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형태

자컾 로그(사랑이 담겨 있어 퀄리티가 올라갔습니다.)

계승식은 초라했다.

죽음과 생명이 그들을 바라보고, 안에 품었던 힘과 그런 표현으로는 담을 수 없는 것들을 후세대에 물려주었다. 우레와 같은 박수도, 걸음마다 밟히는 꽃도 없었다. 묵묵히 그 순간을 받아들이는 이들만이 그 자리에 있었다. 몇십 시간의 유예 끝에 남은 삶이 결정됐다. 영원과 필멸. 삶을 에워싸는 탄생과 죽음의 끝에 뒤따르는 기억. 그리고 제 속도로 마무리되는 주어진 시간. 세레타와 키리스는 평범한 자가 되어 신이 된 절반과 삶을 여행할 절반을 떠나보냈다. 유배지의 차가운 공기를 타고 꽃씨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A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아주 당연한 흐름이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듯이.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아주 오래도록 하늘을 보고 싶었다. 꿈을 꿀 때도 그랬고, 꿈에서 깨어났을 때조차 그랬다. 흑해 위에 뜬 섬이 대륙의 동쪽 끝자락에서 보일 리는 없었다. 그는 손을 움켰다. 태어날 때부터 잃었던 마법이 권능의 이름으로 그의 안에 자리했다. 그것은 A가 바라는 대로 움직였다. 잃어버린 부품이 꼭 맞는 마도공학 기계 같았다. 그러나 A는 하늘로 오르기를 원하지 않았다. 저 위에는 그리운 과거가 있고, 섬 아래 바다의 밑에는 그 시간이 매몰되어 있다. 영영 돌아갈 수 없는 것이 있다. A는 섬이 보이지 않는 하늘에서 눈을 떼고 K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약속을 지킬 때였다. 갈 곳 없는 이들이 떠돌자고 했던 말만큼 서류 없이도 효력을 발휘하는 계약은 없었다.

나는 이제 영원을 바라지 않기로 했어. 낙원은 없지. 그리고 없더라도 괜찮아, 그게 삶이니까...

A는 K의 선택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에게 영원이란 끝없는 도서관을 헤매면서 그 안에 새 책을 끼워 넣는 일이 될 테니까. A 자신이 이 길을 고른 이유와는 다르겠지만, 둘에게는 동행할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아마도 K가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기 전까지 길게는 육 년쯤. 그는 천 년을 살면서 왜 이 기간을 길게 여겼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리고 마음은 하나둘 불을 밝힌다. 때로는 앞길을 무섭지 않게 비추는 등불이 되었다가, 불을 지펴두고 앉아 쉴 수 있는 모닥불이 되기도 했다. A는 기분 좋게 따스한 온기를 느꼈다. 집을 구해 함께 살 때도, K의 옆에서 손을 잡고 잠들 때도, 신의 씨앗으로서 나눠 받은 권능을 내려놓고 걸어서 이동할 때도, 함께 같은 음식을 나눠 먹으며 미소지을 때도... 그렇게 지내다 보니 연 단위로 보내지 않아도 시간은 짧았다. A는 미약한 온기를 띠던 마음이 삼킬 수 없는 빛 덩어리처럼 뜨거워지던 순간 그것을 K의 앞에서 토해냈다. 주어진 시간이 짧게만 느껴지니까 더 달라고 떼를 쓰는 셈이었다. 후작가의 막내와 아무런 신분 없이 마탑에서 살아온 평민이 이루어지려면 극복해야 할 문제도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K의 삶을 끝까지 옆에서 함께 걷고 싶었다.

너를 좋아해... 사랑해... 사람은 왜 사랑 앞에서 멍청해지는지. 가진 말 중에서 제일 예쁘고 반짝이는 단어를 골라 엮어도 모자라는 순간에 마음을 전할 표현은 왜 정해져 있는지. A는 실패의 원인을 그쪽으로 돌렸다. 그렇잖아. 오명과 저주를 가득 뒤집어쓴 용이라서, 다른 모습을 꺼낼 수 없는 반쪽이라서, 아니면 이 마음조차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잊고 잃어버릴 거라서. 이런 건 생각할수록 마음만 못살게 구는 꼴이니까. 거리를 두자는 K의 목소리를 곱씹으며 A는 짐을 쌌다.

떠돌자니 갈 곳이 없었다. 하늘을 바라보는 횟수는 늘어났다. 이러다 보면 어느날 날개를 펴고 올라갈 수 있을 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함께 보았던 길과, 꽃과, 구름을 잊을 수가 없어서. A는 혼자였지만 둘이었다. 걷지 않고 풍경을 그려내 그 안으로 들어서기를 반복했다. K의 잔상을 떼어내고 싶었다. 받아주지 않는 마음이라면 안토아이움의 집 안에 남겨두고 오는 게 옳았다. 누구에게서도 도망칠 이유가 없는데 도망과 같은 일상이 계속됐다. 달리는 중임을 깨달았을 때는 대륙의 북쪽 끝이었다. 그리운 섬이 손안에 잡힐 듯 멀면서 가까웠다. A는 눈을 감았다. 이 순간에는 K와 함께이고 싶었는데.

무엇이든 선을 넘기가 어렵다. 용기를 내기가 어려우며 저지르는 것이 힘들다. 멀어지는 용의 그림자와 뾰족하게 솟은 마탑을 보는데도 A는 속이 시큰했다. 왜 나는 해내는 일마다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들뿐일까.

수소문은 쉬웠고, 재회 역시 금방이었다. 울음과 포옹과 체온이 지나갔다. 사랑하는 가족 세 명에게 하지 못할 말과 해서는 안될 말들을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둔 채로 A는 겨우 숨만 쉬는 삶을 이어갔다. 연명에 가까웠다. 울다가 사람이 들어오면 부은 눈가를 닦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실연은 처음이었고, 그는 몸만 큰 소녀와 다르지 않았으며 그 마음은 아직 뾰족하고 뜨거웠다. 추억을 꺼내볼 수 없으니 순간순간이 아픈 일로만 기억됐다.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던 곳에 발을 디디고 몸을 뉘었음에도 돌아볼 수 없는 것들이 새로 생겨났다. 일부러 반지를 흘려서 잃어버렸다고 말해놓고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감정과도 비슷했다. 정말이지 아프고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애의 옆을 지켜줘야 했는데. 잘못된 선택이라도 하면 어쩌지. 나처럼 울고 있으면 어떡해. 소리 죽여 밤새 우는 날이 계속됐다. 식사를 거르기 시작할 때쯤 부친은 딸을 데리고 나와 번화가에서 맛있는 것을 먹이고, 개나리색 원피스와 크림색 구두를 사 신겼다. 그가 사랑하는 딸의 억지로 웃는 가면을 알아보지 못할 리는 없었다.

그 다음 날부터 A는 근처 음악 아카데미에서 잡일을 돕고, 아이들의 공부를 돕는 조수 일을 시작했다. 학업은 라트리움 아카데미에서 배워둔 것이 있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일부러인지 아닌지 일이 쏟아졌다. 슬픔에 잠길 시간이 없어졌다. 친구들의 심장 박동에 맞춰 반짝이는 장신구도 점차 하나씩 손가락과 손목, 귓불에서 빠져나가 보석함에 들어갔다.

이제 그 반지 차례였다.

A는 그것을 꽤 오래 끼고 있었다. 아카데미에 편입하기 이전부터라고 해야겠지만, 의미를 갖게 된 건 그 다음이었다. 그럼에도 그 시간은 제법 길었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한 아이가 물었다. 선생님, 이 반지는 뭐예요?

"아무것도 아니야..."

은빛 반지가 여느 장신구와 다를 바 없이 보석함에 들어가 잠든 날은 그날이었다. A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찍어 닦아내고 잠자리에 들었다. 울기에는 하루가 너무 피곤했다. 부치지 못한 편지가 책상에 수북했다. 부치지 않았다는 표현이 옳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잠들었다.

그 사이 여름이 몇 번 돌았다. 쌓이는 낙엽을 비질하며 A는 짧아진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 양갈래, 예쁘네요. 한마디에 잘라내 이제는 귀밑까지 오는 길이를 유지할 뿐이었다. 그는 외모에 관심을 끊었으므로 머리 손질은 전 마탑주의 몫이었다. 잘라도 예쁘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전 마탑주는 아끼는 친구의 딸이 부끄럼을 타는 줄 알고 말을 줄였다. 그러나 사실은 그와 달랐다. A는 더이상 누구에게도 예쁘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한 사람이 아니면 그럴 이유가 없었다. 이것이 틀려먹은 생각일 줄은 전혀 모르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재회는 금방이었다. 오랜만에 그라타 스페스에 발을 들여 사람을 찾았던 것처럼. 바다는 하늘을 비추어내고 하늘은 바다의 물 냄새를 머금어 살아가는데 어떻게 만나지 않으리라고 단언했을까? A는 손님의 방문에 계단을 내려가 문을 열었다가,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를 느꼈다. 숨소리마저 놓치지 않는 침묵. 이어서 감정과 소리의 폭발. 쏟아내기 직전 A는 K를 어깨로 치고 뛰쳐나갔다.

운명이라는 관용구는 어울리지 않는다. K와는 엮일 수 없다. 태생이 그렇다. 신분도, 종족도 비극적인 결말만을 가리켰다. A는 도망칠 곳을 찾다가, 어디에도 도망칠 곳이 없으며 어디서든 K를 만날 수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 입을 틀어막았다. 반지 자국은 햇빛에 고르게 그을려 남지 않았는데, 묻어둔 기억들이 무덤에서 솟아오르는 망령처럼 들러붙어 상흔을 입혔다. 왜 그래? 아직도 좋아하지? 보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았잖아. 멀리 가지 못한 탓에 손님의 출입 여부가 보였다. A는 치마 차림으로 길옆 풀 바닥에 앉았다. 요동치는 마음을 꽉 쥐고 하나하나 가뒀다. 좋아하는 건 본인뿐이다. K는 이 마음을 거절했고, A는 비겁하게 편지 하나 보내지 못해 친구로 남기도 어정쩡해졌다. 관계를 정리할 사람 역시 본인뿐이었다. 머리 위에 떠 있던 해가 저마다 솟아오른 탑에 찔려 스러져 갔다. 섬에 해의 옷자락이 질질 끌렸다. 황혼이었다. A는 무거운 걸음을 옮겨 탑 문을 열었다. 붉은빛 노을 한 조각이 창문을 넘어 테이블에 묻어날 때, 나르케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를 보았다.

잘 우린 차가 식어가고, 잊을 수 없는 취향을 모른 척하고, 서로 무언가를 숨긴 채 대화가 오갔다. A는 K에게서 그린 듯한 도련님 같은 모습을, 나르케는 A에게서 반지 없는 손을 읽어냈다. A가 더 고집부리지 못한 이유였다. K는 맞는 옷을 입은 듯 그 모습이 근사하게 어울렸다. 마음을 다시 고백해 끌어내리기에는 너무 완벽한 장면이었다. 애초에 둘은 아르본즈가 아니었다면 만날 수 없을 사이였으므로 이런 거리감은 당연했다. 그런데도 마음은 아프고, 가슴은 두근거리고, 불씨는 도로 살아나서 삶에 비로소 활기를 불어넣었다. A는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N는 그런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반지 없이 손톱이 짧게 다듬어진 맨손 끝이 오므라드는 것을 확인했다. A의 버릇이다. 마주 앉았을 때 할 말을 숨기고 감내하는... 어떤 말을 참고 있는지 또한 모를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K는 일어나지 못했다. A가 입을 열었다. 배웅은 안 할게... K는 대답하고 일어섰다. 문을 향해 A를 등지자 찻잔 정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비겁자였다. 이루어진다고 해도 남은 삶을 힘들게 살아갈 A를 위한다며 끊어낸, 상대를 뒤에 두고 표정도 몸짓도 보지 못하게 되어서야 하고 싶은 말들을 떠올리는. 또한 그는 겁쟁이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A가 있는 방을 나와 계단을 내려간 결말은 너무나 그리던 그대로였다. 각본의 마지막, 연출의 마무리, 무대의 끝...

그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해가 바닷속으로 몸을 숨겨 도망치는 모습을 보며 K는 퓔레로 돌아갔고, A는 부치지 못한 편지를 정리해 서랍 안에 넣었다. 사랑의 형태는 그런 식으로 바뀐다. 각자의 방향으로 삶을 택한 만큼.

공백 포함 5438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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