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샘플] 장대비와 따뜻한 냉동 파스타
GL 1차 커미션 샘플 (5000자)
오늘도 저희 항공을 이용해주셔서…… 감정없고 높낮이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 안내 문구가 머리 위에서 웅웅거린다. 오브리는 자신의 좌석에 등을 편하게 기대며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두께가 있는 창에 오브리 뒤에 있는 풍경이 비춰진다. 주말 비행기에는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보이는 가족이나 연인들이 제법 보였다. 좋은 세상이지. 두 시간이면 다른 나라에 갈 수 있다는 게. 오브리는 턱을 괴었다.
너무 기대된다. 우리 공항에 내리면 어디부터 가? 제 연인에게 다음 행선지를 묻는 얼굴이 밝다. 며칠은 묵을 생각인지 한 손에 들어오는 수첩을 바쁘게 팔락팔락 넘기는 상대가 보였다. 비행기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기분 나쁜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온다. 곧 더 불쾌한 기분이 들며 하늘 위로 날아오르겠지…. 칼같이 다려놓은 셔츠가 구겨지는 걸 개의치않고 오브리는 몸을 뒤척였다. 기분 좋은 걸 떠올리자. 기분 좋은 걸 생각하자…. 그래, 예를 들면….
독일에 있을 자신의 연인이라던가….
“오브리!”
오브리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가 펴졌다가 다시 곤란한듯 꾸깃해진다. 다채롭다면 다채로운 오브리의 변화를 보는 걸 마나는 좋아했다. 자신이 상상한 반응 그대로를 보여주는 오브리를 보며 마나가 환하게 웃었다. 마나의 품에 파묻혀있던 머리가 푸하,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지금 이게 뭐하는 거야? 입을 뻐끔대며 오브리가 당황한 낯으로 올려봤다.
마나는 능글맞은 표정으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단 얼굴이었다. 오브리를 안은 팔에 힘이 풀리나 싶더니 다시금 꽉 조여든다. 원하는 반응을 다 보기 전까진 놓아주지 않겠단 의지가 느껴졌다. 오브리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이, 이 여자가 진짜로. 부끄러운 줄 모르고 이런 짓을 한다…. 오브리에게 있어서 마나는 너무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뻔뻔스럽게 웃는 구석이 있다. 마나의 입꼬리가 느긋하게 올라간다. 왜요? 싫어요?… 그걸 말이라고…. 오브리가 입을 꾹 다문다.
질끈 닫힌 입이 벌어지길 마나는 느긋하게 기다린다. 아, 오늘은 짐을 가볍게 들고 왔구나…. 오브리도 자신을 만나러 오는 게 슬슬 익숙해졌구나 싶었다. 보수적이고 고지식한 연인은 짐 하나를 꾸리는 데에도 대충 꾸리는 법이 없었다. 마나는 그런 오브리의 이해할 수 없는 면에 끌리긴 했으나, 한 편으론 조금은… 조금은 더 마음을 놓고 자신과 이 삶을 편하게 즐겼으면 싶었더랬다. 앙 다물린 입술이 벌려진다. …아니. 마나가 환하게 웃는다. 그것 봐요.
오브리는 공항을 나서는 길이 고되다고 느꼈다. 강력 범죄를 수사하는 것이 덜 힘들거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맞잡은 손이 뜨끈뜨끈하다. 듣기 좋은 낮은 목소리가 자기는 알지 못하는 노래를 흥얼인다. 이 모든 것들이 자극적이었다…. 마나가 살고 있는 나라에 마나가 살고 있는 집으로 향하는 길, 제 옆에 있는 마나가 자신의 손을 꼭 붙잡고 있다…. 다른 연인들에겐 자연스럽고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한 스킨쉽이 오브리에겐 유독 무겁게 다가왔다. 이렇게 사랑과 감정을 거리낌없이 표현하는 연인은 사랑스럽지만 부끄럽다…. 하지만 좋아… 오브리는 괜히 인상을 구겼다. 이유는 모르지만 짜증이 치밀었다. 누구를 향한 화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냥… 그냥 짜증이 났다.
마나의 집은 공항에서 가깝다기엔 멀고 멀다기엔 가까운 애매한 곳이었다.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소리만 빼면 조용하고 한적해요. 마나가 이보다 완벽한 집은 없을 거란 듯 말했다. 집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둘의 거리는 애매모호했다. 연인이라기엔 너무 멀고, 친구라기엔 너무 가까운 거리.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보는 오브리의 옆에서 마나가 끊임없이 조곤조곤 이야기를 풀어간다. 오늘은 무얼 먹었고, 오브리를 기다리며 뭘 사놨고, 함께 무엇을 볼 건지…
비행기 한 대가 하늘을 가르며 날아오른다. 마나의 이야기가 잠시 멈춘다. 빈 자리에 올려둔 손등 위로 마나의 손이 겹쳐닿는다. 정갈하고 둥글게 정돈 된 손톱을 만지는 손길이 다정하다. 맥주 사놨어요. 그런데, 많이 마시면 안 돼요 오브리. 마나가 장난스럽지만 확실한 걱정이 담긴 어조로 조곤조곤하게 속삭인다. 오브리는 그제야 창문에서 시선을 떼고 줄곧 자신을 빤히 바라보았을 마나와 눈을 마주한다. 애정과 그리움, 달콤한 애절함이 섞인 눈…. 이 눈으로 한참 전부터 자신을 바라보았을 걸 생각하니 가슴께가 뻐근했다. 오브리는 눈을 감아버렸다. 마나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다. 쿠르릉 거리는 소리가 먼 곳에서부터 들려온다.
오브리는 우습게도 이 순간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영원히, 영원히….
쿠르릉, 우르릉…. 쏴아아 쏟아지는 빗소리 사이로 두 사람 몫의 발소리가 뒤섞였다. 쏟아지는 비를 걷어차며 힘껏 골목 사이사이를 뛰어간다. 찰그락, 찰칵… 끼이익.
열린 문으로 몸을 던지듯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의 등 뒤로 큰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힌다.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우뢰와 같은 소리가 나더니 빗줄기가 더욱 거세지는 소리가 들렸다. 온 몸으로 문을 막듯이 선 마나가 먼저 소리내 큭큭 웃었다. 오브리가 축축하게 젖은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신경질적인 웃음소리를 냈다. 택시에서 내린지 일 이 분은 지났을까, 하늘이 검다 싶더니 미친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눈을 뜨기 힘든 장대비 속에서 얼이 빠져 얼굴을 마주보다 상황 파악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달린 게 이 꼴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바로 집 앞에 내릴 걸 그랬어요. 안 그래요? 마나가 뭐가 재밌는지 연신 큭큭거렸다. 물에 젖은 쥐 꼴로 있는게 뭐가 즐겁다고…. 오브리는 속으로 핀잔을 주며 머리카락의 끝을 잡아 죽 짜보았다. 물이 후두둑 떨어진다. 무거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옷을 좀 말리고 싶은데.”
“그래요. 감기 걸리겠다. 욕실은 저쪽이에요. 먼저 들어가서 씻으세요, 오브리.”
마른 수건 두 개를 손에 쥐어준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 끝을 수건으로 감싸며 오브리는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청소를 한 것처럼 삐뚜름하게 놓여진 카펫을 발로 반듯하게 옮기며 오브리는 욕실 안으로 들어섰다. 축축하게 젖은 옷을 얼른 벗어버리고 따뜻한 물에 얼어붙은 몸을 녹이고 싶었다.
오브리와 자신이 움직인 흔적처럼 만들어져 있는 물웅덩이를 마른 수건을 발에 끼워 슥슥 문질러 닦아낸다. 손으론 또 다른 수건을 이용해 푹 젖은 머리를 털고 얼굴을 닦아낸다. 축축하게 젖은 옷뭉텅이를 건조기 안에 넣고 동작 버튼을 누르려 할 때, 마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머리 반 개 차이는 나는 사람의 옷을 입은 오브리가 서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오브리는 가져온 여벌의 옷이 없었다.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에 예고도 없던 장대비가 내렸고, 하필이면 오늘 평소보다 짐을 간소하게 챙겨왔다. 그래서 마나는 오브리에게 제 옷을 빌려줬다. 오브리는 헐렁한 바지의 허리춤을 단단히 붙잡았다. 옷이 불편해요? 마나의 질문에 고개를 젓는다. 고개를 휘휘 저을 적마다 제 머리카락에선 마나와 같은 향이 났다. 옷에서도 마나 냄새가 잔뜩 났다. 또 다른 마나의 품에 안겨 있는 것 같았다.
낮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마나가 사랑스러운 것을 보듯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오브리는 콱 목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뻣뻣한 목을 가다듬고 아무렇지 않은 척을 가장한다. 옷 빌려줘서 고마워. 건조기는 내가 돌릴테니까 빨리 씻, 씻도록 해. 침착하게 이어가던 말이 끝을 좀 절었지만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 사실은 엄청엄청 나빴다. 혀를 깨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더 이상의 추태는 보일 수 없었다. 마나의 눈이 데굴데굴 굴러간다. 오브리를 더 놀릴지 아니면 순순히 말을 들을지 가늠하는 거다. 장난은 치고 싶었지만 감기에 걸리는 것도 싫었기에 마나는 순순히 말을 듣기로 했다.
“고마워요. 밥 준비할 시간은 없을 것 같은데, 씻고 나오면 냉동 파스타라도 데워먹을까요?”
“마음대로 해.”
마나보다 작은 체구가 척척 움직인다. 커서 거추장스러운 옷을 걷어붙이지도 않고 고집스럽게 끌고 다닌다. 그 모습이 웃겨서 마나는 또 다시 속으로 웃고말았다.
“아, 좋다…….”
오브리의 머리 위에서 마나의 만족스런 신음이 흐른다. 보송하게 씻고 나오니 몸이 나른했다. 전자레인지가 돌아가며 내는 소음도 듣기 좋았고, 냉동 파스타가 데워지는 냄새도 좋았다. 나른한 마나의 숨결이 제 목덜미에 닿을 적마다 오브리는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 뻣뻣하게 굳어있기 바빴다. 굳이 자신의 무릎 위에 앉더니 몸을 옆으로 돌려 자신을 끌어안는 행위가 뭐가 좋다고…. 편하게 앉는 것보다 불편하기 짝이 없을 행동을 굳이 하는 마나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굳이 밀어내지도 않았다. 얇은 천 너머로 닿는 온기가 다정했다.
굳게 닫힌 창문이 덜컹인다. 비가 거세진 모양이다. 비가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 바람이 덜컹이고 너무 건조하지도 습하지도 않은 실내에서 듣는 전자레인지와 건조기 작동음…. 생활감이 느껴지는 마나의 집은 오브리에게 기이한 안정감을 줬다. 집의 주인이 오브리에게 그러하듯이, 그녀의 모든 것이 오브리를 부드럽고 말랑하게 만드려는 것 같았다.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죠, 오브리?”
“뭐……. 글쎄.”
“갑자기 장대비가 내리면 오브리 생각이 날 거 같아요.”
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오브리는 머뭇이다 …나도. 라고 작게 답한다. 혼자였다면 짜증이 머리 끝까지 나 괜히 물건을 거칠게 대하거나 샤워를 하고난 뒤에도 열이 나 땀이 흐르는 것에 성을 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미래보다야 지금이 훨 나은 것 같았다. 오브리의 손이 잠시 마나의 허리께에서 허우적거리다 조심스럽게 마나의 팔 위로 얹힌다. 조금 힘을 주어 자신을 향해 당긴다. 오브리 최선의 어리광이었다.
마나가 웃는다. 오브리가 눈을 감는다. 자신을 좀 더 강하게 얽매듯 안아오는 팔의 힘이 기분 좋았다. 몸의 긴장을 풀며 오브리가 마나에게 몸을 기댄다. 이 따뜻하고 안온한 여자의 품에서 영원히 살아가고 싶다…. 추리 영화 해주는 거 같던데. 파스타 먹으면서 볼까요? 오브리가 마나의 붉은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말한다. 엉망진창인 추리물따위 보고 싶지 않았다. 얼렁뚱땅 넘어가는 가상과 허구의 추리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오브리는 고개를 순순히 끄덕였다. 마나와 함께 본다면 그런 부분도 흥미로운 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브리. 마나가 다정하게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든다. 날카롭던 눈매가 답지않게 누그러진 틈을 타 마나의 고개가 오브리에게 숙여진다. 오브리도 그것을 피하지 않는다.
전자렌지의 파스타가 다 데워질 때까지 앞으로 30초. 두 사람의 온기가 따뜻하게 섞이는 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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