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르텟> 어린 장미는 뿌리를 뻗는다
결속
이튿날 새벽, 로젠은 일찌감치 잠에서 깼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로젠은 요정 마녀고, 따라서 수면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 스승님과 함께 살 시절에는 이틀에 한 번씩 잤던 걸 요즘은 매일매일 자고 있으니 눈이 빨리 떠지는 것도 당연했다.
창밖은 아직 어두웠다. 푸르스름한 기운이 올라오는 걸 보니 새벽이 다 된 것 같기는 하지만, 어린아이가 일어날 시간은 결코 아니었다.
몸을 웅크리고 재차 잠을 청하려던 로젠은 어젯밤 자기 발밑에서 잠들었던 아이 중 하나가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에시는 바닥에 떨어져서 자고 있고 스카는 어젯밤 잠들었던 대로 자기 침대에서 쌕쌕 숨소리를 내고 있는데 시즈만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잠시 이불 속에서 머리를 굴리다가 꿈지럭꿈지럭 이불에서 벗어났다. 바닥의 에시에게 자기 이불을 덮어준 로젠은 겉옷을 걸친 뒤 시즈가 방 안 어느 침대 위에도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방문을 나섰다.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새어 들어오는 복도는 약간의 서늘함과 많은 신비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키다리 시계가 가리키는 시각은 오전 5시 37분. 아이들은커녕 어른들조차 일어나지 않았을 시간이었다. 로젠은 천천히 벽을 짚고 나아가다가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작은 슬리퍼에서 나는 토닥토닥 소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1층 복도를 마저 가로질러서 현관문을 끼익 열고 나서자 살짝 촉촉해진 깨끗한 공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로젠은 꽃은 그닥 좋아하지 않지만, 아침 이슬을 머금은 풀밭은 제법 좋아했다. 그러니까, 잠깐 산책을 하는 건 꽤 괜찮은 생각 같았다.
단정하게 정리된 마당에 몇 걸음을 꾹꾹 내딛는데, 갑자기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젠, 로젠.]
요정처럼 작고 맑은 목소리는 연이어 로젠을 부르더니 이쪽을 돌아보라며 채근해댔다. 로젠은 망설임 어린 몸짓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곧 자신을 부른 장본인을 찾아냈다.
까만 로브를 대충 두른 어린 마녀 하나가, 야외에 설치해둔 테이블에 오도카니 앉아 로젠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즈.]
로젠은 잠시 육성으로 그를 부를까 고민하다가 결국 전언을 선택했다. 시즈는 로젠의 부름에 응답하기라도 하듯 턱을 괴고 있던 양팔을 툭 떨어뜨리며 테이블 위에 고개를 데구르르 굴렸다.
아직 잠이 덜 깬 모양인지, 밤바다를 닮은 눈동자가 몽롱한 빛을 띠고 있었다.
[왜 이렇게 빨리 일어났어?]
[나는 원래 일찍 일어나.]
담담하게 대답한 시즈는 멍하니 정원을 한 번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난 새벽이 좋아.]
로젠은 건너편에 올라앉으며 시즈를 따라 정원으로 시선을 흘렸다. 막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는 시간, 하늘에 아스라이 남아있는 어둠이 어쩐지 아쉬운 느낌이었다.
그 아래에 다소 웃자란 나무들의 잎사귀들은 아직 잠에서 덜 깨어난 것처럼 흔들리고 발밑에서 돋아난 풀잎들은 벌써 아침이냐며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듯이 사르륵 소리를 낸다. 그것에 화답하는 목소리는 멀리서 쪼르르 짹짹 들려오는 아침 새들의 노랫소리, 바람은 그 모든 것을 한데 어우러서 품은 채 제법 기분 좋은 서늘함으로 흙과 풀 위를 내달린다.
로젠은 그 청량하고 차가운 기운을 몇 번 뱃속 깊이 들이마신 후 앞자리의 소년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어린 환영 마녀는 여전히, 테이블 위에 턱을 딱 대고 나른하게 풀어진 눈으로 어디랄 것도 없이 그저 풍경 전체를 지켜보고 있었다.
로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항상 혼자 나와 있어?]
[으응. 스카가 없거나, 안 일어나면.]
시즈는 그 뒤로도 무어라 웅얼웅얼 말했지만, 로젠이 그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명확한 발음으로 도착한 전언에 로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다. 시즈가 오늘도 어제도 잠에서 깨자마자 옆 침대에서 자고있는 스카를 깨웠지만, 도통 일어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스카는 아침에 잘 못 일어나?]
[응. 일어나면 바로 씩씩해지는데 일어나기 전에는 계속 자려고 해. 꼭 두더지 같아.]
"푸후."
로젠이 자기도 모르게 웃음소리를 내자 시즈는 흐름을 탔는지 계속 재잘재잘 입을 놀려댔다.
[아이시도, 아, 아이시는 우리 누나인데, 아침에 일어나는 게 힘들대. 영지에서 아침에 일어나면 맨날 부스스해. 그래서 내가 옆에 가서 꼭 끌어안으면 짜증 내거든? 나는 아이시가 좋아서 끌어안은 건데...
근데 그래도 괜찮아. 그럴 땐 과일이나 주스를 주면 되니까. 근데 아이시는 사과나 딸기보다는 감귤주스를 더 좋아해. 나는 사과가 좋은데. 너는 무슨 주스가 좋아?]
로젠은 고민하다가 딸기하고 감귤, 하고 대답했다. 시즈는 자기도 딸기주스 좋아한다며 테이블에 머리를 찰싹 붙인 채 배시시 웃었다. 로젠은 그 얼굴을 지켜보다가 문득 궁금해진 것을 물었다.
[있잖아. 에시는 안 깨웠어?]
[으응.]
[그렇구나...]
시즈는 잠시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리고 중얼거리듯이 대답했다.
[에시는, 몸이 약해서. 제대로 못 자면 아파.]
[그런 거야?]
으응, 소리를 낸 시즈는 사르르 눈을 감았다. 까맣고 예쁜 속눈썹이 하얗고 동그란 뺨 위로 살짝 떨어졌다.
평소 활발하고 씩씩한 에시가 몸이 약하다는 건 생각하기 힘들었지만, 그 가느다란 팔다리를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로젠은 갑자기 걱정되어 시즈에게 에시의 건강 상태를 자세히 물었다. 시즈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로젠이 대답을 듣길 포기하려던 즈음 다시 전언을 보내왔다.
[모르겠어. 근데, 감기 걸리거나 체하거나 하는 게 많아.]
[...]
[그니까 에시는 안 깨우는 게 약속이야. 그래서 스카가 안 일어나면 계속 혼자 있어야 했는데, 혼자 있는 것도 좋긴 한데, 근데.]
조용히 대답한 시즈는 로젠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로젠이 부러 고개를 돌리자, 시즈는 되려 테이블 너머로 몸을 쭉 뻗어왔다. 그리고 눈을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우물에 고정한 채 다붓이 덧붙였다.
[근데, 로젠이 같이 있어 주니까 더 좋다.]
살짝 가늘어진 시즈의 눈매가 애교 있게 반짝였다. 표정은 별로 바뀌지 않았지만, 입매나 뺨 같은 부분이 묘하게 풀어져 있었다. 꽤 기쁜 모양이었다.
로젠은 입술을 뻐끔대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 후로는 시즈도 혼잣말처럼 몇 마디 중얼거리긴 했으나 달리 로젠에게 대답을 요구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대체적으로 고요하고 평온한 시간이 흘러갔다.
머지않아 희미했던 어둠은 완전히 종적을 감추고 눈으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또렷한 태양이 하늘에 부드럽게 떠올랐다.
완연한 햇살이 풀밭에 반짝반짝 빛무리를 뿌리고 있을 즈음, 현관 쪽에서 끼익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더니 붉은 꼬마 마녀 하나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걸어나왔다. 그는 시즈와 로젠을 발견하고는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비어있는 의자에 풀썩 앉았다.
"안녕."
스카는 막 일어났는지 부스스한 모습이었지만, 그것마저 묘하게 근사해 보였다. 초상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아. 로젠은 자기도 모르게 그를 세세히 관찰했다.
‘예쁘다.’
시즈도 에시도 예쁘장한 아이였다. 하지만 로젠이 보기에 스카는 그저 '예쁘장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저 살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미학적인 감동이 느껴질 만큼 아름다운 소년. 타고난 미인이란 건 아마 이런 애를 말하는 걸 테다.
햇빛을 부드럽게 받아 쳐내는,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 아직 빗질을 안 했는지 눌려있기는 해도 토파즈와 루비를 섞은 것처럼 영롱했다.
매끄러운 턱선 위에 찍혀있는 입술, 반쯤 감겼던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가 또렷이 뜨는 모습은 희미하게 흔들리던 촛불이 밝은 빛을 내며 타오르는 모양을 연상시켰다.
로젠이 흘금흘금 스카를 훔쳐보고 있는 동안, 시즈는 스카와 아침 인사를 나누고 에시나 스승님의 기상 현황에 대해서 질문을 해댔다.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다가 가끔씩 웃고 가끔씩 입술을 삐죽이는 것이 한 눈에도 둘이 굉장히 친하다는 것 쯤은 알 수 있었다. 아니,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할 소리도 아니었다. 둘이 얼마나 서로를 친하고 가깝게 여기는지 정도는 평소의 행동만 보아도 빤히 보인다.
서로 도와주고 도움을 받고 보답을 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관계. 자신의 영역 안에 상대가 존재하는 것이 당연한 관계.
에시도 친한 건 분명한데 이 둘이 서로를 대하는 것에는 조금 더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 둘 사이에 끼는 것이 조금 껄끄럽게 느껴져서, 로젠은 그들의 대화를 묵묵히 경청했다.
"나는 당근 수프 싫은데. 안 나왔으면 좋겠다."
시즈가 시무룩하게 말하자 스카도 으, 하고 몸을 쭉 뺐다.
"나도. 그치만 스승님이 루나한테 당근 가져오라고 하셨단 말이야."
"차라리 그냥 잘라서 샐러드에 들어가는 게 나은데."
"난 샐러드도 좋고 익혀도 되는데, 수프에는 안 들어갔으면 좋겠어. 당근 수프 이상해. 막 비릿비릿하고."
"맞아, 비릿비릿하고 뭔가 먹기 힘들어. 근데 무우는 반대야. 수프에 있으면 맛있는데 그냥 먹으면 매워."
"으, 난 무우는 수프에 있어도 별로야. 뭔가 물컹물컹하잖아."
"근데 냄새가 화아- 하잖아. 난 그게 좋아."
"넌 냄새 좋은 거 좋아하니까. 근데 너 오이는 싫어하잖아."
"응. 오이 싫어."
시즈는 그렇게 대답한 후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리고 다시 테이블에 얼굴을 딱 붙였다.
"난 오이가 진짜 싫어. 뭔가 딱딱한 것도 아니고 말랑한 것도 아니고 이상한 느낌이야."
"피클도?"
"피클도."
"피클 하면 다른 것들도 다 그렇잖아."
"다른 건 괜찮아. 방울토마토도 무우도 피클 괜찮아. 맛있어."
"응."
"근데 오이는 피클 해도 싫어."
"파스타 먹을 때 오이 피클 먹으면 맛있는데."
"다른 피클이어도 괜찮잖아."
"그건 그렇지. 로젠, 넌 오이 잘 먹어?"
갑자기 날아온 질문에 로젠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눈썹을 떨구고 둘의 눈치를 보다가 결심을 굳힌 듯이 대답했다.
"난 오이, 안 좋아해."
시즈가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로젠을 향해 양손을 쨕 펼치며 말했다.
"나도. 로젠, 나랑 똑같네."
로젠은 으응, 하고 대답하고 시즈의 양손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가늘고 짤뚱한 손가락 열 개가 곧게 펼쳐진 채 곧게 정지해있는 것이 무언가 원하는 게 있는 듯한데, 로젠으로선 도통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곤란한 마음으로 눈앞의 아이들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는데 스카가 로젠에게 눈짓했다.
붉은 눈동자를 따라 옆을 보자 허공에 떠 있는 나뭇잎 네 장이 로젠의 눈에 들어왔다. 그것들은 두 장씩 짝을 지어 서로서로 찰싹찰싹 부딪혀댔다. 그 광경에 로젠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다시 시즈의 손바닥으로 시선을 돌려서, 떠오른 생각을 소심하게 재현해보았다.
짝.
"히히."
로젠의 양쪽 손바닥이 조심스레 시즈의 손에 부딪히자, 어린 환영 마녀는 기쁜 듯이 몽글몽글 웃더니 몇 번 더 손뼉을 쳐왔다.
짝, 짝, 짝. 스카 역시 자신의 힌트를 로젠이 알아들은 것이 뿌듯한지 히죽거리며 둘을 바라보았다. 로젠은 쑥스러운 마음에 거둔 손을 허벅지 위에서 마주 잡고 꼬물거렸다. 스카와 시즈는 로젠의 어색한 움직임을 지적하지 않고 그대로 잡담을 이어갔다. 재잘대는 것은 주로 스카와 시즈 뿐이었지만, 로젠은 신기하게도 대화에 참여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두서없는 이야기와 함께 높아지는 태양. 스카가 배가 고프다고 테이블 위에 상체를 엎었을 무렵, 현관에서 로클렛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즈, 스카! 로젠! 아침 먹자!”
"네-!"
"네."
나란히 대답한 스카와 시즈는 의자에서 폴짝 내려가서는 현관으로 달려갔다.
시즈가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가고, 스카도 따라서 들어가려다가 로젠이 없는 것을 눈치챘는지 고개를 빼꼼 돌렸다. 그리고 여전히 의자에 덩그러니 앉아있는 로젠을 발견하고는 빨리 오라는 듯 손을 휙휙 흔들어댔다.
"...네."
마치 백일몽이라도 꾼 것 같은 기분으로 멍하니 있던 로젠은 뒤늦게 대답했다. 그는 차분하게 의자에서 내려와서는 문을 잡고있는 스카를 향해 총총거리며 달려갔다.
겉옷을 추스르며 신발을 벗는 로젠의 손바닥에는, 햇빛을 그대로 따온 것 같은 온기가 미미하게 남아있었다.
*
아침 식사는 당근과 감자로 만든 수프와 동그란 빵, 달걀 프라이, 그리고 신선한 샐러드였다.
로젠과 시즈로서는 다행스럽게도 샐러드에 오이는 들어있지 않았다. 하지만 수프에는 당근이 들어있었다. 스카와 시즈가 수프에서 몰래 골라낸 당근을 수납술로 처리하려던 것을 스승님들께 들키기는 했지만 아침 식사는 대체로 평화롭게 끝났다.
루나가 로단테를 도와 식기를 정리하는 사이, 꼬마들은 로클렛과 율리아나의 감독하에 이를 닦았다. 로젠은 뻣뻣한 칫솔모의 느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다른 세 명이 군말 없이 닦고 있었기 때문에 꾹 참고 손을 움직였다.
"아이고~ 고생했다! 자, 이제 거실에서 잠깐 휴식! 그리고 열 시부터는 셈 공부를 할 거야."
"으에에에!"
"으에에에에!"
로클렛의 선언에 에시와 시즈가 나란히 싫은 소리를 냈다. 로클렛은 으이구 소리를 내며 두 아이의 볼을 장난스럽게 문질지르더니, 차를 가져오겠다며 부엌 쪽으로 사라졌다.
거실로 이동한 아이들은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당근 수프에 대한 불평에서 시작했던 대화는 곧 탈포레에서 온 쌀로 만든 빵 같은 것으로 이어져, 종내에는 세샤에 배를 타고 가려면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로 이어졌다.
"일주일은 넘을걸?"
"우와, 진짜 오래 걸린다."
"멀미 안 했어요? 난 배 타면 멀미하는데!"
"멀미는 안 했는데, 배 타는 거 처음엔 재밌는데, 몇 밤 자면 너무 지루해져서 좀 그래."
작년에 세샤에 다녀왔다는 스카가 볼멘소리했다. 시즈가 쿠션을 꼭 끌어안으며 스카를 바라보았다.
"올해는 세샤 안 가?"
"으응, 아빠도 바쁘다셔서. 그치, 루나."
"그렇지. 나도 레퀴에스 준비로 바쁘니까, 아쉽지만 내년에나 가지 않을까 싶어."
루나가 책에서 눈을 떼고 덧붙였다. 로젠은 스카와 루나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스카랑 루나는 세샤에 자주 가?"
"어, 자주는 아닌데. 작년이랑 재작년에는 갔었어."
"우리 아버지가 세샤 출신이시거든. 그래서 몇 년에 한 번씩 놀러가."
"작년에 갔을 땐 큰아빠가 듀스타 엄청 많이 사주셨었는데. 듀스타 먹고 싶다."
그렇게 말한 스카의 눈가가 기쁘게 가늘어졌다. 세샤의 특산품 과자인 듀스타의 달콤한 맛을 떠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루나는 그런 동생을 보며 다정하게 웃었고, 시즈는 스카에게 내년에는 듀스타를 잔뜩 사오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듀스타를 많이 사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다. 스승님이나 아버지나 어쨌든 어른들이 사주는 건 한계가 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용돈을 모아둬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다.
"그럼 펀드를 하면 돼요!"
그때, 에시가 손을 반짝 들며 제안했다. 다른 아이들이 펀드가 뭐냐고 묻자 에시는 소파 위를 반 바퀴 구른 다음 설명해주었다.
"다 같이 돈을 모으는 거예요! 그리고 스카가 그 돈으로 듀스타를 사오잖아요. 그러면 다 같이 나눠 가지는 거예요.
돈을 많이 낸 사람은 더 많이 가져가구, 스카도 '듀스타 사오느라 고생했어~'니까 조금 더 많이 가져가구!"
"아, 그거 좋다! 그럼 내년까지 매달 모으면 어때? 음, 오늘이 25일이니까... 1일마다 얼마씩 돈을 모은다거나!"
스카는 자기가 고생한 만큼 많이 가져간다는 부분이 마음에 들었는지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시즈 역시 약간 상기된 뺨을 위아래로 열심히 흔들었다.
에시도 좋아요를 외치며 양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빠질 줄 알았던 루나도, 돈을 많이 내진 못하지만 자기도 끼워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물론 찬성했다.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시선은 의사를 밝히지 않은 로젠에게 향했따.
"로젠은? 어떻게 할 거야?"
"어, 어... 난..."
로젠은 쉽게 대답하지 못 하고 우물거렸다. 여기서 빠지면 자기만 소외될 것 같아서 겁이 났다. 하지만 바로 좋다고 하기에는 결정적으로 걸리는 점도 있었다. 몇 초 정도 로젠의 대답을 기다리던 스카가 대답을 재촉해왔다.
"싫으면 안 해도 돼."
"로젠은 듀스타 싫어해?"
시즈도 머리를 갸웃대며 물었다. 로젠은 다시 몇 초를 어물거린 다음에야 '걸리는 점'을 입 밖에 내놓았다.
"...그게... 먹어본 적이 없어서."
듀스타라는 과자가 뭔지는 알았다. 맥슬러시 백작가와 마녀 메럴리나 앞으로 몇 번 선물이 들어왔었기에.
하지만 그게 로젠의 입에 들어갔던 적은 없었다. 메럴리나는 로젠이 단 것을 먹이기 싫어했기 때문이다. 듀스타처럼 다른 대륙에서 건너온 정체 모를 설탕 덩어리라면 특히 더 그랬다.
스카와 시즈는 자기들이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먹어왔던 듀스타를 로젠은 먹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그런 동생들을 지켜보던 루나가 끼어들어서 상황을 수습하려던 찰나, 전에 에시가 태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스카가 '상품 시연회'를 해줘야 해요!"
시선이 에시에게 모였다.
"상품 시연회? 그건 또 뭔데?"
스카의 질문에 에시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로젠은 펀드를 할 듀스타를 먹어본 적이 없는 거잖아요? 그러면 펀드를 처음 하자구 한 사람이 '듀스타는 이런 겁니다~'라고 맛을 보여줘야 되거든요!"
"아, 그니까 로젠한테 듀스타 먹어보라고 주라는 거지? 알았어. 아껴먹으려고 놔둔 거 있으니까 가져올게!"
설명을 들은 스카가 이해했다는 듯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 침실로 달려갔다. 에시는 그를 손을 흔들며 배웅한 뒤 홱 고개를 돌려 로젠을 바라보았다.
"이제 로젠은 스카가 가져온 듀스타 먹어보고서 펀드 할지 말지 정하면 돼요!"
"으응."
"있잖아. 듀스타 맛있어. 로젠도 좋아했으면 좋겠다."
시즈도 그렇게 덧붙이며 쿠션을 푹 껴안았다. 작은 몸이 푹신한 쿠션에 파고드는 게 제법 기분 좋아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에시도 쿠션을 하나 챙겨서 배 아래에 깔고 누웠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로젠에게도 쿠션을 하나 건네주어서, 로젠은 짧은 고민 끝에 그걸 시즈처럼 양 팔로 꾹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감촉의 천과 담뿍 들어있는 솜의 푹신함이 기분 좋게 다가왔다.
“여기, 듀스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스카는 손에 들고 있던 불룩한 종이봉투를 로젠에게 쑥 건넨 뒤, 쿠션에 팔뚝을 괴고 비스듬하게 누웠다. 로젠은 에시의 설명대로 넘겨받은 듀스타의 포장을 조심스럽게 뜯었다. 종이 속에서 영롱한 설탕 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
다른 아이들의 시선이 제게 쏠려있는 것이 다소 부담스러웠다. 로젠은 빨리 먹어 치우자고 생각했다.
그는 작은 입을 한껏 벌려 과자를 바삭, 깨물었다. 다소 딱딱한 겉면이 1년 된 영구치에 허물어지며 안에 든 달콤한 잼이 주륵 흘러나왔다.
로젠의 풍성한 눈썹이 체리처럼 붉은 눈동자를 사르르 덮으며 뺨이 흐물흐물하게 풀어졌다. 누가 보아도 맛있는 것을 먹어 기쁜 표정이었다.
스카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머릿속으로 바로 들려온 목소리에 시즈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쟤는 삐지면 일단 단 걸 먹이면 되겠다. 그런 내용이었다.
"맛있어요?“
에시가 로젠에게 물었다. 로젠은 입 안에 든 과자를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응..."
"듀스타 좋아요?"
"응..."
"펀드 할 거예요?"
"응..."
이어지는 질문에 장미 마녀는 몽롱한 대답을 되풀이하다가, 남은 과자가 전부 입 안으로 사라지자 아쉬운 표정으로 자기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예의범절 교육을 철저하게 받지 않았다면 손가락에 묻은 설탕까지 핥아 먹었을 듯한 기세였다.
그 모습이 웃겼는지, 스카와 시즈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
갑자기 들려온 웃음소리에 로젠은 어쩐지 부끄러워져서 어깨를 움츠렸다. 에시는 한 박자 늦게 웃음에 동참하더니 곧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듯 손을 착 들었다. 아이는 발언을 허락받자마자 펀드를 위해 장부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누가 얼마나 돈을 냈는지 쓰는 거예요. 까먹으면 싫으니까요!"
"어디다가 써? 공책에다가? 스승님께 새거 사달라고 해야 하나..."
"나한테 안 쓰는 공책이 있는데, 그거 쓸래?"
스카가 고민하는 소리를 내자 루나가 제안했다.
"장부를 만들기에는 딱 좋을 것 같은데... 앞부분 몇 장은 썼지만 거의 새것이거든? 너희가 필요하면 얼마든지 써도 좋아."
"와! 고마워, 루나!"
"루나 최고!"
"고마워요!"
함성을 올린 아이들은 소파에서 일제히 내려가 루나를 끌어안았다. 루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아이들의 머리며 등을 쓰다듬었다. 혼자 소파에 남은 로젠은 쭈뼛거리며 루나와 그 허리께-에시는 다리-에 매달린 아이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자신도 고맙다고는 해야할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리 친하지도 않은 여성을 저렇게 답싹 끌어안기는 좀 그랬다. 로젠이 마음속으로 갈등하고 있는데 에시가 고개를 휙 돌려 로젠을 바라보았다.
작고 가느다란 손이 이리 오라는 듯 팔랑팔랑 흔들렸다.
"...어."
로젠이 머뭇머뭇 루나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자 에시는 비어있는 오른쪽 다리를 가리켰다. 로젠은 루나의 눈치를 한 번 본 다음 천천히 그의 오른쪽 다리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살짝 빨개진 뺨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고, 고마워. 루나."
"괜찮아. 로젠, 머리 한 번 쓰다듬어봐도 돼?"
"으응."
로젠의 허락을 받은 루나가 손을 뻗어 결 좋은 곱슬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그 손길이 기분 좋아 로젠은 자기도 모르게 루나의 손에 대고 머리를 비볐다. 루나의 입술에서 만족스러운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
점심 식사가 끝나고, 로클렛의 주도하에 아이들은 빗자루와 걸레를 손에 들었다.
"이거 검이다! 앞으로 베기! 옆으로 베기!"
"옆으로 베기는 그거 아냐! 이렇게 하는 거야."
빗자루를 쥐고 홱홱 휘두르는 스카의 옆에서 시즈가 짐짓 엄숙하게 먼지떨이를 흔들었다. 제법 각이 잡힌 움직임에 친구들이 오오오 탄성을 질렀다. 시즈는 뿌듯해진 가슴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서투른 검술 연습은 곧 빗자루와 먼지떨이의 칼싸움으로 변했고, 나머지 둘은 나란히 소파에 앉아 열심히 응원을 했다. 오늘의 응원 담당은 에시가 시즈, 로젠이 스카였다.
"얘들아, 이제 침실로 올라와! 청소 시작하자!"
"네!"
로클렛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아이들은 장난을 뚝 그치고 쪼르르 침실로 올라갔다. 오늘 오후엔 율리아나, 로단테, 루나가 집을 비우기 때문에 그 틈을 타서 로클렛이 아이들에게 청소 교육을 할 셈이었다.
마녀들은 보통 마법을 이용해 청결을 유지한다. 그래도 자기 침실 정도는 손으로 청소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로클렛의 지론이었다.
아이들이 침실 바닥에 열을 맞추어 앉자 로클렛은 검지손가락을 세우며 물었다.
"자, 문제. 청소의 첫 단계는 뭘까?"
스카와 시즈는 으음 하며 고민에 잡혔고, 로젠도 어려운 표정으로 로클렛을 흘금흘금 바라보았다. 에시는 그런 친구들을 한 번 쑥 훑어보더니 해맑은 웃음과 함께 번쩍 팔을 들었다.
"그래, 에시가 대답하자."
"어, 창문을 열어야 해요! 그 다음에는요, 이렇게 먼지를 탁탁 하는 거예요! 그리구 빗자루로 슥슥 한 다음에 걸레 하면 돼요!"
"완벽해!"
에시가 먼지를 털고 쓸고 닦는 시늉을 곁들여 대답하자 로클렛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 뺨을 톡톡 두드렸다.
율리아나가 상회의 후계자로서 이것저것 가르쳤다더니 청소 순서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실제로 돈 많은 귀족 자제인 에시가 직접 청소할 일은 거의 없을 텐데도 말이다.
"그럼 우리도 창문부터 열어야겠지?"
"네!"
"자, 다 같이 열자. 참, 오늘 청소에서는 마법 안 쓸 거야. 빗자루하고 걸레로만 해야 돼. 알았지?"
"네!"
입을 모아 대답한 아이들은 로클렛의 지시에 따라 협력해서 창문을 열었다.
시즈와 로젠이 옆 방에서 의자를 가져와 창가에 대놓자 스카와 에시가 그 위에 올라가 경첩을 풀고 창문을 연다. 그 뒤에는 각자 먼지떨이를 흔들면서 먼지를 모았다. 창문을 열기 위해 가져왔던 의자는 그대로 높은 곳의 먼지를 털기 위한 발 받침이 되었다.
"스카! 저쪽에! 저쪽에도 먼지가 있습니다!"
"어디? 없잖아."
"시즈의 치마에 있습니다!"
에시가 가리키는 쪽을 따라 스카가 시선을 옮기자 과연, 시즈의 옷자락에 작은 먼지 덩이가 대롱대롱 붙어있었다. 스카는 씨익 웃으면서 먼지떨이를 탁탁 휘둘렀다.
"아야."
작게 신음소리를 낸 시즈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스카와 에시는 뻔뻔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너 먼지 붙어있었어."
"이따만한 거요! 스카가 떼줬어요!"
"...진짜?"
에시가 주먹을 말아쥐며 말하자 시즈는 미심쩍게 얼굴을 찌푸리고 그것을 노려보았다. 둘은 여전히 뻔뻔한 표정을 고개를 끄덕였다. 시즈는 불신을 담아 친구들을 한 번 노려본 후 로젠에게 물었다.
"진짜야, 로젠?"
"으응?"
로젠의 눈동자는 당황으로 바르르 떨렸다. 로젠은 스카와 에시, 그리고 시즈를 번갈아 보았다. 스카와 에시가 시즈의 뒤에서 말하지 말라는 입을 막는 시늉과 가위표를 만드는 시늉을 해보였다.
이 상황에서 스카와 에시의 편을 들어버리면 시즈에게 미움을 살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실을 말하기도 좀 그랬다. 로젠은 입을 달싹거리다가 결국 고개를 픽 저어버렸다.
"모, 몰라. 난 못 봤어."
"로젠이 못 봤다잖아! 왜 로젠한테 그래."
스카가 비죽비죽 웃으며 로젠을 감쌌다. 시즈는 미간을 꾹 찡그리고 입을 앙 다물었다. 둘 사이에서 불꽃 튀는 눈빛이 오갔다. 그야말로 첨예한 신경전이었다.
"으응."
스카의 뒤에서 눈만 빼꼼히 내밀고 서있던 로젠은 문득 등 뒤에서 마력이 움직이는 걸 느꼈다. 살짝 고개를 돌리자 무언가가 날아와 그의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로젠은 힉, 하고 숨을 들이켰고 곧 스카에게서 야무진 비명이 터져나왔다.
"아!"
툭, 하고 바닥에 떨어진 것은 조금 전까지 벽에 걸려있던 향주머니였다. 스카가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돌리자 그와 눈이 마주친 시즈가 코를 흥 울렸다. 부양술의 응용이다. 스카는 그것을 주워 들며 빽 소리를 질렀다.
"야, 이걸 던지면 어떡해!"
"흐흥."
"너어-"
작은 가슴을 쭉 펴는 시즈와 예쁜 붉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보는 스카. 그들의 신경전을 멈춘 것은 에시의 난입이었다.
"아휴! 다들 모하십니까! 농땡 부리지 말구 청소합시다! 청소!"
사건의 원흉인 주제에 마치 자기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열심히 먼지를 털어대는 에시. 스카와 시즈는 그런 에시를 일제히 째려보았다.
로젠은 그들을 뒤로하고 창가로 다가갔다. 그는 먼지떨이를 서툴게 움직여서 조심스레 창틀을 털었다. 어린 마녀의 손가락보다도 작은 먼지는 바닥에 떨어지다가 문득 불어온 바람에 실려 침실 안쪽으로 쓸려 들어갔다.
겨울이 다가오는 숲속의 바람은 어느새 제법 차가워져 있었다. 바람 탓인지, 아니면 먼지 탓인지. 로젠이 크게 재채기를 했다.
"에, 엣취!"
"아."
세 소년의 관심이 로젠에게 몰렸다. 로젠은 그들의 눈빛을 피해 시선을 떨어뜨리며 코끝을 매만졌다. 스카와 시즈가 서로 한 번 마주본 뒤 연이어 말했다.
"로젠, 감기 걸렸어?"
"아니면 먼지가 너무 많아?"
로젠은 고개를 저었다. 자기도 왜 재채기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딱히 몸이 아픈 것 같지는 않았다. 스카는 잠시 생각하더니 창가를 보며 말했다.
"일단 창문부터 닫자."
"네엡!"
에시가 달려가 창문을 닫았다. 그 사이 스카는 응, 하고 로젠에게 손을 내밀었다. 로젠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스카를 보다가 다시 한 번 작게 재채기했다.
"변온술 써줄게. 손 줘 봐.“
스카가 그제야 자기가 내민 손의 뜻을 설명했다.
"으, 으응. 괜찮..."
"감기일 수 있단 말이야. 빨리.”
“...”
“야, 스승님께 전언 좀 해 줘."
단호한 지시에 시즈가 고개를 끄덕이자, 스카는 로젠의 손을 덥석 잡았다. 로젠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으나 손바닥에서부터 퍼져오는 몽글몽글한 따스함에 이윽고 긴장을 풀었다. 스카는 그런 로젠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의 앞머리를 살짝 정돈해주었다.
"얘들아. 로젠이 아프다고?"
얼마 있지 않아 로단테와 로클렛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카가 제 스승을 보며 대답했다.
"계속 재채기를 해요.“
다른 아이들도 연이어서 상황을 보고했다.
"이마는 안 뜨거워요."
"스카가 창문 때문에 그런 거 같다구 했어요!“
"그래서 제 로브 줬어요."
"저는 변온술 하고 있었어요."
시즈가 조금 전에 벗어서 로젠에게 걸쳐준 로브를 가리키자 스카는 로젠과 마주잡은 손을 반듯이 치켜들었다. 로단테는 시즈와 스카의 어깨를 쓸어준 후 자세를 낮추어 로젠을 보았다.
"로젠, 춥거나 머리가 무겁지는 않니?"
"으응, 아니요. 그러진 않아요."
"그래. 속이 울렁거리거나 하지도 않고?"
로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로단테는 이어서 몇 가지 질문을 더 하고 아이의 몸을 이곳저곳 살펴보았다.
그 사이 로클렛은 나머지 셋을 추려서 소파에 수납하고 돌아왔다. 세 꼬마 마녀는 수납된 지 몇 초 지나지 않아 쪼르르 로클렛의 뒤를 따라갔지만 말이다. 그것을 눈치챈 로클렛이 시즈의 뺨을 살짝 꼬집으며 로단테에게 물었다.
"어때?"
"감기 같지는 않은데. 찬 바람에 몸이 잠깐 놀란 것 아닐까 싶어."
"그럼 다행이네."
스승들의 대화를 훔쳐 들은 에시가 휴우~ 하고 과장되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모습을 본 스카가 에시의 뺨을 꼭 꼬집었다. 에시는 짧은 비명을 질렀다.
"왜 꼬집으십니까!"
"그냥."
"너무하십니다!"
"이 녀석들, 또 그렇게 장난칠래?!"
"아앗!"
"아!"
떽떽 소란을 피우는 꼬마들을 응징한 로클렛은 다시 로젠을 보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슬슬 로젠의 새 옷을 장만해야겠네."
시즈의 로브 아래에 로젠이 입고 있는 옷은 겨울 숲의 추위를 막기엔 턱없이 얇은 가을용 원피스였다.
*
"쇼핑! 쇼핑입니다! 옷을 사러 가요!"
"네 옷 사는 거 아니잖아."
광장을 폴짝폴짝 가로지르는 에시를 따라가며 스카가 말했다. 에시는 뱅그르르 친구를 돌아보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로젠 옷 사는 건데요! 에시는 내 옷 산다고 한 적 없는데! 스카는 로젠 옷 사는 게 싫어요?"
"내가 언제 그랬어?"
"어허어~? 안 되겠다, 로젠. 나랑 같이 가요. 못된 스카는 신경 안 써도 되니까요!"
"야!"
"나두 같이 가."
로젠의 팔을 잡아끌고 달려나가는 에시와 어이없다는 듯 소리를 지르며 따라가는 스카. 그리고 묘하게 즐거운 표정으로 도도도 뛰어가는 시즈.
로클렛은 아이들에게 안 넘어지게 조심하라고 소리를 쳤지만, 로단테를 돌아보는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아이들은 그대로 로젠을 데리고 광장 너머의 의류점으로 들어갔다. 딸랑, 하고 달려있지도 않은 종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에시가 반짝 손을 들며 외쳤다.
"안녕하세요! 에시예요!"
"응? 아하, 에시."
의류점 안쪽에서 옷의 마감 작업을 하던 재봉사 안이 아이들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오렴. 다른 친구들도 같이 왔네?"
"네!"
"안녕하세요."
스카와 시즈가 이어서 안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로젠도 그에 슬쩍 섞여 안녕하세요, 하고 중얼거렸다. 친구들의 인사가 끝나자 에시가 안에게 말했다.
"오늘은요, 로젠 옷을 만들어달라구 할 거예요."
"로젠? 아아... 그렇구나."
로젠을 본 안의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어린 장미의 감각은 그 반응을 예리하게 잡아내어, 로젠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안은 곧 동요를 미소로 바꾸고 로젠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오랜만에 보네, 로젠? 우리 가게에서 옷 맞추는 건 처음이지?"
"네, 네에."
"피부가 참 하얗네. 이러면 어두운 색도 잘 어울리겠어. 보자, 바지가 좋으려나, 아니면 치마나 원피스가 편하려나?"
그 말에 스카가 로젠을 보았다.
"로젠, 어떤 옷이 좋아?"
"으응...?"
로젠은 이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이제껏 옷이란 스승님이나 대스승님, 그도 아니면 유모가 골라와 입혀주는 것이었으니까. 로젠이 대답을 망설이자 시즈가 입을 열었다.
"난 치마가 좋아. 움직이기 편하거든."
"난 바지가 좋은데. 딱 맞고 잘 움직일 수 있는 거."
스카가 그 말을 받아서 자기 로브를 살짝 걷어 올렸다. 앙증맞은 다리에 딱 맞게 재단된 남색 바짓자락이 나타났다.
로젠은 바지를 한 번 보고 스카를 한 번 보고 시즈를 한 번 보고 에시를 한 번 본 후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예, 예쁜 거...?"
그와 동시에 로클렛과 로단테가 의류점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은 둘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로젠에게 제안했다.
"음, 어떤 게 좋을지 잘 모르겠다면 가게 안을 한 번 구경해 볼래? 어른들 옷이 많기는 하지만, 보고 이런 게 예뻐요 하고 말해주면 비슷한 양식으로 만들어볼 테니까."
"으응, 네."
로젠은 안의 눈치를 조금 본 뒤 다른 아이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가게에 있는 옷을 구경했다.
메럴리나는 로젠의 옷에 대해 본인의 의견을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막상 옷을 고르자니 막막하게 느껴졌다. 로젠이 좀처럼 옷을 고르지 못 하고 있자 다른 셋이 번갈아 옷을 추천해주었다.
에시는 움직이기 편한 딱 달라붙는 옷을, 시즈는 이게 잠옷인지 외출복인지 알 수 없는 디자인을 유독 추천했다. 스카는 옷걸이를 가리키며 저런 옷 어떠냐고 물어보는 정도였는데, 메럴리나가 로젠에게 입히던 하늘하늘하고 풍성한 드레스도 있었고 순수하게 편의성을 고려하여 만든 듯한 심플한 옷도 있었다.
“로젠은 이런 게 어울릴 거 같아. 장미니까 청록색으로.”
“요즘 유행은 마호가니 나무 색이랬어요!”
”남부 지방만 그런 거 아니야? 발드로제 령에서는 청록색 많이 입어.”
시즈의 반론에 에시가 대꾸했다.
“발드로제 령은 파란색이 스, 스, 스테에... 스테디 셀러! 랬어요! 그니까 지금 유행은 아닐 수도 있어요!”
“그치만-.”
어쩌다보니 시작된 시즈와 에시의 논쟁은 생각보다 길게 이어졌다. 스카가 색깔 말고 다른 부분도 보라고 한마디 했지만 그들은 좀처럼 들어먹지 않았다. 로젠은 왠지 자기 때문에 싸움이 난 것 같아서 옆 선반으로 도망갔다.
‘아, 저거...’
혼자 옆 선반을 둘러보던 로젠은 곧 한 쪽에 있는 옷에 시선을 빼앗겼다. 검은 바탕에 붉은색으로 문양이 수놓인 셔츠와 바지 한 벌이었다.
단순하고 담담한 디자인과 강렬한 색의 배치가 절로 시선을 끌었다. 로젠은 토닥토닥 옷에 다가가 셔츠 자락을 살짝 만져보았다.
부드러운 공단 재질. 살면서 고급 의상실에서 제작된 옷만 입어 본 로젠으로서도 거슬림이 느껴지지 않는 옷감이었다. 아이가 한참을 홀린 듯 옷자락을 살펴보는데,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옷이 좋아?"
"힉!"
로젠은 숨을 들이켜며 뒤를 돌아보았다. 목소리의 주인은 스카였다. 로젠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스카는 그를 빤히 바라보더니, 이쪽으로 오라는 듯 손짓했다.
"나 이런 옷 많이 있는데 어딘지 알아."
"아, 잠깐..."
아이는 로젠의 부정은 듣지도 않고 안쪽 통로로 들어가 버렸다. 로젠은 다른 사람들이 있는 쪽을 보며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결국 스카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스카가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안내하는 곳이라니, 솔직히 궁금했다.
“이쪽이야.”
의류점 안은 생각보다 넓었다. 마네킹 사이를 지나가자 짧은 통로가 나왔는데, 그곳에는 로젠과 스카보다 조금 나이가 많아 보이는 아이 두 명이 서 있었다. 마녀들의 의류점에 있으니 그들도 마녀이기는 하겠지만 로젠과는 별로 면식이 없었다.
"...“
로젠은 저도 모르게 스카의 뒤에 바짝 따라붙었다. 낯선 사람은 무섭다. 원래도 그런데, 지옥과도 같았던 지난 대집회 이후로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스카는 로젠을 한 번 돌아보더니 손을 탁 잡아주었다. 로젠은 손끝을 꿈틀거렸지만 어쩐지 마음이 든든해진 것 같아서 억지로 빼지는 않았다.
‘조용히 가자.’
스카의 입 모양이 그렇게 속삭였다. 하지만 두 아이는 스카와 로젠을 무시해주지 않았다. 둘 중 금발인 아이가, 속닥거림이라기에는 다소 큰 목소리로 말했다.
"저거 봐. 엄청 뻔뻔하지.“
”응. 진짜 뻔뻔하다.“
그 말에 같이 있던 갈색 머리 아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 같으면 집 밖으로 절대 안 나올 텐데. 무슨 낯짝으로 마을을 돌아다니는 걸까?”
"스승님이 그러셨어. 수선화 씨앗 뿌린 데는 수선화밖에 안 난다고."
"수선화?"
"응. 자식은 부모를 따라간다는 얘기래."
"아하~."
갈색 머리 아이가 로젠을 흘긋 보더니 쿡쿡거리며 웃었다. 금발 아이도 키득거리며 말을 이었다.
"스승이 범죄자인데 제자가 제대로 클 리가 있겠냐구."
그 한 마디에, 스카의 발걸음이 멈췄다. 두 아이를 향하는 그의 눈빛에는 적의가 담겨있었다. 가뭄에 작열하는 태양 같은 압력에 위축됐는지 금발 아이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왜, 왜 보는 거야?"
“포르샤. 쥬브니.”
스카가 이름을 부르자 상대편 아이들은 어깨를 움찔거렸다. 스카는 금발의 쥬브니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너희 스승님도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라서 네가 제대로 못 큰 거야?"
"뭐?!“
로젠은 불안한 마음으로 스카의 등에 붙었다.
"그렇잖아. 틈만 나면 시비나 걸어대고. 맨날 남 기분 나쁘게 하고. 뻔뻔한 건 너희 아니야?"
그의 말투는 평소보다 한층 퉁명스러웠다. 로젠은 상당히 나중에야 알게 되는 사실이지만, 이 퉁명스러움은 스카가 머리 끝까지 화가 나 있다는 증거였다.
상대편의 얼굴에 경계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쥬브니가 말했다.
“스카디아. 넌 그런 건방진 말투를 대체 어디서 배우는 거야?”
쥬브니의 뺨은 흥분했는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로단테 님도, 루나 님도. 상냥하고 정중하셔서 그런 말 안 하시는데!”
“마, 맞아. 왜 너만 그렇게 시정잡배 같은 말투를 쓰는 거야?”
갈색 머리의 포르샤도 친구의 말을 거들었다. 로젠은 스카의 안색을 살폈다. 평소에는 태양처럼 따뜻한 기운을 흩뿌리는 붉은 눈동자가, 오늘은 한없이 차갑게만 느껴졌다.
로젠과 스카가 대답하지 않자 상대편 아이들의 기세가 살아났다. 쥬브니가 로젠을 흘긋 보더니 비릿하게 웃었다.
“아하, 알겠다. 걔한테 배웠구나?”
“!”
로젠은 마치 얼음덩어리로 귀를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우리 스승님도 그랬어. 친구는 가려서 사귀라고. 범죄자의 제자하고 같이 다니니까 너도 그 모양인 거 아니야?”
그것은 매몰차고 냉혹한, 그리고 명백한 비난이었다.
차가워진 피가 로젠의 온몸을 타고 맴도는 것만 같았다. 스카의 표정을 다시 살필 용기조차 없어졌다. 어쩌면 스카는, 저 아이들의 말처럼, 앞으로는 로젠과 어울리지 않으려고 할지도 모른다.
‘안 돼.’
로젠의 머릿속을 그 단어가 지배했다.
무심한 것 같으면서도 주위를 잘 챙기고, 늘 당연하다는 듯 다정함을 건네주는 스카. 미인인 것을 제외해도 솔직하고 당당한 한편으로 배려심 깊은 성격은 누구에게나 호감을 줄 것이다.
로젠은 그에게 다소 거리감을 느꼈지만, 어디까지나 ‘감히 내가 이런 멋진 애와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결코 스카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미움받으리라고 생각만 해도 두려움에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로는 좋아했다.
게다가 스카가 로젠과 거리를 둔다면 그와 친한 시즈와 에시도 멀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면 로젠은 또다시 외톨이가 된다. 혼자, 다가오는 추운 겨울 속에 남겨질 것이다.
‘그건, 싫어. 다시는... 다시는 그렇게 되기 싫어.’
뜨거운 절망이 눈두덩이에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런 로젠의 몸을, 스카는 조용히 팔을 뻗어 가려주었다. 마치 그를 지키려는 듯이.
“나는 친구, 충분히 가려서 사귀고 있어.”
나지막한 스카의 음색이 로젠의 귀에 와닿았다. 단호한, 어찌 보면 차갑게도 들릴 수 있는 말투였다.
“뭐?”
“로젠이랑 친구하는 건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하지만 로젠에게는 그것이 다르게 느껴졌다. 새벽 창가에 스며드는 아침햇살처럼, 비가 온 뒤 구름 사이로 새어드는 한 줄기 햇빛처럼. 포근하고, 부드럽고, 어쩐지 안심이 되는 음색이었다.
“그리고 로젠이랑 닮게 된다면, 난 오히려 좋은데.”
로젠은 거기서 살짝 머리를 들었다.
태양을 닮은 스카의 눈동자 속에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금세 사그라들 것 같아 얕보고 방치했다가는, 어느새 크게 피어나 산 하나를 통째로 집어삼키는 잔불 같은 불꽃이었다.
로젠은 그 불꽃이, 지금 느끼고 있는 온기의 정체임을 깨달았다.
“로젠은 자기보다 약한 사람이 있으면, 비웃는 게 아니라 도와주거든.”
“...”
“게다가 머리도 좋고, 마법도 잘 쓰고, 예쁘고 착하고.”
그의 표정 하나, 몸짓 하나가 모두 주장하고 있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조금도 과장되지 않은 진실이라고.
“시즈랑 에시도 로젠을 좋아해. 물론 나도.”
조곤조곤 말을 잇는 스카. 반면 쥬브니와 포르샤는 계속 말문이 막혀있었다. 잠시 뒤 쥬브니가 겨우 입을 열었나 싶었을 때.
”하, 그래서...“
“그리고 루나도.“
스카가 그의 말을 끊으며 강하게 덧붙였다. 그 한마디에 쥬브니와 포르샤의 표정이 짝 굳었다. 스카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한심해.’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저들이 사실은 영리하고 상냥한데다 미인인 루나데인을 매우 동경한다는 것을.
그래서 루나의 동생인 저와, 또 같이 사는 로젠을 질투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시즈 다음에는 로젠이라는 거지.’
이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선언할 셈이었다. 다시는 나와 내 친구를 그 질투에 끌어들이지 말라고.
“그러니까 난 너희 말은 들을 생각 없어.”
단단히 쐐기를 박아, 저 녀석들이 두 번 다시 내 친구에게 모욕을 퍼붓지 못하도록.
몇 년 전에도 그랬듯이.
하지만 이번에는 상대도 그때와 다소 달랐다. 청소년기에 발을 들이기 시작한 쥬브니와 포르샤는 그때보다 감정이 쉽게 증폭되었다.
결국 분노로 얼굴을 물들인 포르샤가 손을 치켜들었다.
“...이게 진짜!“
그의 손끝에서 마력이 진동하는 것을 느낀 쥬브니가 제지하려고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날카로운 마력의 날이 허공을 가르고 스카의 뺨을 향했다. 로젠이 비명처럼 스카의 이름을 외쳤다.
“스카!”
“윽...!”
매끄러운 피부가 갈라지고 피가 송골송골 맺히더니, 이윽고 턱을 타고 한 방울 흘러내렸다. 반사적으로 얼굴을 감싼 스카의 손바닥에도 붉은 흔적이 묻어났다.
“포르샤, 마, 마법은...! 공격술 막 쓰면 스승님한테 혼날 텐데!”
“아... 나, 나도 모르게...”
쥬브니가 다급히 친구의 어깨를 붙들었다. 포르샤도 공격 마법을 쓰고 나니까 머리가 조금 식었는지 당황해서 눈동자를 떨었다.
스카는 경멸을 담아 그들을 바라보았다. 마녀 마을 안에서 공격 마법을 쓰는 것은 금기시되어있다. 아무리 미성년이라 한들 그냥 넘어가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다. 자기 피부가 조금 찢어진 정도로 상대방이 앞으로 평생 입을 다물어준다면 그걸로 족하다.
눈앞에서 친구가 모욕당하는 것에 비하면 이런 긁힌 상처쯤 아무렇지 않았다. 어차피 본격적으로 싸우면 그들이 불꽃 일족인 스카의 공격력을 이겨낼 수 있을 리도 없으니, 무섭지도 않았다.
하지만 로젠은 달랐다. 그는 스카의 상처를 본인만큼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
‘스카가, 나 때문에.’
조금 전, 스카는 로젠을 친구라고 불러주었다.
세계적인 대죄인이 남긴 아이, 모든 마녀들이 꺼리며 떠넘기던 외톨이를, 좋아한다고 얘기해주었다.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변온술을 써주고, 시즈의 제스쳐가 손뼉 치자는 뜻이라는 것을 몰래 알려주고, 로젠의 전언술 성공을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그와 친구들이 함께 있어 준 덕분에, 로젠의 오래된 불안 옆에 자그마한 안심이 피어날 수 있었다.
그런 아이가 저를 감싸다가 다쳤다. 아무리 작은 상처여도, 스카의 뺨에 맺힌 핏방울을 본 순간 로젠의 분노는 이성을 밟고 피어올랐다.
“...사과해.”
“뭐...?”
로젠의 한 마디에 쥬브니가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로젠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그는 스카의 팔을 잡아 내리고 앞으로 나섰다.
”스카에게, 사과해. 무례한 말을 한 것도, 다치게 한 것도.”
“뭐, 뭐라는 거야. 아까까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던 게...!”
쥬브니가 더듬더듬 반박하자 포르샤도 동조하듯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젠은 그들을 굳게 노려보며 또박또박 물었다.
“사과, 안 할 거야?”
“내가 왜?”
포르셔가 뻔뻔하게 대꾸했다. 스카가 눈썹을 찌푸리는 가운데, 로젠이 천천히 읊조렸다.
“...지금 이 모습을 스승님들이 보시면 어떻게 생각하실 것 같아?”
그의 머릿속 칠판에 지금 어떻게 행동해야 가장 효과적일까, 에 대한 답이 빠르게 채워졌다.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무, 무슨 얘기야?”
“너는 공격술로 스카를 공격했고, 스카는 다쳐서 피가 났어. 이건 명백한 폭력이고, 범죄야..”
“...”
“인간 사회에서든 마녀 사회에서든, 용납되지 않는 행위지.”
그 말에 쥬브니와 포르샤가 양심이 찔리는 듯 고개를 돌렸다. 로젠은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너희는 가해자야. 먼저 시비를 건 것도 너희고, 마법으로 스카를 다치게 한 것도 너희고.”
“하, 하지만.”
“게다가 피해자인 스카는 너희보다 어리고, 인간 사회에서의 신분은 높지.”
로젠의 목소리에는 점점 힘이 실렸다. 분노를 먹고 자라난 힘이었다. 그것은 무시할 수 없는 위압감이 되어 쥬브니와 포르샤를 짓눌렀다.
“아직도 모르겠어? 너희가 아무리 변명을 해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나쁜 건 분명히 너희라고.”
지금 이 자리에, 로젠의 작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왜 말이 없어? 설마 정말 아무 생각도 없이 공격한 거야?”
“...아.”
“사과하기 싫다고 했지. 마음대로 해. 어차피 너희가 받을 벌만 커질 테니까.”
쥬브니가 진흙이라도 씹은 듯한 표정으로 무언가 말하려고 했으나 좀처럼 말이 나오지 않는 듯 얼굴만 빨개졌다. 아까의 기세는 어디에 가져다 버린 걸까. 조금 강하게 반박했다고 겁먹어서 입을 다무는 꼴이 우습지도 않았다.
“...하.”
아무리 기다려도 명확한 답이 없자, 로젠은 코를 울리며 한숨을 쉬더니 갑자기 손을 치켜들었다. 한 박자 늦게 그 손에 시선이 모였을 때, 로젠은 팔을 휘둘러 자기의 뺨을 후려쳤다.
“!”
짝, 소리와 함께 로젠의 뺨이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쥬브니와 포르샤가 경악하며 입을 열었다.
“뭐, 뭐 하는 거야?”
“...도와주세요.”
“뭐?”
그런 그들을 무시하고, 로젠은 몸을 돌려 가게 앞쪽으로 달려 나갔다. 이어서 울먹이는 목소리가 복도를 가득 채웠다.
“도와주세요, 스승님! 스카가, 스카가...!”
이어지는 울음소리는 조금 전에 냉정하게 말하던 아이가 낸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기 힘든 처절함을 담고 있었다.
“뭐야, 쟤. 진짜 뭐 하는 거야...?”
“로젠...?”
쥬브니와 포르샤는 당황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스카는 한순간 로젠을 따라가려고 했지만, 곧 상황을 이해하고 발길을 멈추었다.
‘그런 거구나.’
로젠은 머리가 좋다. 에시나 루나와는 다른 방향으로 발상이 뛰어났다. 그는 지금 스카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스카가 생각했던 결과를 보다 효과적으로 이끌어내려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스카는 여기에 남아 쥬브니와 포르샤가 도망가지 못하게 감시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그의 귀에, 복도 저편에서 어른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니, 로젠.”
놀란 로단테가 무릎을 꿇고 로젠에게 물었을 무렵, 그 눈가에는 이슬 같은 눈물이 맺혀있었다. 로단테는 여린 꽃잎을 매만지는 듯한 손길로 로젠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아이는 더듬더듬 말을 늘어놓았다.
“스, 스카가 다쳤어요...”
“스카가...? 어쩌다가.”
로젠은 눈물을 닦는 척 곁눈질로 주변을 확인하며 대답했다.
“포, 포르샤라는, 애가... 공격해서...”
“...우리 제자가?”
그 말에 계산대 근처에 있던 한 마녀가 화들짝 놀라며 반응했다. 그의 손에는 작은 원피스가 들려있었다. 제자인 포르샤에게 입힐 원피스였다.
로젠의 여린 목소리는 드문드문, 하지만 분명한 발음으로 이어졌다.
“발포술로, 포르샤가, 그, 그래서, 스카 얼굴에 피가 나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포르샤!”
거기까지 들은 포르샤의 스승 크리엘이 먼저 가게 안쪽으로 달려가고, 쥬브니의 스승인 휘플리아도 그 뒤를 따라갔다. 율리아나가 자연스럽게 그들을 쫓아가는 한편, 로클렛은 로젠에게 다가가 안색을 살폈다.
“로젠은 괜찮니? 뺨이 붉은데.”
“...”
“포르샤가 너도 다치게 했니...?”
로젠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아까보다 한층 더 굵은 눈물이 뺨 아래로 쏟아졌다. 로단테의 손끝이 로젠의 붉어진 뺨을 매만졌다.
“...로키, 로젠을 부탁해도 될까? 나는 스카를 보러 가야 할 것 같아.”
평소보다 한층 차분한 목소리는, 오히려 그가 감정을 억누르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로클렛은 고래를 끄덕이며 로젠에게 양 팔을 벌려보았다.
“응. 빨리 가 봐. 로젠, 이리 오렴.”
로젠은 순순히 로클렛의 품에 안겼다. 로단테는 로젠의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어준 후 안과 함께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로클렛은 로젠의 등을 토닥이며 변온술로 아이의 부어오른 뺨을 식혀주었다. 붓기는 점점 가라앉았지만 눈물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그 사실에 로젠도 내심 당황했다.
‘왜, 안 멈추지. 너무 울면, 안 되는데. 로클렛 님이 싫어하실 텐데. 그쳐야 하는데...’
로젠 딴에는 어른들을 속이기 위해 거짓 눈물을 짜낸 셈이었다. 스카의 상처뿐만 아니라 로젠의 부은 뺨까지 포르샤와 쥬브니의 짓이라고 여겨지도록 말이다.
하지만 막상 터져 나온 눈물은 로젠의 의지를 무시하고 계속 흘렀다. 두려움, 긴장, 안도, 죄책감 등등 여러 가지 감정이 몸속에서 날뛰며 수분이란 수분은 다 밖으로 쫓아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것이 지금까지 꽉꽉 눌러 담아왔던, 흘리지 못했던 눈물들이라는 것을 이해하기에 로젠은 아직 어렸다. 그는 어느새 소리 높여 엉엉 울고 있었다. 규칙적으로 등을 두드리는 로클렛의 손길은, 마치 로젠의 가슴에 고여있던 눈물을 전부 털어낼 수 있게 도와주는 것만 같았다.
흘러넘친 감정들은 그 뒤로도 한동안 로젠의 뺨과 로클렛의 소매를 적셨다.
*
“정말 미안해요! 내 관리가 부족했어요. 애들끼리만 두는 게 아니었는데...!”
크리엘과 휘플리아는 제자의 잘못이 명백해진 상황에서까지 허리가 꼿꼿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들은 고개를 숙여 사죄했고, 로단테는 로젠이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단호한 말투로 대답했다.
“크리엘, 휘플리아. 당신들도 알겠지만 이건 미성년 마녀라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무, 물론이에요. 당신이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하고 이해해요. 하지만 이 애들도 악의가 있어서 그런 건...”
“포르샤와 쥬브니는 저희가 단단히 혼낼 테니, 이번 한 번만 눈감아주면 안 될까요? 원로회에는 부디...”
말하지 말아줘요. 휘플리아는 자기가 말을 꺼내놓고도 뻔뻔한 부탁이라는 걸 아는지 뒷말을 흐렸다. 그는 곧 무색한 듯 포르샤와 쥬브니를 다그쳤다.
“뭐하고 있어! 너희도 빨리 사과해!”
“스승님, 그치만 저 애의 뺨은 저희가 때린 게!”
“이 녀석들이 아직도...! 너희 말고 때릴 사람이 어디 있어?!”
억울함을 호소하는 쥬브니. 그러나 스카디아의 하얀 피부에 길게 남은 상처는 그들이 폭력을 사용했다는 분명한 증거였다. 따라서 어른들은 로젠의 뺨이 부은 것도 그들의 소행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휘플리아의 목소리가 한층 커졌다.
“안 되겠다. 너희 둘 다 오늘부터 근신이야. 단단히 각오해!”
“스승님!”
“어서 사과 안 해?!”
결국 스승의 호통에 진 두 사람은 마지못해 사과를 입에 담았다.
“...미안. 용서해 줘.”
하지만 눈빛에는 미안함 마음이 전혀 담겨있지 않았다. 포르샤는 로젠을 노려보았고 쥬브니 역시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둘의 모습에 심기가 뒤틀린 로젠은 일부러 과하게 어깨를 떨며 스카의 등 뒤에 숨었다. 스카가 그런 로젠을 감싸며 상대편 아이들에게 말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을 용서해달라는 건데?”
“어... 다, 다치게 한 것.”
“...그것만?”
스카의 물음에 포르샤와 쥬브니는 스승들의 눈치를 보았다. 모욕적인 말을 했다는 것까지 밝혀지며 더 혼날 것이 분명했다. 스카는 고개를 끄덕이는 그들을 잠시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알았어. 그럼 그건 용서할게.”
“정말? 고마-!”
“다치게 한 것만 용서한다는 뜻이야. 모욕한 건 용서 안 해.”
한순간 밝아졌던 포르샤와 쥬브니의 표정이 도로 딱딱하게 굳었다. 스카는 그런 둘을 노려보며 한 음절, 한 음절 똑똑한 발음으로 덧붙였다.
“너희는 그것만 사과했잖아? 그러니까 나도 그것만 용서할 거야.”
“그, 그런...”
“우린 그런 뜻이 아니라!”
스카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로젠의 손목을 잡고 등을 돌렸다.
“가자, 로젠. 옷 구경 마저 해야 하잖아.”
“아...”
강하지만 강제성은 없는 손길이었다. 로젠은 얼떨결에 그를 따라 발길을 옮겼다. 등 뒤에서 포르샤와 쥬브니가 한층 더 크게 혼나는 소리, 크리엘과 휘플리아가 로단테에게 한층 더 저자세로 사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젠은 솔직히 속이 시원했다. 어쩌면 로클렛의 품에서 뱃속에 뭉쳐있던 것들을 다 짜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던 시즈와 에시가 자기들 사이의 공간을 비워 둘을 맞이해주었다. 에시의 손에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알이 굵은 장미가 네 송이 들려있었다.
“로젠! 이거 먹어요!”
“욱.”
에시가 장미꽃 한 송이를 가지에서 똑 따서 로젠의 입에 들이밀었다. 로젠이 반사적으로 신음을 흘렸다.
“막 들이대지 마. 그러다가 목에 걸리면 어쩌려고.”
“아앗! 안 되는데, 목에 걸리면 아픈데!”
“이제 깨달았냐?”
“그리고 장미는 꽃받침에 가시 있잖아. 긁히면 다친다구.”
스카와 시즈가 에시에게 잔소리를 하는 사이, 로젠은 말없이 턱을 움직여 꽃잎을 씹었다.
입 안에 들어찬 붉은 꽃잎은 여느 때처럼 텁텁하고 물컹했지만, 여전히 조금 달았다. 이제껏 에시에게 받았던 그 모든 꽃들과 같은 맛이었다.
“ 미안해 로젠! 아팠어요?!”
로젠이 간신히 삼킬 수 있을 만큼 꽃잎을 분해했을 무렵. 장미꽃 막 들이대기의 위험성에 대해 한바탕 잔소리를 들은 에시가 로젠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기분 탓인지 안색이 좀 창백했다. 정말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으아니, 아프지는 않아.”
로젠이 고개를 젓자 에시가 휴우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로젠은 그런 에시를 보며 입 안에 든 것을 삼키고 덧붙였다.
“근데 사실 장미꽃, 별로 맛없어.”
“엑?! 그럴 수가!”
에시는 처음 만난 이후 3년 만에 밝혀진 진실에 어지간히 충격을 받은 듯했다. 원래 사백안인 에시의 눈에 흰자가 점유하는 비율이 더욱 늘어났다. 스카와 시즈도 몰랐던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 너 탄생화잖아.”
“맞아. 그래서 좋아할 줄 알았는데... 싫어해?”
셋의 표정을 본 로젠은 자기도 모르게 후훗, 웃음을 터뜨렸다.
“내 탄생화가 장미인 건 맞는데, 탄생화라고 딱히 맛있게 느껴지는 건 아니야.”
“앗. 그런 거야...?”
“응. 난 꽃이라면 샐비어가 더 좋아. 달콤하니까.”
이제는 로젠도 잘 알았다. 이 아이들이 자기의 좋고 싫음을 무시할 리가 없다는 것을. 로젠이 처음으로 친구들에게 분명히 의사를 표현한 순간이었다.
다른 세 명도 로젠의 태도가 달라진 것을 느꼈는지 일순 침묵이 흘렀다. 에시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려던 순간, 로젠이 먼저 덧붙였다.
“그래도, 기운이 났어. 고마워.”
그의 얼굴에는 한여름에 담벼락을 가득 채운 덩굴장미 같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것은 곧 나머지 세 명에게도 옮아갔다. 에시가 기운차게 말했다.
“다음엔 샐비어 가져올게요!”
“샐비어 말고는 또 어떤 꽃이 맛있어?”
스카의 물음에 대답할 새도 없이 시즈가 바짝 다가와서 말했다.
“우리 아빠 집에 가면, 엄청 커다란 정원 있어. 로젠 마음대로 먹어도 돼.”
“사실 난 꽃보다... 과자가 좋아. 달콤한 거.”
“...!”
그 대답에 셋은 묘한 표정으로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로젠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운데 시즈가 조용히 말했다.
“나 이거 알아. 편견이라는 거야.”
“맞아. 생각해보면 당연한 건데. 몸에 좋은 음식이 꼭 맛있지는 않잖아..”
“편견이었어요! 반성해야 해요! 듀스타 펀드에서 로젠 비율을 올려줍시다!”
“으음... 좋아.”
에시의 제안에 스카와 시즈는 잠시 고민했지만 곧 동의했다. 로젠도 마다할 이유가 없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로젠의 옷장에는 스카가 추천한 단정한 아동용 바지 정장과 시즈가 고른 보들보들한 원피스, 그리고 에시가 들고 온 겨울용 코트가 나란히 늘어섰다.
*
그날 저녁, 후식으로 요즘 황도에서 유행하는 디저트가 나왔다.
북부 산맥에서 채취한 얼음으로 설탕과 과일을 섞은 우유를 차게 식혀 만든 귀한 디저트다.
의상실에서의 일로 놀랐을 로젠과 스카를 위한 스승님들의 배려였다.
“이거 맛있다! 근데 배불러요! 뒀다가 나중에 먹을래요!”
디저트를 한 입 먹고 배를 통통 두드리는 에시에게 로젠이 말했다.
“빨리 안 먹으면 녹을 텐데.”
“엑!”
“내가 변온술 걸어줄 테니까 천천히 먹어.”
“고마워요, 스카! 스카는 착해요!”
“스카, 나도. 나도.”
에시의 칭찬과 시즈의 요구에 스카는 싫지 않은지 피식 웃었다. 로젠은 그 광경을 보며 디저트를 스푼 한가득 떠서 입에 집어넣었다.
‘달콤해.’
스푼에 담긴 부드러운 행복은, 그대로 아이의 삶에 깊이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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