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달개님 1천자

시다 by Cid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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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창밖을 보고 있다. 바닥에 붙이고 앉은 두 발은 가느다랗게 떨리는 기차칸의 진동을 느끼고 있다. 그는 간만에 조선으로 향하고 있다. 어쩌면 처음인지도 모른다. 저녁 여섯 시의 1등실 식당칸이 숨쉴 틈도 없이 북적댄다. 건너편 식탁의 노부인이 영자 신문을 읽고 있다. 비상구 앞 테이블석에 앉은 프랑스인은 자녀에게 토마토를 먹이고 있다. 연인은 키스를 나눈다. 소녀는 창밖을 본다. 노을이 가라앉는 지평선을 하염없이 내다본다. 맞은편 빈 자리에 누군가 착석한다. 앉겠습니다. 그는 ‘앉아도 될까요’라던가 ‘동석해도 괜찮겠습니까’라고 묻지 않는다. 소녀는 대답하지 않고, 남자는 그것을 허락으로 받아들인다.

웨이터가 다가온다. 남자는 B코스를 시킨다. 웨이터는 소녀에게도 메뉴를 묻지만 소녀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는 웨이터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는 여전히 지평선 너머로 떨어지는 해를 보고 있다. 웨이터가 물러난 후, 맞은편의 남자가 웃음기 밴 목소리로 묻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요? 소녀는 고개 돌리지 않는다. 아주 적막하고 희미한 목소리로 그는 답한다. 죽는 생각이요. 그 순간, 소녀는 남자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 한다.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잠깐의 침묵 끝에 남자가 말한다. 어떻게 죽고 싶은데요? 소녀가 답한다. 익사하고 싶어요. 바다에서? 바다에서.

소녀는 죽음의 미학을 망치느니 차라리 행방불명되고 싶다고 말한다. 영원한 미제 사건으로 남고 싶다고 말한다. 남자가 묻는다. 왜 목을 매달지 않아요? 소녀는 입을 다문다. 남자가 말을 계속한다. 목을 콱 매달아 죽어버리면, 추하고 너저분한 완결이 되죠. 혀는 늘어지고, 얼굴은 검어지고, 모가지를 구성하는 일곱 개의 뼈는 분질러진 채 썩은 시취가 나는 당신의 몸뚱어리를 사람들이 밧줄로부터 끌어내려고 애쓸 겁니다. 미학을 보존할 자신이 없다면 차라리 망쳐버려요. 그 누구도 가지지 못 하게 만드는 겁니다. 테러리스트처럼? 테러리스트처럼.

어떤 죽음은 테러와 같다. 모두에게 영구적인 상흔을 남기고 박제된다. 소녀는 간밤의 꿈에 대해 생각한다. 꿈속의 그는 기차역에 서 있다. 열차가 가까워져 올 때 그는 경적 소리를 듣지 못 한다. 분쇄되고 싶은 것처럼 그는 선로에 뛰어든다. 그는 기차에 깔려 죽을 것이다. 어쩌면 매달려 죽을 것이다. 기차의 일부가 될지도 모른다. 기차가 어디로 데려갈지, 어디로 데려가고 싶은지, 그는 어디로 가고 싶은지, 어디에 다다를 예정인지…….

고개를 든다. 웨이터가 코스 요리를 나르고 있다. 소녀는 차례차례 놓여지는 옥수수 스프와 게살 샐러드를, 아무도 없는 맞은편 자리를 내려다본다. 냅킨이 흐트러져 있다. 여기 앉아 계시던 신사분, 성함이 뭐였죠? 소녀가 묻는다. 웨이터가 어깨를 으쓱인다. 글쎄요. 그가 답한다. ‘사내’라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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