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11 토, 릭베논
진단메이커 - 방관, 침묵, 바다
*
아우릭은 오후 늦게 눈을 떴다.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고 출근을 하는 대신 수도를 빙빙 돌아다녔고, 꽃에게 물을 줬다. 새로 들어온 씨앗은 없나, 가게를 찾아가던 도중 시장에서 작게 일어난 소란을 구경했다. 그러다 맛있는 냄새에 이끌려 근처 노점에서 닭꼬치도 사 먹었는데 매콤한 양념 때문에 씁씁거리며 한참이나 숨을 들이마셔야 했다.
그다음은 뭘 했는지 모르겠다. 고개를 들어보니 노을이 붉게 물들어가기 시작하던 하늘. 이제는 내 행방을 찾는 사람도 드물어졌을 것이다. 단장이 급하게 나설 일이라는 게 쉽게 생기는 건 아니니까. 신전으로 돌아간 이유는 그뿐이었다.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벤치에 다리를 뻗고 길게 눕자 길게 흘러가는 구름이 보였다. 창문으로 흘러나오는 불빛이 툭툭 꺼지기 시작하는 걸 보니 퇴근시간인 모양이었다.
가만히 누워있자니 가물가물 졸음이 몰려왔다. 늦게 일어났는데 피곤한 이유는 뭘까. 여기서 잠들었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다. 느릿느릿 일어나 앉는데 멀리서 아는 얼굴 하나가 심각한 표정으로 뛰어왔다.
베논이었다. 무언가를 입안에 넣고 곰곰이 씹어보는 것처럼 말을 웅얼거리는 그는 다가왔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멀어져 갔다.
인사를 하려고 살짝 들었던 손을 꼼지락거리며 어색하게 내렸다. 애인을 만났으면 아무리 바빠도 아는 척 정도는 해주지. 쌩 무시해버리는 건 뭐람. 혹시 무슨 일 있나? 볼을 긁적이며 무심코 했던 생각.
특별할 게 없던 날이었다. 침대에 누워 잠에 들면 바로 까먹게 될 정도로 지루하고 조용했던 하루.
내가 볼 수 있는 네 모습은 그날 바쁘게 뛰어가던 등이 마지막이었다.
*
“자. 이거면 되는 거지?”
무언가 가슴 위로 툭 닿자마자 아우릭은 어깨를 움찔 떨었다. 고개를 숙이자 갈색 파일에 묶여있는 서류더미가 보였다. 또 멍하니 서 있었나 보다.
이마와 콧잔등 위로 리온의 걱정 섞인 눈빛이 꽂혔다. 괜찮다. 이런 시선쯤은 익숙해졌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 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느껴지는 묘한 긴장감에 마른 침을 삼켰다.
“응. 고마워. 늘 이렇게 신세를 지네.”
“아니, 뭐.. 힘들 땐 도와야지. 사람이, 부족하니까.”
최대한 부드러운 것들로 고르고 골라 조심스럽게 대답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인상을 살짝 구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입안에서 날카롭게 쏘아붙이지 못한 말들이 휘돌며 상처를 남겼다. 그냥 얘기하지 그래? 인원이 한 명, 그것도 크루세이더의 부단장이 없어져서 바빠졌다고 말이야.
저릿해지는 눈 안쪽. 서류를 끌어안은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약하게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해야만 하는 것들이 이토록 많을 줄은 몰랐다. 꼬박 며칠을 밤새운 덕에 시야가 탁했다. 어지러움 때문에 움직이기 전에 벽에 기대서 한참이나 쉬어야 했고, 자꾸만 풀리는 다리 때문에 휘청이기도 수십 번이었다.
쉰다고 하면 쉴 수 있었다. 어차피 제가 아니더라도 팔 걷고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줄 단원들은 많았다. 알고 있지만 목 언저리에 맺힌 ‘나 이제 안 할래’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하기 싫은데 이제는 그래서는 안된다.
상대에게 실례되는 행동이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내리는 티를 안 내려고 노력하던 그는 묵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우릭.”
“으응?”
“요즘.. 통 웃는 얼굴을 못 봤다.”
..쓸데없는 소리를.
뒤를 돌았다. 손잡이를 잡고 아래로 내리자 딸깍거리며 문이 열린다. 복도에는 사람들이 바삐 오가고 있었다. 즐겁게 대화하는 이들도 있었고, 어딘가 급하게 가봐야 하는 사람처럼 표정 없이 걸음을 빨리하는 이도 있었다.
그의 말은 틀렸다. 나는 태생적으로 유능한 부하 한 명 없어졌다고 기죽어 있을 그릇이 되지 못한지라 오히려 아무렇지 않다는 점에 손가락질을 받곤 했다. 그래도 어쩌랴, 내가 원래 이렇게 생겼는걸.
입천장과 닿는 혓바닥이 텁텁했다. 퍼디난드를 찾아가기 전에 물 한 잔만 마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사람이 복작이는 복도를 향했다.
*
그날 나타난 것은 시간을 갉아먹는다는 마물이었다. 어지간한 힘으로는 쉽게 처리할 수도 없다는 점도 그렇지만 휩쓸리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다는 점 또한 골치거리였다.
내 인사까지 무시하며 급하게 달려가는 그의 어깨에는 이미 마물이 나타난 자리에 가있는 단원들의 수많은 목숨이 책임감으로 뭉쳐있었을 것이다. 하얀 망토를 흩날리며 뛰어가는 동안 조막만한 머릿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모르겠다. 그 내용을 생각해보려고 할 때마다 가슴 위로 묵직하게 내려앉는 통증은 아마 죄책감일 것이다.
당시 자리에 있던 단원의 말로는 마물과 함께 베논이 사라졌다고 했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얼마 전 가디언에 들어온 별의 아이는 그림을 그려 설명하고 싶었는지 품에서 꺼낸 종이를 펼쳤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펜 뚜껑을 뽑는데 어찌나 손을 떠는지 쉽지 않았다. 지켜보던 나인이 대신 열어주었고, 아이는 감사하다며 꾸벅 인사를 했다.
설명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듣고 싶지 않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무릎을 꿇은 채 상체를 한껏 굽히고 그린 선이 이리저리 튀며 당시의 상황을 표현했지만 잘 알아보기 힘들었다. 나는 급하게 부상자를 옮기는 이들과 도망치는 시민들이 남긴 발자국 때문에 울퉁불퉁해진 바닥을 훑었다.
제 기억으로는 여기는 안정화 작업이 쉽지 않던 땅이었다. 오래전 일어난 재난 이후 폐허가 되어버린 평지는 생각지도 못한 마물의 등장으로 한 번 더 뒤집혔을 것이다. 유독 움푹 파인 공간은 아마 베논이 능력을 사용하며 생긴 흔적이겠지. 큰 발자국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보지도 않은 그의 행동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이윽고 아이는 팔을 멀리 뻗어 어느 한곳을 가리켰다. 부는 바람도 없는데 먼지가 휘몰아치고, 허공이 이상한 모양으로 뒤틀린 장소였다.
복잡할 줄 알았던 머릿속은 아주 말끔했다. 연인의 소식을 들은 이후로 줄곧 그랬다.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열을 내며 펄펄 날뛰다가 울고불고 난리를 칠 줄 알았는지 힐끔힐끔 와닿는 단원들의 눈치가 무색할 정도로 냉정한 상태였다.
하얀 낫의 손잡이를 꽉 틀어쥐고 바쁘게 오가는 이들의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아직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시간이 지나면 죽는다는 소리는 아니다.
시간을 갉아먹는다는 마물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별로 없었다. 희귀한 것이라 자주 만날 수 없을뿐더러 공격에 휘말린 사람은 다시는 만날 수 없어서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일이 태반이었다. 베논이 다친 곳 없이 사라진 것이라면 아직 희망은 있다.
우뚝 멈춰 선 건, 양팔을 넓게 벌린 채 길을 가로막는 제이드 때문이었다. 급하게 달려왔는지 헉헉거리며 거친 숨을 뱉어냈고, 보라색 귀걸이가 어깨 위에서 무겁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불러도 대꾸 없이 지금 어딜 가려는 것이냐! 이런 때에 단장까지 사라지고 싶은 것이냐?’
‘.. 아니, 그게 아니라,’
‘놀란 건 알겠지만, 이런 때.. 가장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하는 건 바로 단장인데,’
하던 타박을 끝내지 못한 그는 볼을 타고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을 벅벅 닦았다. 깊은 물속에 푹 잠겼다가 꺼내진 것처럼 멍하던 귓속에 수많은 부름이 꽂혔다. 눈을 꿈벅거리다 보니 느껴지는 여러 개의 손. 부상자를 옮기는 이들과 현장에서 지시를 내리고 있는 리온 외에는 전부 제게 달려들어 팔과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엉엉 소리 내 울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보자니, 이유는 모르겠지만 적절한 해명을 찾기 전까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그날의 답을 주지 못했다.
벌써 4년이 지났다.
그런 위험한 마물이 나타났다고 했을 때, 부하인 그는 지시를 내려줄 상사인 내가 없어서 화가 났을까. 아니면 친구인 나의 도움을 필요로 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급하게 달려가던 그 순간에 연인인 나를 발견하고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도했을까. 묻고 싶었지만 대답해 줄 사람이 없었다. 그저 세 번째가 아니기를 바랄 뿐.
*
한참을 걷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예배당 앞에 서 있었다. 아우릭은 신경질적으로 이마를 짚었다. 대장의 집무실에서 대별지기가 있는 집무실로 가려면 여기로 와서는 안된다.
부쩍 멍하게 있는 상태가 늘어난 건 괜찮은데, 누군가 여러 번 부르고 툭툭 치는 바람에 정신을 차린다거나 가야 하는 곳이 아니라 엉뚱한 곳에 도착하는 건 익숙해지지 않았다. 제대로 된 방향을 잡기 위해 몸을 반바퀴 돌렸다.
위로 향하는 계단을 쳐다보는데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린다. 천장까지 닿을 기세인 거대한 문이 열리더니 기도를 마친 사람들이 예배당 안에서 나왔다.
고개만 살짝 돌렸다. 오늘은 평소보다 사람이 많다. 무거운 것을 털어낸 것처럼 홀가분한 표정, 심각한 표정, 지루하다는 표정, 이제야 끝났다며 개운해 하는 표정. 각자 다른 표정을 한 채 우글우글 몰려나오고 있는 이들을 보는데 누군가 뒤에서 망토를 잡아당긴다.
어린아이는 무엇이 불만인 건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허리를 살짝 굽히고 서류를 끌어안고 남은 손으로 무릎을 짚으며 생긋 웃었다.
“왜 그래? 혹시 나한테 볼 일 있어?”
“넌 바다 본 적 있지? 귀족이니까 봤을 거 아니야.”
“.. 응?”
뜬금없는 말에 당황해서 어버버거리자, 망토를 꾹 틀어쥐었던 작은 손을 제 얼굴을 향해 번쩍 들며 맡긴 물건을 빨리 내놓으라고 닦달하는 것처럼 화를 낸다.
“왜 말을 못 해? 아빠가 하얀 옷 입은 사람들은 귀족이라고 그랬는데. 뭐야. 귀족도 바다를 못 봤다는 거야?”
“....”
“너 귀족 아니지? 옷도 어디서 몰래 훔쳐입은 거야? 아니면 귀족인 주제에 가난하거나 그런 거야? 어?”
바다라면 어릴 적 딱 한 번 사진으로 본 적이 있다. 그때는 베논도 나도 어려서 쉽게 수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할 수 있는 놀이라곤 방 하나에 가득 쌓인 장난감을 들고뛰거나, 마당 한쪽에 만들어진 놀이터에서 고용된 하인들과 함께 숨바꼭질이 전부였던 나이.
내린 눈이 무릎까지 올라오던 추운 겨울, 커튼이 걷힌 창밖은 온통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하루 반나절을 내리고도 부족했는데 끝없이 이어지는 사락눈과 구름이 슬슬 흘러가며 쏟아지던 햇살. 낮은 지붕의 굴뚝으로 퐁퐁 올라오는 하얀 연기가 바람을 타고 퍼지는 모습은 야니크가 서재에서 바라보고 있는 풍경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따스해 보였다.
청소를 하던 중이었는지, 누군가 책을 꺼내다가 급한 볼 일이 생각나 잠시 자리를 뜬 것인지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사다리가 책장 앞에 놓여 있었다.
바닥에 서 있으면 발꿈치를 들고 팔을 최대한 뻗어도 다섯 번째 칸밖에 닿지 않았지만, 사다리에 올라서니 열 번째 칸이 눈높이에 맞았다. 평소에 꼭 보고 싶었던 사진집 책등에 손톱을 박아 넣고 뽑아내자 두꺼운 양장 표지가 부드럽게 빠져나왔다. 가슴에 푹 안은 것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조심해서 사다리를 내려오는 동안 베논은 힐끔힐끔 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불안한 거다. 허락 없이 높은 곳에 올라갔다는 사실을 들키면 분명 혼이 날 테니까.
괜찮아, 잠깐만 보는 거니까 안 들킬 거야,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여는데 무거운 책 사이에서 펄렁거리며 떨어진 사진 한 장. 그 속에 바다가 있었다.
넓게 펼쳐진 모래밭과 하얀 구름이 쏙쏙 박힌 하늘, 점처럼 작게 보이는 주변의 건물들, 간간이 서있는 검은 점은 사람인 걸까. 작은 네모 안에서 절반을 넘게 차지한 건 푸른색의 물이었는데, 하얗게 부서지는 부분을 보니 사진을 찍은 날은 해가 강한 날인 것 같았다.
나는 관심 없는 부분은 잘 기억하지 못했다. 바닷물은 짜고, 쉼 없이 움직이며 ‘파도’라는 것을 만들어내고, 그 과정에서 해초나 조개껍질 따위가 물에 떠내려 온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떨어진 사진을 집어 든 그의 표정이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고, 너 지금 뭐하는..!”
멀리서 달려오던 이는 제 얼굴을 확인하고는 온몸에 있는 피가 전부 빠져나간 것처럼 창백하게 변한다. 아는 사람인가.
아우릭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누구인지 생각나기도 전에 그는 시키기만 한다면 당장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박을 기세로 허리를 숙인 채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용서를 빌기 시작했다.
“죄, 죄송합니다! 이 애가 뭘 몰라서 감히, 피비앙스님께 이런 무례를, 제발 용서를, 죄송합니다, 죄송,”
어물어물 이어가던 말끝이 흐려졌고, 투박한 손은 아이의 작은 정수리를 억세게 눌렀다. 빠져나가려고 바둥거리는 팔을 잡힌 채 강제로 몸을 숙이고 있는 두 사람.
누구지. 시장에서 봤나? 아니면 신전을 오고 가면서 마주쳤나. 비슷하게 생긴 외모를 가진 몇 명이 머릿속을 스쳐갔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아니다.
지나가는 이들은 모여들어 수군거리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멀찍하게 떨어져서 시선을 던지고 몇 마디 떠들어보려다가 제가 누구인지 알아챈 이들이 막아서고, 사라지고, 빈자리를 채운 사람들이 다시 시선을 던지고.
피곤했다. 얼른 모든 일을 끝내야 했다. 그러려면 우선 퍼디의 집무실로 찾아가는 게 먼저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걱정하지마.”
“..정말, 정말 괜찮으신..”
“그래. 근데 미안하지만 내가 좀 바빠서. 이만 가봐도 될까?”
굳은 입꼬리를 끌어올려 아까 리온 앞에서 보였던 미소만큼 웃어 보였다. 남자는 당연히 괜찮다면서 이번에는 귀한 시간을 빼앗아서 죄송하다고 사과를 했다. 허리 숙이는 일이 참 쉽기도 하지. 저렇게만 한다면 모든 일을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다면 나도 그에게, 사라져버린 연인에게 허리를 숙여 사과하고 싶었다.
내가 방관한 거야. 내가 너의,
문을 밀자 넓은 집무실 한쪽에 놓인 책상이 먼저 눈에 띈다. 퍼디난드는 제가 올 거라는 걸 미리 듣기라도 한 사람처럼 놀란 기색도 없었다.
“어서와.”
“놀라지도 않네? 그런 반응은 재미없어~”
습관적으로 다른 이가 있는지 확인하느라 도륵 굴러간 파란 눈동자는 이내 웃음을 띠었다. 제법 많은 양의 서류를 내밀자 마른 손이 어렵지 않게 받아 간다. 첫 면부터 찬찬히 훑어내려가는 시선이 고요하다.
이유를 모르게 초조해지는 마음에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아까부터 굴러다니던 작고 차가운 조개껍질이 장갑에 보드랍게 밀린다.
바다의 사진과 설명을 본 어린 시절의 연인이 가장 흥미를 가졌던 것은 파도에 떠밀려 온다는 조개껍질이었다. 물에 깎이고 모래에 둘러싸여서 햇살을 받으면 반짝인다는 글을 읽고 한동안 그는 그 물건에 대해 궁금해했다.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얼굴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시절부터 나는 이미 남을 읽어내는데 능했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도, 그때 젖살이 통통하게 오른 볼을 오물거리며 집중하는 모습을 봤다면 누구나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그 얼굴이 보고 싶어서,
“저기.. 아우릭?”
“..어?”
“못 들었어?”
또다. 멍하니 있다가 한 번에 알아채지 못했다, 빌어먹을. 짜증스럽게 이마를 문지르려는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웃었다. 사각거리는 느낌이 드는 걸 보니 오늘 하인이 준 것은 바다에서 바로 주워온 물건인가 보다.
“미안, 다른 생각하다 보니까~ 뭐라고 했는데?”
“이제 사람을 한 명 뽑는 게 어떠냐고, 물었어.”
“아..”
“네가 힘든 것도 그렇지만, 언제까지 부단장 자리를 비워둘 수 없다는 거 잘 알잖아.”
그래, 알고 있다.
벌써 4년이나 지났다. 언제까지고 리온과 나인에게 부단장이 처리해야 할 서류를 넘길 수는 없었다. 둘 다 각자의 할 일을 빨리 끝내거나 미뤄놓고 베논이 해야만 했을 일거리를 맡아준다는 것을 알면서, 비어있는 부단장 자리를 채우는 것이 다른 단원들에게도 좋다는 걸 알면서, 여태껏 놔둔 이유는 내 욕심 때문이었다.
언제라도 문을 열고 들어선 그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집무실에 앉아있느냐며 놀란 얼굴을 보여줄 것 같은 착각 때문에 차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건 퍼디도 마찬가지겠지.
고요하던 눈동자가 힐끗거리며 눈치를 본다. 처참하다. 그런 기분이 드는데 왜인지는 알 수 없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고, 말할 타이밍을 맞추지 못했을 뿐 진작부터 생각하고 있었다는 듯 웃었다.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그래. 4년이면 오래 지났지? 나도 슬슬 힘들고.”
“.. 정말?”
“그럼.”
쭉 기지개를 켰다. 적당한 사람이 눈에 들면 말해달라는 당부를 할 때 홀가분한 듯한 목소리를 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제 남몰래 부단장 책상을 손으로 쓸어보는 일 따위는 못할 것이다.
오늘도 그곳에 가는 거야? 하고 싶은 물음을 삼키는 표정에 걱정스러움이 서린다. 괜찮으니 걱정 말라는 말로 달랠 수 없으니 입을 다물었다. 이기적이게도.
오늘의 공식적인 일정은 이게 마지막이다. 이제 가볼 수 있다. 아우릭은 몸을 돌렸다. 밖을 향해 가는 구두 소리가 크다.
*
베논이 사라졌던 곳의 안정화 작업은 여전히 진행되지 않았다. 단장인 내 허가가 필요하기도 했지만, 아무도 이곳에 가까이 오는 것을 꺼려 했다. 왜 단장을 하지 않고 부단장 자리에 앉아있냐는 소리를 듣던 유능한 야니크를 단숨에 집어삼켜서 생사도 알 수 없게 만든 마물이 나타나는 장소에 누가 오고 싶겠는가.
미리 가져다 놓은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어느새 저문 해 대신 떠오른 달이 주변에 널린 4년 치의 조개껍질을 반짝이며 빛냈다.
“나 왔어.”
주머니에서 오늘 치 조개껍질을 꺼냈다. 바닥에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꾹 누르면 어렵지 않게 바닥으로 쏙 파고드는 것. 파묻히지 못하고 맨질맨질하게 빛나는 부분을 쳐다보다가 중얼거렸다.
“그날, 홀로 달려가는 널 따라가지 않았던 나를 원망해. 네가 사라지도록 방관한 건 나야.”
푹 내쉰 한숨에 허벅지 위로 잘게 떨어진 모래가 흔들린다. 멍하니 생각에 잠기기 전 고개를 들었다. 그날 일그러졌던 공간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처럼 돌아와 있었지만 어렵지 않게 그곳을 찾을 수 있었다. 이렇게 쳐다보고 있으면 네가 돌아왔을 때 아무렇지 않게 웃어줄 수 있겠지. 늦었잖아, 하고 능청도 떨면서.
익숙하게 뱉어낸 후회에 돌아오는 침묵이 유난히 길다. 오늘은 밤바람도 조금 차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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