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2 ss

형법 제260조

K=Potassium by KPo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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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층에는 성형외과가 입점해 있었다. 아직 오픈 시간이 되지 않아 문은 굳게 걸어잠긴 채다. 인기척은 당연하게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 동정을, 동현은 계단실 문간 너머로 확인했다.

이 건물에는 두 개의 계단이 있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정문과 연결된 앞쪽 계단, 그리고 뒷문과 연결된 뒤쪽 계단. 지금 동현이 위치한 곳은 앞쪽의 계단으로, 이 계단을 올라 7층에 다다르면 곧장 신도 구역에 진입할 수 있다. 장렬교의 후문이 계단실에 거의 접해있는 모양이었다.

동현은 한 손에 들고 있던 기기를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두었다. 크기는 케이크 상자의 1.5배 정도. 무게도 제법 나간다. 기본적으로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고, 내부에는 액체를 잔뜩 머금고 있으니 자명한 이치다.

이것은, 결혼식 따위의 이벤트에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기계.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풍성한 스모그를 만들어 참가자들에게 볼거리를 안겨주는, 연무기다.

보통의 연무기는 내부의 액체를 가공하여 냄새가 없는 연기를 만들어내지만, 동현이 가져온 연무기는 일종의 개조를 거친 녀석이다. 전원을 켜면 화재 현장의 것과 비슷한 매캐한 연기를 뿜어낸다. 물론 신체에는 영향이 없다. 그렇다면 어디에 영향이 있느냐. 굳이 따진다면 사람의 정신에 영향이 있지 않을까. 매캐한 연기를 마주한다면 누구라도 대피하고 싶어질 테니.

다른 손으로 들고 있던 이동식 배터리를 그 옆에 내려둔다. 능숙하게 기계의 전원을 연결했다. 기계 표면의 붉은 램프가 켜지는 것을 확인하고, 동현은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뒤쪽 계단에서 대기 중일 동업자에게 준비 완료 사인을 보내기 위해.

수신음이 한 번도 채 이어지지 않았건만, 민석은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됐냐?"

"준비 끝."

"신호 주면 바로 연무기 치워. 그거 들키면 귀찮아진다."

"저, 합류는 언제 해요?"

"연무기 치운 다음에 뒷 계단에서 대기하고 있어."

"넵."

동현은 6층 문간에 앉아 기계의 전원을 켰다. 보그르르, 하는 소리가 작게 나는가 싶더니, 금세 철제 주둥이에서 희뿌연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맵고 싸한 냄새가 급속도로 퍼진다. 계단 벽을 타고 위로, 위로 기어오르는 연기를, 동현은 급하게 따라잡았다.

장렬교 본부가 있는 7층의 문을 조심히 연다. 동현이 만든 문의 틈새로 희끄무레한 연기가 빨려들어가듯 퍼져나갔다. 장렬교의 출입문은 평범한 유리문. 연기가 비집고 들어가기엔 무척이나 알맞은 종류의 문이다.

짙은 연기가 장렬교의 출입구를 덮치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동현은 몸을 돌려 다시 6층으로 향했다. 계단은 이미 안개 같은 뿌연 연기로 가득 차 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동현은 한 발 한 발을 주의하여 계단을 내려갔다.

"연무기 켰어요. 삼 분만 있으면 안에 전부 퍼질 거예요."

"금방 끝낼 테니까, 잘 숨어있어."

넵, 하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민석은 전화를 끊었다. 늘상 있는 일이라 이젠 자연스럽다.

동현은 6층의 로비로 몸을 숨겼다. 이 정도 연기라면 연무기도, 이동식 배터리도, CCTV도 애저녁에 가려졌으리라. 눈치 빠른 누군가가 곧장 범인을 잡으러 오지 않는 이상 발각될 염려도 없다.

이 건물의 병원들은 죄다 열 시 이후에 문을 연다. 지금 시각은 고작 아홉 시 반. 연기는 위아래로 퍼지고 있을 테니, 애당초 범인이 몇 층에 있는지 알 수 없을 거다. CCTV를 볼 수 있는 경비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지지만...... 에이, 경비 하나 정도는 나도 따돌릴 수 있지.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고.

동현은 벽에 몸을 기댔다.

이제 자신이 할 일은, 민석의 지시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도화는 답사 때와 같은 모습으로 7층 비상구를 열었다. 예상했던대로, 문을 열자마자 새하얀 연기가 탐욕스럽게 계단실을 채워나갔다. 전혀 당황하지 않고 건물 안으로 발을 내디딘다. 매캐한 안개 속을 걷는 듯한 기분. 시야 확보가 절망적이지만, 건물의 평면도 정도는 이미 머릿속에 박아두었다.

인기척은 조금 거리가 있는 곳에서 들려왔다. 언뜻 들어도 그 수가 상당히 많다. 당황하여 우왕좌왕하는 발걸음 소리. 엘리베이터를 타지 말라는 누군가의 목소리. 연기를 마셔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 

다들 정문으로 대피하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이 근방에는 사람이 없다는 게 된다. 

도화는 곧장 오른쪽 벽을 더듬댄다. 납치된 사람은 오른쪽 방에 있었으니까. 

앞으로 몇 걸음을 걷자 문의 경첩이 손에 닿았다. 아까와 다르게 문이 열려있다. 보폭을 크게 하여 빠르게 방 안으로 들어선다. 방에는 가구랄 게 얼마 없었다. 그 말인 즉슨 장애물이 적다는 거고.

연기 너머로 어렴풋하게 가구의 실루엣이 보였다. 테이블로 예상되는 가구의 근처까지 가서, 도화는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시야 끝자락에 사람의 신발이 보였다. 테이블과 소파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다.

이동했군. 아까는 테이블 바로 근처에 있었는데.

도화는 몸을 낮춘 채 그쪽으로 이동했다.

겁에 질린 숨소리가 들렸다.

끈으로 포박된 발목이 움직였다. 도화를 피해 반대쪽으로 기어가는 듯한 모양새다.

이런, 무서운 건 알겠지만......

"유탐정 씨."

작게 속삭였다. 움찔대던 무릎이 멈췄다.

"저예요, 김민석. 기억하시려나? 김기철 씨 친구."

이젠 잔뜩 긴장해선 오그라든 열 손가락까지 보인다. 도화는 괜시리 손을 저어 연기를 쫓아내본다. 농도가 너무 짙어 쫓아내나마나 였지만.

"......아, 그."

"동두천 카지노. 기억나세요?"

거칠게 오르내리는 가슴께를 시야에 담는다. 서로의 얼굴이 보이기 직전에, 도화는 의식적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안 그래도 심란한 상황인데 두 사람 모두 죽상이면 곤란하지 않나.

예측한 대로, 탐정은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화는 의식적인 미소를 유지한다. 그가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고 안심할 수 있도록 했다. 인간을 대하는 기술과 동물을 대하는 기술은 어쩌면 비슷한 결인지도 모르겠다.

탐정과는 한번 만난 적이 있다. 동두천 카지노 건의 해명을 겸한 만남으로, 당연하게도 기철을 사이에 끼고 어울렸다. 퍽 낯을 가리고 숫기가 없는 사람이라는 첫인상을, 도화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자, 긴장 풀고. 움직이지 마세요."

주머니에서 다용도 맥가이버 칼을 꺼냈다. 칼날을 확인한 상대가 일순 움찔대는 걸 흘기며, 도화는 손발의 포박을 잘라낸다. 겁을 준 건 미안하지만 겁 없이 움직였다가 핏줄이 잘리는 것보단 훨씬 낫다.

"1층에서 김기철 씨가 기다리고 있어. 엘리베이터는 못 쓰고, 비상구 계단으로 도망칠 겁니다. 일어설 수 있죠?"

"......형이요?"

말투에 경상도 사투리가 남아있다. 도화는 문득 그가 대구 출신임을 떠올린다. 이것은 적법한 절차로 얻은 정보는 아니었다.

"그 사람 답지?"

대답이 되지 않는 대답을 하며 탐정을 일으켜세웠다. 나란히 서 보니 그가 도화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다. 관절이 삐그덕거리는지 살짝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장시간 포박의 후유증이리라.

탐정의 손을 잡고 방의 문간을 넘자마자 지근거리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피할 새도 없이 사람과 마주쳤다. 애당초 동행이 있으니 피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도화는 반사적으로 경계 태세를 취한다.

"뭐, 뭐얏!"

척 봐도 반백은 넘어보이는 남자였다. 몸에 쓸만한 근육이라곤 전무하다. 그런 정보부터 인식하는 자신을 자각하는 도화다.

꽉 잡고 있던 탐정의 손을 놓았다. 아침에도 꼈던 하얀 장갑은 아직 착용하고 있다.

"먼저 내려 가. 바로 뒤따라 갈게요."

그리 말하며 비상구를 가리켰다. 푸르게 빛나는 비상구 램프는 텁텁한 연기 속에서도 잘만 보인다. 탐정은 도화의 손가락을 따라 불빛을 확인하곤, 곧장 몸을 돌렸다.

"뭐하는 새끼......!"

상황을 파악한 남자가 우렁찬 고함을 지르려 들었다. 

이 이상 남의 이목을 끌면 곤란하다. 유탐정 씨를 1층에 내려보내고 다시 올라와야 하니까.

그렇다면, 목격자는 제거하는 수밖에 없다.

순식간에 판단을 마쳤다. 도화는 곧바로 남자에게 달려든다. 체격도 평범하고 근력도 평범하다. 이 정도 상대라면 세 명까지는 가볍게 제압할 수 있다. 아직은 그런 자신이 있다.

남자가 기겁을 하며 뒤로 쓰러졌다. 빠르게 허리 위로 올라타선 한 손으로 상대의 턱을 젖힌다. 나머지 손은 울대 양 옆의 경동맥을 압박한다. 이러면 입을 막을 필요가 없다. 숨이 막히면 목소리도 내지 못하는 게 인간이니까.

하나, 둘, 셋.

초를 정확하게 셀 수 있는 능력은 여러모로 유용하다. 이건 조사원이 되기 전부터 연습했던 기술이다.

넷, 다섯, 여섯.

남자가 숨 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정문 쪽의 소란에 비하면 극히 작은 음량이라, 도화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것이었다.

일곱, 여덟, 아홉.

근육이 이완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애드리브다. 사람은 잠시 뇌에 피가 돌지 않으면 의식을 잃는다. 그 상태가 유지되면 천천히 뇌세포가 손상되기 시작하여, 신체에 상당한 데미지를 입힌다.

열, 열 하나.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다. 살인죄는 형량이 무거우니까. 그러니 의식만을 잃을 수 있도록 압력을 조절해야 한다. 근육의 이완 정도를 보고, 기절과 죽음의 경계값을 잘 계산하여서......

열 둘, 열 셋.

손을 떼었다. 라텍스 장갑 내부에 조금의 수증기가 생겨난 것을 깨닫는다.

남자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입을 열지도 않는다.

도화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자의 두 발목을 잡아 탐정이 구금되었던 방 안으로 질질 끌어온다. 남자가 저항하지 않는 걸 확인한 후, 방을 나와 문을 거의 닫아둔다. 연기가 빠져나갈 수 있도록 작은 틈을 만들어 두었다.

일단은 유탐정 씨가 잘 내려갔는지 확인하자. 그리고, 다시 올라와서 조사를 하자. 중요한 증거는 죄다 간부 구역에 있을 테니, 그 잠겨있던 문을 따고 들어가면 되겠지.

의식적으로 숨을 들이마신다. 짙은 연기의 매캐한 냄새뿐이 느껴지지 않는다.

도화는 빠른 걸음으로 비상구로 향했다. 저 아래에서 다급하고 불규칙적인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탐정은 아직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 모양이다. 고통스러운 얼굴로 비틀거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혹 계단에서 구를까 염려가 된다.

연기 탓에 시야가 흐리다. 건물 안보다야 사정이 낫지만, 자칫 잘못하면 발을 삐끗할 수 있겠다 싶다.

남자를 계단으로 유인해 밀어버리는 방법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의외로 살상력이 높다. 모서리에 머리를 잘못 부딪히면 죽어버릴 수도 있고, 덜 부딪히면 금세 회복해 악귀 같은 얼굴로 쫓아올 수도 있다. 여러모로 불확정성이 크다. 

그에 비해 목을 조르는 건 효과가 확실하다. 뇌에 피가 돌지 않으면 사람은 쉽게 기절한다. 남의 도움을 받지 않는 이상 쉽사리 일어나지 못한다. 시간을 벌기엔 딱인 방법이다.

난간 아래로 탐정의 모습이 보였다. 절뚝거리며 계단을 차근차근 밟고 있다.

당신도 참 운이 없다고 해야 할지,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도화는 탐정을 부축할 요량으로 계단을 두 칸씩 뛰어내려갔다.

6층 로비에 쪼그려 앉아 있던 동현은 민석의 연락을 받고 몸을 일으켰다. 슬슬 연무기를 끄고 퇴각하라는 명령이었다. 

이 정도 연기면 환풍기를 풀로 돌려도 환기에 십여 분은 걸리리라. 스모그를 신나게 뿜어대는 연무기의 전원을 끄고, 배터리에서 코드를 분리했다. 양 손에 기계를 들고 계단을 내려가려니 불안불안하다. 결국 배터리를 한쪽 옆구리에 끼곤 난간을 잡는 동현이다.

연기는 1층까지 퍼져있었다. 연기가 시작된 6층보단 그 농도가 확실히 덜하지만, 건물 근처를 지나가는 시민들의 이목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동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곤 건물 뒷문으로 향했다. 동현의 차는 건물 뒷편 근처 골목에 대충 세워져 있다. CCTV에 최대한 잡히지 않는 루트를 나름 고민한 결과였다.

뒷문을 열고 나오자 사람이 한 명 서 있었다. 잘생긴 인상의 남자다. 속으로 기겁을 하며 슬쩍 옆으로 빠져나왔다. 하지만 남자는 동현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그저 문 앞에 서 있을 뿐이다.

적어도 장렬교의 관계자는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그쪽 사람이라면, 이 난리통에 뒷문으로 빠져나온 자신을 대단히 의심스럽게 생각하지 않을까. 아마 당장 붙잡아선 돌팔매질이라도 할 텐데. 그렇지 않은 걸 보면......

동현은 걸음의 보폭을 크게 하여 골목으로 향했다. 얌전히 주차해 둔 차에 두 개의 기계를 실어두고, 다시 아까의 건물로 돌아간다. 민석과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건물 뒷문을 열자마자 두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오동현과 김기철이다. 도화는 제 어깨에 걸려있던 탐정의 팔을 조심히 풀어낸다.

"멀쩡할 거라 그랬지? 내가."

탐정을 기철 쪽으로 밀어냈다. 그의 체구에 가려져 기철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안도에 젖어있을 것이 분명했으므로. 도화는 간접적으로나마 달콤한 보람을 느꼈다.

물론 여유롭게 싱글거릴 시간은 없다. 재빠르게 고개를 동현에게로 돌린다. 멍청한 얼굴로 세 사람을 번갈아 보고 있기에, 도화는 건물 벽을 주먹으로 쳐 시선을 끈다.

"오동현 너, 오 층에서 대기하고 있어. 건물이 생각보다 안 커. 둘이 같이 들어가면 다른 사람들 눈에 띈다."

"어? 네, 넵."

멍청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화는 급하게 건물 안으로 발을 옮기다가, 문득 전하지 않은 말이 생각나 몸을 반쯤 틀었다.

"유탐정 씨, 나중에 부를 수도 있어. 그땐 좀 나와 줘요! 지금은 일단 돌아가서 쉬시고."

대답은 듣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7층으로 올라가야만 했다. 연무기를 철수시킨 이상 연기는 점점 빠져나갈 테고, 그렇다면 몰래 숨어들기 어려워진다. 조금이라도 연기가 남아있을 때 잠입하는 편이 안정적이다.

동현의 발소리가 5층에서 멈추는 걸 듣고, 도화는 난간 아래로 고개를 내밀었다.

"칠 분. 그 이상 내가 안 내려오면, 올라와서 상황 파악해."

"칠 분? 뭐예요, 그 애매한 시간은."

"농담따먹기 할 시간 없어. 알아들었지?"

"옙."

동현이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는 걸 보고, 도화는 다시 계단을 올랐다. 금세 7층에 도달해선 반쯤 닫혀있던 비상구의 문을 연다. 건물 안은 여전히 연기가 자욱하지만, 아까보단 시야가 넓다.

고요하다. 인기척은 없다. 그 사이 모든 사람들이 대피한 건지도 모르겠다.

비상구로 들어서서, 오른쪽 방은 응접실. 아까 갑작스레 대면한 남자를 쓰러트리고 감금한 곳. 그리고 왼쪽 방은, 어디에 쓰는지 모를, 잠긴 방.

바지 주머니에서 다시 맥가이버 칼을 꺼냈다. 시중에 판매되는 제품은 아니다. 전문가의 손을 거쳐 좋지 못한 용도로 개조되었으므로, 실상 맥가이버 칼이라기보단 다용도 경범죄 도구라고 하는 편이 낫다.

왼쪽 방의 잠금장치는 평범한 열쇠식 자물쇠였다. 오동현의 사무실 자물쇠보다 허술하다. 맥가이버 칼에서 락픽을 뽑아 열쇠 구멍에 푹 쑤셔넣어 세심한 손길로 절걱이고 있으니.

뒤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났다.

락픽이 열쇠 구멍에 딱 들어맞은 건 그와 동시였다.

락픽을 구멍에 꽂아둔 채 빠르게 몸을 돌렸다.

누군가의 손이 정면으로 뻗어왔다.

입을 막으려고? 어림 없는 짓을.

빠르게 무릎을 굽혔다. 그대로 한쪽 다리를 뻗어 상대의 정강이를 걷어찬다. 연기로 흐릿한 시야 안에서도 상대가 비틀거리는 꼴이 보였다. 그 틈을 타 옆으로 빠져나와선, 이번엔 제대로, 라이트 훅을 날리려고 했는데,

오른쪽 어깨에 강렬한 충격이 느껴졌다. 어깨의 신경을 타고 팔까지 찌르르 하며 내달리는 고통. 등 뒤에서 있는 힘껏 가격당한 모양이다. 어떤 새끼인지 모르겠지만 힘이 장난이 아닌데. 상당한 데미지라 도화는 이를 악물고 몸을 돌린다.

천으로 싸인 죽도 같은 것이 다시금 어깨를 노리고 달겨들었다. 둔기로 하는 공격은 일단 눈에 보이면 피할 수 있다. 귓가에서 바람 소리가 들릴 정도로 신속하게 몸을 움직인다. 지근거리에서, 죽도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아니, 지금 보니 죽도가 아니다. 그래, 죽도에 천을 씌워놨을 이유가 없지. 

이건...... 장우산이다.

허공을 가르던 우산이 땅에 닿기도 전에, 상대는 도화를 향해 찌르기 공격을 시도했다. 무서울 정도로 날쌔다. 결정력도 있다. 아무리 봐도 보통 사람의 움직임이 아니다. 적게 쳐 줘도 유단자, 아니, 어쩌면 그 이상.

잡념이 동작에 방해가 됐다. 겨우 피하긴 했지만, 장우산의 말단이 옆구리에 강하게 스쳤다. 그대로 맞았다면 피멍이라도 들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걸로 어느 정도 어드밴티지는 얻었다.

찌르는 기술은 필시 팔을 뻗게 된다. 그렇다는 건 옆이 훤히 노출된다는 의미고.

도화는 땅을 박차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순식간에 상대와 거리가 좁혀졌다. 연기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던 얼굴이, 훤히 보이기 시작한다.

턱수염을 기른 남자는, 명확하게도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지면 검은 효력을 잃는다. 진검이면 또 모르겠지만, 장우산으로는 사람을 벨 수 없으니.

꽉 쥔 주먹을 그대로 턱 아래에 꽂아넣었다.

느낌이 나쁘지 않다. 제대로 들어갔다. 썩 괜찮은 어퍼컷이다.

남자는 어헉, 소리를 내며 몇 걸음을 물러났다. 장우산으로 바닥을 짚으며 비틀댄다. 

턱을 얻어맞았는데도 무릎을 굽히지 않는다. 대단한 정신력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공격 태세가 무너진 김에, 아예 우산을 손에서 떨어뜨리기 위해 발차기 자세를 준비했다.

뒷목에 손이 닿았다.

이질적인 감촉에 도화는 무심코 고개를 돌린다.

코앞에 사람이 한 명 서 있다. 얼굴을 확인하려 눈동자를 굴렸는데.

시야가 울렁였다.

상이 하나로 모이지 않는다.

맹렬한 졸음이 온몸을 덮쳤다.

관절이 중력을 따라 편안한 각도로 꺾인다.

바닥에 엉덩이가 닿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쿵, 하고 머리가 울렸다.

잠들면 안 되는데, 라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의식이 암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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