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열 #4.
태후가 머무는 거처인 수강전은 아키라로서도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황후였을 시절에 살았던 영수궁에는 몇 번 가보았으나 수강전까지는 가보지 못했다. 아니,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고모가 꺼려져서 황궁으로 가는 아버지와 동행하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어쨌든 수강전은 영수궁과 규모는 비슷하나 한결 단정되고 기품 있는 모습이었다. 어쩐지… 가끔은, 환갑이 넘은 나이인데도 조카도 당황스러울 만큼 농염한 분위기를 풍기는 고모와 이 고즈넉하고 어여쁜 궁은 어울리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태후 폐하를 뵈옵니다.”
수강전 안으로 들어가자 태후를 비롯하여 선황의 후궁들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도 후카츠가 두 사람을 따랐다. 마치 황제의 그림자처럼 찰싹 달라붙어 움직이는 그가 정말로, 거슬렸다.
신경 쓰지 마. 스스로를 타이르며 아키라는 고개를 꼿꼿하게 들었다.
무려 20년 만에 탄생한 신혼 부부를 향해 쏟아지는 시선에는 악의 없는 호기심이 그득했다. 나이가 들어 탁하게 흐려진 눈동자들이 오랜만에 생기를 얻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황궁은 오랫동안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선황이 세상을 떠나자 상복을 입고 3년 상을 치루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의미로 통곡하며 옥좌에 어른 새 황제는 아직 어렸다.
내년에 성인이 되는 그가 처음으로 들인 후궁과 올린 혼례는 일반적이지 않았다. 혼인하기 위해서는 복잡하고 긴 절차를 거쳐야 함에도 모두 무시했다. 황제는 태후의 허락도 받지 않고 수도 내에 소문이 자자한 센도 가의 장남, 태후의 조카를 기습공격하듯 후궁으로 들였다. 이 얼마나 흥미로운 상황인가.
그탓에 바라보는 시선이 얼마나 뜨거운지 얼굴이 다 따끔거렸다. 타인의 시선에 익숙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거북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럼에도 아키라는 황제의 손을 잡은 채 차분한 태도로 황실 어른들께 절을 올렸다.
이 또한 신혼부부가 겪어야 하는 관습 중 하나였다. 가마에 오른 두 사람의 손목에 붉은 실이 감겼다. 실로 묶인 부부는 하는 수 없이 함께 움직여야 했다. 이는 타인이었던 두 사람이 혼례를 치르면서 한 마음,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인사를 끝내고 거처로 돌아갈 때까지 절대 끈을 풀어서는 안 되었다.
몸이 하나가 된 것처럼 절을 한 두 사람이 준비된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아직도 연결된 부위, 손바닥이 괜히 화끈거렸다. 낯설고 두려운 감각에 아키라는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아키라, 아니… 려비. 황궁에서 첫날밤은 어떠셨습니까.”
두 사람이 들어오는 모습을, 태후는 자못 불만스러운 표정과 흐트러진 모습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올리는 인사도 받는둥 마는둥 하더니 겨우 두 사람을 똑바로 바라봤다. 푹신한 뒷받이에 방만하게 기대었던 몸을 일으킬 때 넓게 펼쳐진 천들이 함께 올려졌다. 옅은 녹색의 천에 금실로 수를 놓은 무늬가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태후 폐하께서 은덕을 베푸시어 편안하였습니다.”
입에 꿀을 바른양 달콤한 아부가 술술 흘러나왔다.
두 사람의 잠자리에 대해서 은근히 물어보는 뜻을 모른 척 넘겨버렸다. 태후도 알고 있을 것이다. 첫날밤은 아키라 혼자 잠들었다는 것을.
모두 다 아는 진실은 숨기고 거짓을 말한다. 스스로도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입에 칼을 문 광대라도 된 느낌이었다.
“황상, 내 항상 내가 가장 아끼는 조카를 만나고 싶다고 한탄하였는데 덕분에 이리 만나게 되는 군요. 덕분에 한을 풀겠습니다.”
태후가 양 입꼬리를 한껏 올리고 하는 말은 빈정거림에 가까웠다. 명백한 비난이었다.
말 한 마디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격언이 지금 이 순간에 떠올랐다. 황제의 뺨을 마구잡이로 내리치는 듯했다. 그만큼 태후는 저 몰래 혼례를 강행한 황제에게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다.
당사자가 아닌 자신도 이렇게나 섬뜩할진데 황제는 어떨까. 아키라는 저도 모르게 흘낏 옆을 훔쳐봤다.
“태후 폐하의 한을 풀어드릴 수 있게 되어 소인, 기쁘기 한량 없사옵니다.”
…잠시나마 걱정했던 마음이 무색했다.
뱀같은 태후 밑에서 자랐더니 똑같이 새끼뱀이 되었던가. 속마음을 뻔히 아는데도 내놓은 말과 말투는 마치 진심으로 들렸다. 아무 표정이 없는, 그저 하얗기만 한 얼굴이라 오히려 더욱 믿음이 갔다.
“그래요, 우리 황상이 참으로 효자입니다.”
“황송하옵니다, 태후 폐하.”
태후는 손톱에 낀 호갑투를 괜히 뺐다가 다시 끼우기를 반복했다. 치미는 홧기를 꾹꾹 눌러 참으며 연달아 비웃는 투로 말을 던졌다.
황제는 무심한 투로 던진 공격을 받아쳤다. 다시 날아온 공에 입가에 걸린 미소가 깊어졌다.
“이왕 오셨으니 내 황상께 한가지 부탁이 있소.”
“하문하시옵소서.”
두 사람의 기싸움을 처음 보는 아키라는 금방이라도 화산이 터질 것 같아서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도움을 청할 요령으로 슬쩍 주변을 둘러보자 자신처럼 걱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하다못해 후카츠마저도 늘상 있는 일이라는 듯이 무심한 얼굴이었다.
다시 시선을 태후에게 향하고 아키라는 체할 것 같은 심정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바라지도 않았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서로에 대한 적개심은 숨겨놓고 꼴보기 싫은 가식이라도 떨기를 바랐다. 이미 황제에게 화가 난 태후도, 그런 태후를 싫어하는 황제도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황상도 알다시피 본후의 건강이 그리 좋지 않소. 매일 황상과 함께 상참에 나갔으나 이제는 그러기가 힘들 것 같구려. 그렇지만 황상께서는 아직 어리시니 누군가 옆에 있어야 할테지요.”
태후는 황제를 황위에 오른지 어느덧 10년이나 되었는데 아직 제 할 일도 할 줄 모르는 어린 아이로 취급했다. 화사하게 웃는 얼굴로 날카로운 호갑투 끝으로 가슴을 마구잡이로 난도질했다.
“그러니 내일 상참부터는 본후를 대신하여 려비가 나가도록 합시다.”
그 손톱은 너무나 길어서 황제 옆 아키라까지 푹 찌르고 말았다.
아키라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미간을 일그러트리며 태후, 고모를 올려다봤다. 미리 언급도 없이 고모가 내던진 폭탄에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것 같았다.
태후는 조카의 간절한 시선을 외면했다. 오로지 황제를 똑바로 응시했다. 여인은 단단히 각오한 표정으로 답을 기다렸다. 얄미운 양자가 거부하는 말을 하는 순간 황제를 물어뜯을 준비를 하고서.
“그 일은 불가하옵니다, 태후 폐하.”
심해처럼 끝을 알 수 없는 침묵을 이겨내고 후카츠가 입을 열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태후를 향해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여 존경의 뜻을 나타냈다.
“태후 폐하의 옥체가 미령하시다면 수렴청정을 거두시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일이라 사료되옵니다. 려비가 태후 폐하를 대신하여 상참에 참여할 수는 없사옵니다.”
“이치에 맞는 일이라, 그래.”
물 흐르듯이 유려하게, 황제를 대신하여 거부하는 후카츠의 말에 태후는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여인이 짧은 계단을 밟아 내려왔다. 황제를 지나쳐 후카츠 앞에 섰다. 그가 몰고 온 바람이 피부에 닿자 급속히 얼어붙었다.
“그 이치는 후카츠 가가 먼저 어기지 않았더냐? 건강을 핑계로 이제 고작 스무 살 밖에 되지 않은, 한낱 애송이를 삼공 대리로 내세웠지. 내 14살의 나이에 입궁하여 태후가 되기까지 삼공 대리란 들어보지도 못하였다.”
“태후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소신이 삼공 대리를 맡은 일과 려비가 상참에 참여하는 일은 상황이 다릅니다. 삼공 대리는 조정 대신들이 오랜 시간 동안 논의한 끝에 만장일치로 정한 것입니다. 허나 지금 태후 폐하께서는 그런 절차도 무시하고 억지를 부리고 계십니다.”
“절차를 무시했다라. 절차를 무시한 것은 황상이 먼저 아니었소? 이 어미에게 묻지도 않고 후궁을 들이셨지.”
“폐하께서는 이 나라의 주인이십니다. 황후도 아닌 한낱 후궁을 들였을 뿐입니다. 그 일을 태후께 허락을 받는 것은 윗사람에 대한 예의일 뿐 법도에 정해진 일은 아닙니다. 과거의 선례를 짚어봐도 어긋남이 없습니다.”
태후와 후카츠의 설전이 이어지는 동안 아키라는 정말, 할 수 있다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선황의 후궁들이 태후를 보지 않으려고 시선을 내리고도 저를 힐끔힐끔 훔쳐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도 했고 무엇보다 고모가 하는 말은 무엇 하나 제대로 된 내용이 없었다. 그냥 억지였다.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여 심퉁난 어린 아이처럼 내 말을 들으라고 떼쓰고 있었다.
후카츠가 하는 말도 모두 다 맞는 것은 아니나 그래도 그는 어느 정도는 논리를 갖추고 있었다. 그는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지니고 30여 년이나 조정을 발 아래 두었던 여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무심한 얼굴로 태후가 부리는 억지를 조목조목 반박하고 잘잘못을 따졌다. 아키타 현에서 부는 북풍처럼 매섭게 몰아쳤다.
센도 아키라는 비로소 후카츠가 집요할 정도로 황제를 따라온 이유를 알아차렸다. 후카츠는 태후에게 맞서는 칼이자 황제를 보호하는 방패였다. 그런 그에 비해서 자신은… 황제에게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어제 처음 만났고 후궁인 아키라 앞에서, 태후가 저에게 모욕을 주다못해 발로 사납게 짓밟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황제는 부끄럽다거나 수치스럽다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런 일이 바닷가를 채운 모랫알처럼 너무 많아서, 파도에 수만번 깎이고 구른 끝에 만들어진, 곱고 고운 모래알이 피부에 닿아도 또르르 흘러내리는 것처럼 그저 무감했다. 이 방에서 그만이 연못 속에서 활짝 피어난 연꽃처럼 평온했고 뻘로 가득한 바닥에 깊이 내린 뿌리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삼공 자리에 대리를 세운 일은 선례가 있는 일이었느냐? 선례란 만들기 나름이다.”
후카츠의 반박에도 태후는 끝까지 제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졸졸졸 물이 흐르며 흘러간 시간을 가늠하는 물시계에서 작게 방울소리가 울렸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태후가 말도 안 되는 고집을 꺽지 않자 돌처럼 단단하던 얼굴에 실금이 그어졌다. 후카츠는 새어나오는 한숨을 삼켰다.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태후 폐하, 려비는 내명부 소속으로 후-.”
“후카츠!”
말이 다 끝나기를 기다리며 태후는 두 눈을 빛냈다. 지금까지 침착함을 유지하던 후카츠가 평정심을 잃고 드디어 걸려들었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그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황제가 빠르고 낮은 목소리로 후카츠를 부르며 그의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지금까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이 주제인 이 상황을 한 발 물러서서 방관하던 황제가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후카츠를 바라보는 시선에 염려가 서렸다.
황제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후카츠도 그와 눈을 맞대었다. 수많은 이야기가 아무런 소리없이, 짧은 시간을 가득 메웠다. 센도 아키라는 모르는 두 사람 간의 연대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고 있으려니 속이 다 뒤틀렸다. 먹은 것도 없는데 모조리 토하고 싶었다. 목끝까지 신물이 올라와 따끔거렸다.
“왜, 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 해보거라. 내 다 들어주마.”
후궁은 정사에 참여할 수 없다.
그 말을 끌어내려고 태후는 무던히도 애를 썼다. 후카츠가 말실수 하기를 바라며 억지를 부렸다. 후궁이 정사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하면, 내가 이제껏 수렴청정을 한 것에 대한 모욕이 아니냐며 펄펄 날뛰려던 계획이었다. 그 핑계로 제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는 물고기를 다시 잡으려고 했건만.
다 끝나가는 판에 황제가 끼어들었다. 그 이후로 후카츠는 특유의 두툼한 입술을 꾹 다물고 황제만 응시했다. 그 관심을 저에게 돌리기 위해서 태후가 도발했지만,
“려비가 상참에 참석하는 일에 관해서는 태후 폐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황제가 냉큼 답해버렸다. 원치 않은 답변에 태후는 일그러지는 미간을 겨우 폈다.
“…그래요, 그 일은 그렇게 하지요. 황상은 역시 효자군요.”
하도 강경하게 주장했던 터라, 차마 무르자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태후는 속으로 이를 갈며 마지못해 좋아하는 얼굴을 꾸며냈다. 제 꾀에 스스로 넘어간 상황이 되니, 제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황제에 대한 분노가 더욱 더 활활 타올랐다.
“다들 이만 물러가세요. 분후가 몸이 좋지 않아 피곤하군요. 려비는 잠시 남겨두시지요. 오랜만에 만나 할 말이 많습니다.”
“네, 태후 폐하.”
황제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먼저 몸을 일으키는 그를 따라 아키라도 덩달이 일어섰다. 다시 무심한 얼굴로 돌아온 황제가 손목에 묶인 끈을, 아주 쉽게 풀어버렸다. 부부간의 연을 상징하는 붉은 비단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모습은 어젯밤, 버림 받은 개두를 연상시켰다.
그렇게 먼저 끈을 풀어낸 황제가 먼저 등을 돌렸다. 아키라만 남겨두고 먼저 떠나버렸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아키라는, 제 얼굴이 어떤지 전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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