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르텟> 어린 장미는 뿌리를 뻗는다
적응
"아, 뭐야!"
둔탁한 소리에 이어 속삭이는 듯한 외침이 들리는가 싶더니, 다시 한 번 부드러운 게 세차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로젠이 이불에서 고개를 내밀자 침대 위에 오롯이 선 두 개의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곧 숨죽인 함성과 함께 베개가 허공을 갈랐다.
"에잇!"
포옥.
"히히, 얍!"
푸욱.
"으아! 익, 에엣."
"아앗! 너 딱 걸렸어, 기다려!"
폭, 팡, 퍼억, 픽.
한참 공중에서 베개를 주고받던 두 꼬마는, 스카가 베개를 들고 침대에서 뛰어내린 것을 계기로 어느새 방 한복판에서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해가 안 되어서 눈만 떼굴떼굴 굴리던 로제는 시즈가 베개에 얼굴이 박혀 숨을 못 쉬는 걸 보고는 말리려고 저도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저기, 그, 그만해."
쉬이이이잇!
"흐익?!"
하지만 도리어, 자기가 다른 세 아이에게 강렬한 제지를 받아버렸다. 검지손가락을 입 앞에 대고 동시에 쉬잇 소리를 낸 세 아이는 각자 문가를 확인하고, 베개를 제자리에 돌려놓고, 로젠의 옆으로 다가와 귓가에 이렇게 속삭이고를 맡아서 했다.
"말소리 내면 안 돼! 스승님들한테 들키면 혼난단 말이에요."
"...?"
로젠은 아직도 상황이 잘 이해가 안 되었지만, 혼난다는 에시의 말에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로 돌아갔다. 그러고보니 스카와 시즈가 여러 마디 말을 나누긴 했지만, 전부 다 속삭이는 듯한 소리였고 목소리를 크게 낸 적은 없었다. 그러니 '그만하라'는 로젠의 말이 제일 큰 소리가 되어버린 것도 사실이긴 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른 로젠은 살짝 반성했다. 로젠은 보드라운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생각했다.
'...그래도 이제 그만 하겠지.'
퍼억.
'...'
로젠의 눈이 조심스럽게 베갯잇 위로 올라갔다. 대체 언제 또 내려왔는지 스카와 시즈가 다시 방 한복판에서 베개를 휘두르고 있었다. 에시는 침대에 가로로 누워서 얼굴만 든 채 소리없이 응원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꺕!"
"어."
"앗."
그러다가 조금 큰 비명소리가 나왔다. 에시의 얼굴에 시즈가 오발한 베개가 가서 부딪힌 거였다. 에시는 베개가 땅으로 또르르 떨어지자 고개를 푹 숙이고 움직이질 않았고, 시즈는 움찔움찔 한 발자국씩 에시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에시의 앞에 도달하자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두 손을 맞잡고 꼬물꼬물하더니 곧 친구의 머리통에 대고 속삭였다.
"...에, 에시이."
"..."
"아팠어?"
"..."
"미아, 으악!"
"꺄하하하!"
시즈가 사과를 하려는 찰나, 에시가 고개를 번쩍 들더니 놀란 시즈에게서 베개를 빼앗아 머리를 후려쳤다. 시즈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에시를 바라보더니 곧 분노로 물든 얼굴로 에시의 침대에 기어올라갔다. 그리고 에시에게서 베개를 도로 빼앗아 친구를 팡팡 때려대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스카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씨익 웃더니 로젠의 침대로 다가왔다. 그리고 얼이 빠져있는 로젠의 손목을 잡고 끌어내려서 에시의 침대로 끌고갔다.
"이거 너 써."
"응?"
자기 베개를 로젠의 손에 꼭 쥐어준 스카는 침대 위에 방치된 에시의 베개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시즈에게 합세해 에시를 팡팡 때려댔다. 로젠은 한 손에는 스카의 베개를 잡고 한 손은 세 사람을 향해 뻗은 채 침대맡에 멍하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국, 방문이 벌컥 열렸다.
"이 녀석들! 또 안 자고 장난치지요!"
소리를 친 사람은 에시의 엄마인 율리아나였다. 그 뒤에는 로단테와 로클렛도 서있었다. 제각기 비명을 지른 아이들은 각자의 침대로 빠르게 흩어졌고, 로젠도 방황 끝에 자기 침대로 돌아갔다. 하지만 스승님들은 그걸로 용서해줄 생각이 없으신 모양이었다.
"으아아!"
"아아아아!"
스카와 시즈가 비명을 지르며 허공으로 떠오르나 싶더니 로젠의 발치에 차곡차곡 내려앉았다. 로클렛이 마법으로 옮긴 것이었다. 에시는 율리아나의 손에 직접 포획되어 이동되었다. 로젠은 자는 척을 하고 싶었지만 이불도 미처 못 덮었고, 무엇보다 스카와 시즈가 양옆으로 바르르 기어오는 바람에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와중에 느지막하게 침대에 옮겨진 에시마저 바르작바르작 손을 휘저어서 로젠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얘들아."
한숨을 쉬던 로단테가 먼저 허리를 굽히고 입을 열었다. 느슨하게 묶은 붉은 머리카락이 목 옆에서 부드럽게 떨어져내렸다. 스카와 시즈가 양 옆에서 로젠의 손을 꽉 잡았다. 로젠은 이제부터 혼날 거라는 생각에 눈을 꾹 감고 떨어질 노성을 기다렸다.
"이렇게 밤늦게까지 잠을 안 자면, 내일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지 않겠니."
그러나 로젠의 예상과 달리, 로단테의 목소리는 아주 차분한 음색이었다.
"그리고 일어나더라도 낮 내내 피곤해서 꾸벅꾸벅 졸겠지. 스승님들은 너희와 낮에 하고 싶은 게 많은데, 그러면 제대로 할 수가 없어지니까 슬퍼진단다."
조곤조곤, 언성도 높이지 않고 비난도 없이 하는 말인데, 어쩐지 묘하게 가슴이 아파왔다. 로젠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 하고 양 옆과 발치의 아이들이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앞으론 안 할게요 하고 대답하는 것을 들었다. 로단테는 흥분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오늘은 넷이 같이 자는 첫날이기도 하고, 장난치고 싶은 마음도 이해하니 더는 얘기하지 않을게. 그래도 내일부터는 자야할 시간에 자기로 하자. 괜찮겠지?"
세 명은 다시 한 번 짧게 대답했다. 로젠도 최선을 다해 죄송해요, 하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옆에서 갑자기 우에엑, 하고 혀를 뱉는 듯한 시즈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클렛이 자기 제자의 볼을 꽉 꼬집은 거였다.
"아이고, 이 귀여운 말썽쟁이들! 이렇게 약속해놓고 내일 밤에 또 장난치면 진짜 이 정도로는 안 끝낼 테니 그럴 줄 알아!"
로클렛은 시즈, 스카, 에시의 볼을 차례대로 쭉쭉 땡겨서 비명을 짜내더니, 결국 로젠의 얼굴에까지 손을 뻗었다. 다른 아이들의 비명소리에 있는대로 높아진 두려움에 로젠은 눈을 질끈 감았다.
"...우우."
하지만 결국 와닿은 손가락은 그렇게 아프지 않았다. 로클렛의 손가락은 로젠의 볼을 꼬집는다는 표현조차 무색할 정도로 살포시 집고서 떨어졌다. 예상 외로 가벼운 처벌에 로젠이 위를 올려다보니, 눈이 마주친 로클렛이 찡긋 한쪽 눈을 감아보였다. 의아해진 로젠은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다른 아이들은 진짜 볼이 빨개질 정도로 강력한 처벌을 받은 것 같았다.
[다음에 정말로 장난을 치면 로젠 볼도 쫙 늘여버릴 거야. 알았지?]
곧 로클렛의 전언이 들려왔고, 로젠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로젠이 휘말렸을 뿐 장난을 치진 않았음을 알아준 모양이다. 조금 뒤늦게 '다른 아이들한테는 안 아프게 꼬집은 거 비밀이야.'라는 전언도 도착했다.
"롯테랑 로키는 너무 말랑하다니까요. 잘못을 했으면 제대로 반성을 해야지요!"
하지만 마지막 타자로 나선 율리아나는 로젠조차 봐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사실 이 시점에서 로단테와 로클렛은 '평소 에시를 전혀 혼내지 않는 율리가 할 말은 아닌데...'라는 의견을 전언으로 교환하고 있었으나, 아이들 앞이기 때문에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율리아나는 짐짓 엄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선언했다.
"그런 고로, 넷 다 반성문을 써서 내도록 합니다!"
"네에에에?!"
"아아아!"
"와아아아!"
로젠을 제외한 세 아이는 제각기 유감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에시의 비명이 조금 기뻐보이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로젠은 반성문으로 끝난 것을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무서울 정도로 큰 소리로 혼나지도, 방에 갇히지도, 밥을 못 먹게 되지도, 심지어는 얻어맞지도 않았으니까.
율리아나는 아이들의 비명이 가라앉자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분량은 플랑드 표준지 한 바닥! 누가 무슨 장난을 쳤는지, 왜 그런 장난을 치게 됐는지, 그리고 안 자고 장난을 친 게 왜 잘못인지를 써서 내세요. 하나라도 빠지면 다시 써오라고 할 거야."
"우우우."
"네에."
"네..."
"녜엥."
"시간은 내일 저녁 전까지! 그 때까지 통과 못 한 사람은 저녁에 디저트가 없습니다. 알겠습니까?"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시즈와 스카가 앓는 소리를 냈지만, 어쨌든 네 명 다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님들은 아이들은 각자의 침대에 돌려놓고 이불을 덮어준 후 이마를 매만지거나 볼에 키스를 하는 등의 스킨십과, 잘 자라는 인사를 빠짐없이 한 후 방에서 나가셨다.
물론, 로젠도 이마와 뺨에 다정한 손길을 한가득 받은 후였다.
*
[반성문까지 쓰라고 할 필요가 있을까? 첫날인데...]
롯테의 전언에 율리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반성문을 쓰라고 시킨 건 본인이면서. 롯테와 로키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는 그제야 설명을 늘어놓았다.
[여덟 살짜리가 반성문을 써봤자 얼마나 완벽하게 쓰겠어요? 누가 어떤 행동을 했고, 내 기분은 어땠고, 그래서 이렇게 반응했고, 앞으론 안 하겠습니다~ 정도겠지.]
[그렇겠지...?]
[그러니까 반성을 시키려고 반성문을 쓰게 했다기보다는요, 음, 그걸 쓰게 하면 로젠이랑 애들이 서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거 같았거든?]
[아아.]
[그런 건 일찍 알아두는 게 좋으니까. 마침 좋은 기회라 쓰게 시켰지요. 어차피 벌은 둘이 줬잖아.]
에시처럼 맑게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은 율리는 약간 피곤한 듯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롯테는 거실에서 쿠션을 이동시켜와서 그런 율리에게 내밀었고, 율리는 고맙다고 하며 등 뒤에 쿠션을 대었다. 로키는 율리가 그렇게 지친 이유로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에스는 뭐라고 했어?]
에셋티 릴 자작, 통칭 에스. 율리아나의 남편이자 에스텔르의 아버지다.
원래 남편과 떨어져 세계수의 권역에서 살던 롯테, 로키와 달리 율리와 에시는 에셋티와 함께 인간 사회에서 살고 있었다. 율리는 저녁을 먹은 직후 남편에게 당분간 마녀 마을에서 지내겠다고 설득하러 갔었고, 그 과정에서 대륙의 동남쪽 끝까지 이동술로 왕복해야만 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지쳐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여름과 겨울에는 인간 사회에서 함께 지낼 수 있다고 해도 갑작스럽게 사랑하는 가족들과 1년의 절반을 떨어져있게 된다면 누구라 한들 달가울까. 심지어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이미 많이 떨어져 지냈던 릴 일가다. 그래서 롯테와 로키는 율리에게 우리 둘로 충분하니 굳이 마녀 마을로 들어올 필요가 없다고 얘기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율리아나는 에시가 말을 꺼낸 거니 어느정도 책임은 지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에셋티의 대답을 듣고 그에 따라 결정하기로 한 거였다.
[응, 프로미샤에 집을 샀어요.]
[...집을? 샀어?]
하지만 돌아온 율리의 대답은 예상 외의 것이었다. 로키가 당황해서 마시고 있던 차를 뱉고 되물었지만 율리는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응. 에시는 어차피 마법 공부는 안 해도 되니까, 일주일에 2~3일 정도 프로미샤로 내려와서 같이 지내면 되지 않겠냐고 해서.]
[그래서 바로 집을 산 거야?]
[나도 좀 당황하긴 했는데 마침 매물이 괜찮게 빠졌더라고. 무슨 백작가에서 쓰던 저택인데 예전에 가본 적도 있거든요? 그래서 그냥 사기로 했지.]
[...잠깐, 그러면 에스가 프로미샤에 와서 산다는 얘기야? 율레마랑 영지는 어쩌고?]
[아, 율레마는 이 김에 프로미샤 지점을 내기로 했어요. 안그래도 슬슬 직할령 쪽도 손을 뻗고 싶다고 했었거든. 영지야 어차피 자리를 비워도 괜찮게 해뒀었고. 상행은 잠깐 혼자 다녀오거나 우리가 따라다니면 되니까.]
롯테와 로키는 설명을 듣고도 여전히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 했다. 하지만 어쨌든 더 지적하진 않았다.
마녀들의 마을에서 제일 가까운 인간들의 도시, 프로미샤. 황제가 유난히 신경을 쓰는 직할령인 만큼 집세가 어마어마한 건 둘째치고, 일단은 릴 자작이자 한 상회의 주인인 에셋티가 그렇게 쉽게 이사를 결정할 수 있을지부터가 의문이었다. 하지만 좀 더 엄밀하게 생각을 해보니 애초에 상행으로 자리를 자주 비우는 에셋티 탓에 자작령은 믿을 만한 인력에게 맡겨둔 상태였고, 프로미샤 근처의 상권을 쥔다는 명목으로 상회장 본인이 와있는 거라면 그럭저럭 말이 되는 얘기기는 했다.
...아내와 자식과 같이 있겠다고 그렇게까지 하는 건 로키와 롯테가 아는 에셋티와는 안 어울리는 지나친 팔불출 행위이기 때문에 당황스러울 뿐이지.
'하긴 뭐, 에스 걔는 율리랑만 관련되면 팔불출이 되니까.'
로키가 어렵게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롯테도 율리에게 그러면 언제 언제 프로미샤에 가서 지낼 것인지 물었다. 율리는 이사를 해봐야 결정할 수 있을 듯하다고 대답했고 그 이후로는 아이들의 교육을 어떻게 할지로 화제가 옮겨갔다.
[우선 로젠이 어느정도까지 공부가 되어있는지 알아봐야할 것 같은데...]
[그렇겠지. 그리고 당장은 네 명을 다 똑같이 가르친다는 건 힘들지 않을까? 특히 마법은 각자 수준이나 특기가 다르니까... 에시는 마법 시간에 경제학 공부를 하면 되려나?]
[응, 그게 좋을 거예요. 에스가 상회는 웬만하면 에시한테 물려주려는 것 같으니까.]
[그래? 하긴, 에시는 알고보면 야무진 데가 있으니까. 그러면 기초 영역만 같이 하는 걸로 하고, 각각 첫 수업 때는 테스트부터 하면 되겠어.]
[기초 영역이면 언어, 산수, 윤리, 사회와 역사, 지리, 약학과 생물학 정도일까요?]
[그 정도면 되지 않을까? 그림이나 조각, 악기 같은 것도 여력이 되면 가르칠 수 있다면 좋겠는데...]
[넷이나 되면 아예 다른 사람한테 부탁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림이나 조각은 율레마에서 연이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부탁해볼까요?]
[고마워, 그래주면 좋겠어.]
[고마워, 율리.]
결국 언어와 산수는 로클렛이, 약학과 생물학은 로단테가, 그리고 사회와 역사, 지리는 율리아나가 맡아서 가르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마법은 로클렛과 로단테가 함께 가르치고 그 사이 율리아나는 에시에게 경제학을 가르친다. 보통 귀족가의 자제라면 수예나 승마 같은 것도 배우겠으나 마녀들에게 수를 놓거나 말을 타는 건 그다지 쓸모가 없는 행위기에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러면 율리가 에시 데리고 내려가있는 동안에는 어떡하지?]
[마법 연습을 하거나... 복습을 하면 되지 않을까. 아직 어리니까 배운 걸 되새기는 시간도 필요할 거야.]
[네에, 그럼 에시도 프로미샤에 있는 동안은 되는대로... 하아암.]
얼추 논의가 끝났을 무렵 율리아나가 견디지 못하고 하품을 했다. 세 사람은 나머지 문제들은 추후에 상의하기로 하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로단테가 비틀거리는 율리아나를 부축하고, 로클렛이 컵을 정리했다.
그리고 마녀의 집에 고요한 밤이 찾아왔다.
*
다음 날 오후, 로단테의 집 부엌.
"그러니까 괘씸해서... 으응... 괘씸... 개씸? 개심? 구ㅐ씸? 뭐가 진짜일까요!"
"그건 '괘씸' 아니야? 괘종시계할 때 괘."
"아! 째깍째깍의 괘구나!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나중에 갚을게."
"으응."
로젠이 철자법에서의 문제를 해결해주자 에시는 해맑게 웃으며 반성문을 또박또박 써나갔다. 철자법을 제쳐두더라도 내용이 '시즈의 베개가 괘씸해서 베에엑 팡팡팡 했더니 시즈가 옆으로 와서 내 베개야 팡팡팡 하고 스카가 로젠한테도 베개 선물해줬어요'인 시점에서 문제가 좀 많아보이지만, 지적하려면 밑도 끝도 없을 것 같아 로젠은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때는 햇빛이 기세를 키워가는 5월 말, 티타임이 끝나고 해가 떨어질 무렵에는 조금 쌀쌀한 감이 있었다. 따라서 둘은 야외 테라스가 아닌 부엌의 간이 식탁에 자리를 잡아 율리아나가 시킨 반성문을 썼다. 조금 더 정확하게 사실관계를 말하자면 로젠이 먼저 식탁에 앉아서 반성문을 쓰기 시작했고, 그걸 본 에시가 자기도 안 썼다며 종이와 연필을 들고 와서 맞은편에 앉았다.
"...낮에 졸리니까 안 댑.. 됩... 됍?"
"'됩'니다."
"안 됩니다! 앞으로는 스카랑 시즈가 장난치면 어, 응원하지 않고 구경만 하겠습니다! 에스텔르... 슈트티렌... 릴."
어른들이 보면 얘가 또 장난치나, 싶을 만한 반성문이었지만 에시 딴에는 나름대로 진지하게 쓴 거였다. 적어도 마지막의 서명이 풀네임일 정도로는 진지했다. 한편 반성문을 써본 적이 없는 로젠은 처음엔 어떻게 써야할지 몰라 헤맸지만, 에시의 반성문을 보다보니 아 이렇게만 안 쓰면 괜찮겠구나 싶어져서 그럭저럭 제대로 된 걸 완성해가는 중이었다.
"너희 뭐 해?"
빨간 아이와 파란 아이가 나란히 부엌으로 들어온 건 로젠이 에시의 반성문을 한 번 훑어보며 철자를 체크해준 후였다. 로젠과 에시가 반성문을 쓰고 있다고 하자 스카와 시즈는 그제야 반성문의 존재를 기억해냈는지 어디선가 종이와 연필을 가져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에시와 로젠의 옆에 한 명씩 앉았다.
"뭐 쓰라고 하셨었지?"
"누가 무슨 장난을 쳤는지, 왜 쳤는지, 그게 왜 잘못인지?"
스카의 질문에 대답한 시즈는 옆자리의 친구에게 동의를 구하듯 바라보았고 로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스카와 시즈는 에시보다는 철자를 잘 알았는데 그래도 어려운 글자는 헷갈리는지 자연스럽게 로젠에게 물어보았다. 로젠은 기묘한 기분이 되어 대답해주다가 이렇게 덧붙였다.
"...저기, 근데... 내가 생각하는 철자가 진짜 맞는진 모르겠어."
로젠의 표정은 조금 죄스러웠다. 다른 아이들은 로젠의 얼굴을 한 번, 그리고 자기들이 쓴 반성문을 한 번 바라보았다. 스카가 대꾸했다.
"뭐, 틀리면 스승님들이 알려주시겠지."
"로젠, 입 벌려 봐."
"어?"
로젠에게 입을 벌리라고 시킨 시즈는 로젠이 우물쭈물 입을 열자 무언가를 그 안에 쏙 집어넣었다. 향기로운 달콤함과 약간의 쌉싸름함이 혀끝에서 녹아 입 안에 가득 퍼졌다. 로젠의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스카가 조금 걱정스러운 듯 이름을 불렀다.
"로젠?"
".........맛있어........"
어두운 장밋빛 눈동자가, 밤하늘의 별과도 같은 기세로 영롱하게 빛났다. 발그레하게 물든 통통한 뺨이 양손 뒤에서 오물오물 움직였다. 시즈는 그 대답에 만족했는지 끌어안고 있던 쿠키단지에서 조그마한 초콜릿 조각을 하나 더 꺼내 이번에는 스카의 입에 넣어주었다. 그 다음에는 대각선 방향에 앉은 에시의 입에 다른 한 조각을 집어넣기 위해 열심히 팔을 뻗었고 에시 역시 목을 길게 빼서 초콜릿을 앙 받아먹었다. 시즈가 아픈 어깨를 쪼물쪼물 주무르고 마지막으로 자기 입에도 초콜릿을 집어넣는데, 로젠이 머뭇머뭇 물었다.
"저기, 근데 그거 막 먹어도 돼...?"
로젠도 집에 있는 과자를 아예 먹으면 안 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의 시간대였다. 로젠은 이어서 그 문제까지 소심하게 언급했다.
"저녁 먹기 전에 과자 먹으면 혼나는데..."
"응, 갠찮아."
입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던 초콜릿을 혀로 밀어 오른쪽 볼에 집어넣은 시즈가 마저 대답했다.
"전언으로 여쭤봤어. 한 조각은 된다구 하셨어."
"전언...? 너 전언술 쓸 줄 알아?"
로젠의 눈이 조금 커졌다. 다른 사람들이 언제 어떤 마법을 배우는지 잘 모르는 로젠이지만 그래도 전언술이 꽤 어려운 마법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적어도 작년에 대스승님이 '아직 5년은 더 있어야 한다'고 했을 정도로는. 그런데 눈앞의 이 작고 귀여운 푸른 마녀는 벌써 전언술을 쓸 줄 안다는 건가. 대답을 해준 건 스카였다.
"쟤 환영 학파잖아. '정신계'는 되게 잘 써."
"응."
시즈가 자랑스러운 듯 가슴을 쭉 폈다. 불꽃 마녀인 스카가 변온술을 잘 쓰는 만큼 환영 마녀인 시즈는 전언술을 빨리 습득했다는 거였다. 신기해진 로젠은 뒤이어 스카에게도 전언술을 쓸 줄 아냐고 물었고, 햇빛을 닮은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난 아직."
"에헴."
"...지금 연습하고 있는데 너무 어려워."
스카는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펴는 시즈를 살짝 노려보고는 양손으로 턱을 괴며 투덜거렸다.
"나는 전언술 배운 적도 없어..."
"아, 맞아. 우리 스승님도 천천히 배워도 된다고 그러시긴 했는데."
"에헴."
"...쟤 저러는 거 짜증나서 빨리 해버리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 스카는 시즈에게 변온술도 잘 못 하는 게, 하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시즈는 그 말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모자에 붙어있던 환영 나비 두 마리를 떼서 스카의 눈을 향해 던졌다.
"으아악!"
마력으로 만들어진 절지동물문 나비목 호랑나비과의 동물에 습격당한 스카는 비명을 지르며 손을 저었다. 하지만 나비들은 좀처럼 떨어져나가질 않았고, 결국 비명을 들은 율리아나가 무슨 일이니 하고 문틈에서 고개를 빠끔 내밀었다. 그러자 그때까지 말없이 손장난만 치고 있던 에시가 딱 일어나서 시즈를 가리켰다.
"시즈가 스카한테 나비 던졌어요!"
"야, 에시!"
시즈가 귀여운 미간을 꾹 찡그리며 에시를 째려보았다. 하지만 에시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자기의 반성문을 곱게 접어 엄마에게 제출했다. 로젠 역시 그걸 보고 자기의 반성문을 두 번 접어서 영차영차 의자에서 내려온 후 율리아나에게 가서 내밀었다. 율리아나는 두 아이의 뒤통수를 달게 쓰다듬어준 후 스카의 얼굴에서 나비를 떼주었다. 그리고 스카와 시즈에게 상황 설명을 듣더니 변온술 못 하는 친구와 전언술 못 하는 친구는 내일 마법 공부 시간에 특별히 자기가 못 하는 걸 연습할 거라고 선언했다. 스카와 시즈는 입술을 쭉 내밀고 율리아나가 시키는 대로 서로를 꼭 안아주었다.
"자! 그러면 이제 거실에 가서 놉시다. 사이좋게 있으면 스승님들이 두꺼운 고기를 촉촉하게 구워서, 시원하고 상큼한 주스랑 같이 내줄 거예요. 오늘 후식은 특별히 기대해도 좋아! 아, 스카랑 시즈는 반성문부터 마저 내야지?"
"네."
"여기요, 율리아나 님."
"로젠, 가자!"
스카와 시즈가 접지 않은 반성문을 율리아나에게 제출하는 사이, 로젠은 에시의 손에 이끌려 거실로 이동했다. 벽난로 앞 소파의 건너편 자리를 비워놓고 로젠과 나란히 앉는 걸 보니 이 자리는 아마 고정석인 모양이었다. 롯테의 집 벽난로에는 늘 불이 따뜻하게 타오르고 있었고 그 빛을 쬐고 있던 에시와 로젠은 어느새 노곤노곤해졌다.
그리고 아이들은 서로 기대어 나른한 시간에 빠져들었다.
*
"..."
로젠은 베개에 턱을 박고 양손으로 귀를 꼭 막았다. 스카와 시즈가 또다시 베개싸움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얍!"
"에잇."
"으으."
퍼억, 푹, 포옥, 픽.
에시는 반성문에서 약속한 대로 손을 이불 속에 꼭 집어넣은 채 구경만 하고 있었고, 로젠 역시 셋에게 휩쓸리지 않도록 아까부터 모르는 척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모르는 척을 한다고 해도 베개가 여기저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오는 건 어쩔 수 없었고 결국 로젠은 도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요정 마녀는 며칠 잠을 자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나 그건 어른들에게나 해당되는 얘기, 아직 어린 로젠은 적어도 이틀에 한 번 씩은 제대로 잠을 자줘야 했다.
'...오늘 못 자면 내일 자면 되니까.'
로젠은 머릿속으로 합리화를 하며 창가에 몸을 꼭 붙였다. 약간의 냉기가 기분 좋게 뺨을 간질였다. 뒤에서는 여전히 숨죽인 기합과 부드러운 난투전의 무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로젠의 마음은 그걸로 조금 평안해졌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로젠은 갑자기 무언가가 다리를 누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
"쉬이잇!"
놀란 로젠이 몸을 벌떡 일으키자, 검지손가락으로 입을 막은 에시의 얼굴이 눈 앞 가득히 나타났다. 로젠이 황급히 비명을 삼키는 동안 에시는 로젠의 머리께까지 기어올라와서는 이불 속에 쏙 들어왔다. 그리고 몸을 가로로 웅크리더니 로젠을 향해 자기의 왼쪽 옆을 팡팡 두드려보이고는 속삭이는 말이 이거였다.
"로젠, 우리 친구지요?"
"응?"
"여기가 일등석이구 내 침대는 이등석이에요. 우리 친구니까 같이 보자."
"...일등석?"
로젠은 에시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에시가 침대 시트를 하도 열심히 두드리는 통에 그저 무시할 수만도 없었다. 결국 장미 마녀는 미적미적 몸을 돌려 에시의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에시는 만족스러운 듯 해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오른손을 들어서 허공에 휘휘 흔들어보였다.
"아무나! 이겨라!"
그리고 육성을 내지 않고서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로 열렬하게 응원하기 시작했다. 그 응원에 힘입어 스카와 시즈의 전투는 보다 격렬한 양상을 띠기 시작했는데, 로젠은 그 광경을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지켜보았다. 물론, 로젠에게도 스승님들이 오면 언제든 자는 척을 할 수 있도록 슬쩍 베개를 잡고 있을 정도의 약은 면은 있었다. 그리고 결국 싸움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으아아앗!"
쿠웅.
침대에 올라가 앉아서 공성전을 벌이던 스카가, 따라서 올라온 시즈의 공격을 피하다가 침대 가장자리와의 여분 공간을 잘못 파악해 쭉 미끄러져 떨어졌다. 그 탓에 울려퍼진 큰 소리에는 떨어진 스카 본인조차 놀랐는지 후다닥 침대에 올라가서는 시즈와 나란히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머리 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걸 보니 스승님들의 호통이 싫기는 싫었던 모양이다.
'애초에 그럴 거면 장난을 안 치면 될 텐데... 으응?'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로젠의 몸을 갑자기 가느다란 팔이 잡아당겼다. 그 기세에 휩쓸린 로젠이 침대 안쪽으로 돌아앉자 머리 위에 이불이 푹 하고 덮였다. 로젠이 겨우 상황을 이해하고 무슨 짓이냐는 듯이 에시를 바라보자, 밝은 하늘색 머리의 가냘픈 꼬마는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대며 속삭였다.
"빨리 숨어요! 스승님들 오시면 들키고, 그러면 혼나고, 그러면 슬프단 말이야."
"으, 으응."
말이 되는 것 같으면서 안 되는 것도 같고, 그러면서도 딱히 틀리지는 않은 이유였다. 로젠은 에시가 시키는대로 몸을 납작하게 숙였고 에시는 로젠의 머리카락 끝까지 꼼꼼히 이불을 덮었다. 그리고 자기도 침대 매트리스에 몸을 꼭 붙이자, 로젠과 에시의 눈동자가 손바닥 한 개 정도의 거리를 두고 마주놓였다.
"..."
에시는 입을 빵긋 벌리고 헤 하니 웃었다. 그리고 그대로 눈을 감더니 몇 초 지나지 않아 쌔액쌕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로젠은 약간 당황했으나 이미 잠든 애를 깨울 수도 없고, 조심스레 들어올린 오른손을 이불과 매트리스 사이의 좁은 공간에서 황망히 방황시키다가 포기하고 자기도 눈을 감았다.
*
다음 날 오후, 첫 마법 수업이 시작되었다.
"자, 로젠. 먼저 쓸 수 있는 마법을 한 번 보여주겠니?"
"..."
로단테는 우선 로젠의 실력을 테스트하려는 모양이었다. 아이가 무엇부터 해야할지 몰라 우물거리자 운반술, 타격술 등 기본적인 것에서 시작해 변온술, 건조술, 조수술 등의 약간 난이도가 있는 마법까지 차례로 해보라고 격려했다.
로젠은 처음에는 로단테의 눈치를 보며 마법을 구사하더니 후반에 가서는 긴장이 풀렸는지 제법 능숙하게 젖은 천을 말려보였다. 로단테는 아이를 칭찬해준 후 로클렛에게 전언을 보냈다.
[꽤 잘 하는데. 어쩌면 마법에는 로젠이 제일 소질이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래? 그러면 바로 전언술 같이 해도 되려나?]
[한 번 시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시즈는 변온술 할 거지?]
[응. 아, 저 녀석들 저거 또 장난치네!]
혼자 전언술 연습을 하고 있던 스카가 어느새 일어나서 시즈를 잡으러 뛰어다니고 있었다. 시즈는 용케도 잡히지 않고 발발발 도망다녔는데 가끔씩 가슴을 쭉 펴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는 걸 보면 아무래도 또 전언술로 스카를 놀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로클렛은 빙긋 웃으며 책상 위에 걸터앉아서 뿌듯해하고 있는 제자를 와락 안아들었다.
"으아!"
"이 녀석들, 그만 하고 이제 수업 시작하자!"
"로클렛 님! 쟤 자꾸 저한테 전언으로 넌 이거 못 하지 해요!"
스카는 이때다 싶었는지 시즈를 딱 가리키며 친구의 만행을 일러바쳤다. 로클렛은 한숨을 내쉬고 품에 안긴 시즈에게 진짜냐고 물어보았다. 시즈는 잠시 대답이 없었으나, 로클렛이 나지막하게 시즈, 하고 이름을 한 번 더 부르자 마지못해 결 좋은 머리카락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리고 짤막한 비명이 울리고 시즈는 빨개진 오른쪽 뺨을 양손으로 누른 채 바닥에 내려섰다.
"장난은 적당히 쳐야지, 우리 제자님. 응?"
"...녜에."
잘못했습니다 고개를 푹 숙인 시즈는 자유가 된 발을 쪼르르 놀려서 스카의 옆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더니 스카의 입에 넣어주었다. 스카는 그걸로 시즈를 용서한 듯, 한 번만 더 그러면 진짜 화낸다, 하고 경고하고는 방싯 웃어보였다. 해바라기처럼 밝고 씩씩한 미소였다.
몇 분 후, 스카와 로젠은 로단테의 앞에 의자를 놓고 나란히 앉았다. 이미 1:1 전언이 가능한 시즈는 로클렛과 함께 자기가 서툰 변온술을, 그리고 마법을 쓰지 못 하는 에시는 율리아나와 함께 경제학 공부를 하고 있었다. 루나데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로단테가 내준 과제를 스스로 해결해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면 오늘은 전언술 공부를 하자꾸나. 원래 어려운 마법이니까 당장 되지 않는다고 해서 너무 기죽을 필요는 없단다."
그 후로 이어진 로단테의 설명과 시연을, 로젠은 얼굴에 힘을 잔뜩 주고 들었다. 기껏 거두어준 로단테를 너무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고 자기는 마법을 잘 할 자신이 없다. 그러니까 설명을 열심히 듣고 열심히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국 로젠은 별로 노력할 수가 없었다.
*
"로젠, 너 진짜 굉장하다!"
"으응..."
"전언술 오늘 처음 해본 거라고 그랬지? 근데 어떻게 바로 성공해?!"
흥분한 스카가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묻자 로젠은 주춤거리며 몸을 뒤로 뺐다. 스카는 그 반응으로 자기 행동이 과했다는 건 깨달은 모양이지만 얼굴을 원위치로 되돌린 후에도 짱이다 우와 쩐다 같은 감탄사를 연신 흘려댔다.
당황하고 놀라기는 로젠도 마찬가지였다. 어렵다는 얘기를 듣고 그렇게나 긴장했었는데 처음 시도에 바로 성공해버리니 어안이 벙벙하기도 하고 솔직히 김도 조금 빠졌다. 노력을 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그냥 로단테의 설명을 조금 집중해서 따라했을 뿐이니까.
스카는 한참 로젠을 굉장하다고 추켜세우더니 시즈와 에시에게도 말해줘야한다면서 의자에서 내려가 타타탓 달려가버렸다. 자기가 성공한 것도 아니고 가까이 지낸지 며칠 되지도 않은 애가 성공했을 뿐인데 스카가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열을 내는 게 로젠으로서는 신기했다.
"있잖아, 로젠 진짜 굉장하다? 스승님이 딱 한 번 설명해주셨는데 바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있던 율리아나와 에시, 로클렛과 시즈 쪽에 도착한 스카는 생각보다는 호들갑을 떨지 않으면서도 감탄한 듯이 로젠이 전언술을 성공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 사이 로젠이 의자에 앉아서 우물쭈물거리고 있자 로단테가 부드럽게 웃으며 그쪽으로 몸을 숙여왔다.
"잘 하는구나, 로젠. 설명을 바로 이해해주어서 기특한데, 내가 머리를 쓰다듬어도 되겠니?"
"네?..."
로젠은 잠시 놀란 표정으로 입을 벌린 채 굳었다. 어른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데 허락을 구하는 건 처음 봤다. 그래도 일단 어른이 질문을 해온 거니 대답은 해야하고, 로젠으로서는 아름답고 다정한 로단테가 자기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은 꽤 기꺼운 일이었다. 로젠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자 로단테는 고맙다며 아이의 머리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느릿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검은 곱슬머리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어린 요정 마녀는 쑥쓰러운 나머지 입술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로젠, 진짜 전언술을 성공했어?"
"로젠 기특해! 그러니까 장미 줘야 돼요! 싱싱한 걸로!"
스카에게 설명을 들은 시즈는 바로 달려와서 로젠의 의자 옆에 매달렸다. 에시는 자기 엄마를 보며 장미를 따오겠다고 소리치더니 로단테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정원으로 달려갔다. 다만 장미보다는 꿀이 달콤한 샐비어가 어떻겠냐는 로단테의 말에 따올 꽃의 품목은 교체된 상태였다. 시즈 역시 도와주겠다며 에시의 뒤를 따라갔고 스카는 자기도 빨리 전언술을 성공하겠다며 연습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면 로젠은 시즈랑 에시가 돌아오면 다중 전언을 연습할까? 로키, 로젠을 부탁해도 되겠어?"
"응, 당연하지. 이리 와, 로젠. 스카가 혼자서 집중할 수 있게 해주자."
로단테와 로클렛의 시선을 받은 스카는 자기도 반드시 오늘 안에 성공하겠다며 열의를 불태웠다. 율리아나는 그 모습을 보며 싱긋 웃었다. 전언술은 기술만으로 따지면 그렇게까지 어려운 마법은 아니지만 인지적인 영역의 발달이 필수적으로 요구되기에 열 살도 안 된 어린 아이들이 익히기에는 꽤 어려운 마법이다. 특히 여러 명에게 동시에 전언을 보내는 다중 전언은 사고를 분할해야하기에 전언술을 비교적 일찍 익히는 환영 학파의 아이라고 하더라도 그리 쉽지가 않다. 인간 출신 마녀들은 마법만 초보지 인지 능력은 이미 어른 수준이니까 비교적 빨리 익히는 모양이지만.
'에시도 마녀가 된다면 금방 익히겠지.'
그러니까, 율리아나의 재미있고 사랑스러운 아기 천사도 금세 익힐 수 있을 거다. 만약 본인의 희망대로 마녀가 된다면.
*
에시와 시즈가 각각 셔츠와 로브자락 가득이 따온 샐비어를 로젠은 열심히 먹었다. 샐비어는 장미꽃에 비해 꽃잎이 작아서인지 꽃꿀의 맛이 잘 느껴졌고 따라서 로젠의 입맛에도 꽤나 맞았다. 장미처럼 발그레하고 물방울처럼 동그란 볼이 기껍게 올록볼록 움직였다.
로젠이 기력이 쭉쭉 올라가는 걸 느끼며 꽃잎을 우물거리는 동안 시즈와 스카는 눈썹 사이를 꾸깃하게 접고 각자의 과제를 해내려 용을 썼다. 시즈는 돌멩이 여러 개의 온도를 지정된 것으로 바꾸는 변온술을, 그리고 스카는 한 명만을 대상으로 의사를 전하는 단일 전언을 연습 중이었다.
"으으응, 힘들어..."
한참 예쁜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력하던 시즈가 기력 빠진 한숨과 함께 몸을 축 늘어뜨렸다. 로클렛은 조금 쉬고 나서 이어서 하자며 차와 과자를 가져오겠다고 자리를 떴다. 로젠은 시즈의 안색을 살피며 뒤에서 들려오는 율리아나와 에시의 경제학 수업에 귀를 기울였다.
"그럼 요렇게 생각해볼까? 에시가 한달에 10실버씩 용돈을 받아요.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아빠를 보러 갈 거야."
"저는 매일 보러 가고 싶은데요!"
"그래? 그럼 매일 보러 가는 걸로 할까? 그럼 일주일에 10실버씩 받는데, 아빠를 매일 보러 갈 거예요."
"네! 일주일에 10실버!"
"근데 아빠한테 가야하는데 거리가 너무 먼 거야. 그래서 에시는 마차를 타고 가려고 했어요."
"네!"
"근데 마차 아저씨가 '원래는 한 번 타고 왔다갔다 하는데 1실버 씩인데, 일주일치를 한꺼번에 내면 5실버로 깎아줄게요.'하는 거예요."
"1시버... 1실버에서 5실버가 되면 늘어나는 거 아니에여?"
에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어느새 에시의 맞은편 의자를 타고 올라간 시즈가 율리아나 대신 의문을 해결해주었다.
"하루에 1실버에 일주일이 7일이잖아. 그니까 하루에 1실버면 원랜 7실버 내야하는데 2실버 깎아주겠단 거야."
"아, 그런 거! 알아요! 한꺼번에 잔뜩 돈을 버는 것보다 계속 돈이 들어오는 게 좋댔어요! 그러니까아, 저는 마부 아저씨한테 감사합니다 할래요."
"그렇지, 2실버 깎아준 거니까 감사합니다 해야지? 그러면 그게 한 달이 되면 에시는 몇 실버를 아끼는 거예요?"
"어어, 그러니까, 한 달이 4주일이니까, 2를 4번 더하면 2 곱하기 4... 8실버!"
"그치! 에구, 잘 했어요 우리 에시. 그리고 시즈도 잘 했어요."
율리아나에게 함께 칭찬을 받은 에시는 까르륵 웃음을 터뜨리고 시즈는 이히히 하고 수줍게 웃었다. 율리아나의 시선이 시즈의 머리 너머에 있는 로젠에게 닿자 그는 로젠도 의자에 올라오라는 듯 시즈의 옆자리를 손짓했다. 로젠이 머뭇머뭇 의자에 올라가니 율리아나가 다음 문제를 냈다.
"그럼 이 다음은 같이 한 번 생각해볼까? 그래서 에시가 한참 그 마부 아저씨, 이름을 음... 제이슨 씨라고 할까? 일주일에 2실버씩 깎아주는 제이슨 아저씨의 마차를 타고 다녔는데 어느날 톰이라는 다른 마부 아저씨가 에시한테 이렇게 말한 거예요. '에시 아가씨, 제이슨의 마차가 아니라 제 마차를 타고 다녀주시면 저는 하루에 70코퍼만 받겠습니다.' 그러면 에시는 어느 아저씨의 마차를 타는 게 더 좋을까?"
"으으응, 응..."
"으응, 70코퍼에 일주일이면 70곱하기 7해서... 저는 톰 아저씨요."
로젠 역시 시즈에 이어 톰 아저씨의 마차라고 대답을 했다. 하지만 에시는 뭔가를 한참 생각하고 손가락을 꼽아보며 계산하고 종이에다가 곱하기 나누기를 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제이슨 아저씨요!"
"아이고, 그러면 에시랑 시즈, 로젠의 답이 다르네? 시즈랑 로젠은 왜 톰 아저씨 마차를 타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시즈는 로젠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자기가 대답을 했다.
"하루에 70코퍼면 일주일에 4실버하고 90코퍼예요. 그니까 톰 아저씨가 더 돈을 조금 받아요."
"그렇지. 그럼 에시는 왜 제이슨 아저씨 거를 탈 거예요?"
"으응, 시즈 말대루 일주일에 4실버 90코퍼예요. 그리구 일 년은 제이슨 아저씨가 260실버고, 어, 톰 아저씨가 255실버 50코퍼예요. 그러면은 일 년에 4실버 50코퍼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 에시가 한참 제이슨 아저씨 거를 타고 다녔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제이슨 아저씨도 에시가 계속 자기 거를 타고 다녔으면 할 거잖아요."
"그렇겠지?"
"그리구 에시랑 제이슨 아저씨 사이에는 '신뢰'가 생겼을 거예요. 그러면 제이슨 아저씨한테 톰 아저씨가 이렇게 해주겠다구 했어요, 하면 제이슨 아저씨도 10코퍼 정도는 더 깎아주지 않을까여? 4실버 90코퍼에 맞춰서여! 그러면 일주일에 4실버 90코퍼면은, 일 년에 제이슨 아저씨가 254실버 89코퍼라서, 그러면 제이슨 아저씨 거가 더 저령하고, '신뢰'도 안 없어지고 더 좋을 거 같아요!"
듣고보니 그것도 일리가 있는 얘기여서 로젠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시즈는 그게 마음에 안 드는지, 반드시 깎아줄지는 모르지 않냐며 에시에게 반박했다. 에시 역시 신뢰가 있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대꾸했다. 결국 율리아나가 논의를 정리해주었다.
"그치, 그러면 일단은 에시 말대로 제이슨 아저씨가 돈을 깎아줄 수도 있으니까 제이슨 아저씨한테 얘기를 해봐서, 깎아주면 제이슨 아저씨 마차를 계속 타고 다니면 되겠지. 근데 제이슨 아저씨도 사정이 있을 테니까 안 깎아줄 수 있잖아요? 그러면 그 다음에 톰 아저씨한테 이제부터 아저씨 마차 탈게요 해도 되지 않을까?"
"맞아요."
"녜!"
"네."
세 아이가 입을 모아 대답하자 스카가 도도도 달려와서 로클렛이 앉아있던 의자를 타고 올라갔다. 곧이어 루나가 운반술로 새로운 테이블과 의자를 가져와 옆에 딱 붙였고, 집으로 들어갔던 로클렛이 차와 우유를 사람 수대로 따라서 가져왔다. 에시가 우유를 꿀떡꿀떡 마시다가 생긴 하얀 자국을 보여주며 수염이라고 장난을 치자 아이들은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고 율리아나는 손수건으로 에시의 입가를 꼭꼭 닦아주었다.
한가하고 다정한 오후의 시간이 느릿하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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