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해 본 적 있는 것
3회차, HBD
지난 추억을 답습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공통된 버릇입니다. 사실 그 추억은 나의 것이라든가 당신의 것이 아니고 인류에게 균등하게 배분된 이상한 기억일 뿐이에요. 만들어지고 주물러져서 학습된 것입니다. 나는 단 한 번도 여름다운 여름을 겪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너무 명랑한 네 앞에서 결코 이런 말을 지껄일 수 있는 자신은 없고
나는 자꾸만 없는 누군가를 따라합니다. 그건 내가 만들어진 무언가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논리적이고 이론적인 부연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느끼는 것이 곧 정설입니다. 부재하는 실체가 되고 싶어서 누군가를 자꾸만 쫓아가지만 거기엔 종착지랄 게 없습니다. 나는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절차로 태어난 게 아니고 어떤 박사가 만들어낸 몸뚱어리를 인위적으로 이 땅에 박아버린 것 같다는 생각과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자아가 있고 취향이 있고 존재 증명이 가능한 자가 되어야만 추억될 수 있습니다. 만들어진 것은 또 다른 무언가를 다시 만들어냅니다. 순환입니다. 악인지 선인지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계속해서 굴러가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돌고 돌고 돌다 보면 결국 원본에 도달하게 되고 그렇게 파생된 또 다른 원본은 아류와 아종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니까 나는 누군가를 베낀 나쁜 품질의 변이종일 뿐인데
어느 순간 모든 것을 깨달아버린 얼굴로 빗속에서 오도카니 가만히 서 있어도
모두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다고 일갈하듯
너무 자란 너는 네 예측관 다르게 여전히 너무 해맑다
1회차의 ‘너’ 시점에서 전개되는 글을 보고 싶다고 해 주셨지요. 답변이 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시에서 마침표를 찍는 것은 거의 처음인 것 같은데(처음이 아니어도 무척 적은 빈도의 일이라) 그래서 더 시, 라기보다 그냥 문장의 덩어리……가 된 것 같기도 합니다. 스터디인데 자꾸만 성에 차지 않는 결과물만 내어 놓는 게 스스로 몹시 불만족스럽긴 한데 그래도 제가 약한 구석에 대해 피드백 받을 수 있어 기쁩니다.
번거롭지 않으시게 1회차의 글도 링크해 둘게요!
사실 1회차 때는 저 스스로도 소위 말하는 급발진 때문에 좋은 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답니다. 그 점을 피드백으로 날카롭게 짚어주셔서 기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고 오묘했네요. 금번의 주제는 굳이 말하자면 타자화, 정도겠습니다. 1회차의 ‘나’는 ‘너’를 무척 가공된 이미지로 보고 있었지만 실존하는 ‘너’를 그렇게 아름답게 미화된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면 결코 둘에겐 깊은 교차점이 없다는 반증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1회차의 화자는 본인이 너무 커버려서 지난 추억에 괴리를 느낀다고 생각하지만 3회차의 화자는 네가 나이를 먹어서 그런 게 아니라 원래부터 나를 너무 미화해서 보고 있었다, 라는 말을 하고 싶었답니다. 이렇게 구구절절 이야기 하는 게 시를 감상하는 데 있어 좋은 첨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다른 분들의 시도 재밌게 감상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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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수집하는 나비
생각했던 느낌과 전혀 달라서 오히려 재미있었어요 읽으면서 어 좀 딱딱한데 일부러 이렇게 쓰신 건가? 시라기보다 뭔가 분석적인 글 같다 느꼈던 게, 붙여주신 코멘트를 읽으면서 시원하게 납득 되었답니다 전 코멘트에 붙여주신 '너를그렇게아름답게미화된사람으로보고있었다면결코둘에겐깊은교차점이없다는반증'이란 표현이 왠지 더 다가와요 실제로 가까울수록 그 사람의 온갖 일면을 알게 되잖아요 역시 해비디님의 통찰력은 언제나 재미있어요
검색하는 판다
직접 시라기보다는 문장의 덩어리 같다고 말씀하신 데에 일부 공감을 해요. 개인적으로 '너'라는 존재의 정체를 감각적인 이미지로 묘사해 내시는 것을 보고 싶었거든요. 내가 보던 '너'라는 사람이 어떻게 미화되어 있었는지 더욱 매력적으로 표현해 낼 수 있을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내가 보던 '너'라는 존재의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요. 그 속성으로 보이던 것을 전복시켜 보여 주신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이 점은 새로워서 좋았어요.
용기있는 유니콘
저번 시에서는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끝에 들어 정말 좋았답니다. 무슨 말로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이미 너무 친숙하던 것을 완전히 놓아버리고 그 밖에서 너무나도 상실된 채로 그것을 관조하기 때문에 더 말간 시였던 것 같아요. 그것이 완벽하게 한쪽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어쩌면 그렇게 기억하면서, 많이 기억하면서 사랑받고 싶었던 우리 부른 이와 불확실성으로 처음부터 괴로웠고 자신만의 고유함을 이미 부정하고 있는 우리 속의 타자가 원한 것의 차이라고 생각이 드네요. 정말 네가 깨달은 건지 아니면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너무 해맑고 명랑한 부른 이는 불리는 이를 위해 언젠가 우리를 잊을 수도 있을까요. 저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좋았어요. 이 아이나 저 아이나 많이 외로운 빗속을 오래 전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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