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작업물, 플롯. 프로필 전달받은 작업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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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렸다. 끝도 없이 조용히 내렸다. 때로는 빗줄기가 굵어졌으나, 결코 소란스럽지 않았다. 미약한 비일상은 장마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런데 장마가 끊이지 않았다. 한 주. 보름. 한 달.... 기어이 1년. 한 해를 채우면 끝나리라는 실낱같은 희망도 수몰되었다. 바다와 가까운 네르디니아부터 잠기기 시작했다. 아무리 수상가옥의 높이를 더해보았자 발버둥일 뿐이었다. 수위가 높아지는 속도는 인류가 삶의 터전을 보수하는 속도보다 빨랐다. 저지대에 위치한 민가가 다음으로 물에 잡아먹혔다. 사막의 나라 하센 마저 더는 사막이라고 부를 수 없는 땅이 되었을 때, 비이상적인 장마는 재해로 이름을 바꾸어 널리 알려졌다. 사람들은 제국 루비아샤로 몰려들었다. 대륙의 중앙. 그중에서도 고지대로. 더 높은 곳으로. 또는 너와 나에게 의지하고 기도하면서 비가 멎기를 바랐다.

세상이 차오르는 물에 입을 틀어막힌다 한들 인류가 소리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재앙 속에서도 사람은 살아가므로. 퀜틴과 오비디테 역시 마찬가지였다. 집이 무너지지 않은 까닭은 단지 가문의 성이 귀족이라는 입지 덕택에 제국의 고지대에 위치했음이었다. 그것을 불태울 때까지만 해도 이런 비가 내리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나, 그 자리에 번듯하게 지은 둘의 저택은 침수로부터 안전했다. 곰팡이 슬지 않은 벽. 고인 빗물이 찰랑이지 않는 바닥. 쉴 틈 없이 천장을 두드리는 빗발에도 무너지지 않는 둘만의 안식처. 가구부터 인테리어까지 모두 손길이 닿은 내부는 아늑한 느낌을 안겨주었다.

먼저 눈을 뜬 사람은 퀜틴이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늦게 잠든 전날 밤의 기대를 배반했다. 그는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협탁 위에 놓인 안경을 집어 들었다. 탁. 작은 소리에 기민하게 반응한 오비디테가 일어났다. 기사단 생활을 하며 기척에 민감해진 탓이었다. 퀜틴이 안경을 쓰고 앞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오비디테는 몸을 일으켜 자리에서 빠져나갔다. 좋은 아침. 간단하고 짧지만 온기가 담긴 인사를 가족에게 건네고서. 덕분에 자리를 정리하는 사람은 퀜틴이 되었다. 목제 책상 위에 전날 보았던 의학 지식 서적이 가득했다. 이런 세상에서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도, 보존할 수 있다는 것도 크나큰 사치였다.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어두어야 할 필요성은 알겠어. 그래도 30분 이상은 문을 열어두지 말기로 해. 퀜틴이 제안하였던 건이지만 이제는 문을 열 때 들어오는 습기를 등한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가죽으로 만들어진 책 표지가 확연하게 운 지도 몇 주가 흘렀다.

망설임 없이 오비디테가 창문을 열었다. 퀜틴이 필사한 자료를 전부 창문으로부터 떨어뜨린 뒤였다. 해는 두꺼운 구름 뒤로 숨어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성냥갑을 두세 번 그어 불을 붙인 오비디테가 그것을 등불로 옮겼다.

"나가려고 그래?"

"식료품이 떨어졌어. 바깥에 다녀와야 할 거야."

불이 타오르는 모양새는 실내가 아니고서야 볼 수 없다. 얼마나 더 이런 불꽃을 볼 수 있을 지 모른다. 문득 퀜틴은 그런 생각을 했다. 이유는 모른다. 환자의 생명이 바람 앞의 등불 같아서일까. 그러나 세상이 이리 된 뒤로는 제대로 된 의사 노릇을 해보지 않았는데. 얼굴이 알려진다는 위험성을 더는 경계하지 않아도 되는데도 그는 사람을 진료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 등불 속 불꽃을, 오비디테의 눈과 다른 여러 색의 일렁임을 오래 보지 못하리라. 퀜틴의 시선이 머무르는 끝에 해부학과 약초학 자료가 아닌 등불 따위가 자리하자 오비디테가 물었다. 왜 그래? 이상한 점이라도 있어? 퀜틴은 입을 떼는 대신 고개를 돌려 우산을 찾았다. 눈앞에 등불 속 불꽃이 아른거렸다. 창문 닫는 소리가 들렸다. 완전히 마른 우산을 집어 든 뒤에야 그는 다른 말로 화제를 돌린다. 환기는 돌아와서 마저 할까. 잠깐의 정적. 오비디테가 대답했다. 그러지.

그때 느낀 기이한 감각을 설명할 수 없었을 뿐이다. 저 등불 하나가 꺼지면 이 모든 일상도 훅 꺼질 것 같다는 헛소리를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목 끝까지 단추를 잠근 뒤, 퀜틴은 크라바트를 집어 들었다. 그 하얀 손을 오비디테가 쥐었다.

"내가 해줄게."

"괜찮아. 이런 걸로."

"하고 싶은 말도 대신 해 줄 테니까."

그것은 더 이상 하늘, 색이라고 부를 수 없다. 하늘은 잿빛이므로. 퀜틴의 연푸른 눈동자가 오비디테를 응시했다. 속이 투명하게 보일 만큼 눈이 커지지도, 당황한 티를 내기 위해 입을 벌리지도 않았다. 가히 귀족보다 귀족다운 처세술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퀜틴이 동요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오비디테가 금방 흥미를 잃고 다른 주제로 따라올 줄 알았던 참이었다. 그는 입을 다문 채로 퀜틴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말하기 전에 먼저 선수 칠 기회를 주겠다는 듯이. 손을 움직여 크라바트를 매주면서. 형태를 다 갖추어갈 때 퀜틴이 말했다.

"괜찮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괜찮을 거야. 오늘도."

"맞아. 거짓말이 아니지."

이제 갈까. 퀜틴이 입꼬리를 올려 매끄럽게 웃었다. 오비디테는 그를 내려다보다가 손을 뗐다. 문을 열자 한 겹 차단되어 들리던 빗소리가 제 크기로 몰아쳤다. 퀜틴이 우산을 폈다. 오비디테가 그것을 건네받아 둘의 머리 위로 받쳤다. 투둑. 한없이 비가 떨어졌다. 이유 모를 감정도 줄곧 내리는 비에 젖어 눅눅해졌다. 옷이 젖지 않으려면 서로에게 붙어야 했으나, 그런 이유 없이도 둘은 서로와 가까이 붙어 걸었다. 떠내려가는 사람의 시신을 마주하는 일이 없기를 가만히 기도하면서. 서로의 영혼을 맞댄 채로 하나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걸었다. 감히 견고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형태의 가정이었다. 작은 비밀이나 고민 같은 게 바로 드러나기 좋은 환경이었다. 습한 공기 속에서 젖었을지언정 찢어지지 않은 감정이 오비디테의 목소리로 퀜틴에게 물었다.

맞아. 거짓말이 아니지.

그렇다고 해서 너는 솔직한 말을 털어놓지도 않았잖아.

소리 없는 질문이 둘의 틈을 채웠다. 이것을 해결하지 못하는 이상 오늘은 이보다 더 가까워질 수 없다. 동시에 퀜틴은 직감했다. 같은 결의 감각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오늘이 가기 전에 해결하게 될 거야. 원하든, 원치 않든 너 역시 깨닫는 방식으로 말이야. 잠기지 않은 가게가 있다는 점은 행운. 그곳에서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식료품을 구한 것 역시 경사. 좋은 일이 계속해서 연달아 일어나는데 퀜틴은 만들어진 웃음 아래에 풀리지 않는 문제의 자리를 두었다.

식사를 끝내고 입을 닦은 뒤에도. 자리를 정리하고 설거지를 끝낸 뒤에도. 그가 좋아하던 독서 시간을 가지는 중에도. 오비디테는 그 행동들을 덮은 한 겹 아래의 기이함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벼락처럼 찾아왔다. 쥐고 휘두르던 가호처럼 왜 이것을 몰랐는지 의문이 들 만큼 순간 떠올랐다. 누군가의 속임수를 눈치챌 때처럼 꽂혀 들었다. 동시에 왜 오늘의 퀜틴이 풀리지 않는 아이러니를 갖고 행동했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러나 어떤 것은 깨닫는다고 해서 도망칠 수 없다. 비가 계속 내리는 원인을 안다고 해서 사람 두 명이 그것을 해결할 수 없듯이. 그냥. 그런 운명인 것이다. 지금은 말할 때가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그 점을 알았다. 손을 잡고 도망칠 땅 또한 없다. 제일 안전한 곳은 이곳. 제일 편안하게 마음을 달래주는 곳 또한 너의 옆.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는 책처럼 시간이 흘렀다. 머무르고 싶은 페이지가 있다 한들 이야기는 끝을 향해 달려가야만 했다.

별다른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일상 속의 무게 없는 이야기만 간간이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오비디테가 퀜틴의 손을 잡았다. 비가 내리는 날에도 노을은 졌다. 낯을 본 적 없는 낮이 그렇게 저물어갔다. 노을의 잔해가 창문을 넘어 번졌다. 오비디테가 말했다.

"오늘이 세상의 마지막 날이라면 어떨 것 같아?"

잘 켜지지 않던 성냥. 일렁이던 등불. 외출 후 꺼 두었지만 신경이 쓰이던 그것. 퀜틴은 오비디테가 던진 질문을 받고서야 형태 없던 감정과 질문의 형태를 또렷하게 인지했다. 왜 하필 오늘이어야 하는지. 겨우 오늘이어야 했는지. 이러한 원망은 도리어 샘솟지 않았다. 그는 그저.

"실감이 안 나는걸. 정말 오늘이 마지막인 걸까?"

비일상 속 비현실을 받아들이기 버거웠을 뿐이다. 더 높은 이상을 꿈꾸었다지만, 그 상상력과 꿈의 방향이 종말을 향하지는 않았다. 그랬던 적도 없었지. 오비디테가 손을 고쳐잡았다. 상처 난 퀜틴의 손바닥이 오비디테의 것과 겹쳤다.

그래도 너랑 있으니 안심이 돼.

마지막을 함께할 사람이 있다는 건 좋은 거니까.

오늘이 정말 마지막이라면, 하고 싶은 게 있어?

글쎄. 오비디테는?

"나는 있지...."

집을 불태우고 싶어.

이렇게나 비가 오는데?

하지만 생각해 봐.... 비가 오니까 불을 질러야 하는 거야.

거센 불을 질러야 꺼지지 않을 테니까.

맞아. 그리고 마당에 십자가를 꽂자.

그 아래에 누워서 마지막 밤을 보내는 거지. 둘은 동시에 소파에서 일어났다. 꽉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였다.

땔감은 서적이었다. 어차피 내지가 습기에 우그러져서 필요 없을 거야. 마지막이라면 나는 저 책들을 보내주고 싶거든. 종이는 재가 되고 지식은 혼이 되어 어딘가에 전해지도록 말이야. 퀜틴의 책꽂이는 그렇게 텅 비게 되었다. 문 앞에 책들을 쌓아두고. 기름을 부었다. 식용유였기 때문에 고소한 냄새가 났다. 두 사람은 웃었다. 해는 방화를 기다리지 않고 넘어갔다. 발아래 깔려 있던 노을 자락마저 옷을 당기듯 치워졌다. 우산 아래에서 오비디테가 성냥을 그었다. 하나. 둘. 셋. 화르륵. 성냥을 쌓아둔 책 위로 던지자 처음은 옮겨붙는 듯했다. 그러나 떨어지는 비에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오비디테는 다음 성냥을 꺼내 그었다. 이번에는 네 번. 불이 붙었다. 우산을 기울여 책 위에 씌운 채로 성냥을 던졌다. 이미 젖은 책 따위를 태우는 것조차 힘에 부치는지 불씨가 꺼졌다. 오비디테는 다시 성냥을 꺼냈다. 그었다. 던졌다. 꺼진다.... 계속. 퀜틴 역시 성냥을 태워 던져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구름이 짙어 별이 보이지 않는 날이었다. 우산은 내버린지 오래였다. 비가 쏟아부었다. 빗줄기가 거세졌다. 푹 젖은 둘의 옷자락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대로는 마지막을 맞을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마음이 출렁였다. 위태로움인지, 두려움인지 명확하지 않았다. 퀜틴의 의문과 걱정은 명백하게 밝힐 수 있었는데, 본인의 것은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다. 오비디테는 제 입술을 물어뜯었다. 그때 퀜틴이 오비디테의 손을 잡았다. 다 젖어 축축한 데다 바깥에 오래 있었기에 차가웠다.

울지 마, 오비디테.

내가 우는 건 어떻게 안 거야?

너라면 그럴 것 같아서.

퀜틴은 오비디테를 안고 둘의 집 반대편으로 쓰러졌다. 축축한 잔디에서 풀 냄새가 진하게 났다. 흙냄새일 것이다. 머리가 진흙으로 엉망이 되겠지. 오비디테는 그런 것쯤은 신경 쓰지 않고 퀜틴을 마주 보았다. 어두운 밤이 되었는데도 이 사람은 희게 빛났다. 오비디테는 충동적으로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어차피 제 감정은 표정과 행동으로 드러나 퀜틴이 벌써 알아차렸을 것이다. 오비디테는 불안했을 뿐이었다. 안정 그 자체였던 집을 나와 불을 지르려는 선택이. 오늘을 끝으로 종말할 세상에서 볼 수 없을 내일의 퀜틴이. 그가 없는 존재하지 않을 나날이. 뜯은 입술에서 피 맛이 났다. 퀜틴으로부터 흐르는 빗물이 얼굴에 떨어졌다. 그가 눈물을 씻어내는 것만 같았다. 아픈 사람의 상처를 매만져 치료하듯 그렇게. 오비디테는 퀜틴이 너무 오래 기다리지 않도록 대답했다. 목소리가 젖어 꼴사나웠으나, 그것을 탓하고 질책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지막이란 거, 생각보다 무서운 것 같아.

내가 옆에 있는데도?

끝이라고 생각하니까, ...내일의 넌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우리는 죽어서도 함께할 거야. 그래도 불안해?

퀜틴은 오비디테의 불안을 알아차렸다. 그가 계속해서 성냥갑에 성냥을 그을 때부터. 혹은 마지막에 하고 싶었던 것을 말했을 때부터. 그보다 더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세찬 빗소리가 귀를 때렸다. 둘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다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바보 같은 의문을 품었어. 바보 같은 불안을 가졌지. 언제나 함께 있을 텐데 무엇이 걱정되고 두려웠는지 몰라.... 말 없는 웃음소리만 크게 울렸다. 그것은 빗소리를 뚫고 두 사람이 여기 살아 있음을 증명했다. 웃음이 잦아들고 난 뒤 둘은 사랑스러운 상대를 눈에 담았다.

"잘 자, 좋은 마지막이 돼. 다음 생에서 만나."

"잘 자, 사랑해. 다음 생에서 기다릴게."

한 겹 아래의 질문이 해답을 찾아 흩어졌다. 둘은 멀어지지 않을 각오로 거리를 좁혔다. 숨이 가까워졌다. 개의치 않았다. 입술을 맞대기 전 눈을 감으면, 그 끝없던 비가 멎는 듯했다. 두 사람은 입을 맞추었다. 올라간 입꼬리가 명화처럼 우아하지 못해도 괜찮았다. 충분히 아름다운 마지막이라고. 그렇게 믿자고. 숨을 나누며 좋은 밤을 약속했다.

모든 것이 덧없다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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