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나기
2회차, 멜 님
네 생각이 모여 달게도 익었다 허벅지가 달랑달랑 드러나는 바지를 입고 정사각형의 평상에 앉아 커다랗고 동그란 수박을 쪼개 먹는다 과육을 내 심장으로 만들었어 새빨갛고 물이 많은 조각들을 너에게 줄게 씨 한 톨도 남기지 말고 씹어 삼켜줘 너의 목구멍을 타고 흐르고 넘쳐서 난 그곳에 집을 지어야지 무럭무럭 자라 심장이 되고 적혈구가 되어야지 널 탐험하기 위해 난 홀로인 거야
천진난만한 바람이 불고 새가 초록을 노래하고 햇살이 명랑하게 태어나는 정오
내가 가득해진 너는 이제 어디로 갈까
계절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준비물 그건 어린아이의 마음이야
눈꺼풀 뒤로 무한히 확장되는 세계
땅이 울리면 어떤 세상은 뒤집히기도 해
그러니 발을 구르는 걸 잊지 마
세포가 된 나는 네가 어떤 꿈을 꾸는지 모두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이 여름에 나를 부르는 걸 잊지 마
제가 정말 좋아하는 키워드 중 하나가 '여름'인데(그 계절을 살아가는 건 힘들어하는 것과 별개로요...) 한 번도 이 주제로 무언가 써보지 않은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뭐라도 써보았습니다.
저 스스로도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제 시에는 화자의 '상대'가 항상 등장하는 것 같아요. 실제로 그런 애틋한 사이로 지칭할 만한 사람이 없어서 오히려 더 쉽게 그 자리에 미지의 존재를 두는 듯합니다.
이번주도 쓰면서 재미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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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하는 판다
완성도 높은 연극의 한 장면을 본 것 같아요. 모든 묘사가 전달하고자 하는 이미지를 선명하게 그려 내요. '눈꺼풀 뒤로 무한히 확장되는 세계'부터 마지막 구절까지가 저는 제일 좋았어요. 저 둘의 사이를 비집고 저도 저 연극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지게 하는 시였습니다. 잘 읽었어요.
HBD 창작자
'과육을 내 심장으로 만들었어', '널 탐험하기 위해 난 홀로인 거야', '내가 가득해진 너는 이제 어디로 갈까' 등, 좋은 문장을 꼽으라고 하면 시 전체에 하이라이트를 쳐야 할 정도로 제 취향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1회차의 멜 님 글보다 이번 2회차의 시가 무척 취향이에요. 시 안에서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서사 역시 뚜렷하고,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도 청자에게 전달되고 있고, 이미지와 심상 역시 무척 잘 느껴집니다. 스터디고 지인이라 좋은 말만 가득 해 드리는 게 아니고, 별로 흠잡을 데 없는 시지 않나 싶어요. 1회차의 시는 어떤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지 재독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번 시는 명쾌하다 못해 산뜻합니다. 어쩐지 명랑하고 산뜻한 글과 다정한 글이 늘 오버랩되는 것은 아닌데도 이 글에는 그 모든 속성이 드러나 있네요. 좋은 시입니다. 저는 1연의 쭉 이어지는 수박에 대한 묘사보다 이후로 이어지는 개별적인 연들이 더 마음에 들었어요. 첫인상보다 현인상이 훨씬 좋은 글이네요. 여름은 정말 시인들의 뮤즈인 계절이 아닌가 싶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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