한 손에 초콜릿을 덧바른 마들렌을 든 채 바닥을 응시했다. 친절을 가장하고 다가와 친한 척을 하던 어른들의 이름을 하나씩 정리해 봤지만 그중 기억나는 건 단 하나도 없었다.
 거의 비슷한 얼굴이었고, 꼭 외워야만 한다는 것처럼 이름을 알려준 후 똘망똘망하다, 잘생겼다, 크면 이스델라의 기둥이 될 것이다 같은 칭찬을 늘어놓는 것까지 하는 행동도 비슷했다.
 지루했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놀러 온 것이 아니라 야니크가의 차남으로서 참석한 자리이기 때문에 아무리 싫어도 아닌 척을 해야 했다. 들고 있던 마들렌을 먹기 싫었지만, 친한 척을 하던 수많은 어른 중 한 명이 쥐여주었기 때문에 먹어야만 했다.
 주변을 힐끔거려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인상을 찌푸렸다. 조물거리며 만졌더니 손가락에 빵가루가 잔뜩 묻어있다.  어떡하지.

 고민을 하는데 시야에 불쑥 들어온 밝은 은빛의 정수리. 두 가닥의 삐죽이는 머리카락이 꼭 덜 자란 새싹 같았다. 순식간에 마들렌의 반절 이상을 씹은 입술이 손가락에 살짝 닿았다.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자 녹은 초콜릿에 갈색으로 변한 입술이 씨익 올라간다.
 곧 불룩 튀어나오는 볼. 하얗고 찰떡같은 얼굴이다. 저와 비슷한 또래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아무리 높게 생각해도 나이가 저보다 어릴 것 같이 생긴 아이는 빼앗아간 마들렌을 맛있게 먹었다. 우물거리며 맛을 음미하는 듯 눈을 감았다가 뜨면 동그랗고 큰 금색 눈동자가 반짝이며 빛났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남아있는 부분을 내밀었다. 아이는 손으로 받아 가는 대신 빵이 전부 사라지고 말끔해진 입을 아아~ 소리 내며 크게 벌렸다. 자꾸 만지작거린 탓에 원래의 모양보다 눌린 끝부분을 조그마한 혓바닥 위에 얹어주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행동이다. 그것도 오늘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음식을 먹여주었다. 가슴 안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으며 제 행동이 잘한 행동인지 곱씹어 보았다. 혹시 야니크가의 차남으로서 실례되는 행동을 한 것은 아닐까.

 “야니크?”

 그 사이 앞에 서 있던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으응, 나보다 형이라고 들었는데, 형이라고 불러도 돼?”
 “언제 봤다고 그런 식으로 친근하게 부르려 하는 거지?”
 “지금 봤잖아~”

 이상한 애다. 형이라는 말은 누구한테 들은 거지?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은 많았다. 아마 이 파티장에 있는 사람들 전부가 제 나이를 알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야니크가에 잘 보이고 싶어서 이름을 외우고 나이를 외운 뒤, 다정한 척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 어른들의 자식 중 한 명이 아닐까.
 이제라도 모르는 척하고 몸을 돌리려는데, 나이가 지긋한 남자 한 명이 다가와 아이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말했다.

 “도련님. 예의를 갖춰서 말씀하셔야지요.”
 “지금 충분히 예의 갖췄는걸. 아니야?”
 “아닙니다. 상대방의 이름을 묻고 싶을 때는 먼저 자신의 이름을 이야기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앞으로의 파티에서는 그러셔야 합니다.”
 “이런 곳에 또 와야 하는 거야? 싫은데. 재미없잖아.”

 노인은 난감한 표정으로 양손바닥을 아래로 향하게 돌리고 목소리를 낮추라는 듯 아래쪽으로 휘적였다. 그리고 제가 서 있는 방향으로 상체를 틀더니 이마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희 도련님께서 또래와 인사를 나누는 일은 처음이시라 실례를 범한 점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
 “대신 제가 인사를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라는 뜻으로 돌아서려고 약간 틀었던 발을 바로 했다. 알아들었는지 노인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커다란 손으로 옆에 서 있는 아이를 가리켰다.

 “이분은 피비앙스가의 도련님으로 이름은 아우릭 D. 피비앙스 라고 하십니다.”

 베논은 눈을 크게 떴다. 여지껏 지나간 어른들과는 다르게 이미 유명하고, 집에서도 여러 번 들었던 이름이었다. 피비앙스. 그 집에 저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산다는 말은 들었는데, 저렇게 하얗고 작은 아이인 줄은 몰랐다.
 놀란 표정을 애써 지우고 손을 불쑥 내밀었다. 이런 식으로 남에게 인사를 받는 것도 그렇지만, 타인에게 먼저 손미는 일도 처음이었다. 아마 식구들이 알면 놀라겠지.

 “베논 야니크다.”

 아우릭은 내민 손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민망할 정도로 오랫동안 지켜보기만 했다. 곁에 있던 노인은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이럴 때는 악수를 해야 하는 것이라고 일러주었지만 아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혹시 이런 것도 실례가 되는 걸까. 생각해보니 저도 제 또래의 누군가와 인사를 나눈 적이 없었다. 어른들이 데려와 억지로 고개를 숙이는 아이는 있었어도 불쑥 다가와 얼굴을 마주 보고 본인의 의지대로 인사를 하는 아이는 없었다.
 이렇게 하는 게 아닌가? 어른들이랑 온 아이는 전부 지금처럼 했는데. 야니크 이름에 누를 끼친 행동이면 어쩌지.

 내민 손을 거두려고 우물쭈물하는데 손바닥과 손등에 동시에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하얗고 작은 두 손이 제 손을 꼬옥 잡고 있었다. 그는 해맑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인사도 했으니까 이제 형이라고 불러도 돼?”





*

 청혼을 거절한 아우릭은 그 후로 삼일 동안 신전에 나타나지 않았다.

 늘 있던 일이다. 일터에서는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연인. 그러나 퇴근할 시간이 되면 귀신같이 나타나서 곁에 붙어 있었는데,삼일 전부터는 그마저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헤어진 걸까. 다른 커플들이 그렇듯 하나가 어긋나면 그 뒤의 일도 줄줄 어긋나서 결국에는..

 ‘부단장’ 이라는 글자 옆에 제 이름을 써넣은 베논은 한숨을 쉬며 서류를 덮고, 다음 서류를 펼쳤다. 작은 글씨가 지렁이처럼 기어 다니고 있다. 손가락으로 눈꺼풀 위를 꾹꾹 눌렀다. 쉬지 못하고 내내 흰 종이와 검은 글자를 번갈아 보던 눈이 뻑뻑했다.
 펜을 내려놓고 의자에 등을 푹 기댔다. 어깨가 아프고, 목뒤가 빳빳하게 당겨왔다. 책상은 제 몸에 맞게 만들어져 불편하지 않았지만, 일정 시간이 넘어가도록 앉아있으면 아무리 좋은 소재로 정성 들여 만들어도 소용없었다.
 정확한 시간을 따져보지 않았지만, 아침에 해가 뜨기 전부터 앉아서 달이 머리 위를 넘어갈 때까지 있었으니 이 정도만 아픈 것이 신기할 수준이었다.
 본인의 기분에 따른 것이지만, 단장인 그가 찾아와 마무리된 서류들이 제법 많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앉은키보다 높게 쌓아준 서류를 징징거리면서도 전부 끝내준 덕분에 집무실 내부도 환해졌다. 처리가 끝난 서류를 보내고 나니 원래 이 공간이 이렇게 넓었나 싶을 정도였다.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아예 얼굴을 보이지 않은 삼일 동안은 잘 지냈을까.
 한 번은 너무 궁금해서 물어본 적이 있다. 매일 밖을 돌아다니냐고. 아니면 아침에 일어나지 않고, 출근 시간 상관없이 집에서 머무는 거냐고.
 뭘 먹은 건지 볼에 생크림을 묻힌 채 걷던 그는 제 얼굴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인지, 일은 하지 않고 어딜 돌아다니느냐 잔소리를 하기 위해 물어보는 것인지 가늠하는 듯, 시선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훑었다.
 쌀쌀한 날이었다. 낮은 밝게 뜬 해로 추위를 느낄 새가 없었지만, 밤이 되면 부는 바람에 찬 기운이 돌 시기였다. 추운 날씨에 꼭 걸쳐줘야겠다던 단장 망토를 단호하게 거절했더니 입술을 삐죽거리던 그는 묻는 말에 대답 정도는 해줘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곧 다른 의도가 없는 순수한 궁금증임을 알아챘는지, 그는 펼친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나올 때도 있고, 늦잠을 자서 점심을 먹고 나올 때도 있는데 대부분 시장에 가서 사람들을 구경하고 맛있는 음식을 사 먹는다고 말했다. 필요한 물건을 직접 사러 다니기도 하고, 가끔 제게 주고 싶은 선물을 사기도 한다며 웃었다.
 예를 들어서 오늘 한 일을 말해주겠다며 아침부터 해온 일을 하나씩 말할 때마다 굽혀지는 손가락은 딱 달라붙는 검은 장갑 위로 유려한 곡선을 그렸다.

 그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져 있으면 했다. 서로 약속을 하고 목에 걸었던 것 말고, 지금까지 그래왔듯 미래에도 함께 하자고 약속하는 증표를 끼워줬으면. 그래서 어디를 가고, 무엇을 하든 제 생각을 해줬으면.

 그날 봤던 커플의 얼굴이 떠올랐다. 청혼을 거절당한 이후로 꾸준히 머릿속을 맴돌며 하루에 한 번 이상은 그들을 생각했다. 스타 캐처가 흔들리는 길거리에서 손을 잡고,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오로지 둘만 있는 것처럼 밝게 빛났던 모습.
 남자가 입었던 하얀 턱시도를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가슴에 매달린 반지 위로 손을 얹었던 건 제 연인도 그 옷이 잘 어울릴거라 생각해서였다. 검은색보다는, 새하얀 턱시도가..

 똑똑. 노크 소리에 정신이 깼다. 문고리가 돌아가고 빼꼼 얼굴을 내민 크루세이더 단원 한 명이 저와 눈을 마주치더니 지나치게 놀란다.

 “죄,죄,죄송합니다! 아까부터 말씀이 없으셔서 무슨 일이 있으신 줄 아,알았습니다! 저번에 코피를 흘리셨다는 소식을 들어서!”

 높은 톤으로 얼굴이 빨개지도록 소리를 질러 말하는 단원을 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귀가 아픈 건 둘째치고 머리가 쿡쿡 쑤셔왔다.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손바닥을 펼쳐 보이자 그제야 헙, 소리를 내며 입을 막고 죄송하다며 조용하게 속삭인다.

 “무슨 일이지.”
 “그게, 얼마 전부터 식사를 자주 거르시고, 그러다가 코피도 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단원들은 부단장님의 건강을 챙겨드리기 위해 식사 시간을 빼먹지 않으시도록 알려드리기로 정했습니다. 혹 불편하시더라도,”
 “결론만 말해라.”
 “식사 시간이십니다! 지금 내려오셔서 식사를 하셔야 저희 크루세이더가 편하게 밥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단원의 눈동자는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찌나 겁을 먹었는지 꽉 쥔 주먹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다. 베논은 책상을 짚고 일어섰다. 의자가 부드럽게 뒤로 밀리자 어버버하며 문을 활짝 열어준다.
 복도를 걸으며 뒤따라오는 단원의 이야기를 들었다. 식사 메뉴는 무엇이고, 이번에 처리하기로 한 일은 전부 잘 되어 곧 보고드릴 예정이고, 어쩌고 저쩌고 이어지는 말들이 귀를 스치고 반대쪽으로 빠져나간다. 덥다. 땀이 흐르지도 않는데 손등으로 턱 아래쪽을 쓸었다. 장갑 위로 후끈한 기운이 스쳤다. 설마 열이 나는 건가.

 “부단장님?”
 “..그래.”
 “괜찮으십니까? 얼굴이 창백하십니다.”
 “신경쓰지 마라.”
 “네..”

 머뭇거리며 눈치를 보던 단원은 최근 크루세이더의 업무와 짧은 시간 안에 효율적으로 성과를 올리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식당은 사람들로 복작거렸다. 너무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점심시간인 것 같다. 손으로 직접 써놓은 여러 개의 메뉴 중 하나를 고르고 의자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앞에 들이밀어진 뜨거운 철판. 그 위에 두툼한 고기가 먹기 좋은 정도로 익어 지글지글 끓고 있었다. 나이프와 포크까지 챙겨온 단원은 인사를 꾸벅하고 사라졌고,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제 근처에는 앉지 않았다.
 포크 끝으로 고기를 쿡 찍고, 나이프를 밀어 넣었다. 서걱거리며 썰리는 감촉을 느끼다가 지금 별로 입맛이 없음을 깨달았다. 먹기 싫다기보다는 잘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작게 썰린 것을 입에 넣으니 혓바닥 위로 약간 달달하면서 새콤한 소스의 맛이 먼저 퍼졌다. 어금니로 살짝 깨물자 안에 가득 담겨있던 육즙이 향긋하게 퍼졌다. 고기 육질도 부드러웠다.
 한 조각 먹고 나니 손이 가질 않는다. 대화를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멀리 들렸다. 어린 시절 처음 갔던 귀족 파티장에서 들었던 어른들의 수다처럼 머리보다 한참 높은 곳에서 웅성거리는 것 같다.
 포크를 내려놓고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몸을 이리저리 기울일 때마다 가슴 위에 있는 반지가 살짝씩 자리를 옮겼다.

 이대로 두고 올라갈까. 남은 일도 있고, 입에 받지 않는 음식을 억지로 먹으면 속만 더부룩해질 뿐이다. 고민을 하는 동안, 옆자리 의자가 드륵 뒤로 빠졌다.
 누군지 쳐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검은 장갑과 긴 망토, 익숙한 향기.

 “왜 안 먹고 있어?”
 “아우릭.”
 “응?”

 고기 위에서 머물던 시선을 돌렸다. 삼일 전과 다를 바 없는 미소로 저를 바라본다. 아무 일이 없었다는 태도에 특별한 말을 붙이기가 어려웠다. 이름을 부르고 말이 없자, 그는 익숙하다는 듯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철판을 본인 앞으로 끌어갔다.

 “식으면 맛없어~ 땀 흘려 정성스럽게 만들어 준 음식인데 맛있게 먹어야지.”

 부드러운 손동작으로 한 조각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내더니 아아, 소리를 내며 제 입 가까이로 들이댔다. 고개를 뒤로 빼며 인상을 쓰자 어깨까지 살살 흔들며 아아아, 한다. 꽂히는 시선이 느껴졌다.
 민망함 때문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미열로 뜨거웠던 귀에 심장이 옮겨가 펄떡이며 뛰는 느낌. 원래 장난기가 많고 자주 하는 행동이라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은 별로 없다는 걸 알면서도 주변 눈치를 보게 됐다.
 단호한 눈빛을 보아하니 그가 원하는 행동을 할 때까지 이러고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다물었던 입술을 작게 벌리자 만족스러운 미소를 하며 포크에 찍힌 고기를 입안으로 쑥 넣어준다.
 어금니 안쪽으로 굴러간 것을 씹었다. 고무호스 같았다. 특별히 골라 좋은 질의 고기였고, 육즙이 퍼지고 소스가 맛있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왜 아까보다 더 맛이 느껴지지 않을까. 억지로 먹어서 그런가. 목 아래로 잘 넘어가지 않는 것을 넘기고 나니 기운이 쭉 빠졌다. 차라리 밍밍한 죽을 시킬 걸 그랬다.
 아우릭은 제가 음식을 삼키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다음 조각을 썰었다.

 “또 밥 안 먹고 일만 했지? 자리에 앉아서 움직이지도 않고 있으면 병난다니까.”
 “네가 자리에 없으니 나라도 일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크루세이더의 일은 돌아가지 않는다. 간부 둘이서,”
 “자, 아아~”

 듣기 싫다는 뜻이다. 알았으니 잔소리하지 말고 먹으라는. 고개를 저어 보이니 웃음기가 지워지지 않은 목소리로 덧붙인다.

 “다 먹으면 뽀뽀해줄게.”

 베논은 그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궁금하지 않았다. 진심이라면 난감할 것이고, 진심이 아니라면 상처를 받을 것이다. 안 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우리는 헤어졌을 텐데? 저는 조심스럽게 청혼을 했고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렇다면 수많은 다른 연인들이 그러하듯 거절을 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었나.
 제 옆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기를 들이밀었다. 얼떨결에 입을 열어 먹으니 검은 손이 곧 엉덩이라도 두들겨 줄 기세로 제 등을 쓰다듬었다.

 “둔하기만 한 게 아니라 기억력도 안 좋네, 베논은.”
 “무슨 소리냐.”
 “어디서부터 말해야 하나, 이 둔탱이가 혼자 헤어졌다고 생각했나 보네.”

 중얼거리면서 한 조각 더 썰어내 본인의 입으로 넣은 그는 눈썹을 찡그렸다. 하얀 얼굴 위로 근심인지 화인지 모를 감정이 어스름하게 비췄다.

 “내가 왜 베논이 말한 거 거절했다고 생각해?”
 “.....”
 “정말 싫어서?”

 동의하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그러자 어휴, 하는 한숨과 함께  나이프와 포크를 탁 소리 나게 내려놓는다. 주위에서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대놓고 쳐다보지는 못하고 힐끔거리기 바쁘던 시선들. 그의 행동에 다들 식사에 집중하는 척했다.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렸다. 멍하니 보낸 시선이 본인과 닿았다고 생각한 단원 하나가 급하게 수저질을 하다가 밥풀을 상에 튀겼다.
 싫으니까 싫다고 거절을 했겠지, 다른 이유가 있을 리가 없다. 설마 이런 일까지 장난을 친다고 정말 싫은 게 아니라 정말 정말 싫어서라고 한다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지.

 “그 말을 정말로 믿으면 어떡해, 베논 둔탱이 바보야.”
 “..싫다고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잘못된 건가.”
 “아니이, 그야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건 맞는데~”

 끄응, 하며 손톱 끝으로 길쭉한 식탁을 톡톡 치던 아우릭은 한참 동안 조용했다. 저 조그마한 입술에서 무슨 소리가 나올지 불안했다.
 지금이라도 듣기 싫다고 하는 게 좋을까.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로 돌아가는 방법도 있었다. 그는 일을 하기 싫어하니까 따라오지 않을 거라는 확신까지 들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일이 싫어도 할 말이 끝나지 않았다면 따라오겠지. 조금만 곱씹어 보면 일이 싫어 말을 포기한다는 것만큼 웃긴 생각도 없는데, 열이 오른 머리는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흐음, 아니면 으음, 정도의 소리만 내다가 침묵이 이어지더니, 곧 제 턱을 부드럽게 움켜쥔다. 이쪽을 보라는 말 대신 직접 고개를 잡아 돌리는 손길을 뿌리치지 않았다. 반짝이는 금빛 눈동자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우리 어릴 때 기억나?”
 “언제를 말하는 거지?”
 “내가 아홉 살이고, 베논이 열 살 때. 삼일 전에 했던 말 똑같이 했잖아, 내가.”





*

 누구나 난감하다고 느낄 법한 상황. 어린 베논은 한숨 먼저 쉬었다. 그리고 침착하게 누워있는 친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라, 아우릭. 옷이 더러워진다.”
 “싫어! 빨리 대답해줘!”

 팔다리를 버둥거릴 때마다 바닥에서 흙먼지가 폴폴 올라왔다. 길을 걷다 말고 갑자기 누워버리는 탓에 보는 사람도 많았다. 하얀 와이셔츠와 무채색의 면바지에 지저분한 것이 덕지덕지 붙는다. 옆에 선 하인들은 떼를 쓰는 피비앙스 도련님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지도 못하고, 가만두고 보지도 못하겠다는 어정쩡한 자세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난 떼쓰는 사람은 싫다.”
 “떼 안 써!”
 “지금 하는 건 뭐지?”
 “이건.. 이건 적극적으로 내 의견을 이야기 하는 거야!”

 어련하시겠어. 그런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러자 입술을 삐죽거리며 어기적 어기적 몸을 일으킨다. 머뭇거리던 하인들은 바로 달려와 귀한 도련님의 옷을 탈탈 털어주었다.
 그는 처음으로 사귄 친구였고, 잃기 싫은 친구였다. 그래서 그런지 저도 모르게 무른 행동을 많이 했다. 싫다는 거절은 한 번 더 망설였고, 맞지 않으면 억지로 맞춰가며 좋다고 하기도 했다. 가족들은 물론이고 제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십 년 동안 곁에서 손발이 되어준 이들도 놀랄 정도로.
 어린 아우릭은 한껏 입술을 내밀고 발을 쾅쾅 굴렸다. 징징거림 사이로 정말 억울한 기색이 스몄다. 제 말이라면 뭐든 다 들어주니까 안 들어주면 형 밉다며 드러누워버리는 못된 버릇이 들어서..

 “왜 나랑 결혼 안 해줘?”

 당연하게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웃겼지만, 소리 내 웃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눈물을 터트리며 다시 드러누울지도 모를 일이었다. 진땀을 흘리며 옷을 정돈해주는 사람들을 봐서라도 그런 일은 없어야 했다.

 “말했지. 난 떼쓰는 사람은 싫다.”
 “떼쓴 거 아닌데..”

 바닥을 기는 목소리에 네 말이 맞다고 해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눈꼬리가 약간 촉촉한 걸 보니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어차피 진짜 결혼할 것도 아닌데 적당히 맞춰줄 걸 그랬나, 하는 후회도 들었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해야 받아주지.
 우리는 아직 어렸다. 사랑이니 뭐니 하는 감정은 어른들의 것이라고 믿었다. 물론 처음 사귄 친구니까 좋고, 소중하지만 그건 들어왔던 사랑의 감정과는 다르다고 믿었다.
 사랑이라면 좀 더 반짝반짝하고 예쁘게 빛나야 하는 것 아닐까. 작고 귀여운 친구는 반짝거리고 예쁘지만 그것과 다르게 조금 더 특별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그렇게 말했으니까.
 평소처럼 쉽게 넘어가 주지 않을 것임을 알아챘는지, 어린 그는 종종 다가와 제 팔을 양손으로 덥석 잡고 어깨를 양옆으로 흔들며 간절한 눈빛을 보내기 시작한다.

 “현실을 생각해라, 아우릭. 고작 열 살에 무슨 결혼을,”
 “그래도 할래! 형 나랑 해! 결혼 나랑 하자!”
 “....”
 “하자아… 응? 나랑 해, 결혼. 지금 싫으면 커서 하자아..”

 그와 결혼하기 싫은 건 아니었지만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때는 그런 감정을 사랑이라고 말하는지 몰랐다. 매일 보고 싶고, 생각나고, 두근거리는 마음이 특별한 친구라면 다 느끼는 것인줄 알았다. 만에 하나 사랑이라는 걸 알았다고 해도 시기가 너무 빨랐다. 아홉 살과 열 살인데.
 노을이 지고 있었다. 해가 저물면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시장은 복작거렸고, 기분 나쁘지 않은 소음이 거리 곳곳에 퍼졌다.
 장을 보고 손에 커다란 바구니나 봉투를 하나씩 쥔 채 지나가던 사람들은 은발머리 아이가 흑발 아이를 많이 좋아하나봐~ 하며 귀엽다고 웃었다. 그렇지만 저는 할 수만 있다면 방금 전 하인들과 같이 안절부절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벌써 촉촉해진 눈가. 긴 속눈썹이 젖어있다. 얇은 눈꺼풀이 감겼다 뜨일 때마다 서러움이 더해지는 듯했다. 입을 다문 채 대답을 하지 않자, 훌쩍거리며 코를 먹기 시작했다.
 어쩌지. 그를 만나러 오기 전 아무리 친구라 하더라도 아이가 피비앙스이고 제가 야니크인 이상 너무 무르게 굴면 안 된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이번에는 절대 넘어가지 말아야지.
 힐끔거리며 눈치만 보자 결국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은 아우릭은 양 다리를 버둥거리며 엉엉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이제 형이라고 안 할 거야! 나중에 꼭 베논이랑 결혼할 거야! 근데 그때는 베논이 고백해!”
 “일어나라니까.”
 “고백 두 번 해! 한 번은 방금 베논이 한 것처럼 내가 뻥 차줄거야.. 그리고 두 번째에 받아줄 거야!”





*

 …아 그러면.

 “기억났어?”
 “..설마 그 말을 직접 실행에 옮기겠다고 거절한 건 아니겠지.”
 “맞는데?”

 어깨를 으쓱인 아우릭은 단장 책상에 앉아 있었던 삼일 전처럼 턱을 괴고 웃었다. 얄미울 법도 한데 먼저 안심이 되었다.
 베논은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일단 헤어지지 않았고, 제 청혼을 거절한 이유가 정말 싫어서가 아니라는 부분에 기운이 쭉 빠져서 그대로 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어린 시절에 본인이 했던 말을 기억하고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는 점이 참 그 다워서 따지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그동안 못 온 거 미안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물건 찾느라 고생 좀 했으니까 봐줘.”

 비장한 눈빛으로 변한 그는 단장 망토를 걷어내고 자켓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다시 빠져나오는 검은 장갑 위에 놓인 네모난 케이스. 남색 벨벳 재질의 천이 둘러싸인 상자 끝에는 금으로 장식된 조그만 손잡이가 달려 있다.

 “이건 목걸이로 하지 말고 손에 끼기로 약속해.”
 “.....”
 “이 정도 나이가 됐으면 결혼해도 되는 거 맞지?”

 케이스의 뚜껑이 열자 그리 굵지도 얇지도 않은 은색 링, 스며드는 것처럼 쏙 박인 검은 보석, 대부분의 시간을 장갑 끼고 지낸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것 같은 두께, 크기가 다른 반지 두 개가 보였다. 끼워보지 않아도 손가락에 딱 맞는 호수로 보였다.
 그는 청혼을 하기 위해 예쁜 디자인을 고민하고, 주문을 해서 받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그 사이 제가 먼저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며 투덜거렸다.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조심해서 계획한 거 다 들킨 줄 알았다구.”
 “..내가 두 번 해야 받아준다고 하지 않았나.”
 “아아, 그러려고 했는데.”

 그때 우리 사이로 쟁반이 하나 불쑥 들어왔다. 눈치를 보던 단원은 인사를 하며 들고 있던 것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긴장을 했는지, 쟁반 위에 있는 수저가 덜그럭거리는 행동에 쟁반 가장자리로 굴러갔다. 얼굴만 한 크기의 둥근 그릇과 김이 폴폴 올라오는 흰죽. 작은 접시에 담긴 간장 장조림 하나.
 두 간부 사이에서 방황을 하던 눈동자가 정확하게 조명을 받아 빛나는 반지로 향했다. 식당의 소음 때문에 우리의 대화를 듣지 못한 유일한 사람 같았다.
 당혹감이 스치는 단원의 표정을 보는 둥 마는 둥 고맙다고 인사를 한 그는 케이스를 내려놓고 제 손을 잡았다.

 “둔하기로는 짝도 없는 베논이 두 번 청혼하는 걸 기다리다가 그전에 헤어지자고 뻥 차일 것 같아서. 실은 첫 번째 청혼도 안 할 줄 알았어. 난 꼭 베논이랑 결혼하고 싶단 말이야. 마냥 기다리다가 할아버지가 될 것 같았다구.”
 “그건..”
 “거봐. 아니라고도 못하겠지? 방금 전까지도 우리가 헤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잖아.”

 못 말린다며 고개를 양옆으로 도리도리 저은 연인은 손가락 끝을 세워 흰 장갑을 손목부터 잡아 천천히 벗겼다. 엄지로 드러나는 맨손등을 어루만지고, 고개를 숙여 가볍게 입을 맞추더니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중얼거린다.

 “사실 오늘 저녁에 말하려고 했어. 베논은 무리하면 열나잖아. 얼마 전에는 코피도 흘리고. 그래서 점심에 죽 먹이고, 약도 먹이고, 특별히 일도 내가 해주려고 했는데, 이렇게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고기를 썰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푹 자고 일어나면 멋있게 짠~ 해주려 했더니. 눈치도 없고, 아프기나 하고.”
 “..아우릭.”
 “공개적으로 말하면.. 불편하게 느낄까 봐 둘만 있을 때 하려고 했는데, 아.. 정말. 설마 했는데 정말 헤어진 줄 알고 있으면 어떡해. 이 둔탱이에 멍청이. 그때는 어리다는 핑계로 드러누운 거지.. 진지하게 말하는데 남들 시선 때문에 억지로 받아주고 그러면 안 돼. 알았지? 조용히 말할 거야. 베논만 들어.”
 “.....”
 “결혼하자, 우리.”

 어느새 식당을 가득 채우고 있던 소음은 사라졌고, 주변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크루세이더, 피스메이커 할 것 없이 시선을 우리에게로 향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장갑이 벗겨내고 케이스에서 크기가 조금 더 큰 반지를 꺼내 약지에 끼워준 그는 미소를 지었다.
 아우릭 또한 만난 지 오래되었으니까, 퇴근한 후에도 얼굴이 보고 싶으니까, 그런 유치하고 쓸데없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답지 않게 말이 길었다. 장난스러운 어투를 가장하고 있는 모습이 낯설기도 하고,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모습이라 새롭기도 하다.

 사람들의 목소리를 믿고 제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였는데, 주변이 조용해졌음을 이제서야 깨달았는지 점점 빨개지는 연인의 얼굴 아래로 그날 커플 중 한 사람이 입었던 하얀 턱시도를 그려보았다.
 전혀 어색하지 않을 그 모습을 떠올리자니, 우습게도 앞으로 같은 미래를 그리는 일에도 힘이 덜 들어갈 것이라는 확신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남들보다 긴 시간을 알아왔으니까.
 베논은 고개를 끄덕였다. 늘 그랬던 것처럼 환하게 웃어줬으면 했다. 원하는 답을 들었다고 만족스러워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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