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 러브 하이 EP. 03
[EP. 03] 당연하지! 처음 사귀어보는 건데!
[BL] 러브 하이 EP. 03
EP. 03
당연하지! 처음 사귀어보는 건데!
*
배나언은 상당히 내성적인 놈 같다. 명찰을 핑계로 통성명 끝내고 교실로 올라가는 내내 나를 흘끔 쳐다보긴 하면서 한 번도 말을 걸지 않았거든.
나는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 봐도 나처럼 친구 잘 못 사귈 것 같은 인간을 외면할 수 있는 인간은 아니었기에 배나언이 앉을 자리 옆에 앉아있던 동급생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바꿔 앉았다. 옆에 앉은 나를 배나언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본다.
“옆에 있는 게 모르는 거 물어보기 편할 것 같아서.”
“아. 고마워.”
“고마울 것까지야….”
대충 손사래 치며 나언에게 답하고 시간표를 확인하던 중 창의적 체험 활동이라 적힌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쟤 창체 동아리 정해야 하네.
수윤의 학교는 지망하는 대학의 전공이 바뀐 게 아닌 이상 1학년 때 들어간 동아리를 2학년 때도 그대로 이어 활동하는 곳이었다. 해서 개학 첫 주에도 동아리 입부 희망 조사만 하고 자습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본인 동아리로 이동하여 활동해야 했다.
배나언은 막 전학 온 참이니 동아리 리스트를 보고 원하는 부서를 일단 정한 뒤, 면접으로 선발하는 부서가 아닌 경우 담당 선생님께 따로 찾아가 사정을 말하고 입부해야 했다. 면접이 있는 경우 차기 부장을 찾아가 면접 일정을 잡고 창체 시간이 있는 금요일 전에 면접을 봐야 했고. 참고로 3학년은 동아리 활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차기 부장은 우리와 같은 2학년이다.
“…그래서, 동아리를 정해야 하는데. 작년에 받은 동아리 리스트 파일 있을 거거든? 잠시만 기다려봐.”
빈 사물함에 교과서 넣는 걸 도우면서 상황 설명을 끝낸 수윤이 본인 자리로 가 가방에서 아이패드를 꺼냈다. 파일 애플리케이션에 들어가 ‘동아리’를 검색하자 pdf 파일 하나가 바로 떴다.
배나언은 수윤이 건넨 아이패드를 받아 들더니 화면을 확대해 거침없이 쭉쭉 내리기 시작했다. 미리 생각해둔 동아리가 있는 것처럼. 빠르게 휙휙 넘기던 손이 멈춘 곳에는 익숙한 동아리명이 적혀있었다.
“‘책과 나의 랑데부’ 이거, 도서 동아리 맞지.”
“…어. 그, 이름은 작년 선배가 정한 거야. 이번에 바뀌어.”
“여기 들어가고 싶어.”
책과 나의 랑데, 크흠, 도서부는 임수윤이 소속되어있는 곳이다. 부원들이 교대로 점심시간 도서 도우미 활동을 해야 하는 대신 봉사활동 시간이 나오기 때문에 지원자가 많아 면접을 보는 곳.
“면접 봐야 하지?”
“원래라면 그렇지만…”
“그렇지만?”
“내가 올해 부장이라. 지원한 이유 들어보고 괜찮으면 바로 입부시켜줄게.”
박유원 아닌 다른 놈 좋아해 보겠다고 나대다가 외향적인 인간으로 오해받아서 차기 부장을 떠맡게 된 곳이기도 하지. 보통은 살짝 돌아있는 애가 한 학년에 꼭 한둘은 입부해서 그동안 부장 선발에 어려움이 없었다던데, 이상하게 수윤이 입학한 해에는 죄다 감투 쓰기 싫어하는 애들밖에 없었다.
임수윤은 중학교 동창이었던 친구의 추천으로 하나뿐인 후보가 되어 만장일치로 선발되었다. 전에 마이츄 선물한 그놈 맞다. 나쁜 새끼.
하여튼. 배나언은 도서부 부장이 수윤이란 소릴 듣자 눈이 커지더니, 자신이 초등학생 때부터 도서부 활동을 했다며 빠르게 어필하기 시작했다.
“부장도 해봤어?”
“응. 중학생 때.”
“좋아. 이따 점심시간에 담당 선생님 뵈러 가자. 1학년 교무실에 계시는데, 나랑 같이 갈 거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임수윤은 이놈을 잘 꾀어서 현재 지원자가 없어 공석인 부부장에 올려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도서 행사 정하고 신입생 면접 때 질문할 것들 정리하고 하려면 가까운 곳에 있는 놈일수록 좋았으니까. 배나언은 같은 반에 옆자리이고 성격도 그리 드세지 않아 보이니 딱 좋았다.
*
주말이 되었다. 임수윤은 이번에도 외박계를 내고 집에 온 박유원과 애인으로서 첫 데이트를 하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데이트라고 해도 그냥 스터디 카페 가던 걸 북카페로 바꾼 정도다. 그래서 회색 학교 체육복 바지에 흰 반소매 티, 검은색 펀칭 카디건을 걸치고 백팩 대충 메고 나왔는데 박유원이 누가 봐도 데이트 나가려는 듯 한껏 꾸민 차림으로 나와서 빵 터졌다.
“푸,푸흡. 너 뭐냐.”
“야! 사귀는 건데 왜 옷이... 옷이 그래?”
“가서 공부할 거잖아.”
“아니, 그래도!”
박유원은 ‘사귀자더니… 사귀자더니…!’ 연신 중얼거리며 내 팔을 끌고 우리 집 도어락을 거침없이 해제한 후 내 방으로 들어갔다.
“조끼는 언제 샀대.”
“이번 주 화요일에... 그게 중요해?”
“아니 그냥 웃겨서.”
너 되게 기대했나 보다. 내 옷장을 뒤져 데이트룩으로 합격인 옷을 꺼내던 놈이 내 웃음소리를 듣고 ‘당연하지! 처음 사귀어보는 건데!’ 외치며 연회색 후드 티를 던졌다. 후드티에 프린팅된 숫자의 색이 박유원 조끼 색과 비슷하다. 두 개를 비교하고 더 빵 터져 웃으니 녀석이 으스대며 ‘잘 골랐지?’ 말했다.
“잘 골랐네.”
“바지도 그거 말고 청바지 입어!”
암만 오래 본 사이라지만 학교 체육복은 너무한 거 아니냐? 이게 내가 가진 트레이닝 바지 중에 제일 예쁘고 편한데. 학교 로고 없어서 티도 안 나고.
“내가 알잖아!”
“네네, 갈아입게 나가세요.”
“우리끼리 무슨 내외… 아, 지금 사귀고 있지. 나 이제 가방 고를 거니까 뒤돌아서 갈아입어.”
“그러든가.”
*
엘리베이터에 타서 일 층 버튼을 누르는데, 박유원이 ‘넌 진짜... 나 아니었으면 첫 데이트부터 차였어. 알지?’하며 연신 본인의 착한 인성을 칭찬하기 시작했다. 데이트룩도 친절하게 다 골라주고 천사다 천사. 예에 천사님, 죄송합니다. 얼른 가시죠.
장난치면서 아파트 밖에 나왔는데 슈퍼에서 두부를 사서 집에 들어가려던 엄마와 딱 마주쳤다. 엄마가 우리 둘의 모습을 훑어보더니 풋 웃으며 말했다. ‘데이트하는 줄.’ 박유원이 긴장해서 침을 크게 삼켰다. 똑똑한 머릴 잘 굴려보면 진짜 의심하고 던진 말이 아니었다는 것 정도는 금방 알 텐데.
“어, 데이트 가.”
“어디로?”
“북카페.”
“또 책이야?”
엄마는 우리가 하는 게 진짜 데이트인 줄도 모르고 놀러 간다면서 또 책 읽으러 가는 거냐며 어이없어하는 얼굴을 했다.
“유원아 나중에 쟤가 책 한권 사서 그거랑 결혼한다고 하면 꼭 네 선에서 말려라.”
“…네!”
“어우 예뻐. 우리 예쁜이. 잘 놀다 와. 이모가 유원이 좋아하는 쪽갈비 김치찜 해줄게.”
“…네!”
“대답이 느리다?”
“좋아요!”
내가 엄마와 대화하는 동안 겨우 긴장을 푼 박유원은 이내 헤헤 웃으며 익숙하게 엄마의 머리 쓰다듬을 받고 ‘다녀오겠습니다!’ 외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나도 따라 고개를 까닥 숙여 인사하고 버스 정류장으로 다시 걷기 시작하는데 박유원이 ‘아! 머리!’하며 울상으로 머릴 만졌다.
“머리에 뭐 했었어?”
“했는데. 이모가 망가트렸어….”
“괜찮아. 한 줄도 몰랐음.”
“야!”
박유원이 씩씩대며 버럭 성질을 냈다. 네가 고백한 줄. 끅끅 웃으며 말하자 박유원이 ‘나도 순간 내가 사귀자고 한 건가 했다! 2년 제한 아니었으면 오늘 바로 헤어졌어!’ 한다.
첫 데이트라고 신경 써서 꾸미면 하나하나 의미 부여하는 티가 팍 나니까 부담되지 않냐. 진짜 사귀는 거라고 보긴 힘드니까 괜히 부담스러워하지 말라고 평소와 비슷하게 입은 건데. 티셔츠랑 검은 카디건은 나름 신경 쓴다고 새로 샀었고. 티 안 났으면 성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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