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 자에 名 자를 써서 내 이름이오.
1920년 한국 배경
키워드 : 독립운동, 첫만남
주의 소재 : 부상, 자살 암시, 불쾌함을 유발할 수 있는 묘사
父親(부친)께 올리는 便紙(편지).
結婚(결혼)이 進行(진행)되리란 消息(소식)을 갓난이에게 들었습니다.
높은 家門(가문)과 婚約(혼약)을 맺어
집안의 名聲(명성)을 높이는 것이 딸아이의 義務(의무)라 父親(부친)께서 늘 말씀하셨지요.
허나, 저는 朝鮮(조선)의 女息(녀식)으로도 日本(일본)의 아내로도 살 運命(운명)도 아닌가 봅니다.
康寧(강녕)하십시오.
시간은 여덟 시를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오전부터 늦은 시간까지 잠시의 휴식도 누리지 못한 늙은 역무원 C가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쩍쩍했다. 하루 열두 시간, 주산 알을 굴리며 푯값을 계산하는 C에게 떨어지는 일당은 50전이 될까 말까였는데, 입을 풀칠하는 데에 돈을 밀어 넣다 보면 비뚤어진 안경이나, 구멍 뚫린 양장 주머니처럼 어쩔 수 없는 것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기운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구멍이 난 안주머니에 C는 손가락을 쑤욱, 집어넣어 보았다. 오늘 집으로 돌아가면 안사람에게 다시 바느질해 달라고 할 테다. 침침해진 눈을 비비고 역사 천장에 자리를 잡은 시계를 향해 C는 고개를 쭉 내밀었다. 뿌연 유리 너머로 한 여인이 보였다.
“제물포로 가는 표 하나 주시게.”
“혼자 오셨습니까?”
“그렇네만.”
비뚤어진 동색 안경테를 매만지던 C가 여인을 훑어보았다. 경성 여인 중 新女子가 많다고는 하나, 어찌 사내의 동행도 없이 혼자 밤 외출을 나설 수 있단 말인가. 류록의 털목도리, 백색의 장식이 달린 머슈룸 해트를 쓴 여인은 오페라백을 수납 창구 위에 올려두었다. 문득 C는 형용할 수 없는 불합리함에 휩싸인다. 오페라백은 7원이요, 머슈룸 해트나 류록의 목도리도 고급 양장이 익숙한 부인들이나 쓸 법한 장신구다. 하루 열두 시간 일해 겨우 50전이나 받는 저와의 삶과는 너무나도 다른 것이라 삐뚜름한 모습으로 주산 알이나 퉁퉁 튕기며 C는 열차 시간표를 확인했다.
“9시에 마지막 열차가 있습니다.”
“그걸로 주게.”
“예.”
濟物浦. 세 글자가 찍힌 주황색 표가 창구를 통해 나왔다. 거스름돈을 계산하는 C를 뒤로 하고 여인은 승강장으로 사라졌다. 어찌 되었든 표는 팔았으니, 임무는 끝난 것이다. 좌우를 살핀 C가 남은 거스름돈을 재빠르게 제 주머니 안으로 넣었다. 아차, 손가락 두 개는 쉽게 들락날락하는 구멍 사이로 동전이 와르르 떨어졌다. 그래도 내일이며 이 의표를 수선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아이와 안사람 입에 무언가를 물려줄 수도 있을 것이다. C는 휘파람을 불었다. 간만에 기분 좋은 하루였다.
어둠을 가르고 열차가 도착했다. 놓인 철 발판을 밟고 안으로 들어간 여인은 곧장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괜히 모자를 벗어 무르팍 위에 올려보았다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 창가에 비치는 여인은 결을 단단히 맺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여인의 이름은 ‘無名’이었다. 몇 분의 시간이 흐르자, 열차가 다시 흰 연기를 내뿜으며 출발했다. 이제 제물포로 가는 열차는 완전히 끊겼고 경성에서 제물포까지 마차로는 아홉 시간이 걸린다. 무명은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밖은 검고 빛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늘에 박힌 별이 유일했다. 죽기 좋은 날이었다. 오페라백을 껴안은 무명이 창가로 몸을 웅크렸다. 큰 푸른 눈동자에 수백의 별들이 잠시간 담겼다 빠르게 벗어났다.
그나저나, 부로 치장한 여인에게 무명이라는 이름이 무엇인가? 귀한 한자를 모아 붙여주어도 모자랄 판에 ‘이름이 없다.’라는 뜻의 그 이름은 과연 무엇인가. 사실 무명은 경성, 그것도 도성 안에 자리한 댁의 귀한 따님이다. 그 집의 주인 되는 사람은 白 씨 성을 가진 양반인데, 淸廉 潔白을 뜻하는 白色의 도포를 두르고 다니다 나라의 국운이 기울 때 그 누구보다 빠르게 수염을 자르고 黑色의 양장을 입은 자였다. 아흔아홉 칸 중 절반 이상의 바닥은 벌써 다다미가 되었고 남들은 창자를 졸라매며 살아가는 이 시국에 열두 각 자개소반을 쌓아두고 광에는 곡식이 흘러넘쳐 쥐마저 살이 쪄 신수가 훤한 것이 백 씨 가문의 담장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 아비는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은 대한인도 일본인도 될 수 없었다. 간절히 바라건대, 이 역적 가문의 모든 핏줄은 온몸이 썩어들어가서 고통받다 죽어라. 불령선인이라며 순사에게 매질 당한 유모의 아들놈이 백 가문 양반댁 대들보에 목을 맨 일이 있었다. 나라를 팔아먹은 주인어른이 문미(門楣)에 걸어둔 문구 未離海底千山暗 及到天中萬國明(미이해저천산암 급도천중만국명)를 뜬 눈으로 바라보며 죽은 시체가 대롱대롱 매달려 겨울바람을 맞아 동서로, 남북으로 정처 없이 흔들리며 아침을 맞이하던 날이 있었다. 배곯은 까마귀가 어깨에 내려앉아 눈알을 빼먹는 장면에 졸도한 유모를 뒤로하고 백 가문 높으신 어른은 핏물이 스며든 다다미를 아까워하기나 했다.
‘후테이센진.’ 대한인의 억양으로 일본어를 하는 아비의 모습. 하부다이로 만든 옷, 티끌 하나 없이 깔끔한 구두, 9할의 대한 사람은 알지 못하는 악기가 어디서 온 것인지 어린 무명은 그제야 실감하게 됐다. 나라를 팔아먹은 자는 대한인도 일본인도 되지 못한다. 조선인이라는 멸칭이 이 집안에 어울리는 말이리라. 그날 이후로 무명은 제 머리맡을 떠도는 귀신과 함께하게 되었다. 순사에게 무릎이 완전히 부서졌다는데, 그것이 참인지 밤마다 찾아오는 귀신은 걸음 소리 대신 손바닥으로 땅을 짚는 소리나 슬슬 바닥을 기어다니는 소리만 들려주었다. 제를 지내주지 못해 원한이 들린 것인지, 죽은 벗의 모습을 보고도 바이올린 수업이나 들은 자신을 원망하는 것인지, 벗이 자신의 몸뚱어리 옆에 던져두었던 기원문처럼 무명은 몸이 썩어들어가서 죽게 되는 건 시간 문제라 생각했다. 눈을 뜨고 두 번째 시체를 마주했을 때 생각했다. 내가 입는 옷은 대한인 가죽을 벗겨 만든 옷이오, 내가 먹는 정백미는 대한인 살을 깎아 만든 낱알이오. 두 명분의 목숨과 천칠백만 명분의 원한이 제 어깨에 매달려 있었다. 언젠가는 죽게 될 것 같았다. 시신을 내릴 때 무릎이 고름처럼 물렁거렸다는 오랜 벗처럼, 얼마나 바닥을 치며 통곡을 한 것인지 손날 뼈가 다 드러났던 유모처럼.
그런 일이 있고 나서도 무명의 아비되는 자는 일본인이 되는 것에 집착했다. 아흔아홉 칸 중 아흔 칸의 바닥에 다다미가 깔리고 자신의 성을 일본식 발음으로 불러도 그는 여전히 조선인이었다. 일본인이 되는 법은 한 가지였다. 혼약을 통해 일본인 사위를 얻는 것. 그때부터 백 씨 댁에는 혼담이 오고 가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부동산 사업을 하는 집안인데, 백년가약을 맺기로 했네. 도성 안의 땅에 관심이 있던데, 서로 좋은 거래가 되었지. 이 경성에는 학생 운동을 하다 죽은 자식이나, 병 걸려 따라 죽은 부모가 많아서 주인 없는 빈집이 넘치거든…….
‘아씨, 큰일 났어요. 어르신이….’
그 말을 들으며 무명은 눈을 감았다. 일본의 전통복을 입고 신전식을 치르는 본인의 모습. 도성에 들어오게 될 일본인들. 양팔로 바닥을 짚어 기어다니던, 자라지 못해 영원히 학생 모습을 남게 된 벗과 손날에서 구더기가 떨어지던 유모. 죽을 때다. 죽을 때가 됐다. 가난한 이들의 가죽을 벗겨 만든 옷과 척추를 뽑아 만든 금 장신구도 이제 되었다. 그리 살다 증오하는 이들이 이곳으로 들어오는 다리가 될 바에야,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이 될 바에야, 차라리 긍지 있게 재가 되길 택하리라. 소원을 들어준다는 금두꺼비, 옥으로 만든 비녀와 가락지, 금으로 만든 열쇠와 백옥으로 만든 연적. 죽기 전 죗값을 치를 수 있다면 이렇게 하리라. 무명은 악어가죽으로 만들었다는 오페라백에 모든 것을 담았다. 한 나라를 팔아넘긴 대가로는 턱도 없는 값이었다.
“현아, 울지 마라. 내 오늘이 지나면 네게 멀쩡한 다리 한 쌍을 줄 수 있으니…… 이제 울지 마라.”
가방을 끌어안은 무명이 웅크린 자세를 고치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무덤, 제물포까지는 앞으로 사십여 분이 남은 상태였다.
백색의 외눈만이 어둠 속 유일한 광원. 쇳덩이의 몸속에서 무명이 내렸다.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겨울바람이 매서웠다.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린 무명이 두어 명의 사람을 따라 역사 안으로 걸어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바깥 풍경이 낯설었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바다가 어디요?”
“여인께서 이 시간에 바다는 왜 찾으시오?”
“찾을 것이 있어서 그러오.”
“그렇다면, 여기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시오.”
무명이 인사를 마치고 걸어갔다. 중절모를 가볍게 벗어 인사한 사내는 잠시간 그 자리를 지키다 이내 무명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사내가 걸음을 옮기자, 사내 옆에 있던 어린놈이 펄쩍 뛰며 사내에게 말했다.
“아니 도련님, 조계지는 저쪽인데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조용히 하고 따라와 봐라. 내 잠시 확인할 것이 있어.”
“Y 도련님이 말씀하신 대주(貸主)는 어쩌시게요?”
“어허, 내가 우리 형님 말씀을 까먹을 자로 보이는가?”
“알겠습니다….”
어둠 속, 세 사람의 걸음이 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무명은 신을 벗었다. 차갑고 축축한 돌의 촉감이 느껴졌다. 파도의 굉음에 무명은 잠시간 넋을 잃었다. 광활한, 거대한 수탈의 현장. 외세에 물어뜯긴 내 나라의 옆구리. 이쪽에는 적산가옥이, 저쪽에는 홍등이 있는 힘없는 내 나라. 무명은 부두 끝을 향해 걸어갔다. 뭉뚝한 이곳에서 한 걸음만 더 걸어가면 바다에 빠지게 된다. 발바닥의 반은 허공에 놓여 있다. 무명은 생각한다. 현아, 현아, 울지 마라. 이제 나도 치욕을 아는 사람이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이해하는 사람이다. 넌 다리가 부러진 채로 우리 집에 들어왔지. 대들보에 밧줄을 걸고 소리도 내지 않고 뜬 눈으로 죽은 네 원한을 알겠다.
“용서해달라는 말은 하지 않으마.”
무명이 가방을 끌어안았다. 저와 제 핏줄처럼 변절한 자가 아닌, 어떤 선한 자가 시신을, 이 속에 들어있는 귀중한 것들을 찾아준다면. 의로운 일에 써준다면.
추락은 조용하다.
파도가 부두에 부딪혀 거품으로 쪼개지는 소리, 저 멀리 깊은 곳에서 뭍으로 밀려오는 천둥 같은 소리. 제 옆구리를 갈라버린 자의 마지막을 기록하는 것조차 과분하다는 듯, 시간은 그렇게 당연하게 흘렀다.
얼음장 같은 바다의 품속에서 무명은 온기를 느꼈다. 무수한 입맞춤과 자신을 껴안고 침강하는 벗과 유모의 환상을 보았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네가 그렇게 죽게 두진 않았을 텐데…. 그렇다면, 너도 유모도….
“빠졌네요.”
“그러게나 말이다.”
“사내가 되어서 구하시진 않으십니까?”
“천아, 본디 이 세상은 운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구하시지 않으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서해 물은 변덕이 심하니 아침에 다시 와보자꾸나. 살려야 할 귀인이라면 서해 물이 저 여인을 다시 돌려보내 주겠지. 자, 이제 정말 Y 형님이 부탁하신 일을 시작할 시간이다.”
“그래도 청자는 아까운데 말이죠.”
“일본 놈들 손에 들어가는 것보단 낫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건……… 아닙니까.”
“그래……. …군.”
“아, 아씨. 정신이 드십니까? 도련님, 여기 좀 보십시오.”
그 소리와 함께 무명이 기침을 토해낸다. 들숨과 엇갈리는 기침에 괴로운지 무명은 몸을 웅크린 채 이불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서해는 변덕스러운 편이거든. 운명이 아씨께서 살길 원하셨나 보오.”
“여긴, 당신은?”
켁켁, 목 안에 남아있는 해수를 뱉은 무명이 자신의 앞에 있는 두 남성을 바라보았다.
“내 이름은 ■ 자, ■ 자 쓰는 사람인데, 부친께서 작게 철도 사업을 하시오. 아씨께서는?”
“버렸소.”
“신분제가 사라진 지 오래지만, 행색을 보아하니 경성 바닥에서 큰 자리맡은 집안의 여식 같은데 이름을 버렸다?”
“그렇다만.”
“순사를 부르면 상황이 복잡해지는데, 그건 싫지 않소?”
“애초에 나를 왜 구했소. 구하지 않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조선 땅에서 각박하게 어찌 그러는가.”
“…난 조선의 여식도 일본의 아내도 아니기 때문이오. 그렇게 살 바에야 죽고 말지.”
“주어진 복을 잡지 못하는 아가씨구먼. 야밤에 그런 옷을 입고 금덩이와 같이 빠진 아가씨에게 들어온 혼담이라면, 상대도 꽤 거물이었을 텐데. 조선인으로 살기 힘든 세상 아닌가. 일본인이 될 수 있다면 일본인이 되는 것이 좋은 선택이지.”
무명의 앞에 앉은 사내가 거만하게 다리를 꼬았다. 무명은 치욕을, 분노를, 원한을 느꼈다. 제 가방에 든 장신구를 꺼내어 만지고 있는 사내의 손이 불경하다고 생각했다. 의로운 사람에게 가길 원했거늘, 어찌.
“철도 일을 하는 것들은 나라를 불하(拂下)하는 족속이라 했는데, 그 말 하나 틀린 게 없구나! 어찌… 어찌 그런 식으로 말할 수가 있는가!”
아, 내가 저런 이들과 같은 삶을 살고 있었구나. 그런 생각에 무명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내놓게.”
“어디다 쓰실 생각이신가?”
“당신이 간섭할 일이 아니야.”
“불령선인을 돕는 데 쓸 계획인가?”
두 눈이 마주했다. 그 결연한 눈동자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사내가 무명의 품에 가방을 안겨주었다.
“빼앗긴 나라지만 엄연히 우리에게도 이름이 존재하지. 황제께서 직접 대한이라 명명하지 않았나.”
사내가 무명을 향해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조선의 여식도 일본의 아내도 될 생각이 없다 하시지 않았소.”
작고 신중한 목소리였다.
“그렇다면, 대한의 투사가 되는 건 어떻소. 투사가 되는 건 많은 것을 본다는 뜻이오. 좁은 경성 바닥에 갇혀 장님처럼 살지 못할 테니 괴로울 것이고 따뜻한 구들장에 몸 뉠 틈 없이 도망치는 고난과 같은 삶을 살겠지. 한 가지 확실한 건, 자유로울 것이오.”
“내가 당신의 무엇을 믿고 승낙하겠는가? 더는 이야기 하기 싫으니 물러가시오.”
픽, 가벼운 웃음을 보인 사내가 다시 등받이에 기댔다. 되어도 그만, 안 되어도 그만이라는 여유 있는 투였다. 무명은 사내의 그 모습이 참으로 보기 싫었다. 가만히 있었더라면 어떻게든 죽었을 터인데, 왜 저 자는 자신을 멋대로 살려 능멸하는가? 내가 나의 목숨 하나도 마음대로 쥐지 못하면, 이 땅에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아래로 고개를 숙인 무명을 향해 사내가 툭, 말을 던졌다.
“아까 아씨께 말한 것처럼 나는 ■ 자 ■ 자 쓰는 사람인데, 부친은 철도를 해서 나라를 팔아먹는 사람이오. 백절(百折) 하는 자주를 소망하는 사람은 소망(少妄)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는데, 그렇게 말한다면 나는 꽤 망상가인 편이지. 아씨께는 안타까운 일이오. 비밀을 들은 상대를 그냥 보내 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규칙이라서.”
아씨는 이름이 무엇인가? 사내가 다시 물었다.
“나는 이름을 버렸다고 말했소.”
무명이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아씨에게 이름을 지어주어도 되겠소? 당분간 동행할 사이인데, 이름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소.”
“내가 왜 그쪽과 동행해야 하오?”
“그야 아씨께서 내 정체를 알아버렸지 않나. 이 ■■의 목에 달린 자들의 목숨이 수십이라 그러니, 양해 부탁드리오.”
“어찌도 이리 무뢰한일 수가…….”
“국난일수록 강하게 살아야 하는 법이니 어쩔 수 없지. 그래, ‘□□’은 어떻소? □ 자에 □ 자를 써서. 아씨와 우리가 만난 날에 초승달이 뜨지 않았나. 그래서 그리 이름을 지었소.”
“난 신경 쓰지 않소. 나를 어떻게 칭하건, 알아서 하시오.”
‘□’은 무명과 끔찍할 정도로 얽혀있는 글자였다. 현에 있는 賢(어질 현)은 죽은 벗의 이름이었고 □은 벗이 죽은 날에도 활로 문질렀던 무명의 악기와 연관된 글자였다. 이번에는 초승이다. 현은 유모는 왜 자신을 살렸는가. 죽은 이와 같은 소리가 나는 이름을 제게 박아 넣어서 일생을 비참하게 만들 생각인가. 죽음마저도 제게는 사치인가…. 죽음이 끊임없이 반추된다. 제 앞에 있는 사내가 끝없이 자신을 쥐고 농락한다. 무명은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드는 감각이 생생했다. 아비도 저자도 무명의 의견은 존재하지 않는 양 지워버린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저자의 마음대로 되게 하지는 않으리라. 무명은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해서 사흘이라는 시간 동안 무명은 총 두 번의 탈출을 감행했는데, 조계지에 있는 대주를 만나러 자리를 비운 두 사내는 무명이 여관 밖으로 나가려고 하면 귀신이 곡할 노릇으로 그 앞에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아이고, □□ 아씨. 조계지는 정말로 위험합니다. 잘못 걸리면 죽는 게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동 대주가 만두랑 평야수(平野水)를 주었는데, 아씨도 어서 들어오시게. 사람이 셋 있다 해서 부러 많이 받아왔어.’
그렇게 나흘째 되던 날, 창밖을 바라보던 무명에게 다가온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리도 나가고 싶소?”
“….”
“내 아씨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한 가지 조언을 한다면….”
“아무것도 모르는데 왜 내게 조언하는가?”
“이쪽도 결혼을 피하고 싶어 도망친 사람이라 그렇지.”
무명이 고개를 돌려 사내를 바라봤다.
“물론, 이쪽은 아씨처럼 어디서 죽고 싶다는 생각은 없지만. 아씨는 경성 사람이지 않소? 나흘이 지났고 이 제물포에서 경성은 고작 두 시간 거리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평양으로 갑시다. 오늘 아침 동 대주에게 연락이 왔소. 조계지에 못 보던 마차가 도착했다고.”
“….”
“나와 함께 일하는 동지들이 지금 평양에 있소. 아씨 또한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싫을 것이지. 아씨께서 좋으나 싫으나, 나는 평양에 계신 대장의 허락을 받아야 아씨를 보내드릴 수 있으니… 그 이후에는 자유롭게 해드리리라 내 약속할 수 있소.”
“나는….”
“마지막 여행이라 생각하시오.”
무명이 사내의 눈을 바라보았다.
“평양까지는 얼마나 걸리오?”
“얼마 안 걸리지. 우리 부친과 각별하신 자들이 깔아둔 철도가 있어서 말이오.”
“그곳에 도착해 그쪽의 대장 되는 자를 만나면 정말 나를 풀어주는 것이오?”
“내 맹세하지.”
“…가겠네.”
파도 소리를 뒤로 하고 무명이 떠난다. □□이라는 이름을 들고 무명이 떠난다. 평양으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싣고, 품에는 금덩이가 든 가방을 껴안고 저 위로 올라간다. □□은 꿈을 꾸었다. □□은 별당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고 수업을 마친 현은 마당에서 비질을 하고 있었다.
‘현아, 너는 나중 자라서 무엇이 될 거니?’
마당을 쓸던 현이 말갛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모르겠습니다. 공부를 계속했으면 좋겠어요.’
‘공부해서 무엇을 하고 싶길래?’
‘자주를 이루고 싶지요.’
목에 큰 상흔이 남은 현이 다 자란 □□을 바라본다.
‘간절히 바라건대, 이 역적 가문의 모든 핏줄은 온몸이 썩어들어가서 고통받다 죽어라.’
몸부림치며 □□이 깨어났다. 옆에 앉은 ■■이 □□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말했다.
“아직 평양까지 남았습니다. 더 주무시죠.”
그 말을 끝으로 □□은 다시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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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소설에 나타난 식민지 조선의 물가― 음식 가격을 중심으로, 박현수, 대동문화연구, 2023, vol., no.121, pp. 233-271
20세기 한국의 신여성과 모던 걸 패션의 비교 연구, 이상례, 소황옥,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2019, Vol. 69, No. 5, pp. 1-14
1920~30년대 한국 여성 패션과 소비문화의 변화, 김은정, 연세대학교 대학원 의류환경학과 박사 학위 논문, 2013
새로운 조선의 시작, 인천 개항장 유적,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eh/view.do?levelId=eh_r0353_0010&code=eh_age_40
, 2024.11.23. 접속
[일제강점기의 노동운동 ②] 저임금·장시간 노동, 그리고 조선노동공제회 활동,
https://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3429
, 2024.11.22. 접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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