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작업 및 기타 샘플

크레페커미션 48. 근면은 누구의 오른손인가

1차 - 이안 + 달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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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안] 근면은 누구의 오른손인가

마차는 도시 외곽으로 향했다. 다음 목적지는 또 다른 피해자 닉 벡스의 아내였던 로디 벡스의 집인데, 위치가 빈민가 근처인지라 정보원과 접선한 후 빈민가를 통과해서 가는 게 동선이 깔끔했기 때문이었다. 효율성을 추구하는 동선이기에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는데, 마차에서 내린 순간 요한나는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행이라면 마차 떠나는 소리가 요란했던 덕분에 배에서 난 소리가 묻혔다는 것이겠지만 큰 위로가 되는 일은 아니었다. 사건에 집중한 나머지 식사도 잊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빈민가 근처였다. 여기서 무언가를 사 먹는 건 그다지 추천할 바가 되지 못했다. 서민의 음식은 품위가 없다거나 하는 시시한 이유가 아니라, 후추 및 향신료로 다른 재료의 맛을 가린 것들 뿐이니 먹고 탈이 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높으신 분 중 성격이 자유로운 분들은 호기심에 남들 몰래 먹어보고 그 방탕한 맛에 매료되기도 한다지만, 요한나는 그렇게 속 편할 수 있는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했다.

잠시 고민하던 요한나는 그대로 조사를 계속하기로 했다. 정체불명의 음식을 먹고 탈이 나도 문제였고, 배가 차면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데다 사건에 집중하다 보면 허기는 다시 잊히는 법이니까. 요한나는 시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너무 익은 과일값을 깎아달라며 흥정하거나 말린 생선을 이상한 눈으로 보며 이름을 묻거나 하며 상인들을 귀찮게 하다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도저히 사람이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은 좁아 보이지만 착시현상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인 통로를 몇 개나 지나면 작은 공터가 나온다. 무작위로 건물을 세우다가 우연히 만들어졌을 공터에는 이미 붉은 빛 도는 갈색 머리칼의 남자와 긴 머리를 아무렇게나 질끈 묶은 여자가 나란히 벽에 몸을 기대어 서 있었다.

“오랜만이야, 더그, 포피.”

“늦었잖아.”

“보자마자 그렇게 말하지 마, 더그. 우리가 일찍 온 거잖아. 오랜만이야, 요한나. 잘 지낸 것 같네.”

포피는 아버지가 현역일 때부터 알고 지낸 정보원이었고, 더그 또한 포피와 오래 알고 지낸 사이였다. 전대 버트란드가 처음 접선했을 때는 단순히 버트란드의 도움을 받은 빈민가 꼬마였으나 그때도 요한나보다 나이가 많았으니, 이들은 요한나를 고용인이나 의뢰인보다는 의뢰인의 딸로 인식하는 면이 컸다. 즉 요한나를 어리게 보거나 귀엽게 보는 축이었다. 요한나는 그게 싫어서 새로 꼬마들을 물색하기도 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길을 걷는 그 누구도 빈민가 꼬마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에서 빈민가 아이들은 탁월한 정보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요한나가 새 정보원을 만들기엔 입이 무겁고 신뢰할 만한 싹을 지닌 아이를 판별할 정도의 식견이 아직 부족한 데다 아이들과는 아직 친해지는 중이어서 중요한 정보를 맡길 수는 없었다. 지금도 필요할 때는 더그와 포피를 주로 부르는 편이었다.

“오랜만은 아니지? 저번에도 우릴 불렀으면서.”

“뭐, 나나 더그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해결한 사건이 있을 테니까.”

포피의 말대로였다. 실제 날짜로 따지자면 안 본 지 오래된 건 아니었지만, 그 사이에 요한나가 다른 도움 없이 해결한 사건이 꽤 있었기에 체감상으로는 오랜만으로 느껴진 것이다.

“정답. 포피는 변함없이 예리하네.”

“후후, 높으신 분들과 관련된 사건이라 필요 없던 거지? 내가 도와줄 수 있는데 꾸역꾸역 혼자 한 거라면 화낼 거야.”

“맞아. 상류층 간의 문제였지. 물론 의뢰인에 대해서 그 이상은 말할 수 없지만 말야.”

“당연히 그래야지. 크는 내내 우리를 잘 써먹고 이제 와 안 써먹으면 안 되지.”

더그의 퉁명스러운 말에 포피가 온화하게 웃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우리보다 유능하고 믿음직한 정보원 잘 없다?”

요한나가 장난스레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인정했다.

“알아. 아니까 이번에 또 부탁한 거니까 진정해.”

포피는 그렇다 치더라도 더그의 반응을 보면 아무래도 요즘 금전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요즘 그리 경제 상황이 나쁘지 않을 텐데, 호황이 빈민층까지는 닿지 못한 모양인지,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는 건지. 요한나는 둘의 상황에 대해서는 말을 삼키면서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성과는 있었어?”

“당연하지. 성과도 없이 낯짝 들이대진 않는다고.”

더그가 툴툴거리며 벽에서 몸을 떼고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으며 짝다리를 짚고 섰다. 요한나가 수첩을 꺼낸 걸 곁눈으로 확인하며 더그는 아무런 곁말 없이 저가 알아낸 것을 빠른 속도로 줄줄 쏟아내기 시작했다. 너무 빨라서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지만 그 속도에 이미 단련된 요한나는 평온한 얼굴로 그에 맞춰 속기를 시작했다.

“일단 터너 부부는 그다지 특이한 건 없어. 나이는 40대 중반에 두어살 차이가 나는 평범한 부부야. 지루할 정도로 성실하기 짝이 없는 분들이시더군.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교회 가고, 열심히 헌금 내는 고루한 양반들이더라고. 친구의 친구가 터너 부부 밑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친구의 말로는 일솜씨가 형편없는 데도 과분할 만큼 오래 고용해 주다 결국 잘랐다더군. 친구의 친구는 나쁜 놈은 아니지만 성실함과는 거리가 멀다니까 그놈이 욕한다는 건 터너 부부가 졸리기 짝이 없는 양반들이라고 봐도 좋아. 부부라서 닮은 건지, 닮아서 부부가 된 건지 몰라도 둘이 비슷하게 표본 같은 인물이라더군.”

“그래……. 그럼 벡스 부부는?”

“정반대. 정확하게는 닉 벡스가 정반대라고 봐야겠지. 로디 벡스가 서른이 안 된 반면, 닉 벡스는 마흔에 가까웠어. 나이 차가 많이 난다 해도 닉 벡스는 일찍 죽은 편이긴 하지만. 어쨌든 로디 벡스는 터너 부부와 비슷한 사람이지만 닉 벡스는 전형적인 술꾼이었다더군. 술에 안 취했을 때는 멀쩡한 편인데 안 취했을 때가 드무니 뭐, 결국 안 멀쩡한 거였지. 술에 취하면 인간이 쓰레기가 되어 집기를 부수고 난동을 부렸다더군. 그래서 죽었을 때도 술독에 빠져 살다가 병이 와서 죽은 게 당연하다고 다들 생각한 모양이야. 굳이 죽은 원인을 찾을 이유가 없을 정도라 부검이니 뭐니 할 것 없이 그대로 장례를 치렀다더라. 그래도 묘지에 잘 묻어준 것만으로도 아내로서 도리를 다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니 얼마나 쓰레기였는지 짐작이 가. 아내는 그렇게 신실한 성공회 신자인데 남편이 그 꼴이니 비극이었지. 뭐, 닉 벡스가 몰아붙여서 거의 반강제적으로 결혼했다는 소문도 있고. 어쨌든 남편의 됨됨이부터 부부가 전혀 닮지 않았다는 것까지 터너 부부와는 정반대야. 닉이 죽은 건 뭐, 로디 벡스에겐 잘 된 일이지.”

“흠, 둘 사이의 접점이 있을 가능성은 낮아 보이네.”

“맞아. 터너 부부의 사업이 기울고 있으니, 나중에는 빈민에 가까워질 가능성도 있지만 아직까진 악착같이 버티고 있어. 부친 장례식에 쓸 비용도 아끼고 아껴서 겉치레를 중요시하는 치들은 흉을 보기도 했다더라. 난 이해가 안 되지만.”

“뭐, 푸트니 베일 묘지에 안장했으니까.”

“솔직히 죽은 사람인데 장례식을 어떻게 하고 어디다 묻든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지만.”

더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인 다음 말을 이었다.

“존 호퍼는 터너 부부와 비슷한 나이대인데, 좀 희한한 인물이야. 인품이 좋지만 다정한 것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지. 남자치곤 체구가 작고 날카롭게 생기기도 했고. 종종 남을 도와주고 거지의 깡통에 동전을 넣는 타입이지만 기본적으로 세상에 대해 냉소적이라더군. 과학이라면 뭐든지 좋아해서 어느 방면이든 준전문가에 가깝지만, 어느 방면에도 특출나지 못한 데다 신분도 그러니 전문가가 되지는 못했어. 그래도 신문의 과학 기사를 검수할 정도로는 충분한 지식을 갖고 있어서 관리소장을 하면서 버는 돈에 가끔 신문 기사를 검수하며 받는 돈으로 생활해. 하지만 버는 돈의 상당수를 과학 지식을 알기 위해 쓰니 궁핍할 수밖에 없지. 결국 아내와 자주 싸웠고, 한 번 크게 다툰 후로는 별거 중이고. 사실 이 양반이 뒤로 뭔가 꿍꿍이를 가진 인간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조사하진 못했어. 시간이 촉박해서.”

“좋아. 정보가 모이는 대로 추가로 알려줘.”

“그래. 뭐, 존 호퍼와는 달리 길버트 코핀스의 구린 면은 금방 알아냈어. 길버트 코핀스는 20대 후반의 유부남이지만, 그다지 성실하게 일하지도 않고 집에 갖다주는 돈도 적어. 당연히 아내와 사이가 좋지도 않지. 뭐, 그래도 호퍼 씨 쪽보다는 사이가 좋지만, 그 비결이 건전한 건 또 아냐. 코핀스 씨도 그리 큰 체구도 아니고 얼굴도 평범한데 묘하게 여자에게 인기가 있는 타입이더군.”

“응? 여자 문제가 있어?”

“응, 그것도 크게. 아내가 있으면서 애인도 만든 놈인데, 애인이라기보단 거의 두 집 살이라고 봐도 좋아. 아내는 눈치가 없는 편이기도 하고 본인도 시간제 하녀로 일하고 있으니 모르는 모양이지만, 웬만한 사람은 다 두 집 살이 하는 걸 아는 눈치야. 심지어 애인은 시장에서 곡식을 팔고 있으니 애인 쪽 살림은 애인의 돈으로 충당하는 모양이고.”

“우와, 쓰레기…….”

“쓰레기지. 뭐, 개새끼는 하나만 하지 않는다는 말도 있으니, 그쪽도 좀 더 파 볼 생각이야.”

“부탁해. 그리고, 다음은?”

“네가 제일 신경 쓰던 사람 말이지?”

더그가 말하다 말고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한숨을 내쉰 다음 주머니에서 물통을 꺼내서 마시는 동안 요한나는 차분하게 기다렸다. 마음이야 시간 끌지 말고 당장 알려달라고 하고 싶지만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걸 조사하라고 시킨 자신도 너무했다는 자각이 있었다. 게다가 많은 내용을 한 번에 길게 줄줄 말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니까. 둘 다 글자를 모르니 하는 수 없는 일이었다.

“달리아 벨.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으로 짐작이 가. 런던 토박이는 아닌데, 누구도 출신을 몰라. 마치 땅에서 솟아나기라도 한 것 같은 인상이었다고 하고……. 이 동네에서는 뒷소문 쪽으로 유명인이야. 나나 포피도 원래 알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고, 뭐, 그야 벨 씨의 집이 이 동네인걸. 내 구역에서 거리는 좀 있지만 어쨌든 이웃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 뒷담 할 정도는 되니까 유명 인사라고 해도 되겠지.”

더그의 설명에 요한나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물론 긍정적인 내용의 정보가 나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긴 했지만, 더그가 말하는 달리아는 요한나의 생각보다도 더 부정적이었다.

“뒷담? 누군가의 악의를 살 정도로 타인과 교류를 하는 타입으로 보이지도 않던데?”

그렇다. 뒷담도 어느 정도 사람 사이에 교류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나가 보기에 달리아는 그 정도의 교류조차 없는 심각한 상태로 보였다. 오죽하면 말하는 법을 까먹은 듯한 독특한 말투를 갖고 있을까. 하지만 더그는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냈다.

“바로 그 점이 문제야.”

“음? 교류가 없는 게?”

“그래. 아무리 야간관리인으로 일하고 있다고 해도 런던에 온 직후부터 일을 한 것도 아니고 분명히 뭔가 과정이 있을 텐데, 오갈 데 없는 걸 불쌍히 여긴 호퍼 씨가 일자리를 주기 전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 아무리 사람이 들고 나는 빈민가라지만 이렇게까지 깜깜한 건 이상하다고.”

“흠.”

“촌뜨기처럼 보이는 여자에게 어떤 건달 놈도 손을 안 댄 것부터 보통은 아냐. 아니, 당연히 손을 대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닌 거 알지? 내 말은. 쓰레기가 발 디딜 틈 없이 널려 있는 지뢰밭 동네에서 외지인이 지뢰를 하나도 안 밟고 넘어간 게 신기하다는 거야. 어쨌든 땅에서 솟아난 것 같은 등장에, 건달에게 시비 한 번도 안 걸리고, 아무와 교류하지도 않고, 밤에만 모습을 드러내는 데다, 여름에도 갑갑하기 짝이 없는 몰골을 하고 있으니, 아무리 가만히 숨죽여 살아도 튈 수밖에. 그래서 이름으로 불리는 일은 거의 없고, 대부분 마녀라고 수군대.”

“마녀라…….”

마녀의 대부분은 무지몽매했던 시기의 학살 피해자들이었지만, 마녀라는 단어에 따라오는 부정적인 이미지는 지금도 여전히 남아있었다. 악마와 내통하며 저주를 일삼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음산하고 기분 나쁜 여자. 그 이미지가 주는 느낌과 달리아 벨을 비교해 보자면……. 달리아 벨은 요한나마저도 마녀라고 수군댄다는 말에 공감할 뻔했을 정도의 인물이긴 했다.

“가벼운 이미지가 아냐. 얼마나 심하냐면, 벨 씨가 진짜 마녀라서 밤에만 나다니며 묘지의 이슬을 식사 삼아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닐 거라고 믿는 사람도 있더라.”

“요즘 시대에? 말도 없이 달리는 마차가 나오는 이 과학의 시대에?”

더그는 그 의문에 대답하는 대신 어깨만 으쓱였다. 요한나는 징그러울 만큼 이성적이고 현대적인 인간이었으니 저런 말도 충분히 할 수 있겠지만 현실은 달랐다. 미신은 어디에나 있고, 제 삶이 제 뜻대로 굴러가지 않을수록 미신의 힘은 강력해지는 법이었다. 그리고 생활에 여유가 없을수록 자신이 알고 있는 게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고.

“어쨌든 그런 의미로 이웃들은 쉬쉬하며 거리를 두는 모양이야. 그래서 사적인 건 거의 알아내지 못했어. 의문에 싸인 인물이지.”

“하지만 방금 전에 너는, 달리아 벨의 과거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했지.”

요한나의 날카로운 지적에 더그는 휘파람을 한 번 불었다.

“하여튼 뉘앙스를 잘 읽는다니까. 그래, 거의 없지 아예 없는 건 아니야. 내가 아편에 찌들어 죽어가는 노인에게서 우연히 들은 건데, 나는 여기서 추가 정보를 알아낼 재주가 없지만 너라면 어떻게 알 수도 있겠지.”

“흠, 말해봐.”

“노인이 몇 년 전의 달리아 벨을 기억하더라고. 그 괴상한 아가씨에 대해서는 자기도 잘 모르지만 이름은 달리아 벨이 아니라고 우기는 거야.”

“호오?”

“달리아 벨이 아니라, 라이 리아 벨이라고 벅벅 우기더라. 그러면서 이름이 괴상하니 분명 외국인일 거라며 허공에 대고 손가락질하던데. 영국인처럼 생겼지만, 분명히 외국 피가 섞였을 거라고.”

“……뭐야, 그 괴상한 이름은.”

반사적으로 대꾸하던 요한나는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아니, 아니었다. 그건 괴상한 이름이 아니었다. 외국인이라 특이한 이름을 가졌다기보다는 마치.

“아니, 그건 중간 이름이 리아인 게 아니라.”

“자기 본명을 말하려다 서둘러 고쳐 말한 것 같지?”

그래, 딱 그런 느낌이었다. 달리아의 말투를 알고 있는 요한나는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말했을지 상상할 수 있었다. 이름이 정말 라이 리아 벨이었다면 오히려 노인은 라이 리아 벨이라고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유명사를 한 번에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말을 더듬는데다 악센트가 이상했으니까. 더그는 달리아 벨의 말투는 몰랐지만, 자기 이름을 버리는 놈 정도는 흔하게 보며 살아왔기에 짐작할 수 있었다고 했다.

“새 이름으로 바꾸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실수지.”

“그래, 그렇다면 진짜 이름은 라이- 로 시작하는 이름일 가능성이 크겠어.”

“맞아. 전체 이름도 아니고 이름의 조각일 뿐이니 내가 거기서 뭘 더 찾아낼 수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너는 다르겠지? 표적이 워낙 독특한 데다 넌 여기저기에 연줄도 있을 테니까.”

“그렇게까지 대단하진 않지만, 어쨌든 좋은 정보야. 고마워, 더그.”

고개를 끄덕인 요한나는 주머니에서 동전을 몇 개 꺼내 더그 쪽으로 던졌다. 손을 한 번 휘둘러 그 모든 동전을 잡은 더그는 찬찬히 수를 세고는 불퉁했던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뭐야, 웬일로 이렇게 후하게 굴어? 요즘 벌이가 좋은가 봐?”

“네가 알아 온 게 많으니까 그만큼 준 것뿐이야. 너무 부담스러우면 다시 줘도 돼.”

“내가 언제 부담스럽대?”

더그는 요한나가 다시 뺏어갈까 얼른 주머니에 돈을 집어넣었다. 내내 불퉁하던 얼굴이 활짝 피는 게 얄밉기 짝이 없었지만, 이 짧은 시간에 많이도 알아 왔으니 줄 건 주는 게 옳았다. 요한나의 주머니에서 돈이 나오면서부터 포피도 덩달아 자신을 부담스러울 만큼 쳐다보고 있는 걸 보면 둘 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돈귀신들이었다. 형편이 어려우면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더그가 기분 좋게 다시 벽에 등을 기대자, 이제는 포피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어쩌지, 더그랑 겹치는 정보가 꽤 많네. 설마 먼저 보고했다고 더 돈을 많이 주는 건 아니겠지, 아가씨?”

“당연하지. 저번엔 포피가 먼저 보고했지만 더그도 비슷하게 받아 갔잖아. 그 전엔 반대였고. 내가 섭섭하게 준 적 있어? 일단 보고부터 해줘.”

“물론 섭섭했던 적 없어. 좋아, 더그랑 겹치는 정보는 빼고 보고할게.”

고개를 끄덕인 포피가 목을 한 번 가다듬고는 빠르게 정보를 쏟아내었다.

“터너 부부에 대해서는 나도 더 아는 건 없어. 지루할 정도로 따분하게 사는 사람이라서 이 동네 근처엔 얼씬도 안 해. 로지가 모르는 남자면 말 다 했지.”

마담 로지는 근방의 홍등가에서 유명한 인물로, 비상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어 홍등가에 한 번이라도 드나든 남자라면 빠짐없이 기억하면서도 입이 무겁고 매서운 성격이어서 경찰까지도 얕잡아보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그 누구도 마담 로지에게서 정보를 빼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어릴 때부터 친동생처럼 함께한 포피와 그런 포피의 목숨을 구해준 전대 버트란드 탐정에게는 예외였다. 전대 버트란드의 뜻을 이어 활동하는 현 버트란드에게도 꽤 유하게 대해주는 편이었고.

“흠, 적어도 여자 문제에 대해선 결벽할지도…….”

“맞아. 내 느낌으로는 부부 둘 다 결벽증이 있어 보였지만, 뭐 답답하게 사는 게 행복하다면 누가 말리겠니.”

포피의 말뜻은 신체적인 부분이 아니라 도덕적인 결벽에 가까울 것이다. 물론 요한나를 찾아올 때마다 두 부부는 깔끔한 옷차림을 했지만 그렇다고 크게 더러움에 대한 경계심은 볼 수 없었다. 도덕적 결벽은 심각한 게 아닌 이상 큰 문제가 되지는 않으므로 요한나는 간단하게 메모만 해두었다.

“하지만 존 호퍼의 부인에 대해서는 좀 들은 게 있지. 호퍼 씨도 좋은 남편감은 아니지만, 아내인 마거릿 호퍼도 그렇게 좋은 아내감은 아니래. 관리소장이 신문사에서도 일을 한다니까 안정적으로 넉넉하게 돈을 벌 거라고 생각했나 봐. 정기적인 수입을 기대하고 결혼했는데 엉뚱한 데로 지출이 줄줄 새니 매일같이 싸우면서 존 호퍼의 지식을 비하했다나 뭐라나.”

“둘 다 큰돈을 벌 만한 직업이 아닐 텐데?”

“큰돈을 바랐다기보다 꾸준한 수입을 좋게 봤다던가? 거느린 식구도 없고 행색이 그리 세련되지도 않았잖아. 일을 꾸준히 하니까 씀씀이가 적을 거라고 생각한 게 아닐까.”

“사실은 다른 데에 돈을 쓰고 있었는데 말야.”

“응, 그래서 별거 중이야. 아내는 지금은 어느 귀족의 타운하우스에서 입주 하녀로 일하고 있다고 해. 얼굴 볼 일이 거의 없으니 남이나 다름없지만 이혼은 안 하고. 신실해서 그런 게 아니라 둘 다 이혼 절차가 귀찮아서 안 하는 거래.”

“귀찮……. 음, 그 부분을 좀 더 조사해 줘. 귀족이 누구인지도 알 수 있으면 좋고.”

“알았어. 그리고 다음은 벡스 부부야. 이 부부에 대해서도 더그와 겹치는 정보가 많지만 내 쪽이 조금 더 자세한데, 일단 닉 벡스가 죽을 건 누구나 예상했대. 죽기 직전에는 누가 봐도 이상할 정도로 눈이랑 피부가 노래지고 배가 부풀었대. 다리도 엄청 굵어졌고. 그 지경이 되도록 술을 마셨는데 술만 마신 건 아니고, 돈이 좀 생기거나 누가 끼워주면 여자도 데리고 놀았다나. 그런데…….”

“그런데?”

포피가 빠르게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닫았다. 대체 왜 그러는지 캐물으려던 요한나는 무언가 망설이는 포피의 표정을 보고는 도로 입을 다물었다. 대신, 손짓해 포피를 가까이 부르며 귀를 손에 대었다. 포피가 망설이는 이유가 요한나 때문이 아니라 남자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은 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라는 감이 왔기 때문이었다. 이안이 아닌 요한나이기에 느낄 수 있었다. 요한나의 태도에 더그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뭔갈 짐작이라도 한 듯 끼어들지 않았고 포피는 쪼르르 다가와 요한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여자를 데리고 놀았지만 못 놀았대.”

“응?”

“그러니까, 거기가 안 섰대.”

“…….”

“로디 벡스가 처녀일 거라는 농담이 공공연하게 돌아다닐 정도로.”

“…….”

“그 이유를 대면서 호소하면 카톨릭 교회에서도 이혼을 허락해 줄 거라는 말까지 돌았으니까, 알 만하지?”

“……아, 그래.”

말을 마친 포피가 다시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요한나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져서는 펴지질 않았다. 정보는 고마웠다. 고마웠는데, 요한나 뒤에 있는 이안이 대리수치심에 몸부림을 마구 쳤다.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면 요한나 앞으로 이안이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다른 건?”

“다른 건, 로디 벡스의 결혼 전 이름이 로디 터커튼이라는 것 정도가 전부. 벡스 부인은 런던 출신이 아니라서 터커튼 시절을 알려면 시간이 더 필요해. 시간을 들여도 다 알 순 없을 거고.”

“알았어. 얻는 대로 알려줘. 다음은 코핀스인가?”

“코핀스 씨는, 음. 더그의 정보와 대부분 일치하지만, 코핀스 씨에 대한 소문이 남자들 사이에서와는 조금 다르게 난 것 같네.”

“응? 왜, ……설마?”

코핀스 씨도 발기부전인데 여자가 많이 붙는 특별한 이유가 있냐는 의문을 ‘설마’라는 두 단어에 담아서 물어보자 포피가 고개를 저었다.

“으음, 요한나가 생각하는 건 아닐 거야. 오히려 겉으로 보이는 관계와 실제가 다른 것 같다는 이야기도 들었거든. 겉으로 보기에 코핀스 씨는 바람둥이에 최악의 남편이지만, 그게 다 아내의 관심을 끌려는 수작이 아닐까 하는 주장도 나왔거든.”

“……쓰레기가 아닌 바에야 그런 식으로 관심을 끄는 게 말이 돼?”

“코핀스 부인이 워낙 눈치가 없어야지. 원체 무뚝뚝하기도 하지만, 이성 간의 교제에 눈치가 전혀 없는가 봐. 사실 남자에게 관심이 있기는 한 건지도 모르겠다고 할 정도로. 코핀스 씨는 아내 앞에서도 공공연하게 여자들에게 추파를 던지지만, 그러면서 동시에 아내의 말 한마디에 쩔쩔매며 어쩔 줄 몰라 한다지 뭐야. 왜, 원래 이성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류의 사람들이 있잖아. 코핀스 부인이 그런 타입인데 코핀스 씨는 부인을 사랑하는 거지. 그러니 온갖 짓을 해서라도 관심을 끄는 거야. ‘이래도 관심을 안 가져? 이래도?’를 반복하다 보니 두 집 살이 까지 하게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어.”

“그 정도면 애초에 결혼은 왜 한 거야?”

“뻔한 거 아니겠니? 남자에게 관심은 없지만 나이는 찼고 주위에선 결혼하라고 난리인데 마침 자기에게 구애가 들어오니 냅다 한 거지.”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냥 정보로 알아둬. 진짜인지는 모르니까.”

“그래…….”

타인의 삶은 참으로 재미있지만 재미있으면서 알고 싶지 않을 때도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런 기분을 느끼며 요한나는 일단 모든 내용을 수첩에 정리했다.

“자, 이제 한 명만 남았어. 달리아 벨, 요한나가 엄청 신경 쓰는 사람.”

“신경을 쓴다기보다는,”

“수상하지? 수상할 만하지. 일단 평탄하게 살아온 인생은 절대 아닐 거라 장담해. 얼굴에 화상자국이 있으니까.”

포피의 말에 더그가 화들짝 놀라고 요한나가 표정을 구겼다.

“엑? 화상자국이야?”

“의심은 했지만 역시.”

둘의 다른 반응에 포피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게 바로 여자로 살아본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여자가 얼굴을 가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잖아?”

“아니, 그냥 미쳤거나 심미안이 남달라서 그러는 걸 수도 있잖아.”

“겉으로 보이는 게 특이하다고 해서 속까지 특이하다는 보장은 없잖아.”

“아니, 그 표정과 분위기는 속까지 특이하지 않으면 나올 수가 없다고.”

요한나는 서둘러 포피와 더그가 아웅다웅하는 걸 말렸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둘은 제 의견이 맞다면서 포피가 토라져 돌아가 버릴 때까지 싸울 것이 분명했다. 둘이 싸우든 말든 상관하고 싶지 않았지만, 포피가 가든 말든 그가 가진 정보는 다 들어야 했다.

“일단 정보부터. 다 들어야 값을 주지.”

“흥. 알았어. 멍청이 더그는 무시할게.”

“야,”

“쉿.”

억지로 입이 막힌 더그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요한나도 포피도 그를 무시했다. 더그가 토라져서 입을 다물어도 일단은 정보가 우선이었다.

“달리아 벨이 런던 출신이 아닌 건 알지만 어디 출신인지는 모르잖아, 다들.”

“아무래도 알 수 없지…….”

말투가 워낙 특이해서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으니, 출신이 어딘지 짐작하기도 힘들었다. 먹는 음식이나 생활 특징도 알 수 없어서 어떻게 출신을 찾아야 할까 막막했다. 지금이야 수상쩍을 정도로 괴이하다지만 고향에서도 그랬을 거라는 보장은 전혀 없었다. 어떤 사건으로 인해 고향을 떠나면서 변한 모습일지도 모르니까.

“근데 난 알 수 있을 것 같아.”

“응? 어떻게?”

“말투가 굉장히 이상하기는 했는데, 기억(rɪˈmembə)을 기엉(rɪˈmembər)이라고 발음하더라고. 이상한 악센트에 묻힐 뻔했지만 똑똑히 들었어. 확실해.”

“그거 남서부 말투잖아?”

“맞아. 확실해. 어딘지 정확하진 않지만, 분명히 남서부에서 왔을 거야. 다른 단어는 대부분 발음을 우리와 비슷하게 하니까, 그렇게 런던에서 먼 지역은 아닐 거고.”

“좋아! 아주 잘 했……. 잠깐만. 들었다고?”

“응.”

“대화를 했단 말야? 상대와 접촉했다고?”

“응!”

“정보원인 걸 들키면 어쩌려고 그랬어!”

포피의 말에 핑글, 세상에 도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물론 좋은 정보를 얻은 건 고마워할 일이 맞았다. 하지만 상대는 사회적인 관계가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인 사람이었다. 즉, 포피를 기억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이야기였다. 혹시 접촉하는 모습을 본 타인이 있다면 그 타인도 사건을 기억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고. 여러모로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포피, 대체 어쩌려고,”

“걱정 마. 아무도 없었으니까.”

“아무도 없어?”

“달리아 벨의 양 옆집은 낮에 다 비어있거든. 동네 구석이라 사람도 없고. 다 알고 나서 골목에 들어서면서 보이는 집마다 문을 두드렸어. 어느 집이든 어린애 아니면 아무도 없을 시간인 걸 알면서 갔다구. 남들이 보면 다른 집을 찾다가 벨 씨의 집까지 간 걸로 보였을걸? 누가 봤어도 의심하지 않을 거야.”

“대체 뭘, 무슨 짓을 한 거야?”

“볼일이 급해서 화장실을 쓰고 싶은데 들어가도 되냐고 물었지.”

“……다른 집에서 문을 열어주면 어쩌려고 그랬어?”

“로지가 밤놀이 용으로 일하는 아가씨 복장을 갖고 있었거든. 그걸 입고 분장하고 가발을 썼지. 다들 방문 영업이라고 생각했을 거고, 어른이 없으니 문을 안 열어줄 거고, 있어도 열어주지 않을 가능성이 컸지. 실제로도 그랬고.”

“달리아 벨도 문을 안 열어주면?”

“몇 년째 야간에만 일하는 사람이 방문 영업 복장이라고 바로 생각할 수 있을까?”

“……대체.”

아버지가 이들을 어떻게 가르쳤길래 이렇게 치밀하게 정보를 캐오게 된 걸까? 요한나는 하늘을 향해 한숨을 내뱉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나름대로 준비를 많이 하고 벌인 일이기도 하고, 이미 저지른 일은 어쩔 수 없으니 부디 달리아 벨과 행인의 기억에 크게 남지 않았기를 바라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화장실을 썼어?”

“당연하지. 마녀라느니 저주라느니 소문은 많이 들었지만, 사실 그냥 사람을 오랫동안 못 만난 사람인 거 아니야? 화장실도 쓰게 해주고 내 거짓 영업도 꽤 들어줬는걸. 마녀라면 그러진 않았겠지.”

아무리 마녀라도 화장실 정도는 쓰게 해줄 것 같은데. 그걸로 앙심을 품을 것 같지도 않고. 하지만 요한나는 그 말을 하는 대신 한숨만 푹푹 내뱉었다. 그리고 침착하게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동전을 꺼내 포피의 손에 쥐어주었다. 포피는 얼굴 한가득 웃음을 지었지만, 신나게 동전을 세더니 곧 불퉁한 얼굴이 되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뭐야, 더그보다 쬐끔 더 줬잖아. 내가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

“준비를 잘했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위험했어.”

“준비를 잘했다면서!”

“내가 지금 돈을 더 많이 주면 다음부턴 더그까지 위험한 시도를 하겠지. 돈을 더 받으려고.”

“…….”

“더그보다 더 준 건 분장하는 데 들었을 화장품값일 뿐이야 그러니까, 다음부턴 그러지 마. 둘 모두 한 번 쓰고 버릴 정보원이 아니니까 이러는 거야. 그러니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너 정말 말 잘한다…….”

포피가 입을 비죽거렸지만, 그 이상 불평하지는 않았다. 저가 듣기에도 요한나의 말이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보고도 했고, 다음 주문도 받았고, 돈도 받았으니 이제는 다시 돌아갈 시간이었다. 더그가 먼저 작별 인사를 하고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뒤이어 포피도 다른 골목으로 가려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요한나에게 돌아왔다.

“아, 잊을 뻔했다. 자, 이거 받아.”

포피가 주머니에서 종이를 한 장 꺼내 내밀었다. 요한나가 반으로 접힌 종이를 펼치고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연필로 어떤 열쇠의 탁본을 떠온 것이다. 얼마나 잘 떴는지 이걸 참고하면 초보 도둑도 잠금쇠를 열 수 있을 것 같았다. 요한나가 아연한 눈으로 포피를 보았고 포피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열쇠가 보이길래 목이 너무 마르다고 징징대봤거든. 벨 씨가 물을 가지러 간 사이에 후다닥 칠했지!”

“그래, 연필과 종이를 갖고 있었겠네.”

“방문 영업 사원으로 위장했으니까.”

포피는 개구쟁이처럼 웃고는 다시 몸을 돌렸다. 무언가 돈을 더 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포피는 그러지 않았다. 돈을 요구하는 대신 포피는 골목으로 들어가며 가볍게 손을 머리 위로 흔들었다. 다시는 위험한 짓을 하지 않겠다는, 말보다 확실한 몸짓에 요한나는 한숨처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일정을 조금 바꿔야겠는걸.”

로디 벡스를 만난 다음 시신들을 보러 가려 했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벡스 부인과 대화한 다음 입이 무거운 대장장이를 방문하고 나면 딱 해가 질 것 같았다. 마치 부추기는 것처럼 타이밍이 좋았다. 기회를 날릴 것이냐, 쓸 것이냐. 포피에게는 위험한 짓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정작 자신이 되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법이었다. 이안은 요한나보다 더욱더, 절대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다.

시간 감각과 함께 잊고 있던 허기가 몰려오고 있었다. 원래는 허기를 더 참았다가 부검실로 가기 전에 요기하려 했지만 마침 기회가 왔으니, 끼니를 때우는 것도 위기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요한나는 포피와 더그가 말해줬던 ‘꿀꿀이 죽보다 좋은 걸 내주는 식당’이 어디였는지 기억하려 머리를 쥐어짜며 비좁은 건물 틈새로 들어갔다. 사람이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은 틈새였지만, 마치 요술처럼 요한나의 몸이 쑥 사라졌다.

 

로디 벡스는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앉아있었다. 곧고 바른 자세이나 동시에 그 상태 그대로 굳어 석상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딱딱하기도 했다. 그의 입술은 잠깐의 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꾹 닫혀있어 열리는 게 더 이상할 것 같았다. 완고하고 고집 세며 엄격한 성정을 빚어 사람으로 만든다면 꼭 그런 모습일까.

퍽 심문하기 까다로운 류의 인물이었다. 한숨을 내쉬고 싶은 기분을 목구멍 뒤로 넘기며 요한나는 입술 안쪽을 살짝 깨물었다. 그나마 자신이 여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이런 타입의 사람은 남자 탐정으로 방문했다면 오히려 경찰이 방문할 때보다 더 굳게 입을 닫는다. 그리고 요한나가 옷을 제대로 차려입지 않았다면, 혹은 빈민가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화려한 옷을 입었다면 그때에도 입을 제대로 안 열 것이었고. 정보원과 접선할 예정이라 장소에 비해 너무 튀지 않게 입고 온 것이 다행이었다.

입을 열지 않는 인물이기에 요한나는 거꾸로 자신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성급하게 할 말을 찾아 주절거리느니 차라리 침묵이 더 낫다. 허름한 거실 소파에 앉아 첫 질문을 꺼낸 뒤, 요한나는 싸구려 홍차를 두어 번 마시는 것 외에는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리 조용하고 입이 무거운 사람이라 해도, 훈련이라도 받지 않은 이상 침묵을 견디는 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

“아무 말씀도 안 하실 거라면 그만 나가주시겠어요? 이쪽은 먹고 살려면 바쁩니다.”

요한나가 먼저 말을 꺼내고 싶은 마음을 몇 번이고 누르던 차에, 겨우 벡스 부인의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제법 뾰족한 어투라서 더욱 마음에 들었다. 만일 벡스 부인이 무덤덤한 어투로 건조하게 말했다면 부인의 드높은 벽에 좌절했을지도 모른다.

“말씀드렸다시피, 좀 더 자세하게 말씀해주셨으면 해서요.”

“충분히 자세히 말씀드렸습니다.”

“부인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말씀하지 않으셨죠.”

“제 자신의 행적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꼼꼼하게 말씀드렸습니다.”

“행적이 아니라 관점의 문제입니다.”

요한나는 다시 차를 한 입 마시고 말을 이었다.

“이렇게 말씀드리긴 죄송하지만, 부인의 남편이라는 사람은 사적인 감정 없이도 언급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죠.”

더 굳을 수 없을 것 같았던 벡스 부인의 얼굴이 더욱 단단해졌다.

“그럼에도 가장 가까운 사이였을 아내는 아무런 감정도 자신의 관점도 담지 않고 사실만을 진술했습니다.”

“그래야 하는 거니까요. 그것만 있으면 되고요.”

“과연 그럴까요?”

요한나의 반문에 거실은 다시 적막에 빠졌다. 그러나 그 적막이 깨어지는 데에는 이전만큼 오래 걸리지 않았다. 벡스 부인은 허리와 목을 더욱 빳빳이 세우며 말했다.

“저를 의심하시는군요.”

“지금 단계에서는 아무도 의심하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모두를 의심한다는 말도 되지만요.”

“저를 의심하는 사람에게 더 할 말은 없습니다.”

“모두를 평등하게 의심하는 사람이죠. 의심 가는 사람을 줄이려고 애쓰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내가 당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말인가요?”

“아뇨. 그저 저는 말씀을 따를 뿐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공평과 정의를 행하여 탈취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예레미야 22장 3절.”

“…….”

“…….”

무어라 더 쏘아붙이려던 벡스 부인은 요한나의 말에 도로 입을 다물었다. 뚫어져라 테이블을 보던 벡스 부인은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 고개를 들며 짧게 아멘, 하고 대답했다.

“시시콜콜하게 말하는 게 어떻게 사람들의 무죄를 밝히는 건진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한 거라면, 어쩔 수 없네요. 후……. 닉이 생전에 어떤 남편이었냐고 물었죠?”

너무 깊어 지옥까지 다다를 것만 같은 한숨을 한 번 내쉰 다음 벡스 부인은 몸에서 조금 힘을 풀었다. 성경을 인용하기는 했지만 부인과는 달리 그다지 신실하지 않았기에 요한나는 양심이 조금 아팠다. 하지만 신실한 자를 녹일 수 있는 게 신 외에 달리 있겠는가? 이 또한 공의를 위한 일이니, 하나님이 여기 있다 해도 이 정도는 눈감아주시리라.

“그보다 더 최악인 인간도 몇 없을 겁니다. 그래요, 남편이 죽은 일로 저를 의심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만큼요.”

“무척 힘드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하나님께서는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시련을 주시는 분이시니……. 하나님께서 저의 인내심을 크게 쳐주셨다면 감사한 일입니다.”

“남편이 아니라 시련이었군요. 살해할 마음이 든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요.”

“그래요. 남편이 죽은 시간에 알리바이도 없는데, 입에 넣을 돈도 부족한 형편으로 남편의 무덤을 써 주었죠. 수상해 보였을 건 압니다.”

사인이 확실하지 않았더라면 본인을 용의선상에 올렸을 만한 행동이긴 했다. ‘남편을 죽인 다음 죄책감이 들어 장례를 잘 치러주었다’는 이야기는 확실히 논리적으로 들리는 데다, 사인이 있다는 것과 그 사인을 믿느냐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기도 하고. 하룻밤 자고 나면 동방과 신대륙에서 새로운 문물이 발견되는 시대에 부검으로 발견할 수 없는 신비한 방법 따위가 없다는 보장도 없었다. 물론 빈민가의 사람이 그런 방법을 알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이지만 인간의 의심은 보통 합리적이지 않으니까.

“알면서도 장례를 제대로 지내주셨군요.”

“그게 인간의 도리니까요.”

“죄 있는 자에게는 그에 마땅한 대우를 해주어야 하지 않나요?”

“시험하지 마세요, 버트란드 탐정님. 우리는 모두 죄인임을 잊고 계신 건 아니겠지요.”

요한나는 얼른 두 손을 들고 짧게 사과했다. 그 뒤로도 벡스 부인과 요한나 사이에서 신학적인 이야기가 몇 마디 더 오갔다. 격렬한 논쟁이었지만 결국 벡스 부인의 의견에 동의하는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가자, 부인의 표정이 조금씩 더 풀렸다. 빈 잔에 차를 더 따라줄 즈음이 되자 부인의 태도는 잡담에도 너그럽게 대답할 정도가 되었다.

“어디에서나 도리를 행하는 것은 미덕이지요. 푸트니 베일 묘지도 안 그런 듯하면서도 할 일은 제대로 다 해준다고 들었습니다.”

“그 점을 보고 푸트니 베일 묘지를 선택했어요. 그 가격에 제대로 일해주는 곳은 거기뿐이더군요.”

“실제로는 어떻던가요, 일은 잘 해주던가요? 고인을 모실 때라든가 관에 안치할 때나…….”

“물론이죠.”

“그렇다면 다행인 일이죠. 시신을 제대로 염할 줄도 모르는 곳도 허다하잖아요.”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남편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꼼꼼하게 정리해 주었습니다. 여자가 하기엔 고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각자에겐 각자의 사정이 있는 법이겠지요.”

역시, 닉 벡스의 시신 또한 벨 묘지기가 처리한 모양이었다. 요한나는 그에 대해 말하는 대신 웃으며 자신을 가리켰다.

“세상일은 보기보다 고되지 않을 때도 있답니다. 저도 그렇고요.”

“아, 죄송합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각자의 사정을 생각해 주시는 분도 많지 않은걸요? 무어, 저는 그저 가업을 이을 뿐이지만요.”

“아, 가업이시군요. 전통을 잇는 것도 무척 중요하지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럼, 가업을 잇는 의미에서 여쭐게요. 부인의 알리바이에 대해 다시 들어도 될까요? 남편분의 사망 시각과, 이번 사건의 발생일 각각의 행적에 대해 들을 수 있었으면 해요.”

“이런, 거절할 수 없군요.”

남편의 사망 시각에 벡스 부인은 잠을 자고 있었고, 이를 증명해 줄 사람은 없었다. 이번 사건이 일어난 밤에도 이야기는 똑같았다. 애써 증명하려 해도 둘 사이엔 아이조차 없었으니 당시 집에는 부인 외에는 정말 아무도 없었다. 이웃의 증언도 형편없었다. 시끄러우면 남편이 있고 조용하면 남편이 없다는 이야기는 증명에 하등 도움될 게 없었다.

그 와중에 남편이 밤에 집을 비우는 일은 너무나 흔해서 오히려 집에 있을 때가 더 놀라웠다고 하니 그 처지를 알 만도 했다. 벡스 부인이 여기저기서 삯바느질이며 허드렛일을 하면서 겨우 입에 풀칠을 하고 술값을 대는 사이에 조금이라도 값나가는 것들은 하나씩 그 자취를 감추었다. 부부의 신성한 의무를 생각하기에는 너무 벅찬 삶이었다.

대체 그런 남자와 결혼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벡스 부인은 잠깐 침묵하다, 말없이 몸을 뒤로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옷의 등쪽 부분을 끌러내렸다.

그 모습에 소리를 지르며 만류하려던 요한나는 가히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물론 겉으로야 자신은 요한나였지만 속은 엄연히 남자인 이안이다. 외간 여자가 제 몸을 스스로 보여주는 사태에 대해 이안은 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아니, 요한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보통 여자들은 모르던 사이끼리도 이렇게 쉽게 몸을 보여주는 건가? 그게 당연한 건가? 여자로 살아온 바로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하층민들의 문화는 또 다른가?

이안이 속으로 비명을 지르든 말든 벡스 부인은 가려져 있던 등 부분을 반쯤 보여주었다. 하나님과 조국과 두 부모님을 걸고 맹세컨대 이런 상황을 절대 바란 적 없다고 속으로 되뇌던 이안은 눈을 감기도 전에 보이는 커다란 흉터에 모든 생각이 사라졌다.

아래쪽이 얼마나 더 엉망일지 선연히 보이는 등의 흉터는 기괴하게 일그러진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그 징그러운 모양을 본 순간에도 이안은 어떻게든 태연하게 굴려고 노력했지만 놀라 들이키는 숨마저 제어할 수는 없었고, 벡스 부인은 그 숨소리에 오히려 낮게 웃으며 다시 옷을 올려 정돈했다.

“제 고향은 셰링엄에서도 바닷가에 인접해 있습니다. 바다에 인접한 작은 동네죠. 제 등이 이렇다는 걸 마을 사람 모두가 알 만큼, 작은 동네예요.”

“……그렇군요.”

셰링엄이라면 상당히 떨어져 있는 동남부의 해안가 지역이었다. 요한나는 마음을 진정하기 위해 그 주변에 아는 사람이 있는지 생각했다. 자신과 아버지의 인맥을 필사적으로 생각하자 점점 마음이 차분해졌다. 벡스 부인은 요한나가 심하게 놀란 이유가 흉터가 너무 징그러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다지 의심하는 기색 없이 말을 이었다.

“부모님은 사정을 모르는 먼 지역의 남자를 골라 절 시집보내면서 상당한 돈도 같이 주셨어요. 네, 허영심 많고 생각이 가벼운 남자가 런던에 터를 잡는 꿈을 이루게 할 수 있을 만큼.”

완전히 진정한 요한나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받았다.

“거부할 수 없는 결정이었군요.”

“거부할 수 없기도 했지만, 그래, 그때엔 저도 꽤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노처녀로 늙어 죽을 불쌍한 애라며 수군대는 마을 사람들과는 헤어지고 싶었거든요. 어린 날의 치기였죠.”

“그렇지만 지금은 다시 돌아가시려고 하시는 거고요.”

“……어떻게 아셨죠?”

날카로워진 벡스 부인의 눈빛을 태연히 받으며 요한나가 지적했다.

“값나가는 것은 남편분이 다 팔아버렸다고 하셨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니, 그렇기에 더더욱 집안이 이렇게 물건 없이 깔끔할 수는 없는 법이죠.”

가져온 각종 삯바느질 일거리라든가, 조금이라도 멀쩡해 보이면 들고 왔을 법한 더러운 물건들이라든가, 있어야 할 것은 차고 넘쳤다. 거머리 같은 남편이 죽어주었다 한들 장례비용을 치르고 나면 다시 하루 벌어야 하루 먹고 사는 생활을 해야 했을 터. 그러나 그런 잡동사니들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이 점을 지적하자 터너 부인의 눈이 다시 부드러워졌다.

“곱게 자란 아가씨 같은데 날카로우시군요. 직업 덕분인가요?”

“그런 셈이죠.”

순간 복잡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요한나가 가볍게 대답했다. 벡스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이미 고향으로 떠났어야 했는데 이번의 그 끔찍한 일이 생기면서 늦어지고 있죠.”

“당분간은 떠나지 않는 쪽이 좋을 것 같습니다. 쓸데없는 의심을 받지 않으려면 말이죠.”

“덕분에 퍽 골치가 아프답니다. 쓸만한 걸 다 이웃에 나눠주었는데 이런 일이 생기다뇨. 다시 일거리를 가져오든지, 공장엘 가든지, 뭐든 해야겠죠.”

“계속 런던에 사실 생각은 없고요?”

“전혀요. 여기는 너무 사람이 많고 시끄러워서 정신이 없어요. 일자리가 많다는 것 외에는 장점이 하나도 없어요. 사람 살 곳이 못 되는 곳이죠.”

요한나 역시 그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였지만, 그저 난처하게 웃어보이기만 했다.

“그래요, 런던 태생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요. 어쨌든, 저를 어떻게든 해치워버리려 했던 부모님은 몇 년 전에 돌아가셨거든요. 남동생은 저를 퍽 불쌍하게 여겨주어서 귀향해서 이웃으로 살자고 말해주고 있고요. 지금까지는 그래도 남편이 있어 동생의 말을 거절했는데 이젠 남편도 없으니까, 이 일만 어떻게든 마무리되면 저는 떠날 겁니다.”

“두렵지는 않으세요?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라든가…….”

“그런 건 죄악에 찌든 남편을 건사하는 것보다는 훨씬 견디기 쉬워요. 어린 날의 제가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예요. 돌아가서 견뎌야 할 뒷말보다 돌아가기까지 필요한 여비를 벌어야 하는 게 훨씬 더 무섭습니다.”

맞는 말이었다. 사람들의 뒷말과 멸시가 견디기 어려운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굶주림보다 더 견디기 어렵지는 않았다. 요한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동전을 몇 개 내밀었다. 벡스 부인이 얼굴을 굳혔지만 요한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동정이라면 필요 없,”

“그런 게 아니에요. 물론 부인께 도움이 되었으면 하지만, 이건 부인께서 베풀어주실 수 있는 것에 대한 대가랍니다.”

“제가 탐정님께요? 무엇을 드릴 수 있을지 생각하기 어렵군요.”

“아무리 고향으로 돌아가신다 해도 집에 오늘 하루 먹을 끼니 정도는 구비해 두셨겠지요?”

“끼니요?”

“네. 사실 제가 일하다 보니 끼니를 걸렀는데, 이 근처에서 아무거나 사 먹으려니 조금……. 아시죠?”

벡스 부인은 요한나의 얼굴을 보고, 테이블 위에 놓인 동전 몇 개를 보았다. 벡스 부인도, 요한나도 알고 있었다. 빈민가의 가정에서 내놓을 수 있는 음식값으로는 과하다는 것을. 그러나 부인이 무어라 말하려 하던 찰나 요한나의 배에서 꾸르륵 하는 소리가 크게 났다. 못 들은 척할 수 없을 만큼 큰 소리여서 부인은 그만 조금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감사히 받지요. 주린 자를 외면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에 반할 테니……. 변변한 건 없지만 이해해 주시겠지요?”

“물론입니다. 뭘 주시든 씹어먹을 수 있기만 하면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보여요.”

거실에서 부엌까지는 몇 걸음 되지 않았다. 부인이 등을 보이며 조리대에서 이것저것 재료를 꺼내는 모습을 보고서야 요한나는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고 수첩을 꺼냈다. 벡스 부인은 저가 듣던 것보다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 요한나는 수첩에 제일 먼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셰링엄으로 사람을 보낼 것.’

 

짧지만 강렬한 실랑이 끝에 요한나는 패배감에 젖어 벡스 부인의 집을 나섰다. 벡스 부인은 받은 돈만큼의 요리를 제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요한나를 두고 장까지 보러 다녀오는 정성에 요한나는 자신의 선택이 틀렸다는 걸 알았지만 도무지 말릴 수가 없었다. 제대로 된 식재료로 꾸린 식탁은 소박하지만 푸짐했다. 스프 안에 숟가락을 담가 고기의 존재를 느꼈을 때는 죄책감마저 들었다. 음식을 다 먹고 돈을 더 주려 했지만 벡스 부인은 딱 동전 한 닢만 가져가고는 더 받으려 들지 않았다.

성격을 파악했으면서도 넉넉하게 준 자신의 잘못이었을까. 나름 사람을 설득하는 데에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주린 이웃의 배를 채워야 한다는 강력한 신앙의 벽을 넘지 못했다. 신앙이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받으면 누가 뭐라 해도 최소한 그만큼의 답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로디 벡스 또한 그쪽 유형인 모양이었다.

어수룩한 패배감을 안고 대장간으로 가면 말을 하지 못하는 대장장이가 무심한 얼굴로 저를 보았다. 열쇠의 모양과 폭을 설명해 주면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못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남의 집 문을 따려는 의도로밖에 생각할 수 없는 주문이었지만, 대장장이는 가격을 높게 부르지도 않고 아무런 의문도 표현하지 않은 채 그저 작업에만 열중했다.

모양이 단순해서인지 열쇠는 해가 다 떨어지기 전에 완성되었다. 물론 이 정도로 단순한 열쇠를 쓴다면 그 열쇠 구멍도 요한나의 머리에 꽂힌 머리핀 하나만으로도 열 수 있을 만큼 뻔한 구조일 테지만 열쇠를 가질 수 있는데 굳이 구멍 근처에 흠집을 내는 모험을 할 필요는 없었다. 갓 만들어 뜨뜻한 열쇠를 손에 쥐고 요한나는 달리아 벨의 집으로 향했다. 곧바로 가는 길을 택하지 않고, 이리저리 방향을 꼬아가며 빙 둘러서.

달리아의 집은 빈민가에서도 후미진 곳에 있었다. 주춤거리거나 티 나도록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건 이목을 끌기 딱 좋지만, 오히려 익숙해 보이면 무엇을 하든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곳이 빈민가다. 그걸 아는 요한나는 부러 거침없이 길을 걸었다. 해가 거진 떨어졌으니 이미 출근했을 시간이었다. 요한나는 먼저 달리아의 집을 무심히 지나치며 곁눈으로 집주인이 없다는 걸 확인한 다음 다른 길로 둘러 다시 달리아의 집으로 갔다. 마치 집주인인 양 열쇠를 들고 돌리는 모습이 당당하기 짝이 없었다.

달리아의 집은 좋게 말하자면 반은 집이 맞았고, 나쁘게 말하자면 반이 폐가였다. 입구며 그 옆쪽 벽면의 반은 어떻게든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나머지 반은 의심할 여지 없는 폐가였다. 깨진 창문 뒤로 온갖 나무 부스러기며 흙이 바닥에 굴러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폐가에 가까운 집을 본인이 쓰는 구역만 정돈해두고 그 외에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내버려둔 것 같은 모양새였다. 달리아 벨이 과연 이 집을 돈 주고 샀을지도 의문이었다. 층이 없는 단독주택인 이유는 단지 과거에 그 집을 소유했던 어떤 사람이 건물을 새로 올릴 돈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혹은, 다른 이유일 수도 있고.’

요한나는 문을 닫고 현관 안에 들어서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가구며 천으로 교묘하게 가려두었지만, 가려진 부분으로부터 현관 쪽으로 비죽 튀어나온 작은 얼룩은 핏자국과 무척 닮았으니까. 멀쩡한 쪽의 상태를 보았을 때 나름 깔끔하게 생활공간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우지 않은 게 아니라 지울 수 없었으리라. 집주인까지 말려든 범죄 사건이었다면 땅의 소유권은 여기저기를 전전하다 국가에 귀속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살 곳이 궁하다 해도 걸인조차 피하는 집터는 있기 마련이었고, 국가는 저가 그런 땅을 가지고 있는 줄도 모를 테지. 그런 사연이 있는 집에 터를 잡았다면 마녀라고 불려도 할 말이 없는 것도 맞았다. 이 추론에 따르면 달리아 벨은 둘 중 하나였다. 보통 강심장이 아니거나, 굳건한 불신론자이거나.

과연 건물의 반만 쓰기로 결심했는지, 현관 양옆으로 있어야 할 벽과 문이 한쪽밖에 없었다. 나머지 한쪽 벽면은 낡았지만 깨끗한 천을 여러 장 기워 만든 큰 천을 커튼처럼 펼쳐 가려둔 상태였다. 요한나는 장갑 낀 손으로 슬쩍 천을 들어올리고 나머지 손으로는 가스등을 들어 천 안쪽을 살피며 인상을 찌푸렸다. 오래된 핏자국이 여기저기 남아있는 데다 낡아빠져 구멍이 나지 않은 게 용한 벽과 판자로 못질해 막아둔 문들. 밤에 보아 더욱 찝찝한 광경을 확인하고 요한나는 다시 천을 내렸다. 주거 공간과 폐허가 천 한 장을 두고 갈라진 모습이 참으로 기묘했다.

폐허의 반대편은 상당히 깨끗했다. 깨끗하다고 해야 할까, 술이 아닌 소독용 알코올 냄새가 희미하게 나는 게 또 수상쩍게 느껴졌다. 집에서 주로 맡아지는 냄새가 어째서 이런 냄새인 것인가? 강박적으로 청소를 한다기엔 그렇게까지 칼같이 단정한 모양새까지는 또 아니어서 요한나의 머리를 복잡하게 했다.

나머지 벽 쪽의 문을 하나하나 열어보면 침실과 거실 겸 주방, 화장실이 있었다. 손님방이 없다는 것이 몹시도 마녀답다고 요한나는 생각했다. 생활하는 공간들은 전반적으로 낡았으나 청결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걸 보아 제대로 관리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정상적인 건 아니었다.

생활공간이라고 표현은 했지만, 그 공간은 몹시도 기묘했다. 생활감이 있으면서도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이 쓰기는 하지만 머물지는 않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람이 있으면서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의아해하며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니 답은 금방 나왔다. 가구는 있는데 개인의 생활 흔적이 거의 없었다.

주방에는 조리대가 있고 화로가 있지만 불을 땐 흔적이 없고, 접시가 있고 물잔이 있지만 그냥 거기에 있을 뿐 쓰이지 않은 것 같았다. 주방이건만 음식 냄새가 거의 나지 않았고 탁자 위에는 빵도마 위에 잘린 빵 한 덩어리가 흠집으로 가득한 유리 덮개로 덮여있었다. 그러면서도 신문물인 냉장고는 존재했는데, 안을 열어보면 물병과 우유 두어 병, 달걀 몇 개, 그리고 사과 몇 알과 상당한 양의 푸성귀밖에 없었다. 음식은 있는데 사람이 실제로 먹고 살 만한 양은 되지 않는다는 것이 몹시도 괴이했다. 연이어 열어본 찬장도 대부분 비어있었으며 다만 조미료 흉내라도 내는 것처럼 소금과 후추가 찬장 중간에 덩그라니 놓여있었다.

이 모든 게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달리아 벨은 만성 영양부족 상태인 건가? 확실히 살집이 있는 체형은 아니었지만 당장에 쓰러질 것 같지도 않았는데, 인간이 아무리 입에 풀칠을 한다 해도 생우유와 날계란과 빵과 생채소만 먹으며 살 리는 없으니 도무지 생활하는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심지어 어디에서도 달리아 벨의 호불호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빈민층이고 남이 쓰다 만 걸 가져다 쓰는 경우가 많다지만 인간에게는 본디 취향이라는 게 있었고, 더군다나 달리아 벨은 일정 수입이 있는 사람이다. 그 말은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무언가를 고를 수 있을 정도의 형편은 된다는 뜻이었다. 아무리 수입이 적다 해도 낡아빠진 손수건에 이름자로 수 정도는 놓을 수 있고 수 놓을 실 색깔 정도는 정할 수 있을 수입일 텐데 그런 사소한 취향마저 드러나지 않았다. 집은 집인데 여관보다도 특색이 없는 집이라니. 마녀니 귀신이니 하는 것을 믿지 않는 요한나마저 마녀라고 수군대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집에 호불호는 없지만 레벨은 있다는 점이었다. 물건은 적지만 하나같이 튼튼하고 모양새가 그럴듯했다. 남이 버린 걸 무작위로 주웠는데, 그 남이 잘 만들어진 물건들만 버린 상황이라면 이런 풍경이 만들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이토록 기묘한 집은 처음 보았다. 침실은 제대로 보지도 않았는데도 그랬다. 욕실은 부엌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살면서 필요한 최소한의 도구만 갖춰져 있었으며 취향이라고는 없었다. 마치 현재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세계에 빠지기라도 한 것같은 느낌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요한나는 거부감이 드는 그 느낌을 떨치려 노력하며 빈틈없이 관찰하고 결과를 수첩에 기록했다.

침실도 다른 공간과 비슷하게 휑했다. 다만 옷장 안에는 겨우 바깥일을 할 때 체면치레를 할 만한 양의 옷이 걸려 있었는데, 그 옷들이라는 것이 요한나가 달리아를 만났을 때 보았던 옷과 거의 비슷한 것들밖에 없었다. 오죽하면 침대 위에 개켜둔 잠옷마저도 온몸을 다 가리는 디자인이겠는가. 보다 보면 절로 더워지는 느낌이라 인상이 찌푸려졌다.

옷을 걸어 보관하는 곳 아래에는 접어 보관하는 서랍이 있었으며 요한나는 그마저도 망설임 없이 열어서 특이한 건 없는지 죄 확인했다. 모자 옆에 뜬금없이 붕대가 여러 개 말려있었는데 평소에 머리카락으로 얼굴의 반을 가리는 걸 생각하면 이상하지는 않았고, 다른 옷들도 체온과 최소한의 사회적 생명을 지킬만한 정도로는 구비되어 있었다.

옷장 반대편에는 책상과 의자가 있었는데 책상 위에는 책 몇 권과 신문에 나온 사건 사고며 정보를 모아둔 스크랩북, 그리고 종이 뭉치와 필기도구가 있었다. 책의 내용은 모두 시체를 어떻게 염하고 어떤 방법이 새로 발견되었는지 등등의 일과 관련되어 보이는 것들뿐이었다. 심히 공부한 듯 구석구석 메모해 둔 흔적이 있었다. 하다못해 소설책 한 권마저 없는 광경에 요한나는 자기 자신이 퍼석퍼석 말라가는 것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흔한 화장대 하나 없는 침실을 둘러보던 요한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침대도 어디서 가져온 건지 참으로 튼튼한 걸 골라 온 것에서 기묘한 안목마저 느껴졌다. 아무리 봐도 무엇도 알 수 없는 집에 지쳐서는 침대도 살펴보기는 해야겠지, 하고 방만한 자세로 팔을 뒤로 뻗어 침대에 손바닥을 짚은 그때였다. 요한나의 손바닥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 이불 사이로 느껴졌다. 퍼뜩 놀라 몸을 바로 한 요한나는 거칠게 이불을 뒤집었고, 그 안에서 무언가 작고 딱딱한 원통형의 조각이 튀어나왔다. 손가락으로 집어 들어 자세히 살펴보던 요한나는 하마터면 손에서 물건을 놓아버릴 뻔했다. 이건 아무리 봐도 사람 뼛조각이 아닌가? 손가락이나 발의 일부가 잘린 것 같은…….

등에서 소름이 돋았다. 집의 나머지 반쪽 부분에서 이런 걸 발견했다면 그다지 놀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나칠 정도로 물건이 적고 그나마도 잘 정돈된 이런 집에서, 뼛조각이, 이불 밑에 있다고?

요한나는 이불이며 요를 샅샅이 살핀 다음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여 침대 밑을 보았다. 이불보로 가려졌을 그 아래에는 손잡이가 달린 상자가 하나 있었다. 손잡이부분을 잡고 상자를 꺼낸 요한나가 얼굴을 차갑게 굳혔다.

인간의 두개골이 하나, 뼛조각이 여러 개, 깨진 비석 조각들, 관 위를 장식했을 나무 십자가, 미이라 가루, 상복에 같이 쓸 법한 베일, 검은색 벨벳 상자, 그리고 불유쾌한 냄새가 흘러나오는, 아마도 소독용 알코올이 담겨있을 병 등. 그것들이 질서정연하게 놓여있었다. 이건 꼭……, 죽음에 대해 수집이라도 한 것처럼 보이지 않은가.

하나하나를 들어 살핀 요한나는 이 모든 것이 수집품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기분이 더러웠다. 이 자는 대체 뭐지? 대체 왜 이딴……. 요한나는 어금니를 세게 깨물며, 겉보기에는 패물 상자로 보이는 검은색 벨벳 상자를 열었다. 거기에는 온갖 칙칙한 색의 장신구가 있었는데 요한나는 그것들이 무덤의 부장품으로 함께 묻힐 것들은 아니었을지 심히 의심스러웠다.

이리저리 머리핀이며 반지 따위를 보던 요한나의 손이 십자가 펜던트 앞에서 우뚝 멈추었다. 십자가 펜던트라고 생각하며 그냥 넘기려다가 다시 보니 그것은, 정확하게는 역십자가라고 해야 옳았다. 방향은 십자가처럼 놓여있었으나 긴 쪽 끝부분의 장식이 더 화려하고 정교했다. 상자를 돌려 반대 방향에서 보니 확실히, 그쪽이 머리가 맞았다.

요한나는 역십자가 펜던트를 이리저리 매만지다 그것을 주머니 안에 넣고 벨벳 상자를 다시 덮어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원래대로 집기들을 되돌린 다음 요한나는 가스등을 끄고 눈을 어둠에 익히고 나서야 집을 나왔다. 이토록 괴기하면서도 이상하며 또 어이없는 일이 어떻게 실제로 있을 수 있을까? 정말이지 믿고 싶지 않지만, 어쩌면 우스갯소리랍시고 한 말이 진실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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