릭베논 - 동백꽃거울

스텔라비스 동양풍 합작


스텔라비스 동양풍 합작 페이지 : https://dusdj0562.wixsite.com/orientalvis

*

 내리는 노을로 시시각각 색을 바꾸는 하늘. 수도에 사는 주민들은 저마다 더 좋은 물건을 사기 위해 바쁘게 시장 이곳저곳을 오갔다. 길거리에 쏟아져 나온 상인들은 쉽게 볼 수 없는 해산물을 싸게 팔고 있으니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손뼉을 쳤고, 저녁 반찬으로 내기 좋은 고기가 들어왔다며 소리를 질렀다. 아이들은 밝은 얼굴로 북적이는 사람들 틈을 뛰어다녔고, 어른들은 지갑과 물건을 번갈아 가리키며 흥정하기 바빴다.
 벌써 술에 취해 목젖이 드러나도록 웃는 사람, 옆 사람이 실수로 놓친 장바구니에서 넘친 물건을 같이 담아주는 사람, 바쁜 얼굴이지만 짐이 많아서 뛰지 못하고 급하게 걷는 사람, 두세 명이 모여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고 반갑게 아는 척 하는 사람. 아우릭은 그 사이를 걸어가며 양념만 남은 나무 꼬치를 흔들었다.
 시끄럽기는 해도 싫지는 않은 풍경이다. 신전 안 크루세이더가 주로 머무는 공간은 제 눈치를 보느라 말 한마디 쉽게 하지 못하는 분위기로 딱딱했고, 피비앙스 저택은 살아있는 생물이라곤 하나도 없는 것처럼 조용해서 숨이 턱 막혔다.
 이 시간은 어딜 가든 활기가 넘쳤다. 아침부터 내리 이어지던 바쁜 일이 끝나고 나온 사람들의 얼굴에는 옅은 피로가 있을지 언정 웃음이 떠나지는 않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시장을 찾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면 음, 배를 채울 수 있어서?

 길 한구석에 세워진 쓰레기통에 꼬치를 넣었다. 이걸로 저녁도 다 먹었으니 이제 완전히 해가 지기 전까지 산책이나 해볼까.
 그렇지만 여태껏 걸어 다니느라 다리가 좀 아픈데. 도서관에 가서 책이라도 읽을까? 퍼디한테 가서 놀아달라고 해봤자 무시당하겠지? 지금부터 잠을 자기엔 시간이 애매하다.

 “자아.. 이걸, 봐주십시오 나으리..”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쳐다보았다. 언제 왔는지 허리가 90도로 굽은 노인이 거대한 수레의 손잡이를 꽉 쥐고 서 있었다.
 나으리라니.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사람들은 각자의 일로 바빠 보였다.

 “저기, 나 말하는 거야?”
 “예. 나으리께서 봐주셨으면 합니다..”

 덥수룩한 머리, 축 처져 억울해 보이는 눈매, 주름이 자글거리는 입가, 거칠게 일어난 피부. 늘어지고 헤진 얇은 갈색 티셔츠에 때가 잔뜩 묻어 통이 넓은 바지. 처음 보는 상인이다. 수도 바깥에서 온 사람인가?
 노인은 말끝을 흐리며 빛이 없는 눈동자를 굴려 수레 위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온갖 물건이 저무는 해를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이것은 저 멀리 바다 건너에서 온 물건들입니다. 저희끼리는 ‘동양에서 온 것들’ 이라고 부르지요.”
 “흐응..”
 “귀한 것들입니다.”

 새빨간 천이 얇고 가벼워 보이는 나무에 붙어있는 우산과 결을 따라 오묘한 무지갯빛을 내는 검은색 상자, 두툼한 실을 이용해 꽃 모양으로 짜여진 브로치, 굵은 나뭇가지와 분홍색을 점으로 찍어 꽃을 표현한 손수건. 확실히 이스델라에서는 흔하게 볼 수 없는 디자인이었다.
 굳이 콕 집어 날 부른 건 뭐라도 하나 사 달라는 뜻이겠지. 물건을 집어 들었다 내려놓을 때마다 미묘하게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하는 표정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흰색 옷을 입은 사람을 잡으면 한몫 챙길 수 있다는 소문이 거리에 은근하게 돌던데 그걸 들은 모양이었다.
 아우릭은 목을 쭉 빼고 아무거나 주워들었다.  손안에 쏙 들어오는 원형의 물건. 한가운데 큼직하게 그려진 붉은 꽃과 몇 가닥 뻗어나간 푸른 나뭇잎. 직접 수를 놓은 것인지 손가락에 스치는 감촉이 오돌토돌했다.

 “그건 동백이라는 꽃이 새겨진 거울입니다, 나으리. 버튼을 눌러 여시면..”

 노인의 짧고 새까만 손톱이 옆에 달린 작은 버튼을 꾹 눌렀다. 그러자 원 가운데가 갈라지며 입을 벌렸고, 두 개의 거울이 모습을 드러냈다. 위에 달린 거울보다 아래에 달린 거울이 사물을 더 확대를 시킨 것처럼 보인다.

 “와, 신기하네.”
 “그렇죠? 아주 좋은 물건입니다.”
 “좋아. 이거 살게. 얼마야?”

 주머니를 뒤적여 지갑을 꺼냈다. 아주 싸지도, 터무니없이 비싸지도 않은 가격대로 지폐를 꺼내다 보니 문득 일찍 잠들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높고 새파란 하늘. 간혹 들리는 새의 울음소리. 연둣빛 풀을 한 방향으로 쓸며 지나가는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여기는 어디일까.
 오르고 있는 언덕은 얕았다. 오랜 시간 걸어도 숨이 차지 않을 것 같은 경사. 나는 지금 산책을 하는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마음 한구석이 급했고, 자꾸만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무언가를 찾고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 더 맞겠다.
 저 멀리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 풍성한 나뭇잎과 분홍색 꽃이 만들어 낸 그늘 아래 앉아있는 누군가. 굵은 나무줄기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엉덩이를 붙인 채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다. 두 다리는 급하게 뛰어갔다. 찾고 있는 게 저 사람이었는지, 나무에 가까워질수록 묘한 안도감까지 들었다.
 아무리 따뜻한 날씨라도 저렇게 자면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이 들었고, 얼른 걸치고 있던 망토를 벗었다. 그러고 보니 크루세이더 복장을 하고 있네. 여기는.. 신전 근처인가? 신전 근처에 이런 곳이 있었나? 아무리 떠올려보려고 노력해도 수도 내에 이런 동산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잠시 해를 가렸던 구름이 흘러갔다. 어렴풋하게 형태만 보였던 그림자에 해가 들자 잠든 이의 얼굴이 보였다.

 “..베논?”

 눈썹 아래까지 길게 내려온 앞머리가 살살 흔들렸다. 곱게 뻗은 속눈썹과 날 선 콧날, 꾹 다문 입술. 바람이 불 때마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잎이 사르륵 날려 베논의 하얀 제복과 검은 머리 위로 떨어졌다.
 망설이다가 그의 곁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풀이 자라는 흙이 축축하게 묻을 줄 알았는데, 푹신한 매트리스 위에 앉은 것처럼 포근하다.
 깊게 잠든 탓인지, 그는 미동조차 없었다. 대신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부단장으로서 작성한 서류 속 본인의 성격을 대변하는 글씨체처럼 흐트러짐이 없다.
 이렇게 자는 얼굴을 본 게 언제였더라. 여전히 좋아 보이는 피부를 쓸어보려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제 더 이상 그럴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나는 영원한 사랑을 믿지 않았다. 그런 건 피비앙스 저택의 서재 구석에 처박힌 로맨스 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허구의 이야기이지, 실제 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감정에는 끝이 있고, 사랑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 또한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했고, 사귀었고, 헤어졌다.

 덮어주려고 손에 들고 있던 망토를 다시 어깨에 걸쳤다. 풀을 먹인 것처럼 빳빳한 깃이 볼에 닿는다. 주렁주렁 달린 단장 배지가 서로 부딪히며 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상대가 잠에서 깨기 전에 자리를 피하는 게 좋다, 알면서도 몸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시선은 못이 박힌 것처럼 그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희귀한 장면이라 그런가.
 베논은 바른 생활을 하는 사람이었다. 해가 뜨면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훈련을 하고, 샤워를 한 다음 아침 식사를 마치고 마차를 타서 출근한다, 일하다가 퇴근해서 잠에 든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에도 반복되는 패턴. 아주 일찍 일어나거나 그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추지 않는 이상은 자는 얼굴을 보는 일이란 극히 드물었다.

 “......”

 잘도 잔다. 그렇게 보고 싶었을 때는 절대 보지 못했던 모습인데.
 나는 이 남자를 언제부터 좋아했더라. 아마 아주 어린 시절부터 였을 것이다. 아직 파티가 신기하던 시절. 평소와는 다른 일을 한다는 점이 즐거웠던 나이.
 제 얼굴에 묻은 빵가루를 털어준 집사는 오른쪽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한 사람을 소개해주었다. 야니크에서 나와 나이가 비슷한 아이고, 자주 볼 사이이니 인사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그 순간 파티장에 흐르던 음악이 바뀌었다. 겉치레를 좋아하는 어른들이 서로의 배우자나 약혼자를 끌어안고 춤을 추기 좋으라며 깔아주는 곡이었다. 지루하고 느린 템포.
 베논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았다. 생각보다 훨씬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사랑을 하는 것인지 의심이 되신다면 하루에 그 사람을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 시간을 세어보세요.’

 계단 난간을 마른 걸레로 닦던 하인은 그렇게 말했다. 그들은 뒤돌아서서 발꿈치를 한껏 들어봐야 무릎까지 밖에 오지 않는 아이가 그런 걸 물어보는 게 웃기다고 수군거렸지만 나는 진지했다. 왜냐면 이상하게 자꾸만 그 아이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만나고 싶었다. 야니크 가문의 그 아이가. 특별한 것이 아니더라도 말해주고 싶었고, 말해주길 바랐다. 귀찮다면 그냥 얼굴만 보고 있어도 좋았다.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자주 하는 일은 무엇이고, 나중에 크면 무엇이 되고 싶은지, 가장 동경하는 건 뭔지, 어떤 친구를 사귀었으면 하는지. 새까만 눈이 참 예쁘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언제 또 만날 수 있을까.
 방으로 돌아가면서 베논을 생각하는 시간을 세었다. 작은 손가락이 접히고 펴지기를 반복했지만 몇 시간을 생각하는 게 많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마 그 순간부터, 그러니까 파티장에서 처음으로 저 눈꺼풀 아래 가려진 새까만 시선을 마주했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 것은.
 그 눈을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베논. 자?”

 낮게 불렀지만 돌아오는 건 여전히 고른 숨소리뿐이었다.





 눈을 떴다. 살짝 열린 창문에 흔들리는 커튼을 따라 들어왔다 가려지기를 반복하는 햇빛. 창가에 앉은 새 한 마리가 째액거리며 날카롭게 울더니 푸드득 날갯짓을 한다.
 몸을 일으키자 어깨에서 팔을 타고 부드럽게 떨어지는 이불. 그 작은 움직임에 바깥에서는 제 이름을 부르고 안녕히 주무셨냐는 인사를 건넨다.
 대답하지 않은 채 늘어뜨렸던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두었던 옷은 사라져 있었고, 호기심에 사왔던 작은 거울은 침대 맞은편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

 아우릭은 잘 익은 채소가 쿡쿡 찍힌 포크를 던졌다. 공중을 날은 식기가 수십 명이 나란히 누워도 될 만큼 넓은 식탁 한가운데로 텅텅 굴러간다. 채소에 묻어있는 소스가 흰 테이블보 위로 여러 선을 그었지만 돌아오는 타박은 없었다.
 열 개 정도 놓인 의자는 제가 앉은 자리 외에는 전부 비어있었다. 벽을 따라 서 있는 두세 명의 하인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지금 당장 식탁 위로 올라가 춤을 춘다고 해도 그 행동을 예의 없다고 나무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주전자를 들고 있던 하인은 조용히 다가와 빈 잔에 물을 따라주었다. 쪼르르륵 소리가 길고 오래 울렸다.
 기분 나쁘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상했다.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마음. 짝사랑을 할 때도, 고백을 해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고민할 때도, 사귈 때도, 심지어 일 때문에 오래 만나지 못했을 때도 베논이 나오는 꿈은 꾼 적이 없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그것보다도 신경 쓰이는 건 따로 있었다. 침실을 나서기 전 주머니에 손을 넣어 둥근 거울을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어쩐지 어제보다 꽃의 붉은색이 더 진해진 것 같다.

 “이거 말이야.”
 “예.”
 “원래 어디다 뒀어?”
 “어제 입고 계신 제복의 주머니에 있던 물건들은 전부 아우릭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자주 머무시는 서재의 바구니 속에 넣어두었습니다.”
 “그래?”

 하인은 대답 대신 허리를 숙이고 바닥을 향해 눈을 떨군다. 그리고 3초 뒤에 예, 하는 대답이 들려왔다. 감정이 들어가지 않은, 높낮이가 변하지 않는 목소리.
 있을 리가 없는 자리에서 자는 제 모습을 지켜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놓여져 있던 거울. 하인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다. 그럴 이유도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들이 저지른 작은 실수 하나로 사람을 몰아붙이거나 타박한 적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피비앙스 저택에서 일하는 하인들은 주어진 일을 정확하게 처리했다. 마치 세세한 동작까지 모두 입력된 기계처럼.
 손바닥으로 거울을 집어 들며 의자를 뒤로 끌었다. 넓게 깔린 카펫 덕분에 귀를 긁어내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후식은,”
 “됐으니까 옷이나 준비해줄래?”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딪히기 다섯 발자국 전에 활짝 열리는 문. 손잡이를 잡아 돌린 하인 두 명은 몸을 빳빳하게 세운 채로 고개만 살짝 숙였다.





 신은 신발을 벅벅 끌며 계단으로 향했다. 무언가 자꾸만 찜찜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상인, 그 노인이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나를 고른 이유, 두지 않은 자리에 놓여져 있던 물건, 동양의 거울. 어쩐지 좀 더 붉어진 것 같은 이 꽃도 마음에 걸린다.

 왜 베논이 나오는 꿈을 꾼 걸까.
 나는 그를 찾고 있었다. 거기 있다는 걸 아니까 당장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것처럼 급하게 굴었고, 자는 얼굴을 마주하며 안도를 했다. 볼 정도는 콕 찌르고 장난이었다며 능청을 떨 수 있는데, 그랬다가는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손을 거두고 입술을 깨물었다. 깨어날까봐 걱정을 하면서도 옆에 붙어 있었고, 아주 오래전 처음으로 그를 좋아했던 시절을 떠올렸다.
 혹시 무의식적으로 헤어진 전 연인을 떠올리고 있었나? 아니면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베논의 이름이라도 들었나? 아닌데, 그런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흐음, 소리를 내며 얼굴을 만지려고 손바닥을 폈다. 동시에 들고 있던 거울이 굴러떨어졌다. 탕탕거리며 복도 끝자락까지 굴러간 것이 벽을 쾅 치고 제자리에서 데굴데굴 구르다가 멈췄다. 근처에 서 있던 하인은 놀란 기색도 없이 허리를 굽혀 물건을 주었고, 정확하고 흐트러짐 없는 걸음으로 제게 향했다.
 어제 산 건데 깨졌겠네. 인상을 쓰며 하인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기분이 나쁜 이유는 한 마디로 정의되지 않는 머릿속 때문이지, 그가 나와서 싫은 것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신선하기도 했고, 약간 설레기도 했다.
 아주 오랜만에 본 얼굴이었다. 헤어진 이후부터는 일을 하지 않고 도망 다녀도 저를 찾지 않는 부단장에게 심통을 부리려 신전이 있는 방향으로는 눈길도 돌리지 않은 것이 벌써 일주일째. 그럼 우리가 헤어진 게 벌써 한 달이 넘었다는 말인가.

 “...허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보고 싶었나, 나도 모르게 보고 싶어 했나. 꿈에서는 그랬던 것 같다. 그럼 현실에서는?
 어느새 다가온 하인은 거울을 내밀었다. 아우릭은 잠시 붉은 꽃을 내려다보았다. 동백이라고 했던가. 촘촘히 엮인 실을 손끝으로 살짝 매만졌다.

 “깨지지는 않은 듯합니다.”
 “그렇게 굴러갔는데, 안 깨졌다고?”
 “예. 깨지는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버튼을 꾹 눌렀다. 원 가운데가 넓게 벌어지고 모습을 다르게 비추는 거울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안에 담긴 제 얼굴에는 흠집 하나도 남지 않았다.
 정말 깨지지 않았잖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앞뒤를 차례대로 살폈다. 멀쩡했다. 쉼 없이 쓸고 닦는 카펫 위를 굴러서 그런지 먼지 하나도 묻지 않았다. 귀하고 좋은 것이라고 말하던 노인의 걸걸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문득 다시 베논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 검은 눈동자가 보고 싶다.

 “가디언 제복은 됐으니까 잠옷으로 준비해줘. 그리고 연락 한 통만 해줄래?”





 몇 분 뒤, 침실의 창문은 암막 커튼으로 전부 막혀서, 불을 켜지 않으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워졌다. 편안한 잠옷과 방안 가득 부드럽게 퍼지는 라벤더 향. 말끔하게 정돈된 이불을 들추고, 엉덩이를 밀어 넣었다. 푹신한 감촉에 웃으며 손짓을 하자 다가온 하인이 미지근하게 데운 물을 곁에 놔준다.

 “수면제는 한동안 드시지 않더니 어쩐 일이십니까.”
 “어어, 그냥.”

 건성으로 대답하자 남자는 각진 가방을 꺼내고 그 안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냈다. 유리 안에서 새끼손톱의 절반만 한 하얀 알갱이들이 달각달각 굴러다닌다.
 대대로 피비앙스 가문의 사람들을 돌보는 의사 가문에서 손에 꼽히는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에 이전 피비앙스 가주에게 똑 부러지고 머리가 좋아서 후손들을 잘 돌볼 인재라고 칭찬을 받았다는 소문이 있는 사람.
 이름에 ‘피비앙스’가 들어가는 이들은 너도 나도 그를 찾았다. 실제로 진료를 잘 하기도 하지만, 아마 이전 가주의 칭찬을 받았다는 소문이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하긴, 온 세상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꽉 막히고 깐깐하며 답답한 이전 가주라는 양반 입에서 다른 가문의 아이를 칭찬이 나왔다는 건 그 아이가 걸어갈 길에는 돈이 깔려있다는 뜻과 마찬가지였으니까.
 얼마 전부터 그는 진료를 봐주는 사람의 수를 줄였는데, 그 안에 들어가는 것은 현 가주와 직속 가족들뿐이었다. 제가 들어갔다는 점에서 많은 친척들이, 특히 제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몇 명이 다 들으라는 듯 수군거렸지만, 조용히 하라는 현 가주의 말 한 마디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드시는 법은 아시겠지만,”
 “하루에 한 알. 그 이상으로 먹으면 몸에 큰 이상이 생길 수도 있고, 확률은 낮지만 별의 힘에 영향을 줄 수도 있으니 한 알을 먹고도 잠이 오지 않으면 연락을 해라~ 이거지? 알고 있어.”
 “여기 있습니다. 정량을 맞춰서 드신다면 다음 주까지 드실 수 있습니다.”
 “에에, 고작 그 정도만 주는 거야?”

 투덜거리며 병뚜껑을 열고 손바닥 위로 털었다. 후드둑 쏟아지는 약을 하나만 남긴 채 병 안으로 다시 넣었다. 의사는 미지근한 물과 함께 수면제를 삼키는 제 모습을 보다가 가방을 챙기고, 걸치고 있는 정장 자켓이 흐트러진 곳은 없는지 살폈다.
 베개에 머리를 기대고, 이불을 턱까지 끌어당겼다. 방 이곳저곳에 서 있던 하인들은 하나씩 인사를 하며 나갔고, 의사 또한 소리를 죽여 복도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 자연스럽게 꺼지는 조명. 저게 무슨 시스템이라고 했더라, 여러 번 설명을 들었는데 자세히 귀에 담지 않아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눈을 감았다. 늘 그런 식으로 상대의 말에 신경을 쏟지 않는 점이 지친다고 헤어짐을 요구하던 전 연인을 꿈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빌며.





*

 놀랍게도 베논은 매번 꿈에 나왔다. 거의 평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언덕을 오르면 거대한 나무가 보이고, 분홍 꽃잎이 날리는 그늘 아래는 잠든 그가 있다.
 늘 같은 자세로 깨어나지 않는 이를 곁에서 지켜보았다.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고요하다. 이따금 돌을 던져 파문을 일게 만들고 싶은 충동이 들지만, 곧 사라져버리고 만다. 자신의 마음도, 그의 마음도, 이미 사귀었다 헤어진 사이라는 우리의 현실도 이 시간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원래의 제 성격으로는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질려버릴 상황이다. 바람이 풀을 스치며 사각이는 소리뿐인 곳에서 못이 박힌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사람의 얼굴을 옆에 앉아서 쳐다보기만 한다는 건 성질에 맞지 않았다.
 질리기를 바랐다. 재미없고 지겹다고 느꼈으면 좋겠다, 그래서 더 이상 잠을 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우릭은 멍하니 초점이 흐려진 눈동자를 굴렸다. 수면제의 영향이 남아있는 몸이 저릿거렸고,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없었다.
 며칠이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해는 떠올라도 제 방에는 빛을 뿌리지 못했다. 창을 가린 커튼이 절대 무너지지 않는 두꺼운 벽 같다. 식사를 오래 거르시면 큰일이 난다고, 답지 않게 발을 동동 굴리는 하인들을 위해 먹은 죽도 몇 그릇인지 모르겠다. 그저 누워서 눈을 감았고 언덕이 보이면 무작정 나무 곁으로 달렸다. 잠에서 깨면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로 들어오는 천장을 보다가 가끔 울었다.
 서럽다. 이번에는 꼭 깨워야지, 말을 걸어야지, 검은 눈동자를 마주해야지, 다짐하면서도 막상 그의 앞에 서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무릎을 꿇고 가만히 지켜보는 일뿐이었다. 몇 번이나 뻗었던 손을 움츠리고, 입술을 깨물고, 다시 나를 보는 눈에 이전과 같은 감정이 담기지 않을 거라고 두려워했다.
 왜냐면 사랑은 끝이 있기 때문이다. 제가 그러하듯 그 또한 끝을 봤을 것이다.
 알고 있다. 우리는 끝에 닿은 사이라는 것을. 

 주먹을 꾹 쥐었다. 그 사이 제법 자란 손톱이 손바닥을 간지럽게 긁었다. 아무리 힘을 주어도 아프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일주일이 넘은 것은 분명했다. 의사가 건네준 약통이 비어버린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예 밖으로 나가지 않은 날짜가 7일은 넘었다는 것인데 그는 소식이 없었다.

 가디언이 피비앙스 저택으로 찾아온 사실은 죽을 먹여준 하인의 입으로 전해 들었다.
 맨 처음 온 것은 로건이었다. 시장을 돌아다니다가 절 닮은 사람을 한동안 보지 못했다는 소식에 찾아왔다고 했다.
 계속 잠만 자고 있다는 소식에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뜨고 놀라던 그는 금방 돌아갔고, 그 후 오든과 제이드를 포함한 몇몇 크루세이더 단원들과 피스메이커의 대장인 리온, 대장이 바쁠 때 대신 찾아온 부대장 나인, 대별지기인 퍼디까지 들렀다고 했다.
 밍밍하게 입안에서 부슬거리는 죽을 삼키고, 바닥에 수저를 던진 뒤 다시 누웠다. 절반도 넘게 남은 그릇을 보던 하인은 끈적하게 떨어진 음식을 닦고, 쟁반을 들어 옮겼다.
 베논은 오지 않았다. 그는 부단장이니까 단장인 제가 없으니 바빠서 못 온 걸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숨구멍 하나 뚫리지 않은 통 안에 갇힌 것처럼 갑갑해졌다. 잠깐 얼굴이라도 비출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냥, 지나가다가 한 번쯤은 궁금해서 들릴 수도 있을 텐데.
 머리 끝까지 이불을 덮어쓰고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걱정이 될 만도 한데. 다른 걸 떠나서, 그렇게 좋아하는 본인의 형 얼굴을 생각해서라도 피비앙스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 좋다는 걸 알면서, 한 번도 찾아오지 않다니.

 울컥 올라오는 신물. 인상을 쓰며 숨을 참았다. 명치까지 넘실거리던 것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며 속을 긁어낸다. 마지막으로 단원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벌써 세 번 정도 잠에 들었다 깨어났다. 아마 한 번만 더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식사를 들고 하인이 찾아올 것이다.
 그때는 물어봐야지, 베논은 오지 않았냐고.





*

 언덕을 오른다. 푹신하게 밟히는 흙과 옅게 올라오는 풀냄새가 익숙하다. 여전히 두근거리는 가슴을 콩콩 치다가 다리에 힘을 주고 달렸다. 한 걸음씩 나아갈 때마다 어깨에 걸친 망토가 쉼 없이 풀썩거린다.
 멀리서 보이는 커다란 나무. 언제나 분홍빛을 잃지 않는 나무가 흔들리며 꽃잎을 떨군다. 여전히 맑은 하늘과 초반에만 간혹 울고 사라지는 새소리. 둥글게 퍼진 그늘 아래,

 “...어?”

 아무도 없었다. 이 정도 다가오면 늘 앉아서 잠이 들어 있는 베논이 있었는데, 어째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제야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수십 번 꿨던 꿈이지만 절대 뒤를 향해 돌아 서지 않았기에 볼 수 없었던 장면들.
 아주 멀리까지 이어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언덕은 제가 보고 있는 앞만 그러했다. 뒤로 갈수록 물감이 물에 번지는 것처럼 엉망으로 퍼지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런 색도 없는 하얀 공간이 등 뒤로 펼쳐져 있다.
 갈 길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그 자리에 멈춰서 넓은 풀밭을 보았다. 늘 평화롭고 아름답게 느껴졌던 곳이 쓸쓸하고 텅 비어 보인다. 날리는 꽃잎은 가볍게 높은 하늘 위로 올라갔지만, 하얀 공간으로는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바람이 부는 방향도 늘 두꺼운 나무를 기준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제 앞에서만 불었다.

 “눈치가 빠르다고 들었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군.”

 베논의 목소리. 새하얀 공간을 향해 몸을 돌렸다. 공중에 둥둥 떠있는 것처럼 서 있는 그는 뚜걱뚜걱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처음 보는 옷을 입은 채로.

 “...일어났으면 그 자리에서 기다릴 것이지, 왜 움직여?”
 “내가 왜 너를 기다려야 하지? 날 갈구하는 건 너니까 네가 나를 찾아야 하는 것 아닌가, 아우릭.”
 “뭐야, 재수 없어 진짜..”

 푸른색의 얇은 겉옷은 소매가 없었다. 대신 안에 걸친 것 같은 밝은 회색빛의 옷이 팔을 덮고 있었다. 가슴 바로 아래 묶인 어두운 회색빛의 끈은 길게 늘어져 무릎까지 내려와 있었고, 푸른 겉옷은 그보다 아래로 내려가 다리를 거의 다 덮고 있었다.
 발목에서 한 뼘 정도 위에서 끝나는 겉옷 밑에는 하얀색 바지가 보였는데, 원래는 펑퍼짐한 넓이인 것을 다리에 딱 맞게 둘둘 말아둔 흔적이 보였다. 앞코는 높게 솟았으면서 바닥은 납작한 신발도 특이했다. 거기다 머리에는 모자까지 쓰고 있다. 특이한 모양의 검은색 모자에 달린 끈은 귀 옆을 타고 길게 내려와 턱 아래 매듭이 묶여 있었다. 대체 저게 무슨 차림인지.

 “그렇게 대놓고 상대방을 훑어보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사실을 배우지 못했나?”
 “그 웃긴 차림새는 뭐야? 끈이랑 모자는 또 뭔데?”
 “...이건 한복이라는 옷이다. 끈이랑 모자가 아니라 술띠와 갓이고.”

 그게 뭐야, 입술을 삐죽대며 팔짱을 척 꼈다. 자고 있을 때는 귀여웠는데, 일어나서 말하고 있으니까 은근히 얄미워 보인다.
 고개를 휙 돌리는 순간 바람이 세게 불었다. 자꾸만 눈을 찌르는 앞머리를 걷어올리자 시원한 공기가 이마를 때린다. 현실 같은 공기. 손을 뻗자 흩날리는 꽃잎이 손등을 간지르고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사륵 빠져나간다. 현실 같은 간질거림.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베논은 내밀고 있는 제 손에 본인의 손가락을 얽었다. 늘 끼던 장갑이 없이, 오래전에 마주 잡았던 맨 손바닥의 온기가 느껴진다. 빼내야 하는 건가, 고민을 하는 동안 그는 입을 열었다.

 “이 형태를 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길래..”
 “무슨 소리야?”
 “난 인간의 미련과 후회를 먹으며 사는 요괴다. 주로 내가 담긴 물건을 가진 상대의 꿈에 나타나 미련과 후회를 남긴 장면을 반복하게 만들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외관은 네가 가장 미련을 느끼고 있는 상대의 모습이다. 이름이 베논인가본데, 당사자가 아니라서 아쉽겠군.”

 저게 무슨 말이지. 알아듣지 못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가까이 다가서니 약간 올려다봐야 할 정도의 눈높이. 이 모습, 그리고 이 온기는 지나치게 현실과 같다. 검은 눈동자에 담긴 감정이 없다는 점까지도.

 “이 형태를 한 인간이 자는 모습을 자주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하루에도 수십 번은 꿈에 찾아올 정도로 후회를 하나?”
 “후회 안 해.”
 “속내를 숨기는 짓도 잘 못하고.”

 그는, 그러니까 본인 입으로 베논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거라고 말하는 요괴는 쯧쯧 혀를 찼다.

 “내가 담긴 물건을 손에 쥐자마자 잠을 자고 꿈을 꾸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걸 다 봤으니 아닌 척해도 소용없다.”
 “아니라니까!”
 “고집이 센 건 맞군.”

 이를 갈며 눈을 세모꼴로 치켜떴다. 가소롭다는 듯한 시선이 제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어내렸다. 잡힌 손을 털자 미련 없이 떨어지는 손가락.
 베논은 함부로 남을 비웃지 않는다. 아무리 화가 나고 말다툼을 하더라도 절대로 ‘나에게 이기지도 못할 것이 우습다’라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 적은 없었다. 그의 말대로 당사자가 아닌 듯했다. 그럼 뭐야, 나에게 미련이 남아있다는 거야?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뱉었다. 요괴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자는 모습을 두고 깨울까 말까 하며 매번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던데, 그것도 나에게 큰 도움이 됐다. 덕분에 이 나라까지 오면서 거의 닳아버렸던 힘도 충분히 채워두었지.”
 “.....”
 “현실에서는 꽤나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것 같던데, 그런 성질치고는 얌전해서 좋았다. 그런 류의 인간들은 대부분 꿈속에서도 행패를 부리기 마련이라 곤란할 때가 많거든.”

 그런데 어쩜 이렇게 똑같을까. 조곤조곤한 말투, 항상 유지하는 단어 사이의 간격, 낮으면서도 귀에 쏙쏙 들어오는 목소리, 없는 망토를 넘기기 위해 살짝 움직이는 팔까지. 입은 옷까지 똑같았다면 저를 보는 눈빛이 지금보다 서늘했을지라도 베논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김이 빠졌다. 밥까지 굶어가며 잠을 잤는데 정작 마주 본 건 겉모습만 똑같은 요괴라니. 여태껏 흔들리는 앞머리의 개수까지 다 세어볼 정도로 가까이서 보고 또 봤는데, 그럴 이유가 없었던 거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적당한 핑계 만들어서 신전에 갔지. 단장이 없는데 찾지도 않는다고 투덜거렸으면 잔소리는 듣더라도 진짜 베논은 봤을 거 아니야.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이 거슬렸는지, 요괴는 소리 없이 입술을 뻐금거리다가 고개를 왼쪽으로 약간 기울이며 물었다.

 “뭐가 불만이지. 말로 해라.”
 “왜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그 모습이야? 베논이 아니라 요괴라며.”
 “내가 이 모습으로 있기를 네 마음이 빌고 있기 때문이다.”
 “아닌데?”

 평소 인상을 더 단단하게 보이도록 하는 도톰한 눈썹이 치켜 올라가고, 선명한 눈매가 가늘게 뜨였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데 딱히 입 밖으로 내고 싶지는 않을 때 보이는 얼굴이다.
 우리가, 그러니까 베논과 내가 친구이던 시절에는 왜애~ 하고 말꼬리를 늘리며 능청스럽게 말하기를 유도했고, 사랑을 하던 시절에는 가볍게 입을 맞추고 매달리며 귀엽다고 속삭여 주었다.

 “그냥 다른 모습이 되는 건 안돼?”
 “인간은 약하다. 특히 바라는 것 앞에서는 더욱 더. 그 사실을 아는데 뭐하러 다른 모습으로 있어야 하지?”
 “..베논 그 둔탱이보다 더 재수 없어.”
 “그런가.”

 우물거리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아, 진짜. 대놓고 미간을 구기자 으쓱이는 어깨.
 곧 다정하게 ‘아우릭’하고 부르며 손을 내밀 것 같다. 그러면 제 앞에 서 있는 저것이 요괴임을 알면서도 이기지 못하고, 꿈을 꾸기 위한 노력을 했던 것이 잘한 일이라 생각하게 되겠지.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사랑에 빠져서 엄청나게 티를 냈는데도, 대놓고 널 좋아한다고 고백하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던 둔탱이의 모습으로 영악하게 구는 걸 보자니 짜증이 난다.

 요괴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딱딱 소리와 함께 얕은 언덕과 커다란 나무가 사라지고, 순식간에 하얀 배경으로 물들어버렸다.

 “어쨌든, 도움을 받았으니 갚는 것이 맞겠지. 넘치는 미련과 후회로 힘을 줬으니, 나도 네가 원하는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 원하는 것이 있나?”
 “웃기네, 정말. 뭐가 그렇게 당당해? 내가 터무니없는 부탁을 하면 어쩌려고?”
 “거절을 하면 된다.”
 “아, 짜증나!”

 발을 쾅쾅 굴렸다. 바닥에서는 먼지 하나 올라오지 않았다. 바닥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마치 허공에 떠 있는 느낌.
 곧 눈을 굴리며 생각했다.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니 하나쯤은 빌어야지.
 혹시 시간을 돌릴 수도 있나. 두 달 정도 전으로 돌아가서, 사랑이 끝나기 전으로 돌아가서, 미련이 남지 않도록 더 표현할 수 있을까. 후회가 남지 않도록 더 잘할 수 있을까. 아니면.. 아주 먼 미래로 가버릴까. 그를 좋아하지 않을 정도로 멀리.

 모든 감정은 끝이 있는 법이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아직 끝이 나지 않은 모양이다. 나의 사랑은.
 그럼 베논의 사랑은?

 “...원하는 거,”
 “그래.”
 “베논한테 가줘. 그래서 나에게 미련이 남았다고 착각하게 해줘. 그 둔탱이가 의외로 날카로운 면이 있어서 빨리 알아챌지도 몰라. 그러니까 조심해서 행동해. 우리가 헤어졌다는 사실을 아쉽게 느끼게 해야 돼.”

 요괴는 대답이 없었다. 베논의 눈으로 한참 동안 제 모습을 살피다가 콧김을 픽 뿜었다. 비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고작 그 정도의 소원이면 들어줄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눈앞이 점점 흐려진다. 어렴풋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가 보인다. 눈을 비볐지만 귀에서는 식사를 하셔야 한다는 하인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꿈이, 깊었던 잠이 깨고 있었다.





 *

 인간은 멍청하다. 한 번 손에 쥔 것은 절대 떠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집착한다. 그러다 사라져 버리면 미련을 가지고 후회를 하며 눈물을 흘린다. 나는 그들이 떨어뜨리는 어두운 감정을 먹고 살았다.
 이번에 잡은 인간은 아주 특별했다. 이름이 아우릭이라고 했던가? 뭔 피, 앙스? 특이한 이름이다. 여태껏 살았던 곳에서는 그런 식의 이름을 본 적이 없다. 집도 크고, 입은 옷차림도 좋고, 잠을 자는 장소도 고급스럽게 보였는데. 이미 손에 쥔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떠난 것을 그리워하다니. 지금까지 만난 인간들 중에 어리석음으로 순위를 매긴다면 아마 열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원래의 정체를 밝힐 필요도 없이 내 멋대로 꿈에서 나오지 않으면 될 일이지만, 직접 모습을 드러내서 소원을 들어준다고 말할 기분이 들었을 정도이니 다섯 손가락이라고 해야 맞을까?

 요괴는 거울을 내려다보았다. 둥글게 하나만 피어있던 동백이 곧 피를 뿜어낼 것처럼 붉어진 채 세 송이로 변해있다. 이걸 세 개까지 피워낸 인간은 쉽게 보기 힘들다. 더 붙어서 미련과 후회를 빨아먹고 싶지만.
 입맛을 다셨다. 외관을 빌려준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아우릭에게로 가라. 그리고 나에게 미련이 남은 것처럼 느끼게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눈치가 빠르고, 자신을 잘 숨기고, 또 고집이 센 사람이니까 금방 눈치챌지도 모르지만, 최대한..’

 아우릭이라는 인간이 대충 다섯 번째라면 베논이라는 인간은 세 번째 정도 될 것이다.
 일주일 만에 다섯 송이를 피운 인간은 오랜만에 봤다. 아마 천 년 만이던가. 천백 년인가? 어찌나 절절하던지 미련을 남게 한 당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힐 땐 처음으로 미안하다는 마음까지 느껴봤다. 안 그렇게 생겨서는 지나간 사랑에 집착을 하고 있다니.
 그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데 쓴 다섯 송이의 동백이 아깝지 않게, 다른 인간이 세 송이를 피워주었다. 역시 바다 건너서 듣도 보도 못한 나라까지 온 보람이 있다.

 “이 나라에 사는 귀족이라는 인간들은 다 그런가 보군. 사랑 같은 것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옥색 도포의 끝자락이 펄럭였다. 요괴는 잠시 아우릭의 얼굴로 변했다가 이내 선명하던 이목구비를 지워버렸다. 마치 끈끈한 재질의 흰색 천을 두른 것 같은 모습. 손에 쥔 거울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다가 이내 앞을 향해 머리를 든다.
 다시 베논이라는 인간을 찾아갈 필요는 없었다. 아우릭이라는 인간이 계속 자고 있을 때 내내 찾아와 걱정하면서도 자신이 찾아온 것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모습을 봤고, 그의 소원도 들어줬으니 이제 남은 건 그 인간들끼리 알아서 할 것이다. 잘 안된 탓에 또 어두운 감정을 뿜어낸다면 나야 좋지만.

 나라 구경도 할 겸, 잠시 떠나서 다른 미련을 찾아봐야지.
 세 송이의 동백 정도면 당분간은 가만히 있어도 살 수 있겠지만, 썩지 않는 식량을 미리 구해서 나쁠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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