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확실히 할 것

커미션 작업물, 오마카세, HL 여름청춘

안녕? 나는 H고 올해 고등학교 2학년이야. 오늘은 방학식을 하는 날이라서 몹시 덥고 푹푹 찌지. 다행인 건 잠깐만 학생들을 붙잡고 있다가 돌려보낸다고 에어컨을 틀어줬다는 점이랄까. 그것 빼고는 도움도 안 되지만, 이따 예체능반 L이랑 떡볶이 사 먹기로 해서 앞머리가 떡질 일은 없게 됐어. 물론 그런 일이 생겨도 난 예쁘긴 해. L이 누구냐고? 있어. 첼로를 좀 켤 줄 알고, 단순한 남자애야. 그리고 날 좋아해.

"L한테 김지현이 고백했다!!"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배배 꼬던 H의 눈이 두 배로 커졌다. 그러니까... 날 좋아해. 아 왜! 고백받았다고 해서 좋아하는 사람이 바뀔 리는 없잖아? 그러면서도 H는 앞문을 열고 들어온 남학생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닌 척하지만 귀는 그쪽으로 쫑긋 세워졌다. 호르몬과 이성, 그리고 소문에 한창 민감할 나이인 학생들은 금방 소리친 남학생을 둘러싸고 몰려들었다. 뭔데? 왜? 어쩌다가? 어디서? 받아줬대? 질문이 쏟아지고, 웅성거림에 방학식 방송은 안 하느니만 못하게 되었다. H는 당연하게도 그 무리에 끼지 않았다. 그야, L 나 좋아하니까. 걘 보수적이라 여자친구 만들기도 글렀고, 고백 같은 거 받으면 얼떨떨하다 거절해 버리고 말걸? H는 빗을 꺼내 머리를 마저 빗었다. 근데 나 이따 걔랑 떡볶이 먹으러 가기로 했는데. 눈길이 힐끔 학생들이 모인 곳으로 향했다.

절대로 끼어볼까- 하던 건 아니었다. 맹세할 수 있었다. 그냥 너무 시끄럽고, 좀 조용히 해줬으면 좋겠어서. H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쪽으로 향하려던 순간 앞문이 다시 열렸다. 선생님이었다. 방학식 안 보고 뭐 해? 빨리 다들 들어가 앉아. 하나 둘 해산하는데 H라고 계속 서 있을 이유는 없었다. 정말 그뿐이었다. 그런데 좀 뻘쭘하고, 타이밍을 잘못 잡은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원래부터 H는 방학식이나 개학식 등에 집중하는 스타일은 아니라서, 여러 시상식과 교가는 듣는 둥 마는 둥 흘러갔다. 평소였으면 치마 허리를 세 단 접어 입고 예쁘지 않냐며 묻다가 L에게 한 소리 들어먹는 게 일상인데, 일상이어야 했는데, 오늘은 별로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니, 아예 떡볶이 자체가 먹고 싶지 않았다. 나이가 몇 갠데 애도 아니고 떡볶이를 먹으러 가. 그렇다고 메뉴를 바꾸자니 용돈이 부족했다. H는 결국 약속을 취소하기로 마음먹었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데 L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이쯤이면 뭐라고 해명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우리 반에 소식통 있는 거 다 알면서. 결국 H가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

나 배 아파. 떡볶이 안 먹을래. 다음에 봐.

그다음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왜냐면 오늘은 여름방학의 시작을 여는 날이었고, 학교가 아니면 자연스럽게 만날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되었다. 답장은 금방 왔다.

약 잘 챙겨 먹어라.

H는 두 손으로 휴대폰을 붙들고 액정을 노려봤다. 더. 더 보내야지. 해명 안 해? 해명 안 하냐고. 결국 누군가가 기다리는 연락이 있냐고 물어보기까지. 뒷문을 나설 때까지도 H는 휴대폰에게 끝없이 눈치를 줬다. 예체능반은 늦게 끝나는지 지나가는 동안에도 종례가 길게 이어졌다. 아프다고 해놓고 기다리는 것도 참 우스운 일이었다. 그래서 H는 무시하고 집으로 갔다. 답장은 더 오지 않았다. 변명을 잘못 잡았나? 그러면 종례 재미없다고 하나라도 더 왔을 텐데. 침대에 누워서도 H는 휴대폰을 빤히 바라봤다. 이런저런 생각이 피어올랐다. 그새 김지현이랑 사귀느라 나는 안중에도 없나? 아니면 생각해 보느라 내 생각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건가?

"누나, 밥 먹어."

만약 그런 거면 괘씸하지. H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내 생각할 자리가 없고, 내가 생각나지 않는다면 나도 방법이 있다구. 널 모른 척하겠어. 연락도 안 할 거야.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니까.

아니, 내가 왜 사귀지도 않는 애한테 밀당을 해야 돼? 웃긴 건 그 뒤로부터 걔가 연락을 안 했다는 거야! 며칠 째냐면 딱 오늘이 사흘이야. 삼 일. 알지? 내가 연락을 안 한다고 걔도 연락을 안 한다니까. 어이가 없어서... H는 인형을 붙들고 배를 꾹꾹 눌렀다. 이 인형마저도 L이 인형 뽑기에서 뽑아다 H에게 직접 건네준 것이었다. 못생긴 곰인형. L 닮았어. L에게서 연락이 끊긴 지도 딱 사흘이었다. 나흘과 사흘을 헷갈려서 L이 알려준 단어이기도 했다. 곳곳에 L이 묻어나 있었다. 멀리하고 보니 더 그랬다. H는 여태껏 이랬던 적이 없었음을 떠올렸다. 분명 방학식 때 받은 고백과 연관이 있을 게, H의 동생이 봐도 뻔할 지경이었다.

방법은 둘 중 하나였다. 1.이대로 버티다가 연락이 올 때까지 모른 척을 한다. 2.자존심 접고 "뭐해?" 묻는다. 사실 이 두 가지 방법을 놓고 고민한 건 마지막 연락 후 12시간이 지난 뒤부터였다. 어슴푸레한 새벽에도 매미 소리를 들으면서 휴대폰을 손에서 떼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사흘은 자존심을 반토막 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게다가 마지막 연락은 L이었다. 이번에 H가 연락한다고 해서 딱히 그렇게 민망할 것 같지도 않았다. H는 결국 보냈다. '뭐해?' 답장은 17분 만에 왔다. 정확한 숫자를 기억하는 이유는 시간이 찍혀있기 때문이지 절대로 불안하고 긴장되어서 방을 돌아다니고 액정을 켰다 끄기를 반복해서가 아니다.

좀 아팠어.

그리고 H는 그 답장을 보는 순간 여러 생각이 떠올라 여태껏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자체를 잊어버렸다. 약은 먹었을까? 죽 먹어야 되는 거 아닌가? 여자친구도 아닌데 여자친구처럼 L의 걱정을 했다는 뜻이다. '약은 먹었어? 죽은? 괜찮아? 어디 아픈데? 많이 아파?' H가 보낸 메시지에 이번에는 답이 오기까지 14분이 걸렸다.

신경 쓰지 마.

그리고 그 다섯 글자는 걱정과 두근거림으로 묘하게 열이 올랐던 마음에 찬물을 끼얹기에 충분했다. H는 우뚝 서서 답장을 노려보다가, 밝았던 액정이 어두워지고, 마침내 꺼지기까지 휴대폰을 힘껏 움켜쥐었다. 처음은 실망이었다. 그 뒤로는 속상함이, 뒤이은 감정은 분노였다. 지가 뭐라고 신경 쓰지 말래?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신경쓰이게 하기 싫다는 거야? 그러나 아무리 휴대폰을 세게 쥐어도, 그 바탕에는 L을 향한 걱정이 깔려 있었다. H는 당장 죽집에 전화를 걸어 야채죽을 주문했다. 직접 할 수도 있지만, 맛있는 걸 먹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리고 옷걸이에서 옷을 꺼내 갈아입으며 답장을 보냈다.

뭐래. 죽 사갈 테니까 집주소 불러.

그렇게 H는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죽을 들고 후끈한 여름날 L의 집 앞 놀이터까지 도착했다. 시간 계산이 영 틀려먹지는 않았는지 L이 제때 나와주었기에, H는 개미가 기어다니는 달궈진 벤치에 앉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무슨 말을 하고, 어떤 대화를 나눠야 할지. H는 L을 향해 손을 들어 보이고, 죽부터 내밀었다. L은 이 날씨에 후드집업을 입고 나와 콧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감기인가 보네. H는 그렇게 판단하고 L의 안색을 살폈다. 평소에는 잘만 마주쳐 주는 시선인데 오늘따라 다른 곳으로 방황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겨버리면 그만인데. 오늘은 유독 속상해서 그게 잘 되지 않았다.

"너 왜 나 피해?"

"...내가 뭘."

"지금도 봐. 나 못 보잖아."

H가 L의 시야에 알짱대자 L이 고개를 돌렸다. 입술을 삐죽이며 H가 L의 팔뚝을 찔렀다. 아, 소리도 없이 L은 입을 꾹 다물었다. 바로 위 나무에서 매미가 시끄럽게 울었다. L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데 H는 그 목소리를 들으려고 가까이 다가갔다. L이 한발 물러났다.

"피하면서. 왜 피해? 여자친구 생겼어?"

"뭐, 무슨, 왜 이야기가 그쪽으로 튀는데?"

"생겼냐니까? 여자친구가 생겨버려서 다른 여자애랑은 거리도 두고, 어? 신경도 쓰지 말라고 하고 그러는 거 아냐?"

"그래서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럼 왜 그랬는데?"

다시 L이 입을 다물었다. H가 폴짝폴짝 뛰면서 대답을 재촉했다. 그 고백은 애초에 받지 않았는데도, L은 섣불리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돌려 돌려 말하면서 친구로 지내자고 거절하던 순간에도 L은 H를 떠올렸다. 신경 쓰이는 사람이었던 탓이다. 아니라고 돌려보냈으면서 H에게는 같은 대답을 못 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아프다는 건 애초에 거짓말이었다. 더 묻지 않는 H에게 실망해서 일부러 연락을 안 했던 것뿐이다. H 자존심에 먼저 찾진 않을 테니까. 그럼 좀 버티다 늘 그렇듯이 제가 먼저 연락하고, 방학이니까 자주는 못 만나도 가끔 만나서 이전처럼 지내고... 그럴 생각이었는데.

H가 찾아왔다.

당사자가 찾아온 것이다. 부르면 불렀지 찾아올 줄은 몰랐다. L은 이 더운 여름날에 후드집업까지 껴입으면서 아픈 애 행세를 했다. 그런데 묻는 게 이것이다. 그럼 왜 그랬냐고. 왜 피했냐고. L은 차마 여기다 대고 너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너만 모양 빠지는 거 싫어하는 거 아니란 말야. 나도 체면 차리고 싶어. 그런데 반짝거리는 H의 눈이 너무 예뻐서, 맴맴 시끄러운 매미 소리가 청량하게 들려서, 날도 더운 날에 껴입었더니 머리가 어지러워서. 그만.

"너 때문이잖아!"

소리를 질러버렸다. H는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L이 소리를 지를 줄은 몰랐어서 깜짝 놀랐다. 아 왜 소리를 질러! 몰라! 자꾸 소리 지를 거야??? ...아니. L이 급하게 기침했기 때문에 H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너 정말 많이 아파? 괜찮아. 덥고 습한 바람이 둘 사이를 가르고 지나갔다. 점심도 먹기 전인 오전 시간의 놀이터에는 사람도 적었다. 괜히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H 뿐만 아니라 L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쭈뼛쭈뼛 말을 고르다가, 결국 H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입술을 축이자 립밤의 체리 맛이 달콤하게 느껴졌다.

"여자친구... 는? 너 정말 걔랑 사귈 거야?"

"..."

"아 왜 이럴 때 입을 다물어!"

H가 L의 정강이를 차려다 말고 발만 한 번 굴렀다. L이 H의 어깨를 붙잡았다. 답지 않게 진지한 태도였다. H가 고개를 들자 후드를 벗어 젖힌 L과 눈이 마주쳤다. 쌍꺼풀이 지고, 눈썹이 짙고, 눈매가 일직선인 L.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입술은 버석해 보이고, 세수는 방금 했는지 얼굴은 촉촉한데 콧잔등에는 땀이 맺혀 있다. 상대가 이렇게 굴면 분위기가 잡히는 법이다. H는 놀이터 바닥에 운동화 앞코로 발장난만 쳤다. 잠깐 마주친 순간을 제외하고는 바닥만 바라봤는데, L이 아무 말도 없어서 H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한 번 더 눈이 마주쳤다. 매번 티격태격하기만 했지 단둘이서 조용히 마주 보자니 가슴께가 간질거렸다. L이 뭔가 말했다. H는 믿을 수 없어서, 또는 제대로 들리지 않아서 되물었다.

"뭐라고?"

"거절했다고."

H의 입가에 미소가 슬그머니 피어올랐다. 아, 그래? 그럼 진작 말을 하지. 난 또... 그런데 L의 표정이 개운하지 않았다. 잡은 어깨도 놓아주지 않았다. 역시 나 좋아하는 거 맞다니까. H는 홀로 생각했다. 이제 돌아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L은 아프니까 쉬게 두고. 이전처럼 연락하다 개학하면 같이 어울려 놀고. H의 사념을 L이 끊어놓았다. 너는?

"어? 난 고백 안 받았는데?"

"넌 확실히 안 해?"

"뭘?"

"H. 나 장난하는 거 아냐. 난... 난 네가 신경 쓰여서 고백도 거절했는데 넌 이러고 다야?"

"야. 그건..."

"됐어. 집에 가라."

잡았던 어깨를 놓는 손이 기운 없이 툭, 떨어졌다. 샴푸 향기가 바람에 실려 왔는데, 과하게 달았다. 방금 감았는지 향이 짙었다. H는 L이 죽을 받아 가면서 고맙다는 말 하나 없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L 주제에 심란한 표정을 짓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집에 가지 않을 핑계를 찾는 동안 L은 한 발 두 발 멀어졌다. 하지만 아픈 애한테 데려다 달라고 할 수도 없잖아. 아픈 애를 끌고 산책을 다닐 수도 없고. 어딜 가도 에어컨이 틀어져 있는 세상이란 말야. H는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L의 등짝을 한 대 세게 후려쳤다. 아! 소리와 함께 L이 돌아봤다. 곧장 화를 낼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금방 이전의 보기 거슬리는 표정으로 변했다.

"확실히 하면 되잖아!"

"됐어. 엎드려 절 받고 싶지 않아."

그 말은 진심인지 L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L의 후드집업 모자를 잡아당기면서 H가 말했다.

"억지로 하는 거 아니면? 그러면 믿을 거야?"

"집에나 가라."

"와, L 짜증 나."

"나도 H 짜증 나."

"그럼 왜 좋아하는데?"

L이 한숨을 쉬었다. 하아. 거기 담긴 귀찮음과 성가심이 결코 예사의 감정이 아니라 H는 후드를 더 꼭 쥐었다. 문은 일찍이 열렸는데, L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목덜미를 매만졌다.

H는 그때 어떤 결심을 했다. 그리고 뒤꿈치를 들어 볼에 입술을 눌렀다. 이 계획의 문제점은, 한마디 하려고 L이 고개를 돌렸다는 것이었다. H는 볼과 다른 느낌에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사고를 쳤구나. 찰나에 그런 생각이 스치고, H는 빨개진 얼굴로 입술을 뗐다. L이 손등으로 입술을 가렸다. 얼굴은 비슷하게 붉었다. H는 기껏 용기를 냈더니 L이 그런 반응이어서, 저도 모르게 발칵 성을 냈다.

"왜... 왜 닦아??"

"...안 닦았거든?"

"그럼 왜 가려??"

"너는 무슨... 말도 없이..."

"누가 뽀뽀를 말하고 해??"

학생들 잠깐만. 지나갈게. 아, 네... 아주머니 한 분이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L은 그 안쪽으로 도망가려 했다. H가 잡아끌어서 그럴 수 없었지만. 더워서가 아닌 다른 이유로 얼굴이 빨개진 둘은 말다툼을 이어갔다. 너 부끄러워서 그러는 거지? 그럼 넌 안 부끄러워? 나는... 볼에 하려고 했거든? 네가 돌아봐서 이렇게 된 거잖아! 이렇게 되면 안 돼? 볼 뽀뽀는 괜찮고 입술 뽀뽀는 아냐?? 큰 소리로 말하지 마!!! 네 목소리가 제일 커, H!! 이름 부르지 마!!! L!!! 한차례 이름까지 주고받으니 정말 서로 뭘 했는지 깨닫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L이 상황을 정리하려는 듯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H는 다시 L이 많이 아픈 것 같아서 걱정을 담아 노려봤다. 걱정을 담았는데 왜 노려보냐고? 원래 그런 거야.

"진정해 봐. 그러니까 확실히 하려던 게 이거였단... 말이지?"

"이거 아냐. 볼에 하려고 했어."

"아무튼... 그래. 그럼 너 나 좋아해?"

H는 할 말을 찾지 못해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둘은 지나가는 주민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현관에서 떨어진 채였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사이좋은 한 쌍으로 오해받기 좋은 자리였다. H는 웅얼거렸다. 아니, 사실 내가 널 안 좋아하는 건 아닌데, 연애적 감정이 있냐고 묻는다면 그건 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고, 네가 날 좋아하는 건 오늘로 확실해졌으니까... 나도 고백을 받으면 차긴 할 건데... 중얼중얼 늘어지는 말을 들으며 L이 웃었다. 찬희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싶어서 L은 손 하나를 일부러 주머니에 넣었다.

"H. 좋아한다고 인정하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 아냐."

"..."

"오히려 후련해. 앓던 이가 빠지는 거랑 비슷한 기분이니까."

"...그걸 어떻게 이에 비유해?"

"아무튼 난 진짜 간다. 어색하게 굴지 말고 방학 잘 보내."

L이 멀어지기 전에 H가 죽 포장 봉지를 쥔 손을 잡았다. 손은 따스하고, L에게서는 아까부터 계속 좋은 향기가 났다. 이제는 알 수 있었다. H를 만난다고 이것저것 누나의 것을 빌렸을지 모른다고. L은 그만큼 섬세한 사람이고, 좋아하는 마음을 품은 소년은 그보다 배는 더 세심해지기 마련이니까. 집 앞을 나오는데 운동화를 챙겨 신은 것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L은 늘 보던 얼굴에서 얌전해진 표정이라 낯설기까지 했다. 그러나 H는 그 얼굴이 싫지 않았다. 도리어...

"이번엔 진짜 볼에 할 거야. 고개 돌려."

놀림도, 웃음도 없었다. L은 눈을 감고 고개를 얌전히 돌렸다. 오른뺨이었다. 너 이래 놓고 뺨 때릴까 봐 이쪽으로 정했어. H는 다시 발을 굴렀다. 너...! 십 초 안에 준비 안 하면 집에 간다. 십. 구... 아 좀! 낭만이 없어.

풋풋한 입맞춤이 L의 볼에 닿았다. 체리 향과 샴푸 향이 났고, 부드럽고 촉촉했다. 뺨에 열이 올라서 온도는 잘 가늠할 수 없었다. 재촉할 때는 언제고 닿고 나니 간지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L이 아무 말도 없자 H가 입술을 떼고 물러났다. 매미가 시끄럽게 울었는데, 둘의 마음속은 그보다 더 소란스러웠다. 둘 사이에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확실한 이어짐이 느껴졌다. L이 침묵을 깼다. 늘 연락을 먼저 하는 쪽도 L이었다. H는 그때 처음으로, L이 어색함을 견디지 못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을 거라고 짐작했다.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자."

"너 감기라며?"

거짓말이었어. 서운해서 연락 씹겠다고 하면 창피하잖아. H는 L의 손을 세게 당기고 활짝 웃었다. 그래!

"근데 그럼 죽은 어떡해?"

"먹어야지."

"인증샷 보내. 소고기죽 샀으면 큰일 날 뻔했네."

"야, 너 나한테 돈 쓰는 게 아까워?"

H가 L에게서 죽을 빼앗아 들었다. 잠깐은 밖에서도 괜찮을 거야. 안 괜찮으면 L에게 물어내라고 하지 뭐, 안 그래? 혼자만의 생각치고는 발칙했다.

"글쎄. 잘 생각해 봐."

뒤에서 L이 H를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안녕? 나는 고등학교 2학년 H고... 다 알지? 봐. 쟤 나 좋아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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