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법 제292조
상냥한 곡조의 전자음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도화는 베갯머리 근처를 몇 번 더듬는다. 두 번의 헛손질 후에야 알람을 끌 수 있었다. 액정을 흘겨 확인한 시각은 오전 8시. 새벽 두 시에 방송을 끝내고 바로 천안으로 내려왔으니 네다섯 시간은 족히 잔 것이 된다.
살짝 무거운 눈꺼풀을 끌어올리기 위해 부러 냉장고를 열어 찬물을 위장에 때려붓는다. 한창 때에는 두 시간만 자도 멀쩡했는데, 확실히 나이를 먹으니 쇠약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어쩔 수 없는 잡념을 머릿속으로 되새기다가 욕실로 향한다.
모텔다운 욕실에서 간단하게 몸을 씻으며 간밤에 동현이 보내주었던 정보를 떠올렸다. 당장 도움이 될 만한 정보는 두 가지. 건물의 평면도와 교단의 움직임.
장렬교는 건물 한 층을 통째로 쓰고 있다. 크게 신도 구역과 간부 구역으로 나뉜단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신도 구역은 신도들이 머무르는 장소, 간부 구역은 장렬교의 간부들이 드나드는 장소. 동현과 도화가 관심을 두는 구역은 당연하게도 간부 구역이다.
출입구는 총 세 군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바로 보이는, 신도 구역으로 이어진 정문, 신도 구역 계단실 근처에 위치한 후문, 그리고 간부 구역에 맞닿은 비상구. 이렇게 된다면 잠입 루트로는 당연히 비상구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CCTV가 없을 것 같진 않지만 장갑만 잘 끼면 어떻게든 도망칠 수 있겠지.
동현과는 아홉 시 즈음하여 터미널 근처의 백화점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 전까지 1차 답사를 마쳐둘 예정이었다. 비상구가 짐이나 가구로 막혀있다면 다른 루트를 찾아봐야 하니까. 장렬교 본부가 있는 건물은 도화가 묵고 있는 모텔과 상당히 가깝다. 느긋하게 샤워를 끝내도 시간에 여유가 있을 듯 싶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 교단의 움직임이 묘하게 심상치 않다.
자신들과는 관련 없는 일이라며 완고히 조사를 거부하던 교단의 간부들이, 바로 어제 저녁 무렵부터 호의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신도를 죽음으로 내몬 당사자가 참회하고 있다고 하던가. 최대한 빨리 경찰에 넘겨 자수시키도록 할 테니 그에게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달라고 했던 모양이다.
경찰은 오늘 정오를 데드라인으로 잡았다. 교단이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동현과 도화의 데드라인 역시 정오가 된다. 아무리 베테랑 조사원이라도 경찰이 들이닥친 건물 내부를 조사하기란 어려운 일이니까. 운이 나쁘면 거동수상자로 현장에서 연행될 수도 있다. 그것만은 피하고 싶은 도화다.
짧은 샤워를 마치고 욕실을 나오니 휴대폰이 진동했다. 김민석 쪽의 기기다. 당연히 오동현이겠거니, 하며 전화로 손을 뻗다가, 의외의 발신자에 눈을 둥그렇게 뜬다.
김기철? 이 인간이 이 시간에 왜.
약간의 흥미가 도는 머리를 자각하며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민석아."
제 이름을 말하는 걸 보니 잘못 건 전화는 아니다. 그는 아직 민석의 본명이 백도화임을 알지 못한다.
"웬 일이래. 이 시간에 전화를 다 하고."
전파 너머로 일정한 간격의 바람 스치는 소리가 났다. 오백 미터 앞은 과속 단속 구간이라는, 네비게이션의 상냥한 목소리 역시 들려왔다. 아침 댓바람부터 드라이브라도 하고 있는 건가.
"나 연락 안 되면 납치된 줄 알아."
"뭐?"
이건 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
순간 무슨 농담을 하는 건가 생각했지만, 그가 아는 기철은 이렇게 공을 들여 농담을 할 인물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건 진심에서 우러나온 선포라고 보아야 할 테고.
근데 당신을 납치해서 대체 누가 이득을 봐?
"뭔 소리야, 그게? 무슨 일 있어?"
"어, 일이 좀 있어서. 지금 바빠서 끊는다, 일단."
뭘 캐낼 틈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도화는 멍하니 통화 종료 표시가 깜빡이는 액정을 내려다 보다가, 한숨을 쉬며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어냈다.
장렬교 본부는 병원 밀집 건물에 자리 잡고 있었다. 13층 짜리 건물에 병원만 여섯 개다. 이런 으리으리한 건물의 건물주는 얼마나 부자란 말이냐. 세속적인 생각을 하며 건물 뒷편으로 향하니 좁다란 주차장이 작게 나 있다. 경차 세 대가 겨우 들어갈 법한 면적이다. 지금은 소형 밴 하나가 1.2대의 면적을 점유하고 있지만.
유리창이 죄다 새까맣게 선팅되어 있다. 이래서야 안에 탑승객이 있는지 없는지도 확인할 수 없는데. 어쩐지 자신과 비슷한 냄새를 풍기는 밴을 흘기다가 건물 뒷편의 문을 연다. 바로 옆으로 이어진 계단은 위아래로 뻗어 있다.
밴 안에 사람이 있었을까? 아침부터 건물 뒷편으로 들어가는 건 조금 눈에 띄었으려나. 하지만 이미 문을 연 이상 물릴 수 없다. 지금은 답사에 불과하니까, 정식으로 숨어들 때엔 분장을 다르게 하면 될 일이다.
도화는 자연스럽게 문을 닫는다. 계단을 오른다. 장렬교 본부는 7층에 있다.
다음 층이 몇 층인지 헷갈릴 즈음하여 표지판이 7층을 가리켰다. 아무런 표시 하나 없는 철문이 덩그러니 벽에 박혀있다.
위아래가 전부 병원이니 간단한 표시 정도는 해 놓아도 좋지 않나? 층수를 헷갈려 교단 안으로 들어오는 환자가 있다면 그건 양쪽 모두에게 피해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며 하얀 장갑을 손에 밀어넣고 있으니.
문 건너편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명확하게도 이쪽을 향하고 있다. 도화는 빠르게 발을 돌려 위층의 계단참으로 몸을 숨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남자 두 명이 나오는 모습을 난간 사이로 엿보는 도화다. 각도가 좋지 않아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옷차림과 체구는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나머지 둘은 처 자고 있답니까."
문이 닫히는 소리. 아래로 내려가는 발걸음.
"납치조니까 피곤할 만 하지."
납치? 무언가의 비유인가. 하지만 납치라는 단어에서 새벽의 전화가 떠오르는 건 당연한 수순.
"이제 서울로 올라가면 되죠?"
"우리 할 일은 끝났다. 돈도 받았고."
일정한 템포의 발걸음 소리가 점차 멀어져 간다. 두 사람의 인기척이 거의 들리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도화는 조심히 몸을 움직여 7층의 철문으로 향한다. 잠시 그 앞에 멈춰 서선 건너편의 동정을 살핀다.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는 것을 확인한다.
아무래도 뒤가 구린 녀석들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납치조니 돈이니 하는 걸 보니 백 퍼센트 확률로 그러하리라. 그렇다면 장렬교가 뭔가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 되겠고. 본격적인 잠입에 앞서 밑밥 정도는 깔아두는 편이 낫겠다.
도화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비상구를 열었다. 평소의 분장은 여전하다. 살짝 졸려보이는 모양의 눈매, 뒤로 대충 넘긴 올백 머리, 입가에 붙인 점.
앞으로 쭉 뻗다가 오른쪽으로 꺾어진 복도. 그것을 사이에 두고 좌우에 하나씩 위치한 방. 팻말 하나 붙어있지 않아 무엇에 쓰는 방인지 영 알기 힘들다. 밝은 무채색으로 어우러진 인테리어는 어딘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뽐내는 것도 같지만, 부외자인 도화에게는 그저 UFO의 내부로 들어온 듯하다는 감상 뿐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여간에 아직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도화는 우선 왼쪽 방문으로 손을 뻗는다. 굳게 잠겨있다.
굳이 지금 문을 따면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진 않았다. 빠르게 목표를 오른쪽 방문으로 바꾼다. 이 방의 손잡이는 방해 없이 돌아갔다.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실어 대담하게 밀어 본다.
불이 꺼져 있다.
문 틈새로 팔을 뻗어 벽을 더듬거린다. 금세 스위치에 손가락이 닿아, 전등을 켠다.
평범한 응접실이다. 응접용 소파와 테이블이 주된 가구의 전부다. 벽 위쪽에 붙어있는 다면체 모양의 판화가 특징이라면 특징이겠으나.
지금 당장은 그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도화다.
바닥의 어느 것이 그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기 때문에.
이곳에 있으면 곤란할 게 뻔한 물체가, 있었다.
소파와 테이블 사이 바닥에.
사람이 누워있었다.
머리에 포대기 같은 것이 씌워져 있다. 두 손 두 발은 각각 노끈 따위로 묶였다.
누가 봐도 납치된 사람의 모습이다.
가슴이 가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보니 아직은 살아있는 모양이다.
장렬교는 이미 한 사람의 죽음에 잔뜩 얽혀있다. 시체를 하나 더 늘려서 좋을 건, 절대 없다. 그렇다면 어째서 사람을 납치했는가.
도화는 조심히 방을 나왔다. 전등 스위치를 끄고, 조용히 문을 닫는다. 근처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곤 천천히 비상구로 되돌아간다.
'자수라......'
죽은 도련님의 손톱에서 발견된 DNA는 신도의 아들의 것. 신도는 결혼을 두 번 했고, 아들 역시 각각 한 명 씩, 두 명을 낳았다. 전남편의 아들은 서울에서 학원 강사 일을, 현남편의 아들은, 행방불명.
장남이 범인이라고 한다면, 납치된 사람은 차남일 것이다.
또한, 차남이 범인이라고 한다면, 납치된 사람은 장남일 것이고.
뻔한 일이다. 사이비 종교 같은 폐쇄적인 단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제물을 필요로 하니까.
비상구 문을 닫고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9시 10분 전이었다.
"너 진짜 미쳤냐?"
"아니, 형, 진짜 미안해요. 알람이 왜 안 울렸지?"
"하아...... 지금 어딘데."
"......오산이요."
"미쳤구만."
아무리 빨라도 이십 분은 족히 걸릴 거리였다. 도화는 약속 장소 앞에 서서 길게 한숨을 내뱉다가, 사고나 내지 말고 오라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오동현, 하여간 믿음직하지 못한 동업자다. 저런 주제에 뭔 독립을 한다고 설친 걸까. 몇 번이나 떠올렸던 의문을 오늘도 되감는다. 아침 햇살 아래에 이십 분이나 서 있긴 뭐한 고로, 별 수 없이 카페에 들어가 있기로 한다.
길 건너편의 카페가 문을 연 게 보였다. 횡단보도 쪽으로 걷던 와중 한 시간 전의 전화가 문득 생각났다. 급한 불은 슬슬 껐으려나, 싶어 휴대폰을 들어 그의 전화번호를 검색했다.
수신음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어, 민석아......"
하는 목소리에 훌쩍이는 콧소리가 섞인다. 울고 있나? 이건 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인데.
7월 하순의 아침 햇살이란 생각보다 따갑다. 겨우 다다른 건널목의 신호등은 붉은색. 다차선 대로를 아침부터 쌩쌩 달리는 버스와 자가용들. 터미널 앞이라 버스가 더 자주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뭔 일 있어?"
또 다시 훌쩍, 훌쩍. 목이 메여선 말을 잘 꺼내지 못하는 상대. 어디 실내에 들어가 있는지 생활 소음은 전혀 섞이지 않는다.
"......탐정이가 납치됐어......"
정수리가 삽시간에 뜨거워졌다. 도화는 무심코 턱을 당겨 하늘을 바라본다. 쨍한 색감의 아침 하늘이 참 이쁘장하다.
신호등의 색이 바뀔 때까지 잠자코 기철의 이야기를 들었다. 오열이 섞인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음이 영 편한 건 아니었지만, 지금 가장 마음이 불편한 건 기철일 것이 분명했으므로. 도화는 줄곧 입을 다물고 있었다.
유탐정은 어제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학원을 나가는 모습을 동료 강사가 보았다고 하니 귀가 중 사라진 것이 분명하다. 사라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에는 탐정의 휴대전화가 떨어져 있었고, 동거인의 납치 정황에 돌아버린 기철은 아는 경찰에게 물어물어 근처 CCTV를 싹 뒤졌다. 그 결과 납치범들로 추정되는 차를 하나 발견. 천안으로 남하한 것을 확인하고 미행까지 했는데 그만 깜빡 졸아 놓쳐버렸다......
따위의 맥락 없는 정보를 중언부언하는 기철이었다. 설명을 다 들으니 도화는 어느새 건널목 건너편에 도착해 있었다. 목표하는 카페는 바로 이 근처에 있다.
"그래서, 당신 지금 천안인 거야? 에휴......"
별 우연이 다 있다 싶었다. 오늘은 납치범들이 천안으로 모이는 날인가. 이 일만 끝나면 불러서 이야기라도 좀 더 들어줄까, 고민하고 있으니. 전파 건너편에서 침묵만 이어진다.
"......여보세요. 듣고 있어?"
귀에서 전화기를 떼어 액정도 확인해 보았지만, 아직 전화는 진행 중.
"여보세요. 자?"
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딘가의 문을 연 듯한 생활 소음.
어라, 카페라도 가 있었나?
당면한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누군가에게 팔을 낚아채였다.
반사적으로 몸 전체를 돌렸다. 반대쪽 팔에 힘을 실어 주먹을 쥔다.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손에 힘이 풀리고 말았지만.
도화는 애써 미소지었다.
그래야만 할 당위성이 느껴졌다.
"......천안이 좁긴 좁은가 본데."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의 기철이 코앞에 있었으니까.
"커피라도 먹자."
벽시계의 시침이 9를 가리켰다. 유진은 벽을 흘기던 시선을 전방으로 돌린다. 잠시 기다려 보았지만, 아무도 예배실로 들어오지 않는다. 평소에는 초 단위에 맞춰 재깍재깍 입실하던 간부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의아한 것은 다른 신도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예배실을 메우던 신비로운 분위기가 일순 흔들린다. 명백하게도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 있다.
바로 옆 자리에 꿇어 앉아있던 유준이 그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휴대전화에 무언가를 타이핑하더니, 슬쩍 액정을 기울인다.
왜 안 오죠?
간결한 의문문. 유진 역시 제 단말기를 꺼내 답신을 꾹꾹 눌러 쓴다.
트러블이 생겼나?
유준은 미세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두 사람은 예배실의 가장 뒷편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신도 출입구 가장 근처에 위치한 것이 된다. 기본적으로 예배 시의 자리는 자유롭게 고를 수 있다. 오늘은 갑작스러운 강제 예배인만큼 특등석을 선택해야만 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튀어나갈 수 있는 자리란 꽤 유용하다.
무릎 앞에 놓인 안대는 이전에 사용한 것과 다르지 않다. 간부가 들어오면, 지시에 따라 이 안대를 착용하고 절을 한다. 오늘도 필시 그럴 예정이었으리라.
현재 예배실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신도들의 수는 어림잡아 오십 명 안팎. 장렬교는 몇 년 전에 생긴 신생 종교이니 신도 수가 적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이게 전부는 아니리라. 그렇다면 대체 무슨 기준으로 고른 신도들일까. 유진은 갑작스레 떠오른 의문을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굴려본다.
출입구 근처에서 웅성이는 소리가 들렸다. 많은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는 아니다. 많아 봤자 두 세명 정도 아닐까. 유준이 고개를 뒤로 돌리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신 사제님, 하는 목소리가 어렴풋하게 귓바퀴를 타고 들어왔다. 장렬교의 간부들은 서로를 사제라고 부른다. 그들을 통솔하는 교주란, 유진이 느끼기로 인간이 아니라 무언가의 숭배물인 모양이었다. 그러니 사실 상의 책임자는 사제들이라는 게 된다.
유준이 다시금 액정을 들이밀었다.
이상한데요.
유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건 확실하다. 들어오는 정보가 없어도 너무 없어서 문제지만.
하지만, 가만히 있어봤자 어쩐지 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유진은 단말기에 짤막한 대답을 쳐 넣는다.
다녀올게. 기다리고 있어.
유준이 답신을 확인하는 걸 보고, 그는 몸을 일으켰다. 맨 뒷자리라 신도들의 이목은 많이 끌지 않았다.
예배실은 신도 구역과 간부 구역의 경계에 위치해 있다. 그러므로 출입구도 두 개. 신도들이 사용가능한 신도 출입구와 간부가 드나드는 간부 출입구가, 각각 예배실의 뒤쪽과 앞쪽에 달려있는 것이다. 유진이 머리를 내민 곳은 당연히 신도 출입구.
이곳에선 신도 구역의 로비가 한눈에 보인다. 지금은, 이례적이게도 사람이 한 명도 없다. 평소에는 로비 중앙의 데스크에 수더분한 인상의 안내원이 한두 명 앉아있었는데.
유진은 문간을 넘어 로비로 발을 옮긴다. 소란은 간부 구역 쪽에서 들려왔다. 간부 구역은 접근성이 떨어진다. 예배실 옆의 복도를 지나면 곧장 간부 구역이긴 하지만, 그쪽으로 갈라치면 데스크의 안내원들이 제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안내원들이 없다. 대담하게 복도를 지나보기로 했다. 성인 두 명이 나란히 서면 막혀버릴 정도로 좁다란 길이다. 딱 예배실 정도의 거리를 지나자 트인 공간이 나왔다. 넓지는 않다. 폭이 넓은 복도를 사이에 끼고 두 개의 방이 마주보고 있다. 복도의 막다른 면에는 비상구 전등이 달린 문이 하나.
얼굴이 눈에 익은 간부 세 명이 왼쪽 방 앞에 모여있었다. 방 안에 대체 무엇이 있는지, 그 안으로 시선이 집중되어 유진의 출현을 눈치채지 못한 채다. 경악스러운 옆얼굴들을 보니 좋지 못한 것이 있는 건 확실한데. 유진은 슬쩍 벽에 붙어 기척을 지워본다.
간부 하나가 분기탱천한 얼굴로 방 안으로 들어섰다. 예배실에서 항상 예배를 지도했던 그 간부다.
옷자락이 구겨지는 소리. 무언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
"당신 누구야?!"
날카로운, 억누른 듯한 고함. 이 정도 데시벨이라면 예배실 안까지는 닿지 않는다. 나머지 두 간부는 안절부절 못하는 모양새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
"......사, 살려주세요."
남자의 목소리였다. 간부들의 목소리는 아니다. 방 안의 제삼자이리라. 장렬교에 잠입하다가 잡히기라도 한 건가. 유진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떠 본다.
무언가 내팽개쳐지는 소리가 났다. 남자의 고통스러운 신음도 동시에 들려온다.
"이 멍청한 것들...... 사람 하나 제대로 못 실어와?"
방 밖의 간부 두 사람이 화들짝 놀란다. 방 안의 그녀는 멍청한 것들, 멍청한 것들 하며 몇 번을 더 중얼거린다. 단속적인 발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방 안을 돌아다니고 있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실어오다니? 저 안의 남자는 장렬교가 데려온 사람이라는 건가. 뭔가 착오가 있어 다른 사람을 데려왔나?
"신 사제, 이 사람을 어쩌지? 처리할 수도 없고."
문간 밖에 서 있던 간부 하나가 겨우 입을 열었다. 패닉이 가시지 않았는지 여전히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다. 방 안에서 나던 발소리가 우뚝 멈춘다. 잠깐의 침묵. 방 밖의 두 간부는 서로 시선을 교환하다가, 이윽고 말을 잇는다.
"......당장 오늘 정오에 넘겨야 하잖나."
"일단 좀 미루겠다고 하세요!"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방 안의, 신 사제의 것. 상대의 말을 끊듯이 하여 주도권을 잡는다.
"마음의 준비가 덜 되었다고 하면서...... 하아, 이 멍청한 것들이."
"이미 모인 신도들은 어쩌고?"
"신도들이야 나중에 다시 부르면 됩니다. 이 아침에도 모였는데 다른 시간대에 모이지 않을 리가───"
신 사제의 명령을 듣고 있던 간부가, 별안간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유진과 눈이 마주친 건 당연지사였지만, 이내 그 시선은 공중을 향해 떠올랐다. 기겁한 얼굴로 입을 떡 벌린다. 어쩐지 매우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 유진은 제 머리 위로 눈동자를 굴렸다.
희뿌연 연기가 천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낮췄다. 빠르게 뒤를 돌아보았지만 열원은 느껴지지 않았다. 불이 난 게 아닌가? 이 층이 아니라 다른 층에서 불이 난 건가. 하지만, 화재가 발생하면 보통 소화전이 울릴 텐데.
"이, 이게 무슨!"
새파랗다 못해 푸르딩딩해진 안색의 간부가 외쳤다. 방 안에서 연신 분노의 말을 내뱉던 신 사제도 복도로 몸을 내밀었다. 복도에 가득 찬 연기를 보자마자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고 말았지만.
그녀가 몸을 웅크린 유진을 발견한 건 그 직후였다. 아래로 처진 눈꼬리가 포악하게 실룩댄다. 간부 세 명이 모두 그를 주목하고 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선수를 친 건 유진이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화재가 난 것 같은데, 아무도 오시지 않으셔서 찾아뵈러 왔습니다."
최대한 염려스러운 표정을 안면 근육에 설치했다. 높은 사람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 법한 말을 골라 입 밖으로 내뱉었다. 두뇌 한켠에선 비상 램프가 열심히 빨간불을 점등하고 있다. 지금이 절호의 찬스다, 하며.
어디서 불이 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대피를 핑계로 간부들을 내보내야 한다. 그리곤 연기 속으로 몸을 숨겨 본부를 조사하자. 만약 화마에서 도망치지 못해 몸에 불이 옮겨 붙더라도, 지금은, 교수님이 주신 부적과 돌이 있으니까, 아마 괜찮을 거다.
유진은 간부들에게 절을 올리듯 허리를 낮췄다.
주머니의 돌멩이가 허벅지를 눌렀다.
기철은 평소와 다르게 말이 없었다. 애인이 납치당했다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으나. 커피잔을 앞에 두고 퍽 우울한 얼굴로 테이블의 무늬만 내려다보는 꼴이 애처로워 뵌다. 도화는 예의라도 차리기 위해 위로의 말을 몇 마디 건넸지만 돌아오는 반응이랄 게,
"그런 말 할 거면 집에 갈게."
였다.
피상적인 위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 듯했다. 질문 패턴을 바꿔, 이번에는 뭐라도 알아낸 게 있냐고 물었더니,
"그런 식으로 떠 보려고 커피 사 준다고 한 거야?"
비웃으며 대답하기에 도화는 약간의 의욕이 꺾였다.
의식적으로 미소를 만들었다. 이렇게 나온다면 차라리 클라이언트를 대하는 모드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맛이 없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세 모금 마시며 잡념을 닦아냈다.
"떠 보다니. 나도 마침 천안까지 내려왔으니까, 힘 닿는대로 조사해보려고 그러지."
"마침? 이 시간에 여기 있다니 대단한 우연인데. 호두과자라도 먹으러 왔어?"
예상은 했지만 만만치 않은 정신 상태다. 애인을 정말로 아끼긴 아꼈던 모양이다. 그 성격 좋던 인간이 이렇게까지 망가졌을 줄이야.
"늘상 하는 부업하러 왔지. 대단한 우연이긴 해."
그러니 이젠 별 대답이 없다. 어쩌라고, 라는 답신을 눈빛으로 수신했다.
이 인간, 온 정신이 납치된 애인에게 팔려있다. 남의 부업 따위는 궁금하지 않겠지. 아니, 머릿속에 넣어둘 공간조차 없겠지. 지금 나랑 어울려 주는 게 기적인 건가.
도화는 몇 가닥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올린다. 올백 머리를 슥슥 정리하며 다시 한 번 묻는다.
"뭐 짐작가는 건 없고?"
"살아있는지도 모르겠는데?"
이런 반응은 이제 무시하기로 했다.
"이상하잖아. 다 큰 성인 남자를 납치해서 할 일이 뭐가 있다고. 것도 서울에서 천안으로?"
"그러게. 탐정이가 무슨 대단한 자산가 아들도 아니고...... 목숨이 위험하겠지?"
기철은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피식 웃었다.
대단한 자산가의 아들에 가까운 사람은, 탐정보단 기철이리라. 기철의 아버지는 사립학교의 이사장이다. 기철은 아버지의 백으로 그 학교에서 선생 일을 하다가, 몇 년 전 모종의 사건에 휘말려 사표를 썼다. 그런 정보를 얼마 전의 조사로 캐내었던 도화다.
그래, 돈을 목적으로 사람을 납치한다면 탐정보단 기철을 납치하는 게 수지에 맞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척이나 이상한 납치다. 백도 없는 평범한 학원 선생을 납치해서 어디에 써 먹나. 장기매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매일같이 학원에 나가는 사람을 납치하면 실종 신고가 빠르게 접수되지 않나. 급하게 장기를 빼냈다 쳐도 납치 장소가 무려 서울 한복판. 것도 CCTV가 득시글한 대치 학원가란 말이다. 실종 신고만 접수된다면 체포는 시간 문제다. 실제로 눈앞의 기철이 CCTV를 보고 천안까지 쫓아오기도 했고......
......대치 학원가?
묘한 정보가 뇌리에 둥실 떠올랐다.
사건 관련자 중 하나가 그쪽의 학원 선생이었던 것 같은데.
도화는 휴대폰을 켜 동현에게서 강탈한 사건 자료를 열람했다.
그래, 그 신도와 전남편 사이에 있던 아들이, 대치에서 학원 선생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장렬교는 사람을 하나 납치했다.
범인이 장남이면 납치된 사람은 차남, 차남이 범인이면 납치된 사람은 장남.
납치된 사람이 대치의 선생이면 범인은 차남이다.
도화는 남의 주민등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유리잔이 테이블과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기철은 여전히 초점이 나간 눈으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유탐정 씨 동료는 좀 알고 있어?"
목소리를 낮춰 조곤조곤 물었다.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면 오히려 행동이 차분해진다. 정신의 폭주가 외부에 유출되지 않도록 한다. 조사원이 되어서 생긴 버릇이다. 어쩌면 직업병인지도 모른다.
기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고개를 끄덕이는지도 모를 것만 같은 표정을 한 채.
"누구누구 있어? 유탐정 씨랑 비슷한 사람이라던가, 있어?"
"비슷한 사람? 없는데...... 탐정이는 탐정이고......"
좀 더 직설적으로 나가야 할 필요를 느꼈다.
장남의 이름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입에 담았다.
"혹시 임은도라는 사람 알아? 학원 강사라 하던데."
"알아. 저번에 봤어."
"어디서?"
필요 이상으로 차가워진 자신의 발음을 자각했다. 의식적으로 만들었던 미소는 이미 사라져 있으리라.
"저번에 탐정이 동료 다른 분이 입원했을 때. 병문안 갔다가 만났어."
학원 선생이 어쩌다가 입원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지금 물어볼 거리가 아니다.
"그럼 임은도라는 사람도 유탐정 씨 동료고?"
기철은 고개를 주억였다. 누가 보아도 명백한 긍정의 의미를 담아.
"아, 그래......"
관자놀이가 뜨거워졌다.
나, 아무래도 당신 애인을 아까 보고 온 것 같은데.
눈두덩이 욱신댈 정도로 사고를 연속하고 있는 자신을 인식한다.
장렬교는 원래 임은도를 납치하려고 했다. 신도의 자식인 그를 경찰에 넘기고, 진범인 차남을 감싸주려고 했다. 임은도가 장렬교 신도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장렬교 신도이면 신도인대로 넘기면 되고, 신도가 아니라면 다른 신도들의 증언을 조작하면 된다. 본부에서 봤다는 증언을 삼십 명에게 듣는다면 경찰도 믿을 수밖에 없겠지. 아니, 애초에 경찰 안에 장렬교 신도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일은 더욱 일사천리로 흘러간다. 경찰 측에 남아있는 범인의 DNA를 임은도의 것으로 바꿔치기 할 수도 있으니까. 조작된 물증까지 확보 가능하다. 임은도는 신도들의 조작으로 범인이 된다. 진범인 차남은 부외자가 된다.
그런데, 납치 당시 무언가의 착오로 임은도의 동료인 유탐정이 납치되었다. 납치 담당자들은 그의 머리에 포대기를 씌워 장렬교 본부에 던져두었다. 그게 패착이었다. 장렬교 인간들은 납치된 사람의 얼굴을 굳이 확인하지 않았던 거다. 적어도 내가 확인했던 그 순간까지는.
휴대폰 액정이 전화 수신창으로 바뀌었다. 발신자 오동현.
도화는 천천히 입술을 핥고, 전화를 받는다.
"형! 저 갤러리 앞에 도착했어요. 어디 계세요?"
기철은 텅 빈 눈으로 도화를 쳐다보고 있다.
"바로 갈 테니까 준비해."
"어, 지금 바로?"
"바로."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시선을 들어 기철을 바라보니, 이젠 미간에 작은 골을 새긴 채다.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어냈다. 턱을 까딱여 당신도 일어나라는 사인을 보낸다. 물론 기분이 상한 듯한 기철은 일 미리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어디 가?"
작은 원망이 실린 목소리가 안쓰럽게 들렸다.
이 인간아, 원망해야 될 사람은 나야.
납치자 구출 같은 난이도 중상의 과제를, 지금 억지로 작전에 끼워넣고 있다고......
라는 말을 목구멍으로 밀어넣고서야, 도화는 대답할 수 있었다.
"차에 들어가서 쉬고 있어."
"뭐?"
"아직까진 멀쩡할지도 모르겠어, 유탐정 씨."
의자가 대리석 바닥에 거칠게 미끌렸다.
팔을 억세게 쥐어잡혔다.
당신, 그런 표정도 지을 수 있구나.
유탐정이라는 남자에게 가해지는 애정의 압력이 무섭도록 선연하게 느껴져서, 문득 숨이 막혔다.
코웃음이 나왔다.
벌벌 떨리는 기철의 손을 끌어당겨서, 도화는 하잘것 없는 추억을 끊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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