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이설] 양각야호

도사들 틈에 여우 한 마리가 있네

*9월 16일 공개된 화산귀환 헤테로 CP 합작 <9월의 나들이>

참여작입니다. 아름다운 작품들과 헤테로 cp가 즐비하니 꼭 봐주세요! 

*원작 337화, 715~720화와 대응되는 부분이 몇 있습니다. 

* 썸네일은 클튜 소재입니다.


 

"도사들 틈에 여우 한 마리가 있네."

골목 구석에 앉은 노파의 한마디가 오검의 주의를 끌었다. 오검이 서로 의아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방금 저 사람 우리 보고 한 말인가?"

"저도 들었어요. 우리 중에 여우가 있다는데."

"그럼 여우는 누군데?"

"청명이 아닙니까?"

"점쟁이가 이목을 끌려고 작정하면 뭔 말을 못 하겠어? 장사 더럽게 안 되나보네. 잡담 말고 갈 길이나 가자."

"청명아, 사형 땅에서 꺼내는 주고 가거라."

"… …."

땅에 무릎까지 박힌 조걸을 빼내주던 청명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점쟁이를 바라보던 유이설을 발견했다.

"사고 안 오고 뭐해."

"…가."

청명은 그 자리에 서서 무리에서 뒤떨어진 유이설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줄곧 점쟁이 쪽을 바라보고 있던 유이설은 그제서야 퍼뜩 청명을 보고는 일행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청명이 농담을 던졌다.

"왜. 사고가 여우라서 그래?"

"……."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는 대답을 예상하고 던진 말이었다. 그러나 유이설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턱을 살짝 틀어 청명의 시선을 피하는 것이다. 청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

어?

저거 식은 땀인가? 

✿∘°˚°❀°˚°∘✿ 

*양각야호: 두다리로 선 여우라는 의미로, 음흉하고 탐욕스러운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주로 간신배를 표현하는 말이나 여기선 '인간을 흉내내어 두 다리로 선 여우'라는 의미로 사용함. 

여우(狐).

고대 서진 어느 박물지의 기록에 따르면, 몇 십년을 수행한 여우는 여인으로 둔갑할 수도 있다고 한다. 미인으로 둔갑한 여우가 인간의 정기를 탈취하거나 미색으로 나라를 어지러뜨린 죄를 저지르고 죽임을 당하는 소설도 심심찮게 유행하곤 했다.

꼬리 아홉 달린 여우, 어린아이들을 잡아먹는 여우. 

사람으로 둔갑한 여우...

사고가?

에이, 설마.

유이설만큼 출신 성분이 확실한 사람도 없다. 아비의 무덤을 본 것도 생생히 기억이 나는데. 

"사고. 시간 있어?"

"?"

"왜 뜬금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봐? 오랜만에 대련이나 하게. 전에도 해달랬는데 바빠서 못 해줬잖아."

"...괜찮아."

"뭐? 어? 어디가? 사고! 야!"

청명은 갑자기 산 속으로 뛰어드는 유이설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길거리에서 점술사를 만났던 그 날 이후로 유이설은 청명과 단 둘이 있는 시간을 유난히도 꺼렸다. 당과 훔치고 안절부절 못하는 어린애마냥 청명의 그림자만 보면 도망을 쳐댔다. 다른 사람들하고는 잘만 있는데, 유독 청명하고만... 

청명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갑자기 왜 이렇게 피하지?'

에이씨, 몰라. 

이렇게 속이 훤히 보이면서도 아리송하게 하는 것은 처음이다. 진짜 가지가지 하네.

황급히 달아나는 유이설의 뒷모습이 그의 시야에서 점점 작아져갔다. 

✿∘°˚°❀°˚°∘✿ 

"이게 맞아?"

"지금 장문인의 말씀에 항명을 하는 거냐?"

"아니, 그건 아닌데…."

내 참….

청명이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신물이라지만, 그도 온 중원을 뒤져가며 찾고는 싶지만, 암향백매화를 보았다는 제보 한마디에 멀리 남쪽의 광시까지 오검을 파견하여 이리 긴 시간을 보내게 하는 것이 마냥 기껍지만은 않았다. 지난 유물을 찾는 일이 가치 없는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냥 할 일 제쳐두고 서두를 일도 아니었기에. 안 나오면 천천히 찾아도 된다니까? 아무래도 장로들과 장문인에게는 어려운 시절 화산의 신물이 어딘가로 실종되어도 별 수를 쓰지 못했던 선대의 기억이 크게 남았던 모양이었다.  

"왜 그리 입이 댓 발 나왔느냐."

"사숙 같으면 지금 그럼 싱글벙글 하게 생겼어? 지금 서가(西街)는 물론 양삭(陽朔) 근방의 상단이랑 표국을 다 뒤졌는데 꽃 비슷한거 하나 없는 거 봐. 이러다가 저기 저 강바닥까지 다 뒤지겠다?"

"필요하다면 그리 해야지.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 눈깔이나 고쳐 떠라."

"맞아요, 사형. 왜 어깃장을 놓아요? 다른 것도 아니고 신물을 찾는데 품 좀 들여야죠. 이런 것이 어쩔 땐 가장 중요하다고요."

"그래도 제보도 들어온 마당에 이걸 찾아야 장로님들께서도 선조를 뵐 면이 설 거 아니냐."

당소소와 조걸이 청명의 어깨를 툭툭 치며 투덜거리는 조카 달래듯이 타일렀다.

그 선조가 나라고 이것들아...

"그런데 정말이지 좀처럼 감이 잡히질 않네요. 어디 팔려가긴 한 것 같은데 며칠째 거래된 과정을 좇으려 해도 흔적이 보이질 않고."

"모래 속에서 바늘 찾는 꼴이긴 하지. 제보가 거짓말이었나…?"

"그런데 사고는 어디로 갔죠?"

"그러게. 저쪽 탐문해본다고 하고 갔는데."

"혼자서요?"

"리강(離江) ."

대화를 하고 있던 두 사람은 들려오는 음성에 뒤쪽을 돌아보았다. 탐문을 마치고 온 듯, 어디선가에서 날아온 유이설이 부드럽게 착지했다. 청명이 눈을 가늘게 떴다. 

'오늘 따라 더 날라다니네….'

"리강이요?"

"가라앉은 상선이 있어. 아래에 물건 많음."

그 말을 듣고 있던 청명이 한숨을 쉬었다.

"오늘 안에 돌아가긴 글렀구만."

십 리에 달하는 거리에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十里畵廊) 리강은 중원을 통틀어서도 손에 꼽히는 아름다운 강으로 유명했다. 잔잔하고 넓은 강은 푸른 비단과 같고, 양쪽으로 자리한 거대한 암석이 마치 벽옥으로 깎은 비녀와도 같았다는 어느 시인의 묘사가 떠오르는 광경이었다. 오검은 나들이를 온 객들처럼 나룻배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듣던 대로 장관이긴 하네요."

"와…. 선계 말고 여기로 오는게 더 좋을 것 같은데요? 아아악!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말이!"

"그래서. 대가리 말고 주둥이를 때려달라는 의미인 것이냐?"

"죄송합니다."

나룻배를 타고 가다보니, 어느새 맑고 잔잔한 수면은 온데간데 없이 뒤집어진 배와 홀딱 젖은 채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상인들, 그리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몇몇 사람들의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다행히도 사람들은 다 빠져나왔으나 그 안에 있는 물건들을 거의 건지지 못해 애가 타는 듯 했다. 몇몇 이들이 실갱이를 벌여댔다.

"그러게 어디서 대충 만든 배를 가져와서…!"

"이 양반이 어디서 배 탓은 배 탓이야? 이전까지 탈 없이 운행한 배라고!"

"저기 가라앉은 것들의 가치를 다 모으면 그딴 배는 열 척도 산다고!"

"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말씀 좀 묻겠습니다."

"아니, 배가 가라앉은거 빤히 안 보여? 어? 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백천에게 대뜸 쏘아붙인 사내가 옅은 미소를 띤 그의 얼굴을 보고는 할 말을 잃었다. 

"우리가 누군지 또한 빤히 보일거라 생각하니 통성명과 겉치레는 사절하겠습니다. 혹시 이 배가 어디서 온 배인지 아십니까?"

"…전부는 모릅니다. 여러 상단에서 운송을 의뢰한 배라서 이곳 저곳 들렀을테니… 양삭으로 갈 배라는 건 확실합니다."

"이거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오늘 아주 일 복이 팡팡 터지네."

"작게 말해라."

수색이라는 명목의 자원봉사를 시작한지 일 다경도 되지 않아, 가라앉은 배의 수습을 섬서에서 온 화산 오검이 자발적으로 돕게 되었다는 소문이 근방에 퍼지게 되었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감사의 인사와 신기한 듯 바라보는 시선들을 적당히 받아 넘기던 청명이 수면 아래서부터 궤짝들을 건져 가지고 올라오는 유이설을 흘끔 바라보았다. 네가 이 팔자에도 없던 노동의 원흉이라는 듯, 제 사고를 지긋이 째려보던 청명이 대뜸 말을 건넸다. 

"사고도 암향백매화인지 뭔지가 찾고 싶어?"

유이설이 움찔 굳다가 청명 쪽으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뭔가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몸짓이었다. 이곳은 보는 눈이 많은 곳이니 청명을 대놓고 피하지 못하니 저리 껄쩍지근하게 행동하는 게다. 

"당연. 화산의 신물이니까."  

"그거야 두 번 말하면 입 아프지."

뭐 신물은 신물이긴 하다. 청명도 처음 옥천원에 암향백매화가 없다는 것을 알았을때엔 혼절을 했었다. 화산도 아닌 다른 것들 손에 있을 수도 있으니 찝찝하고, 찾아다가 위패들 앞에 올려두면 속이 한결 놓일 것 같긴 하지만…. 

이리 최우선으로 두고 시간을 들일 정도는 아니란 말이다.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데, 안 그래도 수련하고 이것저것 하느라 바쁜데…!

유이설은 상선의 잔해들을 치우고 물건들을 끌어올리는데에 집중하면서도, 종종 강 바깥의 높이 솟은 봉우리들을 바라봤다. 그것이 마치 뭔가 약속된 장소를 바라보는 것 마냥 보이기도 했다.

"거긴 왜. 산들도 다 뒤지려고?"

유이설이 할말을 잃은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말끝은 흐렸다. 

 "그냥…."

"이렇게 잘 깎인 산들이 처음이어서 그런가? 하기야, 여기가 운치 있는 곳이긴 하지."

 비록 여긴 뒤집어진 배 때문에 풍경 감상할 여유는 없지만.

화산파의 무인들과 운남의 영물 한마리가 일손을 거드니 전복된 배의 수습은 예상보다도 더욱 빠르게 마무리 되었다.  

"자, 물품 대장의 수량과 건진 물건들의 양을 대조해 보니 여기 이 이상의 물류는 없습니다. 전부 건진 거죠."

"야. 정말 없어?"

백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남아있는 전승에 의하면 암향백매화의 향기는 화산에서 제일 오래된 매화나무의 껍질과도 비슷한 향취가 나기에, 혹시나 하여 그 냄새를 익히게 했던 바였다. 쓸모는 없었지만… 

"완전히 똑같은 냄새가 아니라 비슷한 냄새!"

"키이이!"

"없단다."

"또 허탕이네요..."

"대체 어디 있는건지 원."

"그런데 사고는 어디 있죠?"

"어? 어디 갔지?"

"사매야 아까부터 여기 계속… 어?"

"사고?"

"사고 어디 갔어?"

"뭐 찾으러 와서 다른 걸 잃어버리면 어떻게 해?"

"찾아야지 뭐."

"물 속에 있는거 아니죠?"

유이설을 제외한 오검이 강 한가운데에서 계림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아름다운 강 주변으로 곳곳에 푸르고 둥근 산들이 솟아있었다. 

"엄청 넓네요."

"선계가 떠오를 정도로…" 

"난 저기 서쪽 강에서 가장 가까운 봉우리부터 뒤져볼테니까 각자 찾아보고 해질때 쯤에 다시 여기로 모여."

"그래. 수색을 어떻게 할지의 여부는 일단 사매를 찾은 후에 정하자꾸나."

"찾으러 왔으면서 찾게 하는 행동거지 하고는."

돌아가면 이 행동을 후회하게 해주겠어. 청명은 욕지거리를 씹어뱉으며 숲으로 뛰어들었다. 

나뭇잎이 빼곡한 숲은 아직 해가 지지 않았음에도 햇빛이 가로막힌 바람에 약간 어둑했다. 그리고 유난히 새나 사슴 같은 동물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고 어딘가 음산했다. 이에 수상함을 느낀 청명은 기척을 내지 않고 천천히 숲을 둘러보았다. 수 다경 후 기감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짐승이겠거니 하고 그쪽을 돌아보니, 다름아닌 유이설이었다. 

'생각보다 쉽게 찾았네.' 

자신조차도 잘 느끼지 못하는 유이설의 기척이 평소와는 달리 고요하지 않으니 조금은 이상했다. 

"사-"

별 의심 없이 사고를 부르려던 청명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헙 입을 다물었다.

저게 뭐야…? 

사고의 도복 자락 아래로 몇 뭉텅이 털 달린 꼬리가 살랑였다.

'저건….'

여우의 꼬리인가?

"……." 

청명의 목소리를 듣고 저를 향해 뒤돌아본 사고의 눈빛이 이상했다. 청명은 경계심을 감추지 않고 유이설의 눈을 맹렬히 쏘아봤다. 살짝 젖어 헝클어진 앞머리 사이로 햇빛을 반사하는 검은 눈이 자석처럼 그의 시야 중앙에 딱 맞물렸다. 

"사고…?"

그녀는 사뭇 곤란해하는 기색이었다. 유이설이 제 머리를 한쪽 귀 뒤로 넘기고는 작게 입을 달싹였다. 왜 안하던 짓을 하지.

"…사질."

그리고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마냥 물기 있는 눈을 부러 동그랗게 뜨는 것이다.

"…뭐하는 거야, 지금."

청명이 흠칫했다. 저건 사고가 아니다. 사고는 저런 눈 따위 하지 않는다.

뭔가 수상한 짓을 하다가 청명에게 걸린 절체절명의 위기조차 자기 미모로 무마할 수 있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저 어딘가 귀엽… 아니, 괘씸하고, 가증스럽다 못해 요살스러운 눈빛따위…! 그녀는 하지 않는다.

이를 의심할 여지도 없이 매우 잘 알고있던 청명은 유이설을 그저 경악어린 눈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청명이 냅다 삿대질을 해댔다.

"야! 이새끼 이거 너 누구야! 사고에게서 안 나가?"

"…?"

"이게? 묻는 말에 대답 않는건 무슨 버르장머리... 아! 이마에서 손 떼라고!"

"아파? 의원 필요해보여."

"…허, 의원 같은 소리 하고 앉았다."

청명은 헛웃음을 지었다. 물론 평범한 사내들이었다면 이마에 닿아오는 유이설에 손길에 얼굴에 피가 확 몰려 정신도 못 차렸겠지만, 애석하게도 이 하늘 아래 발붙이고 콧바람 쐬어본지가 백 년이 넘은 청명에게는 예외였다.

제압은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청명은 유이설의 팔을 뒤로 꺾은 채 움직이지 못하게 짓눌렀다. 유이설의 거죽을 한 미지의 존재가 연기를 멈추고 얼굴을 팍 일그러뜨렸다. 내숭 떨더니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는구만. 

"뭔 도사가 이리 무거워...!"

"천근추라고 들어는 봤나? 잡귀면 함부로 도사의 몸을 뚫을 순 없었을 거고. 정체가 뭐냐."

"잡귀 아니거든? 무려 벽하원군님(碧霞元君: 태산을 관리하는 여선女仙. 태산노모太山老母라고도 한다.)의 밑에 있는 구미호(九尾狐)라고!"

"얼씨구, 그럼 나는 원시천존 밑에 있는 도사다 이것아. 그리고 여우귀신은 잡귀가 아니더냐?"

예상대로였다. 흔히 볼 수 있는건 아니었으나 이전 생에서 청명은 가끔 양민들의 의뢰로 잡귀신에 씌인 자들을 위한 도제를 올리는 것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다른 사람들처럼 마냥 생소하진 않았다. 물론 도사가 다른 요괴인지 모를 것에 걸려든 것은 처음 보지만. 뭐 그만큼 이 놈은 잡신보단 특수한 존재이긴 한 모양이다. 오히려 청명보다 여우가 더 놀란 듯 했다. 

"고작 한 백년도 안 된게 자꾸 노인네 말투를… 뭐야? 너 최소 백년 넘었네? 아이고 내 팔자야. 하필 이런 노인네한테 걸려서…"

"뭘 알긴 아네. 꼴에 잡신도 신이다 이거냐?" 

"그딴 사파랑 비교하지 마! 우린 몸을 드나들 때 대상과의 쌍방 동의 약속대로만 한다는 철칙이 있거든? 너야말로 나이는 먹을대로 먹었으면서 이런 어린 여자한테 사고라고 하고 사니까 좋냐? 이 음침한 노인네야! 아아악!"

 "좋아서 할 리가 있겠냐? 내가 선조인데! 이게 어디서 격장지계야? 그보다 약속이랬지? 너 딱 걸렸다. 너가 사고를 노리고 사기를 친 게야. 아무것도 모르는 애 꼬드긴 건 언제였는지도 불어라." 

"사기도 잡귀도 아니야! 내가 하는 건 오직 정당한 거래라고. 오히려 내가 얘 목숨을 살린 거라니까?"

여우가 유이설의 얼굴을 한 채 청명쪽을 쏘아보며 앙칼지게 반박했다. 뭔가 적응이 되지 않는 풍경이었다. 청명이 못마땅한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뭔 개소리냐, 그게."

"그것은 이대로 말하기엔 긴 이야기인데..."

여우는 청명에게서 슬쩍 빠져나와, 점잖게 양반다리를 하고 앉…으려다가 청명에 의해 저지되었다.

"악…!"

"어디서 먹히지도 않을 수작질을. 이대로 말해라, 사고 몸 뺏은 벌이다."

청명은 여전히 유이설을 짓누른 채였다. 힘을 끌어올려보다가 몇번이나 고개를 바닥에 떨군 유이설, 아니 여우가 결국은 그에게 굴복했다. 

"내가 한 이백 년 살았는데 이렇게 왈가닥인 놈은 처음 보네. 그럼 천천히 들어보고 판단해."

유이설의 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느 산 중턱을 지나는데, 외딴 곳에 여린 기척이 하나 느껴져서 보니까 어떤 오두막 안에 죽은 남자 하나랑 여자아이가 있는게야. 안 그래도 어린 것이 몸도 약해 갖고, 이대로면 반 시진도 버티기 힘들어 보였어."

- 얘. 너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데, 내가 소원 하나 들어줄까?

- …….

여우는 아이의 시선이 닿는 곳을 따라갔다. 죽은 지 시간이 좀 지난 남성의 시신에서 추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이거 웃긴 애네? 이미 죽은 사람은 못 살려. 벽하원군 님이 오시면 모를까. 그보다 당장 너야말로 숨이 끊어지게 생겼는데. 

- …….

- 그러지 말고 내가 너 살려주는 걸로 하자. 조금만 숨 붙여놓으면 곧 네 아비의 스승이 널 구하러 올거야. 그때까지만 버티면 너 살 수 있어. 동의하면 눈만 끔뻑여봐.  

"이렇게 된 거라니까는. 이제 좀 놓지?"

"……."

여우가 슬쩍 청명의 손아귀를 빠져나와 바로 섰다. 그가 늘어놓는 사연에 청명은 다시 여우를 제압할 생각도 없이 잠자코 생각에 잠겨있을 뿐이었다. 

껄적지근한 기분이었다. 청명이 죽은 후 오랜 시간이 지나, 망해버린 화산을 등지고도 잊지 못한 채 매화를 그리며 죽어간 화산의 제자와 그로 인해 홀로 남겨졌었던 그의 여식은 언제 들어도 복잡한 감정이 드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내 영험한 능력으로 대충 상황을 파악하고 보니 아이 아버지의 스승이 연통을 받고 오고 있었지만, 이대로는 오기까지 얘가 버틸 수 있을 지 장담할 수 없었어. 딱한 사정 지나칠 수 없어서 도와주기로 한거지. 겸사겸사 나도 도움 좀 받고?"

"사고도 참… 혼자 끙끙 앓기는. 그냥 장문인이나 나한테만이라도 솔직하게 얘기 하지."

"그러겠냐? 어디 말했다가 너같이 지랄맞은 사질 귀에 들어가면 어디까지 날뛸 지 모르는데 잘도 말하겠다."

"끙……."

앓느니 죽어야지.

사고 몸으로 팔짱을 끼며 빙글빙글 빈정대는 잡귀가 얄미웠지만 틀린 점이 전혀 없었기에 반박할 수는 없었다. 청명은 슬쩍 말을 돌렸다. 

"지 잇속 챙기려 냉큼 잡은거 살려준 척 포장하니 우습구나."

"불리하니까 말 돌리기… 아야아악! 이거 니 사고 대가리라고! 사고도 똑같이 아파할 수도 있다고!"

"그니까, 어쨌든 간에 사고 몸을 뺏기로 했다 이 말이지? 장문인이 오시기까지 목숨을 붙여주는 대신에."

"그리 말하면 섭하지. 빌린 거야, 빌린 거. 스물 다섯이 되었을 때 그믐날 단 하루만 이 아이 몸을 빌리기로 했어."

"왜지?"

"그건 비밀인데…."

"사고 얼굴로 누구 후리려는거면 가만 안 두겠다."

"...이거 도사 맞아? 내가 일부러 미인을 노린거면 아기한테 접근하진 않지! 물론 이렇게 어여쁘게 클 줄은 생각도 못하긴 했지만. 아까 개울물에 얼굴을 슬적 비춰보았는데 화들짝 놀랐… 악! 알았어! 빌린 거 돌려줄 때까지 너도 따라가면 되잖아!"

"이상한 거 하는 순간 기운으로 바싹 말려버릴 줄 알아라."

"나 잡귀 아니라고. 파사破邪의 기운 안 통한다고. 하여간 나이랑 얼굴도 따로 노는 말코 주제에... 알았어. 그만할게."

청명이 무감정한 표정으로 주먹을 내려놓았다. 유이설, 아니 여우는 고개를 홱 돌리더니 따라오라는 듯 숲 속으로 척척 걸어들어갔다. 계림의 숲은 어딜 돌아봐도 똑같은 풍경의 미로 같았다. 그러나 여우는 확실한 목표점이 있는 듯 막힘 없이 길을 찾았다.

"여기가 네 살던 곳이냐?"

"맞아. 여기 내 집이 있어."

"이 숲이 네가 사고 몸을 뺏은 이유가 있는 곳이기도 하냐?"

"그래."

"그것 참 기가 막히는 우연의 일치로군. 하필이면 우리가 고생하러 온 곳이 네 살던 곳이고 네 볼일 있는 곳이라는게..."

"……."

"감히 문파의 신물을 두고 사기를 쳐? 이래도 네가 사기꾼이 아니라는 거냐? 사실 쳐맞아 죽고 싶은 게 아니고?"

"…나도 달리 방법이 없었어."

"나보고 그 말에 그냥 예예, 하고 잠자코 있으란 거냐?"

말은 그렇게 했으나 청명은 그저 잠자코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약속'이라는 것으로 저 것이 사고의 몸을 차지한 이상 마음대로 그녀에게서 저 존재를 쫓아내는 것은 사고에게 해가 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청명은 유이설이라는 인질 때문에 손발이 묶인 꼴이었다. 그는 치밀어오는 분을 누르며 잠자코 여우의 뒤를 따랐다. 

푸르른 숲을 걷다보니, 발 딛는 곳이 온통 푸르거나 흙빛이던 와중 조금씩 황금색 이파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부채같이 둥근 모양이 은행나무의 이파리였다. 매끈한 은행나무 이파리들은 푸른 색들 사이에서 홀로들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니 중추절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 곧 은행나무에서 노란 잎이 돋아나는 계절이었다. 여우가 멈추지 않고 은행나무로 걸어갔다. 누가 봐도 저것이 여우의 목적지였다.

더욱더 가까이 다가가니 줄곧 울창했던 것과 달리 나무가 듬성듬성하게도 나있지 않고 그저 휑한 공터가 나왔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커다란 은행나무가 이리저리 황금빛 이파리를 뿌려대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멀리서 눈대중하기보다도 굉장히 큰 나무였다. 높이가 대략 일곱 장(약 21m)은 되어 보이는 것이, 그 수령(樹齡)은 천년하고도 몇백은 더 묵은 듯 하였다. 

보통 이렇게 크고 오래된 은행나무는 오래된 사찰에서나 볼 수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공터의 형태도 사찰이 있던 곳 같았다. 이런 깊고 외딴 산에 그런 곳이 있었다니 절 중에서도 흔한 경우는 아니다. 진짜 속세 따위 조금도 닿지 않으려던 독한 불자들이 살았던 모양이군. 청명은 은행나무로 곧장 걸어가는 여우에게 넌지시 물었다. 

"여기 터를 보니 원래 사찰이었군."

유이설의 고개가 조용히 끄덕였다. 

"용케 알아보는구나. 싸그리 불타서 이 나무만 남았는데. 여긴 본디 작은 사찰이었어. 내 집이었기도 하고."

여우는 당도한 은행나무 앞에 앉아 무언가에 홀린 듯 은행나무 이파리 사이를 파헤쳤다. 

"잠시 빌릴게."

"그거 함부로...!"

검을 빼든 여우가 청명의 말을 무시하고 은행 나무 근처의 흙을 파내기 시작하였다. 지금껏 세 걸음마다 한번씩 청명의 눈치를 보던게 언제였냐는 듯 여우는 정말로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그의 말도 무시한 채 그리 말 없이 땅을 푹푹 파대기만 했다. 그 모습을 보던 청명은 이상한 기시감이 들어 여우를 말리지 못했다. 

고요하고 한적한 숲 속은 금속이 흙 사이를 끊임없이 파고드는 소리만이 푹푹 들려올 뿐이었다. 은행 나무 아래 곧 관을 넣어야 하는 묫자리처럼 얕지 않은 구덩이가 생겨났다. 여우는 이젠 검을 툭 내려놓더니, 그자리에 무릎을 꿇은 채 손으로 흙을 긁듯이 걷어내었다. 이쯤 되니 아래에 무언가 묻혀있는 것을 꺼내려는 것이 확실했다. 좀 전처럼 넉살 좋게 떠들던 건 언제였냐는 듯 바삐 손을 놀리는 뒷모습에서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청명이 흥분한 여우를 저지하려 다가갔다.

"야. 계속 남의 몸 막 쓸거..."

"조금만, 조금만 더."

몇 걸음 걸으니 자연히 구멍안을 들여다 보게 된 청명은 들끓는 벌레들 틈에 살짝 드러난 나무 궤짝을 발견했다. 용케 여즉 바스라지지 않은 새끼줄이 그 상자를 칭칭 감고 있었고, 삿된 문자가 가득한 종이쪼가리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사람의 피와 척수를 발라 고정한 듯 했다. 악취가 진동을 하는 것이 누가 보아도 꺼림칙하고 더러운 흉물이었다. 분명 마교의 저주가 담긴 물건이렸다. 청명은 그 상자에 망설임 없이 손을 뻗으려 하는 여우의 손목을 억세게 잡았다. 유이설의 몸이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버둥거렸다. 

"놔!"

"뭐 하려는 건지나 말해."

"이 몸이 가진 기운으로 저것을 정화할거야."

"안에 뭐가 있는데?"

청명이 끈질기게 캐물었다. 손목을 잡힌 사고가 혈안이 된 채로 그를 원수 보듯 쏘아보았다. 눈가에 가득 넘쳐난 눈물이 턱에까지 꽤 굵은 두 줄기를 이루고 있었다. 

"너희 중생들이 부모, 형제, 친우라 부르는 존재."

"……."

그 눈빛에 그만 폐부가 꿰뚫린 청명은 숨을 삼켰다. 

'사고의 겉가죽만 빌렸을 뿐이다.' 

청명이 저도 모르게 되뇌었다. 그를 쏘아보고 있는 이는 그의 사고가 아니지만, 유이설의 얼굴이 자신에게 원수 보듯 하며 눈물까지 흘리고 있으니 먼젓번의 해괴한 행동들 보다도 께름칙했다. 여우가 거칠게 청명의 손을 뿌리쳤다.

"악...!"

그 손을 뿌리친 여우가 조급하게 손톱을 세워 상자를 움키려다가, 손이 새끼줄을 끊기도 전에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덜덜 떨리는 하얀 손 끝이 거뭇했다. 잠자코 보고 있던 청명이 혀를 차댔다.  

"쯧쯔... 도사 기운 다룰 줄도 모르면서 어찌 혼자 이걸 정화하려 그런거냐?"

청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건 정화가 아니라, 해주(解呪)라 하는 거다."

청명이 유이설의 손목을 그러쥐어 능숙하게 기운을 불어넣었다. 손끝의 마화가 햇빛 맞은 눈마냥 금세 사라졌다.

"내 호흡에 맞춰서 따라 숨을 쉬어라. 그리고 집중해. 사고 몸에 넘쳐나는 기운 중 조금이라도 손 끝으로 끌어내야 한다. 오래 묵어서 찌들었으니 쉽게 사라지진 않을거야."

잠시 청명을 멍하니 바라보던 여우가 눈을 가만히 감고는 청명의 지시를 따랐다. 그의 도인을 따르니 어렵지 않게 작게나마 기운을 끌어낼 수 있었다. 청명이 유이설의 손목을 잡은 그대로 움직여 그녀의 손바닥을 상자 위에 얹었다. 상자 위로 희다고도 해도 될 듯한 빛이 드리워지고 벌레들이 저마다 혼비백산하였다. 

"……."

"말하지 마. 괜히 흐트러뜨리면 귀찮아지니까."

상자에 칭칭 감긴 새끼줄과 부적들이 기세 좋게 내뿜던 사특한 기가 정순한 기운에 틀어막혔다. 새끼줄 하나가 벗겨지듯이 상자에서 떨어져 나갔다.

머리 위를 내리쬐던 가을의 햇빛은 점점 기울어가, 주변의 공기가 차갑게 식은지 오래였다. 주변이 조금 어두워지려 할 때 즈음이 되어서야 주술의 흔적들은 먼지를 쪼갠것 보다도 작은 가루가 되어 온데간데 없이 날아갔다. 저주에 절은 오물을 걷어내고 보니 상자는 그저 평범한 오동나무 상자였다. 

청명이 이것이 무어냐 묻기도 전에 여우가 그의 손을 밀쳐내, 무릎을 꿇은 채 상자를 두 팔로 껴안았다.

"아아, 아아아..."

 슬픔에 겨워 이성을 놓은 것만 같은 사고의 흐느낌에 청명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여우는 꽤나 긴 시간동안 그리 가만히 꿇어앉아 체신머리 없이 목놓아 울어댔다. 그 소리를 들은 것인지 아까부터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던 산여우들이 하나 둘 유이설의 곁에 다가왔다. 청명은 산짐승들에 빈틈 없이 둘러싸여 우는 사고의 모습을 그저 잠자코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겨우 울음을 그친 여우가 여전히 유이설의 얼굴을 한 채로 말했다. 

"나 돌아왔어요."

상자 안에 든 백골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묵은 백골을 태우는 연기가 은행 나무 아래에서 쉴새 없이 피어올랐다. 나무가 타며 내는 소리가 타닥, 타닥 귓전에 튀어올랐다. 이윽고 나지막한 진언이 죽은 이의 영혼을 꿈 너머로 보내는 의식의 끝을 알렸다. 한 때 뼈였을 잿가루가 불어온 바람에 흩어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여우가 운을 떼었다.

"마교의 주박 속에서 고통받을 주지스님의 혼백을 보내드리기 위해선, 그 봉인을 풀 필요가 있었어."

"그래서 신물을 가지고 거짓말을 해 우릴 여기 오게 하고는, 사고의 몸을 차지했다?"

"그래. 나는 그것이 죄임을 부정하지 않아. 너희 문파의 법도에 따라 처분해."

그리 말하는 여우의 시선은 청명의 검에 가 있었다. 청명이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섰다.

"네 그 주지스님이 그러라 가르치더냐?"

"?"

"자기 장례 치르겠다고 네놈 목숨까지 내놓으라 그리 가르쳤냐고."

"스님은 그럴 분이 아냐."

"그런데 너는 왜 그래. 그 긴 시간을 살아온 목숨을 고작 그 사람 노잣돈으로 쥐여주려 하냐고."

"……."

할 말을 잃은 여우가 눈을 내리깔았다. 

"난 가르침을 거스를 각오도 되어 있어."

"아, 그러셔?"

청명이 눈 앞의 어린 여우를 보며 허리춤에 두 팔을 얹었다. 그 주박은 마공을 사용하는 이들이 자신들의 원한을 산 자들의 시신에 하는 것이다. 남겨진 자들이 장례를 지내지도 못하게 하는 일종의 족쇄. 불교나 도교 계열의 내공을 지닌 자들의 힘이라면 이깟거 푸는 것이 품은 들되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내공 한줌이 아쉬운 전쟁통에는 그것조차 여의치가 않았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는 해주법을 아는 자가 얼마 남지 못해 결국 풀지 못한 모양이었다. 

청명에게는 이 작았던 사찰의 승려들이 겪었을 일이 너무도 뻔했다. 주박을 풀 수 있는 이들 중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고 모조리 죽었기에 이런 주술 하나 풀지 못하고 오랜 시간 은행나무 아래 묻혀있어야 했던 백골의 주인이, 그리고 그를 잊질 못하고 이리 된 여우 한마리가 청명이 없었던 과거의 화산과도 닮았기에 너무도 뻔하고 지겨워 거북할 지경이었다.

"난 네게 죄를 물을 수 없다."

"……?"

"화산에 네가 저지른 일은 잊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여우는 화산에 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다른 이가 아닌 청명이 그것을 물을 수는 없었다. 묘한 책임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만일 화산이 전쟁이 끝나고도 대문파로서 건재했다면 이런 작은 사찰이 마교도들에게 유린당하고 고통받을 일 따위 없었을 것이기에. 그리고 화산의 그늘이 지켜야 했으나 그러지 못할 뻔 했던 유이설을 여우가 살린 것은 사실이었기에. 청명이 뒷짐을 졌다. 여기서 검을 빼들 일 따위는 없다는 의미였다.

"또한 화산에게 입은 은혜는 더더욱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반응 왜 이래? 싫어?"

얼떨떨해하던 여우가 급히 합장을 취했다. 

"인간의 평생이 아홉 번 끝날 만큼의 시간이 지나더라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청명은 그 말에 포권으로 대답하였다. 여우는 고개를 숙인 채 진심을 담아 감사를 표했다. 

"죄를 빚으로 바꿔준 화산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잊고 또 망발 부리면 그땐 내가 죽이러 간다."

여우는 정중히 인사를 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 

"그땐 꿈인줄 알았어. 너무 어렸으니까." 

여우에게서 벗어난 유이설은 무릎을 모아 앉아 나무에 등을 기대인 채, 지난 회상에 잠겼다. 곁에 앉은 청명은 잠자코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약속한 시간이 가까워오자 여우가 와서 꿈이 아니란 걸 알려줬어."

여우는 유이설이 혼자 있는 시간을 골라 약속한 시간이 왔고, 그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당부했다고 한다. 약속의 힘인지 무력으로 쫓아낼 수도 없었다고 한다.

"그래도 어른한테 말을 했어야지. 혼자서 어쩔 생각이었던거야?"

"...베어버리려 했는데."

"……."

"죽이는거 아님. 겁만 주려 했어."

"그렇다 치자."

유이설이 가만히 하늘에 걸린 해를 바라보았다. 노을을 띠어 붉은 빛을 뿌리는 해가 그저 여상히 구름들 틈에 걸려있었다.

"자신의 몸을 지키지 못했어. 문파에 대한 과실."

청명이 그만 참았던 한숨을 포옥 쉬었다. 

"사고 보면 가끔 이렇게 빡빡하게 굴더라."

"...장문인께 말 할거야?"

"에휴. 앓느니 죽어야지. 혼나는게 좋다면 그냥 나랑 땡땡이 치고 여기 나들이 온걸로 혼나.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가기 아쉽잖아."

"……."

청명이 풍경이 트인 곳을 찾아 털썩 앉고는, 유이설을 보며 제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턱턱 쳤다. 

"야 이거 봐라? 역시 다들 계림 계림 하는 이유가 있네. 운치 죽인다야. 풍경이 안주구만. 술 한 잔 줄까?"

그가 품속에서 술 한병을 꺼냈다. 유이설이 눈살을 찌푸리며 잔소리를 하려고 하자 청명이 먼저 입을 막았다. 

"꿍쳐 놓은거 아니야. 아까 배에 탔던 사람 중 한 명이 감사하다고 품에 넣어준 거니까 잔말 말고 받아. 참고로 잔은 없다. 나 원래 병째 마시는거 알지?"

"……."

"오늘 안 그래도 피곤한데 놀랄 일 많았잖아. 좀 마셔. 어허, 안 받아?"

"……."

그 말을 들은 유이설은 순순히 청명이 건네는 병의 목을 잡고는 천천히 술병을 들이켰다. 병째 들이키려니 조절이 잘 되지 않아 생각한 것보다 많은 양을 들이켰다.

"사고도 술꾼의 재능이 있어. 천천히 안 넘기고 꿀꺽꿀꺽 마시는거 보게. 더 빨리 취하려는 요령을 벌써 터득했네."

"니가 할 말 아님."

"어쭈? 벌써 취했나? 사고 욱하는 게 주사야?"

"술이 아니라 청명이 원인."

"알았어, 알았어. 술병 안 나려면 천천히 마시라 하려던 거였어."

 둘은 그렇게 술병 하나를 번갈아 들이키며 서로 주거니 받거니 했다. 줄곧 눈앞에 펼쳐진 풍경 중 한 폭에 시선을 두던 청명이 문득 유이설을 바라봤다. 술기운이 올라 붉어진 콧잔등에 붉은 노을빛이 드리우니 온통 붉었다. 

"그럼 내내 여우에게 씌여있던 거야?"

"리강에 오고서부터 조금씩."

"그럼 요즘 나 피하고 계속 도망친 건…"

"그건 나야."

"……." 

"청명에게는 들킬 것 같았음."

"……." 

잠시 둘 사이에 정적이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유이설이었다.  

"…처음이야. 그렇게 소리내어서 울어본 건." 

그렇게 말하는 유이설에게서 아까의 재 냄새가 풍겨왔다. 

"씌여있을 때도 기억이 나?"

"조금씩 떠오르고 있어. 누군가를 장사 지냈다는 것은 알아."

"……." 

"그리고 그 때의 감정도."

그렇게 말하는 유이설의 눈이 무언가를 곱씹는 듯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지 짚힐 것 같기도 했다. 청명은 그저 자신이 해주고 싶은 말을 했다. 

"과거의 문파가 남긴걸 지키는 것 못지 않게, 미래에 있을 우리 문도들을 지키는게 더 중요해."

"……?"

"그냥, 그렇다고. 옛것을 잇는 게 후인들의 의무라지만 이런건 다소 주객전도가 된 감이 있다 이말이야. 지금 이렇게 앞날이 창창한 장문지재들을 굴리는게 말이 되나? 벌써 중원 한바퀴는 다 돈 것 같은데."

"청명이 제일 굴림."

"그러니까 더욱더 이렇게까지 하면 안되지. 이미 내가 충분히 굴리고 있는데 살아돌아오지도 못할 선조들이 뭐라고… 악!"

유이설이 섬전처럼 내지른 꿀밤을 소매 속으로 게 눈 감추듯 거두었다. 청명이 스읍 소리를 내며 제 머리를 싸매었다.

"선조에 대한 예의. 지…"

"아오, 진짜 아프네."

"지…"

"지 뭐."

"……."

청명의 눈썹이 씰룩였다. 유이설의 얼굴이 노을 아래서 봐도 확연히 하얗게 질려있었다.

"…딸꾹."

유이설이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목이 메었는지, 뭔가를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대뜸 딸꾹질을 했다. 

"사고 벌써 취했어?"

"아님. 아니…"

"목에 뭐 걸렸어?"

"아니, 아니…"

"왜?"

내내 우물쭈물하던 유이설이 나지막이 내뱉었다. 

"아니요…."

유이설의 입에서 갑자기 존댓말이 나왔다. 청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저거 식은땀인가?

유이설이 갑작스럽게 자리를 박차고는 경공을 펼쳐 그 곳을 떠나 도망쳤다. 청명이 빛의 속도로 멀어져가는 사고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사고는 여우가 자신의 몸에 들어가 있던 때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설마…?'

"사고! 사고! 어디 가!"

"오지 마!…세요."

"갑자기 또 왜인지 말 하라고!"

"말 못해.…요."

"괜찮다고!"

"전혀.…요." 

 바삐 유이설을 쫓는 청명의 머리에 여러 생각들이 스쳐지나갔다. 아무래도 여우와 나눈 대화들 중 일부가 조금씩 떠오른 모양이었다. 어떤 말을 했었지 내가…

- 뭐야? 너 최소 백년 넘었네? 

- 너야말로 나이는 나랑 비슷하게 먹었으면서 이런 어린 여자한테 사고라고 하고 사니까 좋냐? 이 음침한 노인네야!

- 좋아서 할 리가 있겠냐? 내가 선조인데!

 - 하여간 나이랑 얼굴도 따로 노는 말코 주제에…

 

와. 이걸 노린 격장지계였나? 

그 음침한 여우새끼 그냥 베어버렸어야 했는데!

"사고! 일단 서봐, 괜찮아!"

"안 괜찮아...요!"

"야아아아아!"

붉은 노을과 푸른 숲 사이사이로, 두 검은 그림자들이 바삐 스쳐 지나갔다. 붉은 노을이 지나간 하늘은 이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후기 & 비하인드 tmi

1. 화산귀환 헤테로 합작

https://ohmy9th.wixsite.com/9th-walk

세상에 이런 잔칫상 진수성찬에 호박전 하나 올리게 되어 너무 기분이 째졌었습니다 총대님의 아름다운 편집 때문에 제 글이 삐가번쩍(not 비가번쩍) 해진것 같았어요 합작이란 이런 거구나? 

합작은 포온온에 올린 <위화>에 처럼 원작 시간선에서 상상을 보태어 하려 했었는데 떠오르는게 1도 없어서 엄청 막막하던 와중 <세계테마기행 광시편>을 유툽클립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풍경이 너무 죽여줘서 이걸 뭐라도 써먹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글의 배경은 완전히 이 영상속에 나온 리강이 되었습니다.

 

 

영상을 보면 오검이 개고생을 한 리강의 풍경이 나옵니다. 조걸의(윤종에게 처맞는) 일부 대사나 인용된 시구도 여기 나온 해설입니다. 나들이에는 역시 풍경좋은 곳이죠 9월의 나들이하려다가 9월의 장례식도 하긴 했지만...

2. 모브들의 설정 

양각야호는 제가 혼자서 날조한 모브들의 백스토리가 많아서 조금 난해한 면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궁금한 점이 많은 분들이 계실것같아서 정리한 글을 올립니다. 

 이 글에 나오는 '주지스님'은 아미파의 인재였다가 진정한 수행을 하기 위해 하산한 공윤이라는 여승으로, 글의 배경이 되는 리강 근처의 한 산에서 '백과사百果寺'를 세우고 같이 하산한 몇몇 사형제들과 함께 그곳에 은둔합니다. 공윤은 조용하지만 고집을 부리면 아무도 못말린다는 점에서 유이설과도 비슷한것같아요.

 그곳은 본래 사람을 해치는 여우들이 득시글거려서 산적들도 꺼린다 이름이 난 험지였는데 실상은 여우요괴들이 지배한 땅이었습니다.

 나름 고수였던 공윤과 승려들은 산을 평정하고 그 산의 치안을 안정시킵니다. (유명해지자 속가로 하자는 제의가 들어왔으나 수행을 위해 나온 것이라 거부) 글에서 나오는 여우는 사냥을 하질 못하고 도태되어 쥐나 잡아먹는다 무시당하던 약자였는데 백과사는 이 여우를 거두어 불법을 설파하고 사찰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주었고, 이외 다른 가르침을 원하는 여우들이나 도태된 여우들을 돌보아주며 계속 살아갑니다. 글에서 나오는 커다란 은행나무도 사찰의 누군가가 모종을 들고 와 공윤과 여우, 승려들이 함께 심고 키운 나무입니다. 

 후에 마교의 발호가 시작되었을 때 공윤을 비롯한 백과사의 승려들은 마교도들과 싸우고, 결국은 그로 인해 마교에게 찍혀서 백과사는 습격을 당하여 사찰의 승려들이 전부 몰살됩니다. 공윤은 침입한 마교도들의 우두머리를 죽이는데에 성공하지만 치명상을 입었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여우에게 백과사를 불태우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합니다. 

 여우는 공윤을 불교의 풍습에 따라 화장하고 싶어하나 자신을 목숨걸고 지킨 공윤의 수고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마교도들을 피해 그곳에서 도망칩니다. 마교도들에게 많은 원한을 산 공윤의 시신은 장례를 치를 수 없도록 봉인인지 저주인지 싶은 짓을 당합니다. (은행나무 앞에 묻힌건 여우가 사찰을 불태운 후 주술을 당한 공윤의 시신을 수습하여 임시로 묻어둔 겁니다. 그 과정에서 주술의 사특한 기운으로 인해 많이 다쳤었습니다.)

 그렇게 원래부터 별로 알려지지 않던 백과사는 완전히 잊혀졌습니다. 홀로 살아남은 여우는 결국은 반쯤 포기한 채 중원을 떠돌며 살아가다가 아기 유이설과 우연히 만나고, 그땐 별 흑심 없이 도와줍니다. (다만 몸을 내어준다는 계약의 형태로만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설정이라서 굳이 조건을 붙여서 합니다. 그러나 그때는 유이설의 몸을 빌린다든지 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장래에 강한 도관의 검수가 된 유이설을 보고 여우는 유이설을 이용해 오랫동안 잊었던 소망을 이루기로 하고, 그렇게 양각야호가 시작이 됩니다. 

 처음 공윤을 만날 때 여우는 1n년밖에 살지 않은 아기 여우였고, 현재도 구미호 치고는 어리고 미욱한 편입니다. 아닌척하지만 불안함도 의심도 많고 경계심도 강해서 1n0여년전 마교의 발호를 겪고 난 후 구파를 믿지 않았기에, 오랫동안 다른 이들에게 공윤의 장례를 도와달라고 요청할 생각은 하지 않았었고 지금에 와서야 무리하게 유이설을 이용해 자기 혼자서 해결하려 했다는 설정입니다.

그다지 똑똑한 편은 아니라 청명이 일부러 선조인 것을 들키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합니다. (여우: 억울...)

3. 이후

제 캐해로는 유이설은 청명이 선조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매화검존이라는 것을 알아차릴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청명이 질질질 흘리던 단서도 있고 꼰대같이 행동하는 것도 있고 도호도 검존이랑 똑같고...

 글을 보면 유이설이 엄청 놀라서 꽁무니가 빠지게 냅다 도주하는데 청명이 선조라는걸 알게되자 마자 침착맨 짤처럼 드드드드드드드 (이게 그래서? 저게 이래서?) 단서들이 조합이 되어서 1초만에 검존=청명이라는 걸 깨닫고, 하필이면 그 중요한 사실을 사질 꿀밤 때리다가 깨달은 거라서 순간적으로 심마에 빠진겁니다. 청명이가 일단 위기감을 느끼고 쫓아가는데 둘이 어떻게 될지 좀 궁금합니다 

만약 여기 주저리까지 읽으셨다면 정말 감동적일것같네요... 화테로 청설 많이많이 합시다 상투적 의미의 음양조화의 길 걸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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