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증
탕님 2천자
그 커피 마시지 마. 왜입니까? 독이 들었거든. 한 덩이 보기 좋게 자른 레몬 휘낭시에를 집어 먹으며 멜리시아가 말한다. 그 말을 들은 머커가 은으로 된 찻숟가락을 커피에 빠뜨려본다. 까맣게 변색되는 숟가락. 정말이군요. 그는 개수대에 커피를 모조리 흘려보낸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내가 그걸 모를 리가 있나. 그러니까, 어째서? 내가 개발한 독이니까. 멜리시아는 손을 떤다. 수 년간 앓은 알콜의존증의 부작용이다. 머커는 입을 다물고, 멜리시아는 침묵하는 그의 옆얼굴을 바라본다. 입에 묻은 빵가루를 문질러 턴다. 내가 탔다고 생각하는군.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긴, 얼굴에 다 쓰여 있는데. 결혼은 사람을 의심병 환자로 만든다. 기혼자는 끝도 없이 배우자의 외도를, 사업을, 사기를, 병세를, 치매를, 도박을, 유독함을 의심한다. 멜리시아는 결혼 이후 수도 없이 머커에게 다음과 같이 묻고 싶은 마음을 참았다. 무슨 생각해? 그 머릿속에 뭐가 들었어? 뭘 바라고 있는 거야? 그러니 제 아무리 넉살로 감추려 해도 멜리시아보다 배는 집요한 구석이 있는 머커가 어떠할지는 구태여 말할 필요 없다. 멜리시아는 그를 ‘이해’한다. 아니, 정말로. 적어도 사려깊은 마음으로 그를 이해하려 노력한다.
그들은 직업병을 완전히 버리지 못 했다. 멜리시아는 여전히 음식을 먹기 전에 냄새부터 맡는다. 은숟가락을 상시 대동하고 다닌다. 열에 둘 정도는 정말로 독이 들어 있는데, 처녀 시절 등졌던 원수들이 아직도 그를 생각하며 칼을 갈고 있다는 증거다. 머커는 웃는다. 아주 많이. 웃음은 사람을 무방비하게 만들고, 그가 소셜 바운더리에 자연스럽게 침습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는 아직도 ‘여러분’이라던가 ‘당신들’ 같은 불특정 다수를 가리키는 과장스러운 호칭을 즐겨 쓴다. 혹자는 그가 쇠퇴한 코미디언이라도 되는 줄 알았을 것이다. 사실 그는 회계사다. 매일 아침 지루한 회색 타이에 회색 수트를 입고 검은 수트 케이스를 드는. 사무실에 앉아서 고리타분한 숫자 놀음을 하며 계산기를 두드리는 그런 회계사 말이다. 멜리시아는 그가 회사에 있는 동안 집에 전화가 걸려 올 때면 그가 결국 참지 못 하고 자신의 상사를 ‘자살’시킨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버릇이 생겼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아직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성실한 비즈니스맨이다.
머커의 불안증세는 한동안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그는 멜리시아가 개 버릇 남 못 주고 그들이 먹는 음식에 어느 날 독을 타 동반자살을 꾀하지는 않을까 염려한다. 멜리시아의 우울증과 알콜 의존 이력을 볼 때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멜리시아는 그 확률이 희박하다고 주장하고 싶다. 적어도 그는 향후 10년간은 뒈질 생각이 없다. 대학원을 졸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달 S대학원에 원수를 접수했다. 이제와 공부를 다시 시작하기에는 이르지 않은 나이지만 그는 자신있다. 자신감 빼면 시체다.
멜리시아라고 해서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는 가끔 이 모든 게 머커의 연극은 아닐까 생각한다.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면 머커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있고, 짐은 다 빠져 있고, 함께 살았다는 흔적은 온데 간데 없고, 머커라는 남자는 사실 태어나지도 않은 것처럼 그렇게 실종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멜리시아는 머커가 아주 훌륭한 킬러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는 자살을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런 표정. 머커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얹는다. 뒤에서 그를 끌어안는 팔뚝이 튼실하다. 누구를 교살시킬 것도 아니면서 이렇게 튼튼할 팔은 어디다 쓸 건지 궁금하다. 넌 생각이 너무 많아. 머커가 말한다. 멜리시아가 대답한다. 난 정말로 독을 타지 않았어. 압니다. 알아? 예. 머커가 멜리시아의 뺨에 입술을 붙인다. 커피는 됐습니다. 카페인은 사람을 예민하게 만들어요. 핫초코나 타 마십시다. 그가 멜리시아를 안은 채로 말한다. 멜리시아는 카페인이 아니라 결혼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대꾸하고 싶지만, 그마저도 귀찮아져 관둔다.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핫초코 믹스를 꺼낸다. 몇 봉지? 2봉지. 당뇨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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