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 러브하이

[BL] 러브 하이 EP. 02

[EP. 02] 그냥 깔끔하게 한 번 사귀고 헤어지자!

잉젬이네 by 잉젬
5
0
0

[BL] 러브 하이 EP. 02

EP. 02

그냥 깔끔하게 한 번 사귀고 헤어지자!

*

고백한다. 자각한 건 중학생 때였지만, 사실 박유원을 좋아한 역사는 시간을 거스르고 거슬러 유치원 야간 반에서 처음 대화했을 때까지 내려가야 했다고.

임수윤은… 박유원이 자신에게 말을 걸었을 때, 그래서 동화책만 보던 눈을 위로 올려 녀석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부터 박유원이 마음에 들었다. 명절에 할머니 댁에서 만난 새끼 강아지와 닮아서.

할머니 댁에 있던 새끼 강아지 뽈뽈이는 하도 돌아다녀서 뽈뽈이라 이름 지었다는 할머니 말씀에 걸맞게 사람만 보면 같이 놀고 싶어서 환장을 했다. 사람 앞에 가서 자길 보라며 바짓가랑이를 물거나 낑낑 짖고 방방 뛰고….

어른들은 명절 음식 준비니, 벌초니 하는 것으로 바빴으니 녀석과 노는 사람은 주로 수윤의 몫이었고, 임수윤은 놀아주다가 책을 읽고 싶어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만 하면 가지 말라며 서럽게 우는 강아지를 외면하지 못했다.

셋째 날쯤 되었을 땐 녀석과 나름의 합의점을 찾아서 같이 놀다가 수윤이 책을 읽고 싶어지면 마당에 설치된 테이블에 앉아 동화책을 읽는 방식으로 명절을 보냈었지. 

명절이 수요일부터 금요일까지여서 주말도 합하면 무려 5일이나 본가에 있어야 했는데, 수윤은 그 탓에 뽈뽈이에게 정이 무척 들었었다.

박유원을 만난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박유원의 근처에는 늘 친구가 많았으므로, 야간 반 들어갈 적엔 인파에 둘러싸인 박유원을 인식하지 못했으나, 어린아이에게는 퍽 넓은 교실에 선생님과 수윤, 그리고 유원만 남게 되었을 때는 혼자서 뭘 하고 놀지 고민하며 빨빨 돌아다니는 놈을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쟤 되게 뽈뽈이 닮았네. 박유원을 봤을 때 그리 생각하고 다시 읽던 책을 보기 시작했는데, 어느 시점부터인가 바로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선생님이었다면 수윤에게 말을 걸었을 테니 아니고. 그럼 남은 건 한 명.

당시 임수윤은 박유원이 언제까지 기다릴 수 있을지 궁금해서 장난을 조금 치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는 유원이 옆에 앉은 사실을 알아차렸는데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꿋꿋하게 책을 읽었다.

결국 기다리다 지친 박유원이 그에게 말을 걸며 놀자고 했을 때 속으로 얼마나 킥킥댔는지 모른다. 안 놀아준다니까 금세 울먹이는 것도 뽈뽈이랑 똑 닮았었다.

박유원에게 호감을 가진 계기가 그렇다 보니, 임수윤은 자신이 녀석에게 가진 호감이 연애적인 감정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임수윤이 본 세상에는 사람 좋아하는 강아지랑 같이 놀면서 가끔은 장난도 치고 싶은 감정과 같은 결로 연애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중학생 때 자신의 마음이 어떤 형태를 띠고 있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던 것은 드디어 그의 세상에 자신과 비슷한 방식으로 사랑하는 인물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그 인물은 아버지가 회식도 안 가고 빠르게 귀가할 정도로 재미있게 보던 케이블 주말 드라마의 여주인공이었는데, 드라마 끝나고 몇 달 후에 학교 도서관에 대본집이 들어와서 읽다가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을 보며 하는 생각에 대한 서술이… 그가 유원을 볼 때 드는 생각과 상당히 유사한 것을 발견했다.

박유원에게는 수윤이 좋아하는 다른 책에 서술된 어느 문단처럼 너를 보고 두근거리는 순간이 있었다 둘러댔지만… 사실 감정을 자각했던 때에 임수윤이 느낀 감정은 미안함이었다.

의도치 않았다지만 저놈을 무려 십 년간 속이고 가족 제외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자리 잡아버렸지 않은가. 임수윤은 본인이 희대의 사기꾼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박유원의 순수한 우정을 무참히 더럽혀버린 느낌.

열여섯 임수윤은 이제부터라도 박유원의 마음에 보답할 수 있게 마음을 정리해보자고 결심했다. 박유원은 공부를 무척 잘하는 놈이고, 연구원인 부모님의 자취를 따라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어서 수윤과 다르게 고등학교를 인문계가 아닌 과학고로 갔다. 지금이 바로 마음을 정리할 절호의 기회였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물건도 아니고, 정리하자! 한다고 정리될 리 없지 않은가. 그래서 찾은 임수윤의 전략은 박유원이 아닌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었다. 법에 저촉되는 인간만 아니라면 누구든 상관없다! 박유원만 아니면 돼!

열린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면 금방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첫 전략은 사교성 좋은 사람으로 오해받아서 반장 떠맡고, 뭔 행사 때마다 앞줄에 서서 박유원마냥 애들 주도해야 하는 원치 않은 포지션만 얻고 끝났다.

중학교 때 임수윤과 같이 도서 위원이었던 애 중 같은 고등학교에 배정된 친구가 동아리 활동 시간에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너… 괜찮아?’

‘…아니.’

‘…….’

그 친구는 임수윤의 교복 재킷 주머니에 힘내라는 의미로 마이츄를 슬쩍 꽂아 넣었다. 당시 임수윤은 부담스러운 감투를 쓰고 몹시 힘든 나날을 보내던 중이었으므로 친구의 선물을 감사히 받았다.

임수윤의 계획은 아주 완벽하게 실패했다. 고등학교가 갈라진 거지 사는 지역이 바뀌거나 나라가 바뀐 게 아니었던 탓에 박유원을 자주 만난 것도 한몫했다. 내가 만나러 간 거 아니다. 박유원이 주말만 되면 외박계 내고 매번 우리 집 앞에 와서 초인종을 눌러댔다고.

학교에서 기 빨리고 주말에는 박유원 만나 죄책감을 느끼는 상황에 고등학생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학업 스트레스까지! 임수윤의 정신은 점점 극한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신이 그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선에 도달했을 때, 임수윤은 미친 결정을 하게 된다.

그냥 박유원이랑 깔끔하게 한 번 사귀고 헤어지자!

그가 보기에 그의 짝사랑은 이미 관성의 영역에 들어선 지 오래였다. 관성을 끊는 데에는 연애만 한 게 없고, 이별만 한 게 없다. 통계적으로 접근해보면 한 번 헤어진 커플이 재결합하게 될 확률은 매우 낮고, 오래 짝사랑하다 막상 연애하니 마음이 푹 식는 경우는 꽤 빈번하게 있다고 한다.

혹시 모르지, 박유원이 연인으로는 영 별로라 마음이 확 식어버릴지도.

아니어도 십년 넘게 좋아한 놈이랑 연애 한 번 해보는 거니 나한텐 이득이고.

박유원이 거절하는 미래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너 좋아하니까 친구로 못 지내, 안녕.’ 하고 쌩 가버리는 것도 아니고, 2년 후엔 다시 친구로 돌아간다는데 걔가 거절할 이유가 있어? 그냥 우리끼리 새 놀이 시작하자는 식으로 꾀면 그만 아닌가.

그의 예상대로 박유원은 수윤의 제안을 수락했다. 이 핑계로 조기졸업 안 하고 학교 1년 더 다니겠다 발언했을 때는 어지간히 미친 게 아니구나 싶었다. 이런 놈에게 한국 과학 기술의 미래를 맡겨도 되는 것인지… 말세다.

*

아무튼, 방학 중에 박유원과 2년간 연애하기의 시작을 성공적으로 끊은 수윤은 몇 달 후 개학했다.

그리고 하필 고등학교 1학년 때 동급생들에게 이미지 메이킹을 말아먹은 업보로 임시 반장이 되었다. 임시 반장이 반장 되는 건 국룰아니냐.

수윤은 한숨을 작게 푹 쉬었다. 조례가 끝나고, 선생님이 ‘수윤이는 부탁할 거 있으니까 잠시 나와볼래?’ 하신다. 개학하자마자 일이라니 2학년은 정말 빡세구나.

그는 담임 선생님을 따라 앞문으로 나왔다. 교무실로 가는 길에 듣게 된 임시 반장으로서의 첫 업무는 겨울 방학 때 수속을 마치고 오늘부터 정식으로 등교하게 된 전학생의 도우미 역할이었다. 선생님도 자신이 담당하는 반 임시 반장이 사교성 좋은 놈일 거라고 오해하고 계신 거지.

2학년 8반이 적힌 팻말이 꽂힌 자리를 찾아 걸어가니 선생님 좌석 옆에 마련된 방문객용 의자에 앉은 전학생의 정수리가 보였다.

기다리는 동안 휴대폰으로 판다 영상을 보던 놈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헐레벌떡 폰을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 선생님께 꾸벅 숙여 인사했다.

‘모르는 거 있으면 여기 수윤이한테 물어보고. 얘가 우리 반 임시 반장이야.’

‘…네.’

‘교실 들어가면 빈자리 있으니까 거기 앉으면 돼. 행정실에서 교과서는 받았지?’

‘네. 수특도 샀어요.’

‘그래. 들어가 봐!’

대충 전달사항을 다 말한 선생님이 손을 훠이훠이 휘저었다. 수윤은 전학생과 함께 꾸벅 인사하고는 교무실 밖으로 나왔다.

어찌되었든 임시반장이라는 감투를 썼으니 책임감있게 행동해야겠지. 그는 전학생의 이름을 확인하기 위해 오른쪽 아래 가슴팍 쪽을 스윽 훑었다.

아무것도 없다. 명찰 안 받았어? 물었더니 전학생이 아차 싶었는지 ‘받았어.’하며 백팩 앞주머니를 뒤적였다. 금방 찾아낸 명찰에는 ‘배나언’이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


<다음화>

https://pnxl.me/v0qgz7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